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2

참의부201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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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Ⅱ. 절대권력을 만든 유신쿠데타

 

3.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는 것 때문에 개헌의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국민투표 과정이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우선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발동한 불법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에게 군사 동원의 공포 분위기를 주면서 투표했으니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압 투표였다. 게다가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전면 금지된 상황이었다. 국민투표의 내용에 대해 언론도 비판적인 보도가 금지됐다.

 

군대와 공무원, 관변단체들은 국민투표 95% 찬성운동을 벌였다. 군영내 투표는 찬성을 강요하는 공개투표였다. 당시 군대에 강제징집돼 있던 사람들은 공개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중대 인사계가 행정반에서 찬반이 인쇄된 기표용지 중 반대란을 손으로 가려 쥔 채 찬성란만을 차례로 들어오는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투표를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행정반원이 대리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또 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intermediate group)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 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비판도, 국민의 찬반토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 이상이었으며, 그 1년 뒤 재차 실시한 국민투표에서도 압도적인 지지가 나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국민들은 현명하고 위대한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는 성찰적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①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한 절대권력 체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사례는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스트 체제가 대중민주정치의 형식을 통해서 배태된 것과 유사하다. 유렵에서 전체주의의 성립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불신과 위기론을 야기한 것도 바로 국민대중이 정치권력의 공작 대상이라는 사실이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유신헌법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조항과 구속적부심제 등을 폐지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에 해당한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사고에 젖어 있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분립에 어긋난다. 권력분립론은 절대군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지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사회계약론자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그런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며 그 결과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이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이어지면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를 남겼다.

 

② 언론자유 5등국……멸망 직전 공산주의 국가들과 동점

 

박정희 군사정권의 통치력 중 가장 큰 배경은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린 공작이었다. 유신독재체제에서는 수시로 긴급조치를 선포해 특정 이슈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금지했다. 예컨대 1979년 10월 부산·마산 시민항쟁도 계엄포고령으로 언론 보도를 금지해 사실 자체의 기록으로 사초(史草)라 할 수 있는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된 한민통(한국 민주주의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의장 김대중은 언론에 이름이 나오지 못한 채 ‘재야인사’로만 표기됐다. 언론의 암흑기였고 우민화 통치의 극치였다.

 

유신독재체제 아래 정부는 언론 공작의 대표적인 것으로 신문의 광고주들을 협박해서 눈 밖에 나면 광고 수입을 틀어막았다. 광고주인 기업을 협박하는 공작은 중앙정보부가 담당했다.

 

1974년『동아일보』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선언을 발표하자 중앙정보부는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온 기업들을 압박했다.『동아일보』는 곧바로 광고 해약 사태에 직면했다. 신문은 광고면을 백지로 둔 채 인쇄됐다. 정부의 광고 탄압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성원 광고들이 답지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신문사의 광고 수입을 대체하기엔 턱없이 모자랐고 그나마 오래가지 않았다.

 

③ 광고 탄압에 신문사주들 독재정권과 타협으로 돌아서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사의 총수입은 대체로 구독료 55%와 광고료 45% 정도여서 지금에 비하면 광고 수입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상 광고료 수입은 매우 중요했다. 광고 수입의 숨통을 조이는 공작으로 산민사의 사주 측은 결국 비판적 기자들을 해직시키면서 중앙정보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공작 수법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5·17쿠데타와 5·18광주시민항쟁을 전후한 내란 과정에서 비판적 언론인이 강제해직될 때도 그대로 답습됐다. 언론사 사주 측을 압박해서 모든 사원들의 일괄 사표를 제출받은 뒤 선별적으로 수리하도록 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내란 때는 보안사령부가 언론인 강제해직을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의 직접적인 언론탄압은 비판적 언론인들을 수시로 불법 연행해 문초하고 구타하는 방식이었다. 젊은 기자에서 최종 제작책임자인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았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시로 출입하면서 간시하고 신문의 편집과 제작에 간섭했다.『동아일보』기자들의 10·24자유언론선언의 한 원인도 그런 정보기관원들의 편집국 출입이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재벌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수신문사들이 특혜 성장을 누렸다. 정권에 대해 적당히 비판하고 다른 한편 타협하는 줄타기 경영을 하면서 언혼의 정치사회적 영향력과 경제적 부를 함께 얻었다. 주류 언론들의 그런 줄타기 시절, 한국의 언론 자유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바닥 수준이었다.

