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인마와 통화를 했다 - 7

무념무상2014.02.26
조회958

출처:웃대, 피더스님

 

 

우선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지금까지 여자친구란 인물을 단 한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들기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였다. 단지 그럴 기회가 없었기에, 혹은 그럴 수가 없었기에. 물론 나로써는 후자의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웠다.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만들고도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회가 되질 않았다. 이틀 사이에 내 인생에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아주 스펙타클한, 평생 잊혀지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기억. 하지만 아무리 내 인생이 흔들려도, 내 본분은 글을 쓰는 것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을 구해주는 정의의 영웅이 아니였다.


하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은 예외였다. 소설가임에도 불구하고 영웅 행세를 하며, 김지희를 구했던 그 일.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소설가라는 것도 결국엔 한 사람이자 인간이니까. 내 눈 앞에서, 내 귓가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걸 말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한 마디로, 그때 김지희를 구한건 결코 내가 그녀를 남몰래 사모하거나, 사귈 의향이 있었기에 일으킨 행동이 아니였다.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써, 사람으로써, 그리고 싸이코패스를 마주한 미스테리 소설가로써 취한 행동. 그런데 왜, 지금 내 눈 앞에는 김지희가 아른거리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우리 집? 아니, 우리 집이 아니였다. 여긴 어디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광경이였지만, 곧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마치 투명한 막이 내 정신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기분. 좋지 않은 기분이였다.


“아, 김지희.”


이윽고 내 생각은 눈 앞을 가로막던 막을 꿰뚫었다. 그래, 여긴 김지희네 집이였다. 전에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잘 기억안나지만, 그때에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여기있는걸까. 김지희는 내 눈 앞에서 함박 웃음을 띄고있었다.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소개하는 도시락의 뚜껑을 열며. 집 인데? 여긴 너희 집 인데 도시락을 만들어 먹는다고?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갸우뚱한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가 건네는 계란말이를 입으로 받아먹을 뿐이였다. 이상한 일인걸까, 아니면 당연한 일인걸까?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내 혀가 마비되거나 미각을 잃은 것도 아닌데. 게다가 더 이상한 점은 내가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맛이 안느껴지는데도 그저 덤덤한 표정.


김지희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뭐라고 말을 하는거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는거지? 잘 안들리는데.


그 순간이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였다. 발라드 곡. 추억의 노래 리스트에나 나올법한 오래된 발라드 곡. 잔잔하고 조용한 음에 남자 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섞인 그 노래. 그 노래가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순간, 눈 앞의 분위기가 바뀐다. 김지희는 사라졌다. 도시락도 사라졌다. 머리 위에서 빛을 비추던 형광등도 꺼져버렸고, 초록색 들판이 보이던 괴상한 창문도 깨져버렸다. 하지만 노래는 계속 흘러나왔다. 발라드 노래.


공포. 소름끼치는 감각이 내 모든 신경을 자극했다. 등이 서늘했으며, 눈 앞은 핑 돌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발라드 노래 하나에 집중하며 앉아있자, 나는 내 오른쪽 주머니에서 불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꺼낸다. 휴대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검정색 휴대폰. 나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짧은 시간의 침묵. 의아함에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던 그 순간이였다.


“안녕, 아저씨?”




*






“헉!”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재빨리 시선을 돌려 눈이 닿는 모든 곳을 살폈다. 김지희의 집이 아니였다. 그리고 휴대폰도 울려대지 않는다. 귓가에 그 노래 가사가 들려오는 듯 했지만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음으로써 잡 생각을 떨쳐냈다.


“이 미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악몽, 그것도 하필이면 그 여자가 나타나는. 순간 머릿속에 새벽의 그 통화 내용이 떠오른다. ‘내 꿈꿔’. 이런 미친년! 난 정말로 네 꿈을 꿔버렸다고! 감각이 생생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그 여자의 차갑고 소름끼치는 목소리. 차라리 텔레비전에서 귀신이 기어나오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아직도 등에서 느껴지는 이 서늘함을 한시빨리 없애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요즘 샤워를 꾸준히 하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래의 나였다면 샤워는 귀찮아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텐데.


매일 소설을 쓰다가,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뻐끈한 어께와 등짝을 기지개로써 펴곤 했다. 그 여자 때문에 샤워를 자주 하게 되다니, 이건 좋은건지, 나쁜건지.


샤워를 마친 나는 윙, 소리를 내며 켜져있는 컴퓨터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선 곧바로 워드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사실 아직도 소설을 쓸 기분은 아니였다. 내가 이틀동안 무슨 짓을 당하고,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떠올리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써야만했다. 게다가 이미 내 소설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해놨다. 젠장할, 현실과 거짓말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지금까지 작성한 글자는 고작 1100자. A4용지 한 장을 채우기도 턱 없이 힘든 숫자.


