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돌풍을 일으키며 많은 이슈를 낳았던 친구, 개봉 당시에는 적나라한 살해 방법 묘사와 조폭들의 일상을 그린 것으로 일각에서는 지탄을 받으며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향후 폭발적으로 등장한 우리나라의 조폭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인 영화 "친구"지만 일반적인 조폭영화와는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친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 친구란?
"나는 친구가 한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이까 한자드라.
친할 친, 오랠 구 오래두고 친한게 친구라 카드라."
영화에서 준석(유오성 분)은 독백하는 장면에서 친구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빌어서 그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오래두고 친한 것, 그 말인즉슨 깊은 유대를 맺은 일련의 관계들은 가족에 비견될 만큼 지속적인 관계로 발전가능하다는 것이다.
친구라는 것은 본래 이차적 관계로서, 혈연과 같이 어쩔 수 없이 묶이게 되는 일차적 관계와는 다르게 자신이 선호하여 선택하는 관계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의무적인 틀보다는 자신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자유롭고도 강한 유대를 일으킬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증으로 친구를 우연한 기회에 사귈 수는 있지만 억지로 사귄 경우는 없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할 확률이 높고, 닮은 구석이 많을 확률이 높다. 가족과 같은 친밀한 존재도 외적으로는 닮은 것이 많을지 모르겠지만 내적으로는 닮은 구석이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선호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친구는 우리의 선호에 의해 서로 사귀게 된 것이므로 어떤 점에서 본다면 가족보다도 더 깊은 공유와 유대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상택(서태화 분)은 수재이고 엘리트의 길을 걷지만
정반대의 삶을 사는 친구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친구들이 서로를 위안하며
"친구끼리는 미안한거 없다"라는 대사이다.
조금 딱딱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친구끼리 미안한 것이 없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필자도 친구들에게 미안한 짓을 달고 사는데 세상의 모든 친구들이 서로 서운한 일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친구들은 모두 본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곁에 있게 된 것이다. 당장 크게 서운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흡사한 존재인 친구를 다시 찾기란, 혹은 다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다지만 마음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다.
보통 우리는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오랜 지기로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순수한 환경에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환경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온전히 마음의 유대를 공유하고 있는 친구를 다시 찾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려운 일이 되며, 우리가 친구를 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곁에 있는 사람이 바로, 다시 캐낼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보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끼리 미안한 것이 없다는 말도 이해는 된다. 친구가 나락의 길을 걸을지라도, 비록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어떻게 본다면 자신의 거울이기도 하다. 친구는 스스로 택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분신이 잘못된다고 해서 타인의 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칠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하는 통에 분신 같은 존재가 잘못되었거나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나무라거나 욕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이 정말 분신과 같은 존재로 서로를 여기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유년 시절의 소개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초등학생 시절의 천진난만한 네 사람은 성인이 된 후와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이 크지 않다. 모두 물놀이를 좋아하고, 모험심이 있으며, 함께 뛰놀기 좋아한다. 즉 비교적 가장 순수한 시절에서 그들의 온전한 내면을 다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서로의 닮음을 찾은 것이다.
그 내면의 본성은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바뀔 것이 아닌 '기질'이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갑자기 돌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러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본연의 기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시기는 유년의 순수함, 그것이다.
-거북이와 조오련의 대결을 궁금해 하던 유년의 아이들은 고교 시절부터
점점 삶이 갈리기 시작하지만 그들 서로가 알고 있는 서로에 대해서
전혀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그들은 "친구"다.
그러나 가끔은,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다른 자신을 깨닫기도 한다. 극중 상택과 준석의 만남에서 상택의 말실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잘 표현한다.
준석 : 건달도 다 우리만의 법칙이 있다.
상택 : 건달이 건달이지, 무슨 법칙이 있다고 그러는 거야? 너희들은 그냥 깡패야.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우리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고, 나를 포함한 모두의 친구들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아마 우리가 추억하는, 최초로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기억은 점차 희미한 잔상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도 상택의 사과를 준석은 그저 "친구끼리는 미안한 거 없다"로 매듭짓고 만다. 설령 상택이 창창한 미래로 인해서 가치관이 바뀌었다 한들, 이미 그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비난이 비난일색으로 점철된 것이 아닌 우려가 담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대학생이 된 후 간만에 준석을 찾아간 상택과 종호는 폐인이 되어버린 그를 발견한다.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상택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준석을 거절하지 않는다.
상택은 약에 취해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준석의 모습을 안타까워했으며, 자신의 분신이 무너지는 모습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존의 건달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에게 건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은 준석 자신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친구라는 것은 세상에 처음 만난 자신의 분신이고 최초의 정신적 닮음이다.
