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6. 대선으로 가는 길, 감동과 반전의 드라마 ⑵

참의부201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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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거부한 대선후보

 

노무현은 1993년 10월 언론사 인터뷰에서 “정치를 해오면서 특별히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원칙이나 신념”으로 선명성과 꿋꿋한 모습을 들었다. “사람들은 화살을 잘 피하고 물살을 잘 타는 사람의 묘기를 지켜보면서 재미를 느끼지만 아주 거대한 흐름에 굽히지 않고 부딪혀 나가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비바람을 뚫고 나가는 꿋꿋한 모습을 기대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 사회의 희망과 기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에 그런 기상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사회적으로 큰 위기가 왔을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다. 나는 정통성, 선명한 노선을 강조하면서 정치를 해왔다. 앞으로도 이런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를 할 것이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면서〈개혁과 통합으로 원칙의 시대, 화합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다듬어온 철학이고 정책이었다.

 

노무현은 여기서 “다음 정부는 무엇보다도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우리 중산층과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경쟁력 있는 나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나라, 환경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선진문화국가, 아시아의 질서를 주도하는 아시아의 중심국가”라는 한국의 21세기 비전을 제시하고,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3개의 다리 즉 정치개혁, 국민통합, 원칙과 신뢰의 다리를 건널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화려한 구호나 공약보다 더 소중한 신뢰와 믿음을, 원칙의 시대, 화합의 시대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해서 정치개혁과 동서화합을 이루고, 원칙이 승리한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노무현은 대선가도, 그러니까 당내 경선 과정에서부터 수구족벌신문의 왜곡과 편파보도에 시달렸다. 그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무렵 김대중 정권은 중앙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언론탄압으로 규정하면서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언론사 세무조사는 김영삼 정권 때에도 한 차례 실시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공개되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노무현은 이에 대해 해양수산부 출입 기자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정부의 세무조사를 지지하고, 특히《조선일보》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부의 각료나 국회의원 누구도 저들의 후환이 두려워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 선거가 이회창과 이인제의 대결로 가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를 자꾸 실었다. 나는《조선일보》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신문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조폭언론과의 전쟁불사’ 발언 보도가 나가고 50일 후 해양수산부 장관을 퇴임했다. 민주당으로 돌아온 뒤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2001년 6월 7일,《미디어오늘》이영태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나는 말했다. ‘수구 세력의 선봉에《조선일보》가 있다.《조선일보》는 독재권력과의 야합으로 부정과 특혜를 쌓아 올린 기득권 세력이며 언론 시장에서 부당한 과실을 누리고 있다.《조선일보》는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조선일보》식 정치구도를 만들고 있다. 내가《조선일보》를 상대로 버거운 싸움을 하는 것은 개혁세력 방어를 위한 전략이며 몸부림이다.’”

 

그가《조선일보》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당한 보복과 불이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극구 만류했으나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는 9월 12일 “《조선일보》는 친일반민족 신문이며 법으로도 하도록 되어 있는 세무조사도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비리·특권 신문”이라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조선일보》는 ‘이회창 기관지’이며《조선일보》와 이회창 총재가 똑같은 수구·냉전 특권세력”이라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에 나서면서《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후보 릴레이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거기에 노무현은 없었다. 노무현이 인터뷰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11월 13일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려《조선일보》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조선일보》의 권위를 높여주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조선일보》의 장사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기기묘묘한 편파·왜곡보도로 정부와 민주당에 끊임없이 상처를 입히는 신문과 협력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노무현은 이렇듯 치열한 당내 경선을 치르는 와중에 수구족벌신문들과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 한국 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쓴 경선 드라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2002년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대장정에 들어갔다. 경선 직전의 대세는 단연 이인제 후보였다. 민주당의 최대세력인 동교동계까지 이인제를 밀었다. 1997년 대선 당시 ‘이인제의 존재’로 인해 김대중이 이회창을 꺾고 당선될 수 있었다는 이유로 호남을 비롯한 일부 민주진영에서는 ‘보은의 의미’에서 이인제를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경선 뚜껑이 열리자 곳곳에서 ‘이변’이 속출했다. 첫 경선인 제주에서 한화갑이 이인제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이인제 대세론이 초장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은 3위로 선전했다. 이어진 3월 10일 울산 경선에서 노무현은 1위로 기세를 올린 반면 이인제는 3위에 그쳤다. 3월 12일 김근태가 일찌감치 후보를 사퇴하고, 이틀 후 유종근은 후보 사퇴와 동시에 탈당했다.

 

그런데 대세를 판가름하는 진짜 ‘이변’은 3월 16일 광주 경선에서 일어났다. 노무현이 동교동계의 지원을 업은 이인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후 이인제는 대전·충남북에서만 1위를 차지했을뿐 나머지 전 지역에서 노무현에게 밀렸다. 그런 가운데 3월 19일 한화갑, 3월 25일 김중권이 후보를 사퇴하고 3월 30일 경남 경선부터는 노무현, 이인제, 정동영 후보 셋만 남아 경선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4월 14일, 이인제의 핵심 지지기반인 충북에서마저 노무현이 이인제(734표)의 절반이 넘는 득표(387표)를 하자 이미 판세가 기울었다고 여긴 이인제가 17일 후보를 사퇴함으로써 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는 노무현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정동영이 남은 부산, 경기, 서울 경선을 끝까지 함께했지만 경선을 ‘축제’로 마무리하기 위한 ‘우정 출연’ 성격이었다.

