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6. 대선으로 가는 길, 감동과 반전의 드라마 ⑶

참의부201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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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에게 진 빚이 크다”

 

변방의 정치인 노무현은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법통을 이어온 집권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었다. 그것도 ‘보스’에게 충성을 바친 대가로 얻은 지명이 아니라 당당하게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가 된 것이다. 이것은 국민 외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국정에 실현할 수 있는 최초의 대선후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중앙대학교 겸임교수)은 이를 두고 “그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넘기 위해 당선이 보장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등 원칙과 소신을 지킨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당 내의 변방에 있던 그를 일약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준 시민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변화와 희망의 염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대의 아웃사이더 진중권은 잡지《아웃사이더》에서 노무현에게 “늘 빚 진 느낌”을 토로했다.

 

“사실 나는 노무현에게 늘 빚을 지고 있다고 느껴왔다. 아마도 5공 청문회 때부터일 것이다. 그때 나는 민주화 투쟁의 어설픈 동지로만 여겨왔던 야당 의원들의 수준이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달았다. 증인을 앉혀놓고 사실적인 심문을 하지 못하고 소리 바락바락 질러가며 도덕적 훈계나 하며 ‘닭짓’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참 저 당에는 참으로 인재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이 안 난다’며 요리저리 빠져나가는 장세동보다 더 열통 터지게 만든 것이 바로 이 게으르고 무능한 야당의 국회의원들이었다.

그때 단 한 사람, 충실히 준비해 와서 증인들을 논리적으로 코너에 몰아넣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노무현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심문을 마치고 그 많은 자료들을 보자기에 싸는 장면을 영상으로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다. 또 증인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자 명패를 집어던지던 그의 파토스도 기억하고 있다. 이때 그는 우리 국민의 논리적 수준과 정서적 분노를 정확히 대변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에게 뭔가 빚을 지고 있다고 느껴왔고,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를 게스트로 만났을 때 비록 내가 속한 당의 정치인은 아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꼭 성공하십시오’라고 말했다.”

 

● ‘노무현 바람’의 정치사적 의미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노풍’ 곧 ‘바람’으로 표현된 정치인은 노무현이 처음 아닐까 싶다. 한 언론인은 이른바 ‘노무현 현상’을 두고 “국민들은 노무현이 인맥 없는 사람, 패거리 정치를 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선호했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능력이나 원칙에 따른 정치 행태를 보인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나누어먹기식의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태의 낡은 정치를 깨기 위해서는 가신과 학벌, 지역구도의 정치인이 아니라 가신없는 학벌과 지역구도에서 자유로운 이를 주목하게 했다. 그가 노무현”이라고 진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단일후보로 선출된 노무현도 부산의 첫 연설에서 “이제 제가 대통령이 되면 그것은 정권재창출이 아닙니다. 새로운 정권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그것은 김대중 정권도 아니고, 호남 정권도 아니고 바로 노무현 정권이고, 전국 정권이 될 것입니다. 측근정치, 가신정치, 계보정치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정치개혁은 시작됐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까. 저는 단 한 사람의 계보도 없습니다. 측근도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고 천명했다.

 

‘노풍’은 지자체선거와 보궐선거의 참패, 민주당 내의 일부 반란세력과 한나라당, 족벌신문의 온갖 역풍에도 불구하고 잦아들지 않았다. 잦아들 듯 하다가 다시 불고, 고비 때마다 더욱 거세게 불었다.

 

사회학자 김철규(고려대학교 교수)는 “노풍은 정치권의 낡은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개혁을 열망하는 시민들에 의한 바람이다. 개혁적 중산층과 서민, 386세대, 네티즌, 여성 등 정치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던 주체들이 스스로 팔을 걸어붙인 결과다. 이들은 부패정치, 경제적 불평등, 엘리트적 대권 후보 등에 대한 불만을 노 후보에 대한 희망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노풍’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새로운 정치, 개방적 정당정치, 사이버 공간에서의 의사소통과 정보 공유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첫째, 수십 년 동안 재생산되어온 구시대 정치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정치,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1987년 시민항쟁 때 이미 표출된 바 있다.

둘째, 개방적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엿보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정당은 오랫동안 보스 1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당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정책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충성과 친소관계, 이해 타산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고 해체되고 움직여온 것이 현실이다. 당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도 수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정책정당도, 국민정당도 존재할 수 없었다.

 

셋째, 대안적 의사소통 영역으로서의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이 입증되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다알이 지적했듯 민주주의 활성화를 위해 정보와 의사소통은 핵심소요이다. 그런데 주류 미디어는 일방향적이며 정보 흐름을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비해 인터넷은 쌍방향적이고 탈규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과 네티즌들의 성장은 온라인 공간에 새로운 시민사회 영역을 확보해 내고 있다.˝ - 김철규, ‘변화의 시작, 노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월간중앙」, 126쪽, 2002년 5월호.