“아 진짜, 그 싸이코년 때문에 되는 일이 없네.”


아니, 따지고보면 그 여자의 전화가 오기 전부터 나는 글을 쓸 의욕을 잃어버렸었는지도 모른다. 슬럼프인가? 전에는 달랐었는데. 나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확실히, 전에는 달랐었다. 키보드에 손만 올리면 글은 마치 마법처럼 주르륵 써내려가졌다.


머릿속에 단어가 나열됐고, 나는 그걸 받아쓰기만 하면 됐었다. 청산유수, 일사천리. 그리고 그렇게 써내려간 내 대표작이 바로 ‘백견’. 솔직히 말해서 내용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 그저, 연쇄살인마가 무차별 적으로, 100명 이란 사람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다는 내용이였다.


킬링타임용 스릴러 소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견’ 은, 기대 이상의 판매량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주위 사람들의 호평도 있었다. 생생한 표현과, 숨 막히는 전개. 나는 그야말로, 글을 표현하는데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칭찬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백견’을 쓸때와 같이, 머릿속에서 단어를 나열해주는 일은 없었다. 슬럼프? 이런걸보고 바로 슬럼프라고 하는 거겠지.


당연하게도 띄워놓은 워드 프로그램에 내가 글자를 적는 일은 없었다.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기에, 쓰지 못하는건 아주 당연한 일이였다. 단어를 생각해내라, 구상, 사건, 인물을 생각해내라. 머리에게 긴급한 신호를 보냈지만 머리는 답 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라이, 그래. 안 쓸란다.”


더 이상 내 머리는 소설가로써의 기능을 재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차가운 콜라 한 모금을 들이마신 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담배갑을 집어들어 한 개피를 입에 물린다. 그리고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히려던 그 순간이였다.


“어.”


손이 딱, 멈추었다. 방 안에 가득 울려퍼지는 발라드. 전화가 온 것이다. 아니 젠장, 전화가 온 것 뿐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건지. 하다못해 벨소리라도 바꿔야할 것 같다.


‘그 여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서둘러 배게 속에 박혀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위험한 물건을 만지고 있는 듯히, 조심스러운 동작이였다.


「김지희」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그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감사를 빌었다.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담배에 불을 붙힌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어?’


김지희의 목소리. 매일 편의점에서 들어왔던 그 목소리를 이렇게 전화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였다. 이상한 기분. 왠지모를 위화감이 나를 감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날카롭고, 차갑고, 소름끼치고, 오싹한 목소리. 하지만 지희의 목소리는 확연히 그 것과는 달랐다. 나는 그저 착각한 걸까. 아니면 깊숙한 트라우마가 남은걸까. 그때의 목소리가 너무도 소름끼쳐서, 나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앞으로 정상적으로 들을 수 없게 된 걸까.


“여보세요? 오빠?”


“아, 어. 왜 지희야.”


그녀가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그 순간, 긴장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만약 지금 그녀가 나를 ‘아저씨’ 라고 불렀으면, 나는 기겁을 하며 휴대폰을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아, 저 그게… 어제 일 때문에 말인데요.”


어제 일? 아아.


내 머릿속은 아주 잠깐, 일순간 까먹고있었던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제의 날. 내가 그녀를 구한 날. 살인마와 만난 날. 아니, 정확히는 내 통화 상대와 눈을 마추쳤던 날.


“아, 응.”


“저기 어제는 대채 왜….”


말해줘야 하나? 어제 그녀가 처했던 상황을? 그때 우리의 옆을 지나갔던 그 여자가 미치광쟁이 살인마이고, 내 통화 상대였다는 사실을? 나는 입을 ‘아’ 모양으로 벌린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에게 말을 해도 될까?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내가 지금껏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 어젠 미안. 너무 갑작스러웠나? 아, 지희야.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 큰 일 아니였거든.”


“네?”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걸까. 생각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내 입은 수화기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 이게 옳다. 그녀에게 사건의 진상을 전부 설명하는 건 너무 리스크가 컸다.


살인마는 이 동네에 살고있었다. 혹시, 내가 지희에게 알려줌으로써 그 비밀이 곳곳에 퍼지게 된다면, 그 살인마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도 그리 낮지는 않다. 물론, 그녀가 쉽게 입을 열고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 뿐이다.


“아…, 네.”


“근데, 다음부터는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 야, 여자가 겁도 없이.”


“알았어요. 근데 오빠 진짜 별 일 아니예요? 어제 진짜 심각해보였는데.”


