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아자이 나가마사&오이치

콜로라도201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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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년 어느 따뜻한 봄날 한채의 꽃가마가  높은 산위에 있던 어느 작은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가마가 오기를 기다린 한 곰같은 사내는 한걸음에 달려가 가마앞에 섰다. 가마의 문이 열리자 그곳에서 한 미녀가 내렸다. 사내는 한눈에 반해버린 듯 얼어붙어 있었다고 한다.

 아자이 나가마사는 오타니성(소곡성)의 성주로 당시 북 오우미(지금의 시가현일대)의 작은영주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아자이 스케마사가 주군이었던 쿄고쿠 가문의 땅을 빼앗고 독립한 소영주로서 당시 남 오우미의 롯가쿠 가문과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혼례전 일본 전국시대 지도 하늘색 땅이 오이치의 고향인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이며 그 옆의 노란색 땅이 나가마사의 땅이 북 오우미이다.

 

가마에서 내린 이치는 오늘날 170CM정도의 키였다고 전해졌으며 당시 전국시대 최고의 미녀라고 불린 여성이었다. 그녀의 오빠는 오다 노부나가로서 당시 적대국이었던 미노(지금의 기후현 일대)를 집어삼킬 요량으로 이웃나라인 오우미에 동맹을 목적으로 혼인을 제안한 것이었다.

 전국시대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오이치 오다노부나가의 여동생으로 당당한 기개가 있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키가 굉장히 커서 독특한 이치만의 기모노를 입은 그림도 전해내려 온다.
 후일 그녀의 세 딸들은 모두 전국시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치는 자신의 앞에 있는 한 곰같은 사내를 보며 잠깐 겁을 먹었다고 한다(실제로 아자이 나가마사의 키는 183CM였다고 하며 몸무게가 100kg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왠지 풍체가 좋은 그와는 왠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아자이 가문은 북쪽과 남쪽의 거대가문에 둘러쌓인 약소국이었다. 특히 아버지인 2대 히사마사는 전쟁을 싫어하고 복종을 통한 평화를 얻기만을 원했다. 이에 가신들은 불만을 품고 반란을 모의 강제로 히사마사를 은퇴시키고 16살인 나가마사를 옹립했다.

 

당주가 되면서 롯가쿠 요시카타의 신하라는 의미로 요시카타의 이름에서 글자를 따와 카타마사(賢政)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그는 롯가쿠 가문의 일개 가신의 딸과 결혼하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그녀와도 사이가 안좋은 상태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제안이 오자 지체없이 첫째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롯가쿠 가문이 공격해 오자 그는 직접 전쟁터로 나가 롯가쿠 가문을 격파해 마침내 독립을 하게 되었다.(이 전투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로 부터 함께 할만하다고 인정받아 당시 신랑측이 결혼비용을 모두 내는 관례를 깨고 신부측에서 모두 부담했다고 한다.)

 오이치의 오빠이자 전국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 그는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아가는데 있어 큰 공헌을 한바 있다.

 

 

