〈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1

참의부2014.01.09
조회121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Ⅱ. 절대권력을 만든 유신쿠데타

 

2. 인권을 유린한 잔악한 고문들

 

1972년 10월 17일 밤, 아무런 간판도 장식도 없는 삭막한 퀸셋(Quonset) 건물.

 

군 정보기관 소속의 한 소령이 연행돼온 남자에게 협조해줄 것을 나름대로 정중하게 당부한다.

 

“옷을 다 벗으세요.”

 

그는 속내의만 남기고 겉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4명의 점퍼 차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속내의까지 홀랑 다 벗겼다. 점퍼들은 실오라기 하나도 남김없이 알몸이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 놓았다. 이른바 ‘통닭구이’ 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고등경찰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붙잡으면 조직을 캐기 위해 동원했다는 비인간적 고문수법 가운데 하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하수인들이 유신쿠데타 상황에서 야당 인사들에게 그대로 자행했다.

 

취조 4인조는 ‘통닭 남자’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는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고 거의 질식 상태인 그에게 또 사정 없는 각목 구타가 가해졌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풀어주면 말하겠다고 했다. 점퍼들은 서너차례나 다짐을 받고는 그를 풀어 땅에 꿇어 앉혔다.

 

그때 갑자기 그의 입에서 “우드득, 딱” 하는 소리가 났다. 혀를 깨물었으나 의치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취조하던 점퍼들은 당황해하면서 그를 제지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의 수사 안가.

 

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 들어왔다. 사복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군의관이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담당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수사관은 수년 전 잡혀왔을 때도 심문하던 그 사람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 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터질 듯했다.

 

역시 같은 시각, 서울의 한 헌병대 퀀셋 막사.

체격이 건장한 40세 안팎의 남자 한 사람이 연행됐다. 남자가 퀀셋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2명의 조사요원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구타했고 그는 실신해 쓰러져 버렸다. 완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의 옷을 다 벗겨서 묶으려면 상당한 실갱이가 벌어질 터였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그냥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서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나체가 된 채 손과 발이 묶여 주리를 튼 것 같은 상태에서 두 책상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통닭구이였다. 고문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기술이었다.

이어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으니 그는 다시 실신했다. 정신이 들어 보니 의사가 혈압을 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은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①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시기도, 아르헨티나의 비델라 집권 시대도 아닌 ‘박정희판 더러운 전쟁’

 

이 야만적인 고문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것일까? 흔히 우리는 일제강점기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항일독립운동 애국지사들에게 가하는 악행을 연상한다. 아니면 1970년대 중반 남미 아르헨티나에서의 비델라 군사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가했다는 고문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세 고문장면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시기도,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권력 아래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도 지금부터 불과 40년 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판 더러운 전쟁’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유신쿠데타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보안사·헌병대가 설치기 시작했다. 국가기관이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불법 폭력을 구사했다. 그것은 가히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이나 일제 치하에서 자행되던 체제폭력이었다. 명색이 국민의 대표로서 국정감사 중이던 국회를 해산하고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붙잡아다 악행을 가했다. 온갖 고문기술을 총동원해 비인간적으로 문초했다.

첫번째 장면은 당시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군 장성 출신인 그가 군 내부 사정에 밝은 것은 당연했고 그것이 야당에 매우 긴요하고 드문 역할이었다. 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도 많았다.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인지 특별히 군 내부의 동향 파악에 신경을 썼다. 자신이 과거 남로당의 군 내 프락치였다가 그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아서인지 내부 밀고자와 정보망을 특히 미워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야당에 간 이세규 의원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표적이었다.

 

② “전쟁에서 적군의 포로가 돼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안 한다”

 

군 정보수사기관에서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린 이세규는 혀를 깨물고 의치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입을 겨우 벌려 이렇게 소리쳤다.


“전쟁에서 져서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왜 이러십니까….”

이세규는 양쪽 팔을 잡는 자들에게 입속의 핏물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너희 놈들은 군인도, 인간도 아니다!”

이세규는 5일간이나 더 그렇게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세규의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이었고 10·17 유신쿠데타에 지지성명을 내 달라는 것. 이세규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두 번째 장면은 조연하 전 국회부의장, 세 번째는 최형우 전 정무장관이 역시 10·17 유신쿠데타 직후 잡혀가 고초를 당한 증언이다. 최형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내란 때도 보안사에 끌려가 똑같은 악행을 당한다.(그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실세가 됐다. 그렇게 못된 악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들과 손잡고 3당 합당을 한 것이다.)