 

50일 가까이 전국 각지를 돌며 실시된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정당사상 우례없는 흥행을 이뤘다. 당원은 물론 일반국민의 관심이 그만큼 높았던 것인데, 대세론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변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어떤 ‘게임’이든 일반의 예상이 빗나가면 그만큼 열광하기 마련이다. 열광을 이끌어낸 ‘이변’의 발원지는 광주였다. 민주당 주류의 지지기반인 광주 경선에서 ‘영남 사람’ 노무현이 이 지역 출신인 한화갑은 물론이고 ‘대세’ 이인제에 앞서 새로운 ‘대세’로 떠오름으로써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광주에서 불기 시작한 이른바 ‘노풍’은 전국 16개 경선 지역 가운데 11개 지역에서 1위, 제주(3위)를 제외한 4개 지역에서 2위를 차지함으로써 압도적인 종합 1위로 대선후보를 결정지었다.

 

노무현은 이 과정에서 평범한 진리 하나를 다시 확인했다고 했다. “광주 염루종합체육관에서 실시한 경선에는 선거인단 1,572명이 참가했다. 투표율이 무려 81%였다. 광주 전남의 대표 정치인이던 한화갑 후보를 3위로 밀어내고 득표율 37.9%, 595표를 얻어 1등을 했다. 2위 이인제 후보보다 104표를 더 받았다. 부산 출신 원외 정치인 노무현이 민주진영의 심장 광주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압승을 거둔 것이다. 스탠드에서 가슴을 졸였던 지지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민주당 경선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이인제 대세론’은 언론과 정치인들이 만든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들은 기회주의자를 용납하기는 하지만 지도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노무현의 경선 행로에는 훼방꾼이 많았다. 특히《조선일보》는 노골적으로 노무현 후보에게 딴지를 걸었다. 족벌신문들은 노무현의 술자리 얘기나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어 대서특필하고 붉은색을 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공회대학 교수인 김동민은 “족벌신문들이 달가와할 리 없었다. 민주당 국민경선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로 부각되었을 뿐 아니라 본선에서 당선가능성까지 높아지자 집중적인 견제에 나선 것이다. 음모론과 색깔론이 먹히지 않자 언론관을 몰고 늘어졌다. 술자리에서의 발언을 두고 침소봉대하여 맹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술자리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허심탄회하게 나눈 얘기를 뒤늦게 문제 삼은 메이저 신문들의 작태를 보면서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노무현이 인천 경선에서 다시 1위를 하자 족벌신문들은 발악적으로 헐뜯었다. 이날 노무현은 “한나라당과《조선일보》가 합작해서 입을 맞춰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힘이 든다”며 “언론에게 고개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이며 동아·조선은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맞받아쳤다.

 

“공감이 가는 것을 보도하면 왜 수긍하지 않겠나. 지금의 언론보도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지금 이인제 후보하고 경선을 하는 것인지 일부 특정 언론하고 경선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할 지경으로 노무현은 족벌신문으로부터 온갖 모함과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 따라서 노무현의 대선후보 경선 승리는 수구기득세력을 대변해온 족벌신문과의 싸움에서의 승리이기도 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노무현 후보’의 등장은 특이한 현상이다. 역대 집권당 대통령 후보 등장 과정과는 판이하다. 그동안 집권당 총재인 대통령의 뜻에 따라 지명돼온 관례대로 했다면 ‘노 후보’는 없었을 것이다. 새롭게 선보인 국민경선제는 노무현과 같은 비주류 소수파도 ‘대세’와 ‘주류’를 넘어 승리할 수 있다는 밑바닥 민심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세상이 바뀌고 민심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노 후보는 단기필마로, 그것도 거대 족벌언론의 융단폭격과 경쟁자의 치명적인 색깔 공세에도 불구하고 우뚝 일어섰다. 국민은 그만큼 기성의 기성 조직과 제도와 인물에 신물을 내온 터이다. 노 후보는 여느 기성 정치인들과는 달랐다. 기득권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려니와 특히 수구언론의 횡포에 맞선 그의 결기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대단한 용기다. 지금껏 기성 정치인들은 말로는 서민대중을 위한다면서 결국 기득권층을 대변했다. 그쪽에서 정치자금을 얻어다 쓰는 신세를 졌고 또 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들도 어느새 기득권층에 편입되었다. 과거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출신들도 원내에 진출하여 얼마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정치귀족’이 되는 우리 정치현실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노무현은 ‘독불장군’ 소리를 들을 만큼 남달랐고, 언행이 일치했다. 지나치리 만큼 솔직한 가운데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진정성이 있었다. 그 다른 점을 국민과 민주당원들이 높이 산 것이다. 시세편승이나 인기영합을 거부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일관된 신념으로 정도를 걷고자 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한국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본 것이다.

 

2002년 4월 27일, 노무현은 서울 경선에 이어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넘는 개혁과 통합의 정치로 오는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여러분께 바치겠다”며 3대 집권 청사진(정치개혁, 원칙과 신뢰, 국민통합)을 제시했다. 이어 “각종 게이트 사건은 대통령 주변 인물과 고위공직자들이 특권의식과 반칙과 문화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로 어두운 권력문화를 청산해야 한다”며 부패척결을 다짐하고 “특정지역이나 특정학교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노 후보는 기회주의와 연고주의, 정실주의 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우리 사회의 낡은 관행을 걷어낸 원칙이 바로 선 사회를 만들겠으며, 지역통합의 정치를 실현해 어떤 지역도 차별받지 않고 소외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역설했다. 또 노사대립에 대해서는 “필요하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노사화합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고,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반드시 성공돼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포용정책을 계승할 방침”임을 재확인하고, 경제정책으로 “이제 경제 성장과 분배의 정의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피력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