육체를 세상에 처음 낸 것은 부모이고, 가장 가까웠던 것이 형제였다면,
자신의 본질을 처음 같이 알게 된 사람은 친구이다.
2. 말할 수 없는 우정
-극중 동수(장동건 분)의 비참한 최후는 친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 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이다. “고마해라, 마이 뭇다이가,”
라는 대사는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가족 이상의 깊은 유대를 이룬 이들 네 친구는 왜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걸어야 했을까. 그것은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비록 친구는 자의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들이 갈리게 되는 계기는 타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의 비극적 전개를 이끌어가는 준석과 동수의 관계는 기묘하다. 준석은 일인자로 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뿌리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동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것은 혐오의 의미가 아니라 불만의 의미다. 2인자로서 모든 행동을 도맡아 하지만 정작 1인자인 준석의 그늘에 가려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취하지 못한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장의삽니더."
그의 내재적 불만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 동수에게는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의사라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걸림돌과 같은 것이다. 동수는 살려고 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없고 고행만 되풀이 되는 악순환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준석과 부러 대립각을 세우고 어찌 보면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감행한다. 허나, 준석은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적인 건달 밑에 수하로 들어간다고 해도 만류는 해보지만 붙잡지는 않는다.
준석은 상택의 경우처럼 준석의 내면에 숨어있는 것 또한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수도 자신이 행하는 일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자각하고는 있으나 이미 환경적인 요인으로 변질된 자신 때문에 그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때문에 둘은 점점 더 대립-사실상 동수의 일방적인 대립-하며 쌓을 필요도 없는 오해를 쌓게 되고 비극적 말로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는 건달로 살고 싶진 않았지만 스스로 그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건달의 자식으로 태어나 건달로 살게 될 운명을 지닌 준석, 그리고 힘은 세지만 가진 것이 없고 늘 손해만 본 동수, 명석한 두뇌로 애초부터 성공의 실마리가 보였던 상택, 적당히 눈치 보며 조금씩 실리를 취하는 중호(정운택 분). 애초에 이들이 걷는 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것이었다.
내면에 함께 깃든 정신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할지 모르겠지만 환경은 그것을 유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나누었다 한들, 더러 찾아오는 외부의 제약은 이것을 유지하게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이 네 친구들은 이를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3. 결국에 남는 것
-자신이 타락할 지언정 친구가 타락할 것은 용납하지 않는 준석
비록 많은 우여곡절과 오해와 불신이 싹텄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모든 것을 뒤집는다. 마지막까지 친구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 준석과, 끝까지 이들을 잊지 않으려하는 상택과 중호. 그리고 완전히 돌변한 사람인 것 같았던 동수의 마지막 변심은 본래의 가치를 보여준다.
동수는 준석이 상택의 배웅을 간다고 했을 때 비아냥대고 말았지만 결국 공항을 향하려다가 죽임을 당한다. 물론 공항을 가든 가지 않든 그는 죽을 운명이었으나 그 하나의 궤적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동수는 애초부터 그들을 등질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정작 대립각을 세운 준석에게도 직접적인 피해는 입히지 않은 것이다.
원망했던 아버지에게도 굳이 찾아가 돈을 전달하며 눈물짓는 동수의 모습은 그의 내면이 온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본성은 원래가 피에 굶주린 잔인무도한 건달이 아니라 순수한 유년 시절의 동수가 가진 기질이다.
준석은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동수를 죽이라고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친구들과 심지어 동수 아버지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거짓 자백을 해버린다. 동수가 마지막 순간 자신들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친구들을 등질만큼 모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준석은 충분히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형을 살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스스로 그 길을 거부했다. 그가 형을 거부하는 것은 동수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죄를 물었다.
-준석과 동수는 영화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강한 우정으로 묶여있다.
상택은 후에도 준석을 찾아와 거짓 자백을 한 이유를 간신히 물어보지만 시원찮은 대답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어긋남을 스스로 교정하겠다는 친구를 더 이상 말릴 까닭이 없는 탓이다. 그리고 열심히 회상한다. 그들이 순수한 교감을 나누던 시절로 부터 현재까지. 이 비극적 운명이 본래는 악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한 편 영화가 되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친구들 간의 더러운 암투도 아니며, 그로 인한 희생도 아니고 단지 튜브에 옹기종기 모여 한담을 나누던 어린 네 소년일 뿐이다.
상택의 마지막 회상에, 거북이와 조오련의 대결을 점치는 친구들의 판에서 준석은 동수의 편을 들어줬다고 한다.