유신쿠데타 당시 이와 똑같은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당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20여명에 이른다. 위의 세 의원 외에 강근호, 김경인, 김녹영, 김상현, 김한수, 나석호, 박종률, 이종남, 조윤형, 홍영기 등이 모두 국가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야당 의원들은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이 겪은 고문에 대해 증언했다. 그러나 종교인과 학생운동 간부들은 아직 이렇다 할 고문악행에 대한 증언을 남기지 않았다. 나 자신도 유신쿠데타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일주일 이상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공포의 고문을 당했다. 나는 이제야 그 전모를 증언한다.

 

당시 박정희는 가장 비타협적인 저항세력이던 학생운동을 소탕하기 위한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연대장급 지휘 아래 군대를 투입했다.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 법대 등이 있는 동숭동에는 김복동 대령,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과 고려대학교가 있는 종암동 지역에는 전두환 대령, 그리고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 등이 있는 신촌에는 정병주 준장의 부대가 각각 진주했다. 지휘관은 박정희의 친위대인 하나회와 그 후원 장성이었다.(정병주는 후에 전두환의 12·12쿠데타 때에 반대하다가 하나회 부하의 총격을 받고 체포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군 부대가 진주하기 전 관할 경찰서는 대학 캠퍼스에 사복형사대를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날 하루만 전국에서 1889명을 붙잡아갔다가 그 중 92명의 간부만 유치장에 구금하고 모두 석방했다. 그 후 캠퍼스에 붙잡히지 않은 학생간부까지 포함해 전국 각 대학에서 모두 177명이 제적당한 채 군 강제입영 조치됐다.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일인 10월 15일, 필자는 이틀 전 1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연합학생총회의 사회자였기에 일단 서울의 교외에 숨어야 했다. 그런데 대학본부에서 열리는 총장 주재 개교기념 행사에 학생 대표가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갈이 왓다. 당시 나는 서울대 문리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리고 김상곤(현 경기도 교육감)은 총학생회장으로 개교기념 행사장에 가야 했다. 그때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제적과 강제입영은 못 면하더라도 모진 고문을 경험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학본부 총장실에 막 들어가려 하자 안에서 보직교수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김 군, 큰일났네. 곧 10시에 정부가 위수령 발동을 발표한다고 하네” 하고 말했다. 교수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나왔다. 나는 위수령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겠다며 대학본부를 나서다가 건너편 의과대학 구내에서 동대문경찰서 형사 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두 형사가 뺨을 때리면서 욕지거리와 함께 야료에 가까운 폭행을 시작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못하던 정보과 형사들이 위수령 발동에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나중에 김상곤이 붙잡혀오고 이어 다른 몇 동료들이 또 잡혀왔다. 김상곤도 벌써 뺨을 몇 대 맞았는지 벌겋게 부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당시 관할이던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그리고 성균관대 학생간부들이 불법 감금됐다.

 

③ 경찰 조사반, 암실에서 주먹질과 발길질로 킥복싱 고문

 

경찰 조사반은 항상 밤 12시가 넘어서야 우리를 불러냈다. 지하 취조실이었다. 그래도 야근 기자들이 돌아다니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고 밤 시간이어야 고문의 효과가 크다고 했다. 맨 뒤에 조사반장이 있고 그 앞쪽에 취조 형사의 책상이 자리했다. 취조 형사의 책상에는 각목이 하나씩 준비돼 있었다. 취조 형사는 수시로 그것을 들어 어깨와 팔을 두들겨 패며 “빨리 불어 임마!”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아, 이 자식 안되겠네. 어이!” 하고 부르면 건장하고 늘씬한 사내가 나를 끌고 컴컴한 암실로 들어갔다. 사내는 나에게 온갖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녹초가 되게 폭행당한 나를 다시 취조 형사 앞에 앉힌다.

 

“야, 임마. 너 버텨봐야 고생만 해. 불지 않으면 절대 안 끝나. 우리도 죽겠어.”

 

경찰서에서 그렇게 시달린 지 한 사나흘 쯤 되는 날 밤 2시경.

 

취조 형사는 책상에서 몽둥이를 들어 나를 다시 후려 팰 기세였다. 그때 뒤쪽의 조사반장이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예? 아 예, 그놈 여기 있습니다.”

 

그러더니 반장은 나를 노려보며 몽둥이를 드는 형사에게 말했다.