 

유신독재체제 말기인 1977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인권운동 단체인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한 각국별 언론자유 등급을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프리덤 하우스는 당시 세계 145개국의 언론 상황을 1등국부터 7등국까지로 분류했다. 거기서 한국은 언론자유 5등국이었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헝가리·폴란드·유고슬라비아 같은 나라들과 동점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후진국들인 인도네시아·필리핀·케냐·수단 등과 동급이었다.

 

파키스탄·이집트·레바논·로디지아도 4등국으로 포함돼 한국보다 언론자유가 앞선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국보다 못한 나라라면 그저 소련·루마니아·중국·북조선인민공화국·베트남·캄보디아 정도의 일당독재 공산국가들뿐이었다.

 

④ 1987년 6·10민주화운동까지 “한국 기자는 자유언론인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인 연구과정인 미국 하버드대학의 ‘니만 펠로십’도 한국 기자 추천받기를 거부했다. 박정희가 유신독재체제를 선포한 1972년 10월 이후 1987년 6·10민중항쟁이 승리한 때까지 15년간 한국 언론은 그렇게 수모를 겪어야 했다. 유신독재체제 선포 이전엔 1963년부터 1972년 초까지 매 2년마다 하버드대학 니만 펠로십 연구원이 선발됐었다.

 

2000년대 들어 프리덤 하우스는 세계 각국의 언론 상황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한국을 2등급으로 분류했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들은 우리 나라의 언론자유가 1등급이 아님을 강조했다. 김대중 정권이 언론자유를 옥죄었다는 논조가 깔려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언론사에 대해 한 일이라면 탈세행위를 법에 따라 처벌한 것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부동산 관리와 세금 문제에서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특혜를 받거나 묵인받아 온 보수언론은 탈세 처벌도 언론탄압인 것처럼 왜곡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의한 군부철권통치가 끝나고 하위권이던 언론자유가 상위권으로 올라선 상황에서 언론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보수신문사의 사주와 편집인들은 과거 어두웠던 시절엔 무엇을 했는가? 언론자유를 위해 과연 기여한 일이 있었는가? 유신독재나 5·18내란 상황에서 정의로운 기자와 논설위원 모두 언론자유투쟁을 벌였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는지 조사해볼 일이다.

 

당시 자유언론을 실천하려던 기자들을 강제로 해직시킨 사주는 지금 사주의 선대가 아니던가? 탈세 처벌을 모면하고 비호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들먹이는 그들이 종교와 자유를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다를 게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⑤ 국민통합은 갈등 해소가 전제조건 돼야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유난히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총력안보’니 ‘국민총화’·‘일치단결’과 같은 용어들이 난무했다. 이런 용어들은 후진국의 독재권력자들이 즐겨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모든 갈등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맹목적 통합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통합은 갈등 해소가 그 전제조건이 돼야 한다. 갈등과 비판의 목소리는 제대로 해소시키지 않은 채 무조건 단결과 총화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독재권력의 특성이다. 박정희가 총력안보와 함께 국민통합을 내세운 근거는 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의 무력적 위협이었다.

 

유신독재체제는 대통령 박정희가 그 이전에 견지하던 경제제일주의로부터 국가안보지상주의로 전환한 억지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이후 취약한 정통성을 가난 추방과 조국 근대화를 내세워 정당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경제제일주의가 1970년대 들어서는 권력 강화의 명분으로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북한의 남침위협론과 함께 남북통일의 명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사선개헌 때부터 ‘총력안보’를 구호로 내걸면서 사회 전반을 병영통치체제로 조직화했다. 대학에도 군사교련 과목을 설치했다. 처음엔 이를 교양과목으로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군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주었다. 그러다 1971년부터 대학 교련은 모든 재학생들이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으로 되었다. 이젠 군 복무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려면 모두 교련과목 학점을 따야 햇다. 대학에 교련 교관단이 들어섰고, 이들은 필수과목 강의 형식을 빌어 학생들에게 안보강연도 했고, 정권에 대한 옹호 발언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또 향토예비군을 더 강화해 각 직장마다 예비군을 설치했다. 예비군 연대장이나 대대장으로 예비역 대령과 중령들이 각 직장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비상기획관 노릇까지 맡기도 했다. 군 고위장교들이 전역한 뒤 사회 곳곳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쿠데타 준비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사회를 병영체제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누가 보아도 세계적으로 냉전적 대립구도가 해소돼가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1960년대 말부터 탁구 친선경기 선수단 방문을 주고받으며 핑퐁 외교로 데탕트에 합의하고 교역과 관광 등 교류를 확대한 끝에 국교정상화를 이룬 시기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적 냉전체제의 와해 분위기를 이른바 ‘국지(局地)안보 위기론’이라는 궤변으로 뒤집었다. 강대국 간의 데탕트는 그 아래 약소국 간의 국지전을 부추기는 역작용으로 나타난다는 억지였다. 남·북한을 각각 지원하는 열강인 미국과 중국이 화해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북한의 군사행동에 대한 보복조치를 억제하기 때문에 한반도 국지안보가 더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에 이어 1972년 유신독재체제를 선포한 당시 북한 측 김일성 정권의 태도는 긴장완화 분위기가 역력했다. 1971년 한 해 동안 북한 군사력에 의한 휴전선 침범행위는 종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고, 이산가족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이어 1972년 5월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의 밀사로 평양에 밀행해 북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 김일성을 만나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다. 이것은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3대 합의문서 중 하나인 7·4남북공동성명으로 발표됐으며 그것에 바탕해 남북관계조절위원회가 발족됐다. 분단 후 첫 남북간 합동기구였다.