4. 몇 가지
눈치가 빠른 사람은 벌써 눈치 챘겠지만 이 영화의 주된 관심은 역시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이어오면서 친구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어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다. 조폭, 건달과 같은 소재는 그저 양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갱스터 영화이면서 갱스터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설정된 것일 뿐, 영화의 근본적인 속성은 폭력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레인보우의 리더이자 동수의 어긋남에 기폭제 역할을 했던 진숙(김보경 분)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이 보인다. 역할의 중요성은 있는 반면에 크게 활용된 컷이 없다는 것은 인물낭비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짤막하게 등장하지만 영화 흐름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아쉽다.
또, 다소 엉성하게 엮여있는 불화의 씨앗들이다. 동수의 내면 속의 불안정함을 좀 더 정밀하게 그려냈다면 그의 행동이 다소 뚱딴지같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이다. 그 외 학창 시절 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그려낸 중호가 후에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는 것도 아쉽다.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개연성 부분이 조금 엉성하게 엮여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딘가 식감이 좋지 않은 식빵을 물도 들이키지 않고 텁텁하게 계속 먹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것에 치중한 많은 느와르, 갱스터 영화들이 한 번쯤 다시 영화 ‘친구’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때때로 극한의 절망 속에서 솟아나오는 희망을 더욱더 갈망하고 그것에 감동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솟아나는 작은 들꽃의 가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가끔 친구가 생각날 때, 이 영화를 한 편 보고 옛 시절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제각각 다르게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원래는 같은 곳, 같은 생각을 하며 자랐다는 것을.
+추천 뮤지컬
영화 ‘친구’의 감동을 그대로 이어받아 뮤지컬로 재탄생 시킨 것이 있다. 지금은 공연이 끝났지만 영화의 전당에서 공연 했던 시네뮤지컬 ‘친구’이다. 앞서 이야기한 본 작품의 속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아쉬웠던 개연성 문제나 여러 가지 섬세한 묘사들을 반영해 보완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서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다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뮤지컬을 보는 것을 권한다.
다시 보면 좋을 영화 100선 - 6. 친구
안녕하세요 지나간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조금 썼던 COSTA입니다.
영화에 관련한 톡 채널이 개설됬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아직은 채널이 없어
이 채널을 빌려서 또 글을씁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영화는 누구나 다 알 법한
"고마해라, 마이 뭇다이가"
대사가 등장하는 영화 "친구"입니다.
2001년 개봉한 영화라 명성만 익히 듣고 실제로 보지 못한 분들도 많을 것 같네요.
최근에는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시네뮤지컬 "친구"를 공연하기도 했었는데요,
이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다음 회차 뮤지컬도 같이 보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럼 우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많은 이슈를 낳았던 친구, 개봉 당시에는 적나라한 살해 방법 묘사와 조폭들의 일상을 그린 것으로 일각에서는 지탄을 받으며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향후 폭발적으로 등장한 우리나라의 조폭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인 영화 "친구"지만 일반적인 조폭영화와는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친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 친구란?
"나는 친구가 한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이까 한자드라.
친할 친, 오랠 구 오래두고 친한게 친구라 카드라."
영화에서 준석(유오성 분)은 독백하는 장면에서 친구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빌어서 그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오래두고 친한 것, 그 말인즉슨 깊은 유대를 맺은 일련의 관계들은 가족에 비견될 만큼 지속적인 관계로 발전가능하다는 것이다.
친구라는 것은 본래 이차적 관계로서, 혈연과 같이 어쩔 수 없이 묶이게 되는 일차적 관계와는 다르게 자신이 선호하여 선택하는 관계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의무적인 틀보다는 자신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자유롭고도 강한 유대를 일으킬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증으로 친구를 우연한 기회에 사귈 수는 있지만 억지로 사귄 경우는 없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할 확률이 높고, 닮은 구석이 많을 확률이 높다. 가족과 같은 친밀한 존재도 외적으로는 닮은 것이 많을지 모르겠지만 내적으로는 닮은 구석이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선호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친구는 우리의 선호에 의해 서로 사귀게 된 것이므로 어떤 점에서 본다면 가족보다도 더 깊은 공유와 유대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상택(서태화 분)은 수재이고 엘리트의 길을 걷지만
정반대의 삶을 사는 친구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친구들이 서로를 위안하며
"친구끼리는 미안한거 없다"라는 대사이다.
조금 딱딱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친구끼리 미안한 것이 없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필자도 친구들에게 미안한 짓을 달고 사는데 세상의 모든 친구들이 서로 서운한 일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친구들은 모두 본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곁에 있게 된 것이다. 당장 크게 서운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흡사한 존재인 친구를 다시 찾기란, 혹은 다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다지만 마음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다.