 

“어이, 그놈, 그냥 놔둬라. 그놈 A에서 올려 보내라고 한다야.”

 

나는 그 A라는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이게 과연 시중에서는 남산이라 불리는 중앙정보부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중앙정보부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제발 그곳만은 피해야 하는데…….

 

그때 내 앞의 취조 형사가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말했다. 그는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너 임마, 거기 가면 진짜 고생하는데…. 내가 뭐라 그랬어. 여기서 빨리 불라고 할 때 끝내 버리지 참….”

 

그의 짐짓 동정어린 말투가 나를 더욱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순간 그래도 경찰이 내 편이고 중앙정보부는 악의 소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악행의 정도가 다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일까?

 

그들은 나에게 취조반 한쪽에 앉아 쉬라고 했다. 그리고 서너 시간이나 흘렀을까? 새벽녘에 나는 검정색 지프차에 짐짝처럼 실렸고 두 사내가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차가 퇴계로 쪽을 향하자 그들은 내 머리를 앞 의자 등받이 밑으로 처박았다. 나는 바깥을 내다보지 못한 채 끌려가 그 ‘남산’의 어느 독방에 던져졌다.

 

중앙정보부로 압송된 나는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박정희 독재권력 공포통치의 본산에 끌려왔다는 생각에 혼비백산이었다. 압송조 2명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 책상에 발을 걸치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선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이 아무런 비품도 없이 삭막했다. 그들을 나를 벽 앞 가까이에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앞만 쳐다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른 3인조가 교대됐다. 이들이 나를 다룰 맹수들이었다.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뭘 묻기도 전에 매질부터 하는 것은 기를 빼놓고 신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공포감과 함께 매질에 못 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새끼, 엄살이 심하구먼.”

 

그들은 나를 붙잡아 앉히더니 정강이에 두꺼운 장작 같은 것을 넣고는 무릎 위를 구둣발로 밟아댔다. 무릎 관절이 으스러지는 고문이었다. 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는 무릎 위쪽 대퇴부 뼈를 3분의 1가량이나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고문은 육체적 고통 못지않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사람을 항복시켜버린다. 나는 모진 고통에 눈물 범벅이 되어 고문자들에게 두 손으로 빌었다. 평생에 잊지 못할 처참하고 굴욕적인 몰골이었다.

 

④ “죽여서 저 산에 던지고 투신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유신쿠데타 전야라 할 수 있는 1971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는 무언가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라는 해괴한 각본이었다.

 

“김대중과 김상현을 만난 게 언제, 어디서지?”

 

정말이지 이들과 만난 사실이 있다면 불지 않고서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교 바깥의 정치인이나 종교계를 접촉한 일이 없다. 일종의 역할 분담으로 대외접촉은 주로 선배 복학생들이 맡았으며 나는 학교 내부 장악이 주 임무였다.

 

그들의 다른 또 하나의 요구는 돈줄을 대라는 것. 포괄적으로 배후세력을 캐기 위한 고문이었다. 위수령 직전 나는 이른바 지하신문이라 불리는 미등록 간행물을 두 번 발행했으며 좋은 반응을 보고는 세 번째를 준비하고 있었다.『의단(議壇)』이라는 제호의 이 지하신문은 서울대학 문리대 대의원회의 기관지라 할 수 있었다. 대의원회 의장이던 내가 발행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내걸었고 편집진은 모두 비밀이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지하신문의 편집진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댄 배후를 불라는 거였다. 이 문제도 사실 투명하게 입증되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등록만 안 했을 뿐 문리대 대의원회 기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산은 학생 자치경비 중에서 사용했다. 이런 번연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만도 험한 고문악행에 시달려야 했다.

 

“너, 이 방이 어떤 곳인지 알아? 여기서 죽어도 저 산에 던지고 투신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임마.”

 

그해 대통령선거가 있던 4월 직전 육군 대령 한 사람이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의문사한 사건으로 잠시 떠들썩한 일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는 듯했다.

 

책상 앞에 앉아 신문하는 동안 옆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고문하는 자의 저주하는 욕설에다 바닥에 나뒹굴면서 쿵쾅거리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뒤엉켜 정녕 인간 이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당하고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동료들과 얘기해보니 대개 비슷한 경험이었고 공포감을 주기 위해 녹음소리인 것 같았다. 이런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을 경험한 탓에 나는 독재권력의 실체와 체제 폭력에 대해 평생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