 

남북관계조절위원회가 기능을 상실한 것은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독재체제를 선포하고 이어 12월 김일성이 이른바 주체헌법을 제정하여 양 측이 똑같이 1인 중심 독재권력을 강화한 뒤의 일이다. 그 이후 남북관계는 상당 기간 7·4남북공동성명 이전의 긴장관계로 후퇴하고 말았다.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남북관계를 이용한 결과였다.

 

⑥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정치학적 명제를 그대로 입증했다. 유신독재체제 아래서 대통령 박정희는 아무도 견제할 수 없는 절대권력이었다. 국회도 사법부도 박정희의 권력과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박정희의 사생활조차 퍼스트레이디인 육영수가 관리하거나 견제할 수 없었다. 그의 사생활은 상당 부분을 가족보다도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 의전과에서 비밀리에 조력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권총 살해가 벌어진 것도 외부의 연예계 여인 두 명이 동석한 궁정동 비밀연회장에서였다.

 

모든 국정은 박정희의 친위대인 중앙정보부, 군 보안사령부, 청와대 경호실이 감시·감독하고 조정했다. 유신체제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 출신 김재규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유신헌법는 박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하기 위한 헌법이었다”고 증언했다.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자 박정희는 야당과 비판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제1야당인 신민당에 강경한 선명 노선의 지도부가 들어서자 와해 공작을 벌여 이른바 대행체제로 약화시켰다. 김영삼 총재가 해외 언론『뉴욕 타임스』와 인터뷰한 것을 이른바 ‘국가모독죄’로 문제 삼아 국회에서 제명시켰던 것이다.

 

유신독재체제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온갖 체제 폭력과 야만적 고문행위, 반문명적 정치공작에 대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그 불법성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문명사회로 발돋움할 수 있으며 후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불미스런 과거사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정리해야 다른 나라의 과거에 대해서도 제대로 비판하고 새로운 출발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제대로 가질 때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올바른 청산과 사죄를 정정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통령 박정희의 헌정 유린행위에 대해 후대의 민주주의 선거 출범 정부 최고책임자가 역사적 책임의식 위에서 사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회가 주관하고 학계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헌정사 평가위원회’ 같은 것을 발족할 필요가 있다. 최근까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했지만 유신헌정과 같은 고도의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손대지 못했다. 나치의 과거사에 대해 후대의 독일 정부가 책임지고 사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것만이 우리 나라가 역사적으로 후퇴하지 않고 발전한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⑦ “국민소득 오르면 민주주의 정치가 발전한다”는 명제 뒤집어

 

유신독재체제는 또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민주적 정치를 잘 실천할 수 있다는 정치발전의 일반이론을 뒤집었다.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 민주적 정치가 발전한다는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정치 일반에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통념으로 받아들여져온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자신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면서 먼저 잘 먹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선 경제성장, 후 민주주의 정치 실현’을 지론으로 내세운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는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3선개헌도 했고 유신체제도 선포했다.

 

그러나 남한의 국민들은 1960년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피땀 흘려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바탕 위에 민주주의 정치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반민주적 절대권력 체제인 유신헌정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후진국 정치발전론의 통념에 정반대로 어긋나는 결과였다. 박정희가 주장한 ‘선 경제성장, 후 민주주의 정치 실현’도 다분히 공작적인 구호였으며 이루어지지 않는 허구적 꿈에 불과했던 셈이다. 민주주의는 집권자의 선의에 의해서 구현되는 제도가 아니라 국민이 쟁취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라는 금언을 실증하는 사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