보통 우리는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오랜 지기로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순수한 환경에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환경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온전히 마음의 유대를 공유하고 있는 친구를 다시 찾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려운 일이 되며, 우리가 친구를 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곁에 있는 사람이 바로, 다시 캐낼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보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끼리 미안한 것이 없다는 말도 이해는 된다. 친구가 나락의 길을 걸을지라도, 비록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어떻게 본다면 자신의 거울이기도 하다. 친구는 스스로 택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분신이 잘못된다고 해서 타인의 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칠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하는 통에 분신 같은 존재가 잘못되었거나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나무라거나 욕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이 정말 분신과 같은 존재로 서로를 여기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유년 시절의 소개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초등학생 시절의 천진난만한 네 사람은 성인이 된 후와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이 크지 않다. 모두 물놀이를 좋아하고, 모험심이 있으며, 함께 뛰놀기 좋아한다. 즉 비교적 가장 순수한 시절에서 그들의 온전한 내면을 다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서로의 닮음을 찾은 것이다.
그 내면의 본성은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바뀔 것이 아닌 '기질'이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갑자기 돌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러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본연의 기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시기는 유년의 순수함, 그것이다.
-거북이와 조오련의 대결을 궁금해 하던 유년의 아이들은 고교 시절부터
점점 삶이 갈리기 시작하지만 그들 서로가 알고 있는 서로에 대해서
전혀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그들은 "친구"다.
그러나 가끔은,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다른 자신을 깨닫기도 한다. 극중 상택과 준석의 만남에서 상택의 말실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잘 표현한다.
준석 : 건달도 다 우리만의 법칙이 있다.
상택 : 건달이 건달이지, 무슨 법칙이 있다고 그러는 거야? 너희들은 그냥 깡패야.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우리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고, 나를 포함한 모두의 친구들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아마 우리가 추억하는, 최초로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기억은 점차 희미한 잔상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도 상택의 사과를 준석은 그저 "친구끼리는 미안한 거 없다"로 매듭짓고 만다. 설령 상택이 창창한 미래로 인해서 가치관이 바뀌었다 한들, 이미 그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비난이 비난일색으로 점철된 것이 아닌 우려가 담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대학생이 된 후 간만에 준석을 찾아간 상택과 종호는 폐인이 되어버린 그를 발견한다.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상택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준석을 거절하지 않는다.
상택은 약에 취해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준석의 모습을 안타까워했으며, 자신의 분신이 무너지는 모습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존의 건달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에게 건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은 준석 자신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친구라는 것은 세상에 처음 만난 자신의 분신이고 최초의 정신적 닮음이다.
육체를 세상에 처음 낸 것은 부모이고, 가장 가까웠던 것이 형제였다면,
자신의 본질을 처음 같이 알게 된 사람은 친구이다.
2. 말할 수 없는 우정
-극중 동수(장동건 분)의 비참한 최후는 친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 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이다. “고마해라, 마이 뭇다이가,”
라는 대사는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가족 이상의 깊은 유대를 이룬 이들 네 친구는 왜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걸어야 했을까. 그것은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비록 친구는 자의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들이 갈리게 되는 계기는 타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의 비극적 전개를 이끌어가는 준석과 동수의 관계는 기묘하다. 준석은 일인자로 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뿌리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동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것은 혐오의 의미가 아니라 불만의 의미다. 2인자로서 모든 행동을 도맡아 하지만 정작 1인자인 준석의 그늘에 가려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취하지 못한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장의삽니더."
그의 내재적 불만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 동수에게는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의사라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걸림돌과 같은 것이다. 동수는 살려고 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없고 고행만 되풀이 되는 악순환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준석과 부러 대립각을 세우고 어찌 보면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감행한다. 허나, 준석은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적인 건달 밑에 수하로 들어간다고 해도 만류는 해보지만 붙잡지는 않는다.
준석은 상택의 경우처럼 준석의 내면에 숨어있는 것 또한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수도 자신이 행하는 일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자각하고는 있으나 이미 환경적인 요인으로 변질된 자신 때문에 그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때문에 둘은 점점 더 대립-사실상 동수의 일방적인 대립-하며 쌓을 필요도 없는 오해를 쌓게 되고 비극적 말로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는 건달로 살고 싶진 않았지만 스스로 그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건달의 자식으로 태어나 건달로 살게 될 운명을 지닌 준석, 그리고 힘은 세지만 가진 것이 없고 늘 손해만 본 동수, 명석한 두뇌로 애초부터 성공의 실마리가 보였던 상택, 적당히 눈치 보며 조금씩 실리를 취하는 중호(정운택 분). 애초에 이들이 걷는 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것이었다.