“별 일 아니라니까, 어제 내가 술을 좀 마셨더니 제 정신이 아니였나 봐. 지금도 머리 아파 죽겠다.”


술을 마셔서 정신이 아니긴 개뿔, 온 몸을 짓누르는 긴장감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죽을 것 같아서, 살인마가 들고있던 칼에 찔려버릴 것 같아서.


“알았어요, 고마워요. 그럼 쉬세요.”


“어, 알았어.”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의 배경화면을 바라본 나는 곧바로 벨소리 목록으로 들어갔다. 분명 나는 이 노래를 아주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아주 치가 떨릴 정도로 질린다. 아니, 질린다기보단 무섭다.


“그래, 되도록이면 가사 없는걸로 바꾸자.”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벨소리 목록 중,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많은 목록 중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딱 한 가지 뿐이였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무슨 이유였을까. 나는 이 음악을 선택했다. 저장되어있는 클래식 음악 중에 유일하게 내가 아는 노래였을 뿐더러, 웅장하면서도 어딘지모르게 슬픈 느낌을 안겨주는 느낌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잔잔한 발라드 음악을 벨소리로 지정해놓다가, 베토벤 음악을 벨소리로 지정하다니. 이건 오히려 더 놀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어떠랴, 나는 벨소리를 바꾼 후,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매트리스에 튕긴 휴대폰은 벽에 한번 부딛혀 다시 침대위로 착지했는데, 나는 이 광경을 얼마전에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데자뷰?”


그리고 내가 이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은 바로 그 순간, 방 안 가득.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소리에 놀란 나는 ‘헉’ 하는 추임새를 붙였고, 이윽고 표정을 구기며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있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미친년」


생각해보면 이 년은, 항상 다른 사람과 통화가 끝난 바로 그 직후에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웅장하게 운명 교향곡을 연주해대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동안 통화를 연결시키지 않았다. 저번에 이 여자가 자신을 기다렸냐고 말했던게 아직 마음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흘렀을까. 이 정도면 이 여자가 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순간에, 나는 통화를 연결했다. 싸이코패스와의 밀고 당기기. 아니, 자존심 싸움이라고 표현해야할까.


“안녕, 아저씨?”


이 말 역시 데쟈뷰인가.


“또 왜 전화한거야?”


“뭐예요 아저씨, 어제는 그렇게 전화 빨리 받더니. 왜 오늘은 늦게 받아요? 어제 내가 한 말이 신경쓰인거예요? 그런거야?”


나는 대답대신 표정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였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생각보다 더 골치아픈 여자가. 머리가 좋았고, 눈치가 빨랐다.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였다면 전문적인 겜블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왜 전화한거냐고.”


“왜 또 퉁명스럽게 굴어? 어제는 그렇게 친절했었는데. 아저씨 진짜 이상해요. 진짜 싸이코 아니야? 이중인격자? 내가 더 무서워지려 그래.”


나는 그 질문에 침묵으로 응했다. 이중인격자라는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각인된다. 뭐지? 알 수 없는 위화감. 수화기 너머 상대의 대한 불안감과 공포.


“신발, 됐어. 본론만 말 해. 왜 전화 한거야.”


나는 그 불안과 공포에, 욕설로 되받아쳤다.


“알았어, 본론만 말할게. 오늘 새벽에 전화받아.”


“전화?”


또? 설마 또?


“그래, 아저씨 어제 기대했었지? 그러니까 오늘 죽여주겠다고. 어제 그 여자 말이야. 오늘도 한번 노려보자고. 하루 종일 붙어있다보면 죽일 시간쯤은 생기겠지.”


눈 앞이 핑돌았다. 시야가 흐려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혼란스럽다. 지희를, 김지희를 오늘 다시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어제 못 죽여서? 아니, 그건 이유가 안됀다. 이 여자는 단지 나에게 살인을 저지르는 그 순간의 끔찍하고 잔인한 소리를 전달시키는 것에 재미를 붙인 거였지, 절대로 자신이 정한 목표물을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다.


어제 이 여자가 김지희를 노린 건 그저 우연이였다. 새벽에, 그것도 1시 40분 경에. 우연히 집 앞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나온. 살인마의 목표물이 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안성 맞춤인 여자. 단지 어제의 김지희가 그 조건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살이 찌찌 않는 체질인건지, 아니면 그녀 나름대로 관리를 하고있는 건지는 몰랐지만, 어째됐던 김지희 역시 꽤나 마른 체형이였다. 더군다가 그녀의 키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였다.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적인 키, 160에서 163 사이 정도.