당시 상황은 사이토 요시타츠가 1561년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사이토 다쓰오키는 오다가 전방에서 압박해오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가마사에게 동맹을 제안하지만 노부나가가 선수를 쳐 나가마사와 노부나가는 동맹 관계를 맺게 되고 1563년 나가마사는 미노 국을 공격한다. 이 때 나가마사가 미노 국을 공격한 틈을 타 롯카쿠가 빈집털이를 시도하자 나가마사는 그대로 군대의 방향을 돌려 롯카쿠를 털어버린다.
그러나 이 동맹은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가문의 오랜 맹우인 아사쿠라 가문과 오다 가문은 매우 사이가 나빠 아사쿠라 가문이 이에 항의하게 되었고 친 아사쿠라 가문의 가신들도 반발하였다. 그래서  동맹을 맺을 때 '아사쿠라 가문을 말없이 공격하지 말 것','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게 될 때에는 먼저 이쪽에 알릴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오이치는 대단히 총명하였고(그녀의 오빠인 노부나가는 "만약 이치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뛰어난 무장이 되었을 것이야."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남편과도 금슬이 좋아 2남 3녀를 낳았다. 그들은 시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찿아가 인사를 드렸다고 하며 부부끼리 자주 어울리며 가신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치는 현명한 아내이자 자상한 어머니로 10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행복도 전쟁 앞에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상락에 성공하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군이 협정을 깨고 포고없이 아사쿠라군을 공격하자, 아자이 나가마사는 고민 끝에 결국엔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효와 맹우에 대한 오랜 의 때문에 오다 가와의 동맹을 파기, 오다군을 공격해서 물리쳤다.(이때 가네가사키에 오다 노부나가 군이 포위될 뻔 했는데 이치가 콩주머니를 통해 먼저 위기를 알린 덕분에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오라버니와 남편사이를 고민했지만 오라버니를 택했고 대신 남편을 자신이 설득할테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아자이 나가마사는 이 사실을 안 아버지와 가신들이 그녀를 인질로 잡거나 죽여야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고 그녀를 감싸주었다.       그 후로 아자이 나가마사는 몇 번이고 오다 가의 침공을 물리치지만, 결국엔 노부나가의 대군에게 거성인 오다니 성이 포위되고 만다. 노부가나는 단번에 진격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고했는데, 만약 항복을 한다면 야마토에 새로운 영지를 준다며 (배반을 싫어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후와 미쓰하루, 기노시타 히데요시등을 설득의 사자로 보냈지만 나가마사는 계속 거절해 최종 권고도 결렬됐다.   오다니 성이 함락되기 직전 아자이 나가마사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인질로 잡으려는 가신들을 물리치고 그녀를 구해낸 뒤 가지 않겠다는 그녀와 세딸을 억지로 가마에 태우고 기노시타 히데요시에게 데리고 가라고 명령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에서 할복자살했다.(그녀는 자신을 데리고 간 히데요시를 극도로 미워했는데 이것은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결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청을 마지막까지 거절한 아자이 나가마사를 극도로 미워해 이후 그와 아버지 히사마사의 두개골을 황금요강으로 썼다고 한다.(오늘날 이 기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대세이며 실제로 시바타 가쓰이에는 나가마사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고 그를 묻어주었다고 한다.)   오이치는 오빠를 원망했지만 딸들의 안위를 위해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의 아들인 만푸쿠마루는 가신들에 의해 성을 겨우 탈출했지만 현상금에 눈이 먼 이웃사람에 의해 붙잡혀 다섯살의 나이에 죽창으로 찔려 죽었다.그리고 갓난아기인 이쿠마루(機丸)는 그녀의 통곡에 가까운 청에 의해 노부나가의 배려로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그 이후 환속해 분고국 호소카와 번의 가신이 되어 아자이 가문을 이었다.   이후 오이치는 노부나가가 죽은 뒤 자신의 남편에게 관용을 배풀어준 시바타 가쓰이에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쓰이에는 오다 가문을 노린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해 거성인 기타노쇼(북장성)성이 포위되자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녀와 세 딸을 돌려보내려고 했다.(하시바 히데요시는 그녀를 손에 넣은 후 남편이 되려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젊은시절 부터 그녀를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치는 이를 거부하고 두번째 남편인 가쓰이에에게 감사를 표한후 함께 자결했다. 그리고 북장성도 함께 불타 두 사람의 시신과 함께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쓴 입맛만 다셨다고 한다.  

그녀의 세딸 중 첫째인 차차는 그녀와 많이 닮았기 때문에 끝내 히데요시의 첩이 되어 아들인 히데요리를 낳고 이후 오사카성에서 죽었다.

 

둘째딸인 하쓰는 자신의 아버지의 주군인 교코쿠 가문에 시집가 평안한 삶을 살았고

 

막내인 고우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시집가 3대쇼군인 이에미쓰를 낳았다. 이후 그녀의 딸이 일왕에게 시집간 후 다음 일왕이 되었고 그래서 나가마사는 죽은 뒤인 1632년에 정2위 중납언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