내면에 함께 깃든 정신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할지 모르겠지만 환경은 그것을 유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나누었다 한들, 더러 찾아오는 외부의 제약은 이것을 유지하게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이 네 친구들은 이를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3. 결국에 남는 것
-자신이 타락할 지언정 친구가 타락할 것은 용납하지 않는 준석
비록 많은 우여곡절과 오해와 불신이 싹텄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모든 것을 뒤집는다. 마지막까지 친구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 준석과, 끝까지 이들을 잊지 않으려하는 상택과 중호. 그리고 완전히 돌변한 사람인 것 같았던 동수의 마지막 변심은 본래의 가치를 보여준다.
동수는 준석이 상택의 배웅을 간다고 했을 때 비아냥대고 말았지만 결국 공항을 향하려다가 죽임을 당한다. 물론 공항을 가든 가지 않든 그는 죽을 운명이었으나 그 하나의 궤적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동수는 애초부터 그들을 등질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정작 대립각을 세운 준석에게도 직접적인 피해는 입히지 않은 것이다.
원망했던 아버지에게도 굳이 찾아가 돈을 전달하며 눈물짓는 동수의 모습은 그의 내면이 온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본성은 원래가 피에 굶주린 잔인무도한 건달이 아니라 순수한 유년 시절의 동수가 가진 기질이다.
준석은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동수를 죽이라고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친구들과 심지어 동수 아버지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거짓 자백을 해버린다. 동수가 마지막 순간 자신들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친구들을 등질만큼 모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준석은 충분히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형을 살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스스로 그 길을 거부했다. 그가 형을 거부하는 것은 동수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죄를 물었다.
-준석과 동수는 영화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강한 우정으로 묶여있다.
상택은 후에도 준석을 찾아와 거짓 자백을 한 이유를 간신히 물어보지만 시원찮은 대답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어긋남을 스스로 교정하겠다는 친구를 더 이상 말릴 까닭이 없는 탓이다. 그리고 열심히 회상한다. 그들이 순수한 교감을 나누던 시절로 부터 현재까지. 이 비극적 운명이 본래는 악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한 편 영화가 되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친구들 간의 더러운 암투도 아니며, 그로 인한 희생도 아니고 단지 튜브에 옹기종기 모여 한담을 나누던 어린 네 소년일 뿐이다.
상택의 마지막 회상에, 거북이와 조오련의 대결을 점치는 친구들의 판에서 준석은 동수의 편을 들어줬다고 한다.
4. 몇 가지
눈치가 빠른 사람은 벌써 눈치 챘겠지만 이 영화의 주된 관심은 역시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이어오면서 친구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어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다. 조폭, 건달과 같은 소재는 그저 양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갱스터 영화이면서 갱스터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설정된 것일 뿐, 영화의 근본적인 속성은 폭력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레인보우의 리더이자 동수의 어긋남에 기폭제 역할을 했던 진숙(김보경 분)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이 보인다. 역할의 중요성은 있는 반면에 크게 활용된 컷이 없다는 것은 인물낭비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짤막하게 등장하지만 영화 흐름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아쉽다.
또, 다소 엉성하게 엮여있는 불화의 씨앗들이다. 동수의 내면 속의 불안정함을 좀 더 정밀하게 그려냈다면 그의 행동이 다소 뚱딴지같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이다. 그 외 학창 시절 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그려낸 중호가 후에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는 것도 아쉽다.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개연성 부분이 조금 엉성하게 엮여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딘가 식감이 좋지 않은 식빵을 물도 들이키지 않고 텁텁하게 계속 먹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것에 치중한 많은 느와르, 갱스터 영화들이 한 번쯤 다시 영화 ‘친구’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때때로 극한의 절망 속에서 솟아나오는 희망을 더욱더 갈망하고 그것에 감동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솟아나는 작은 들꽃의 가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가끔 친구가 생각날 때, 이 영화를 한 편 보고 옛 시절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제각각 다르게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원래는 같은 곳, 같은 생각을 하며 자랐다는 것을.
+추천 뮤지컬
영화 ‘친구’의 감동을 그대로 이어받아 뮤지컬로 재탄생 시킨 것이 있다. 지금은 공연이 끝났지만 영화의 전당에서 공연 했던 시네뮤지컬 ‘친구’이다. 앞서 이야기한 본 작품의 속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아쉬웠던 개연성 문제나 여러 가지 섬세한 묘사들을 반영해 보완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서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다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뮤지컬을 보는 것을 권한다.
원본 출처 : http://blog.naver.com/pistol4747/20203058680 COSTA의 WideVison 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