 

이렇듯 2002년 ‘노풍’의 진원지는 제도언론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이었다. 수구정치세력과 족벌신문이 ‘저주의 언어’로 그토록 융단폭격을 가했지만 ‘사이버 응원군’에 힘입은 노무현은 끝내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기존 정치색에 오염되지 않은 노무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절망의 벼랑 끝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전령’들

 

노무현은 국민경선을 통해 대선후보가 되었지만 아직 갈 길은 험하고 도처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변방의 비주류 정치인이 집권 여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여기저기서 표출되었다.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족벌신문 심지어 민주당 내부에서까지 반노무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장 노무현 앞에 놓인 산은 6·13지방선거였다. 광역단체장 16명, 기초단체장 232명, 광역의원 682(비례대표 73명)명, 기초의원 3485명을 뽑는 6·13선거를 앞둔 정치정세는 민주당에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2001년 말부터 터지기 시작한 ‘진승현 게이트’와 ‘이용호 게이트’에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이 연루되었다는 설이 퍼지기 시작하고, 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에 이어 5월 6일에는 민주당을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치른 지자체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 4곳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패퇴하고, 한나라당은 충남(자민련)을 제외한 11곳을 휩쓸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수도권(서울·경기·인천)과 강원에서 69개 지역을 휩쓴 반면 민주당은 11개 지역 당선에 그쳤다. 광역의원 선거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수도권과 강원에서 235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과반의석으로 이들 4개 광역의회를 장악한 반면 민주당은 겨우 34석에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강원 1곳에서만 33석을 얻었으니,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참패였다.

 

민주당은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지도부 인책론과 당 진로 문제 등을 놓고 계파 간에 내부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비주류 일각에서는 대통령선거 후보 사퇴와 제3후보론까지 제기했다. 대선을 앞두고 지자체 선거의 참패를 노무현에게 물어 후보 사퇴 압력을 가한 것이다. 노무현은 6·13선거에 앞서 영남권에서 단체장을 1명이라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고 한 터여서 사태는 더욱 꼬여 갔다. 그래서 그는 대선 후보에 선출된 뒤에 김영삼을 찾아가 다시 민주화세력의 통합에 앞장서줄 것과 영남지역의 지자체 선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냉대를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6ㆍ13 지방선거에 전력투구했다. 영남권에서 단체장을 하나라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기세를 보여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영남은 고사하고 수도권과 충청, 강원 등 호남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참패했다. 마치 산사태가 난 것 같았다.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후보가 재신임을 불사하는 결연한 자세로 지방선거를 지휘한 것으로 이해하고 후보 재신임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해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거꾸로 지지율 하락을 이유로 후보를 교체하자는 움직임이 당내에서 생겨났다. 재신임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도 나왔다. 그럴수록 지지율은 더 내려갔다. 민주당은 8월 8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선을 후보 지휘 아래 치른 이후 당무회의에서 재신임 여부를 결정하기로 문제를 봉합했다. 나는 명색만 후보였을 뿐 당내에서 점차 고립되어 갔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24쪽.

 

위기였다. 당내 계보나 지역기반이 없는 후보이다 보니 지자체 선거 참패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써야 할 판이었다. 후보 선출에서 불만이 많았던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기회다 싶어 후보교체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노무현 후보를 구한 것은 민초들이었다. 때마침 6월에 서울에서 열린 한·일 FIFA 월드컵 본선 8강전에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연장전까지 득점 없이 공방전을 벌이고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카마초 감독이 지휘하는 우승후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따돌리고 4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민초들은 ‘노무현 살리기’ 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번에도 노사모가 전위가 되었다.

 

《여의도통신》편집부장인 정지환 기자는 “붉은 악마와 노사모. 그들은 운동장과 정치판에서 당당하게 응원구호를 외치고 율동을 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한국 축구와 정치를 바꾸려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아우성이고 몸부림이다. 그들은 직접 그라운드와 정치판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수’와 ‘후보’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절망에 빠진 한국 축구와 정치를 사랑하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절망의 벼랑 끝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전령’들”이라고 했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월드컵 광기와 ‘노무현 바람’은 여러 면에서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오랫동안 짓눌려 온 그 어떤 스트레스에서 탈출구를 마련해 준 덕분에 불붙었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정치를 새로운 ‘스트레스 해소’ 산업으로 만들자. 이건 우리의 시대적 소명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썼다.

 

FIFA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예상을 넘어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대표팀 등 세계적인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4강의 위업을 이룬 것은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이 예상을 깨고 여당의 대선후보가 된 것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월드컵 응원과 노무현 살리기를 같은 차원에서 진행한 것이다. 일찍이 한국정치에서 없던 현상이었다.

 

FIFA 월드컵의 붉은악마들과 노사모라는 ‘전령사’들의 지지가 아니었으면 ‘노무현 후보’는 지자체 선거 참패 책임론에 짓눌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때마침 한국 대표팀의 눈부신 선전이 늘 패배하고 좌절하기만 해온 이 땅의 민초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 희망은 ‘전령사’들을 통해 억울하고 분통터지도록 한나라당과 족벌신문들은 물론 소속 당으로부터도 ‘얻어맞고’ 있는 노무현을 성원하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