살인마는? 살인마의 키는 어느 정도였을까. 어젯밤, 살인마와 서로 스쳐지나간 순간. 그 순간을 떠올려보자. 김지희가 왼쪽에, 내가 가운데에, 그리고 살인마는 내 오른쪽을 스쳐지나갔다.


내 키는 178…, 아니 나보다 왼쪽에 서있던 김지희의 키와 비교해보자. 작았었나? 아니, 분명 컸었던 것 같다. 165에서 168 정도 사이. 물론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었다. 사실은 170이 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건, 김지희의 키보다 살인마의 키가 더 컸다는 점이다.


그랬기에, 자신보다 더 갸녀리고, 더 작고, 더 약해보이는 그런 여자였기에. 그랬기에, 김지희가 살인마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분명히 ‘하루 종일’ 이라는 단어를 내게 말했었다. 한 마디로, 오늘 일어날 살인은 꼭 새벽에 발생한다고 단정시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일부러 김지희를 노리며 시간을 끌 바에야 다른 목표물을 찾는게 그녀로써는 더 손쉽지 않을까? 낮 이라면 이 동네에서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다. 걸어서 십 여분 거리면 바로 번화가가 자리해있었다. 한 마디로, 살인마의 희생 양으로 선택될 목표물은 길에 널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채 왜 김지희에게 이토록 집착하는걸까? 답은 하나다. 그것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나를 알고있다.’


확실하진 않았다. 그저, 한번 노린 목표물을 놓쳤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시덥잖은 이유를 나에게 강제로 들이민 것 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면서 그녀가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집착을 가지고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70%? 아니, 80%. 확률이 높아져만 갔다.


“그럼 그렇고 알고있어. 이따가 전화 받고. 언제 전화 걸지는 모르겠다. 언니 죽이기 전에 전화걸게.”


즐거운 듯 했다. 덤덤한 어투로 내뱉는 그녀의 문장 뒤에서, 그녀가 옅은 조소를 띄고있는게 느껴진다. 머릿속에 웃고있는 그녀의 얼굴이 상상됀다. 얼굴은 완벽히 재현되지 않았다. 다만, 그 눈. 어제와 같은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리라고 마음을 먹고있던 그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날카롭고, 냉정했던 그 눈동자. 그 눈동자가 지금 나에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일단 끊어.”


일방적으로 말을 마치고,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잠시동안 멍하니 선 채로 휴대폰을 바라볼 뿐이였다. 생각이 재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내 머리는 생각보다 나빴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투둑투둑 하는 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나는 반 쯤 열려있던 창문의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다. 비가 내리고 있다. 비는 금세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몇 번 건드리고 가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예 부숴버릴 듯이 창문을 두드린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런 몽환적인 분위기를 꽤나 좋아한다. 화장실 하나, 방 한 개. 거실겸 부엌 하나. 크기도 그리 넓지 않은 좁은 집 안에 울려퍼지는 빗소리. 그리고 창문이 진동하는 소리. 반 쯤 열린 틈새로 들어오는 비 내음새.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마치 악몽을 꾼 어린아이 처럼, 정신없이 방 안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정리하지 않은 콜라병 몇 개와, 휴대폰 충전기, 별로 사용하지 않는 커피포트와 헤어드라이기 같은 물건들이 내 발걸음을 막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원 형을 그리듯이 방 안을 빙빙 돌 뿐이였다.


‘일단, 오늘도 나가야하나? 어제처럼, 어제 같이?’


뚝. 발걸음을 멈췄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휴대폰을 조작해 방금전의 통화 목록을 살폈다. 그리고 맨 위에서 두 번째. 「김지희」. 나는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전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연이 두 번 이상 겹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이건 운명인걸까? 김지희의 컬러링 음악은 내가 방금전, 불과 몇 분전에 벨소리로 지정했던 그 음악이였다. 웅장하고, 거대하고, 어딘지모르게 조금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그 클래식 곡.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상황이 이렇게 된 것 대채 무엇 때문이였을까. 살인마. 그 살인마의 말은 정말 진실일까. 정말로 우연히 나에게 전화를 건 것 뿐이고, 정말 우연히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있던 것 뿐이라면? 그건 이미 우연이라는 말의 범주를 지나치에 벗어나버린 것이 아닐까.


내 귓가에 베토벤의 운명이 들려왔다. 교향악단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악기가 내 앞에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휴대폰을 쥐고있는 내 두 손은 알 수 없는 전율에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운명’ 의 1악장 서두. 전에 그의 제자가 ‘운명의 1악장 서두는 무슨 주제인가.’ 라는 질문을 했을때, 곡을 작곡했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