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5

참의부201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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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3. 산업화 위한 독재 아닌 독재 위한 산업화

 

1960년대~1970년대 박정희 개발독재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발전론의 논리로 박정희의 개발독재통치를 정당화한다. 권위주의 정치체제, 즉 독재가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이들 박정희 신봉자들은 민주주의 정부였다면 그 같은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정치체제가 경제성장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논리다.

 

그 예로 4·19민중혁명 이후 장면 정권의 무질서·혼란과 허약한 리더십을 든다. 그런 정권은 인적·물적 동원과 재배치를 통한 국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역사적·구조적 상황에서 한국의 산업화를 위해 박정희의 개발독재통치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역사적 필연론까지 제기한다.

 

한편 이와 관련한 박정희 자신의 입장을 보면 공식적으로는 산업화와 정치체제의 관계에 대해 “선 건설, 후 민주화”라는 구호로 정리했다. 이는 ‘선 경제발전, 후 민주주의’와 동일한 철학이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자행하기 직전 1972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에서는 우선 경제건설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성장을 위해서도 절대적인 기본 요건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언명했다. 이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먼저 경제건설이 기본 요건이라는 입장이다. 정치적 발언이어서 속마음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는 경제개발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장애라는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여기서 박정희보다 박정희 신봉자들이 권위주의 독재정부를 더 선호함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권위주의적 발전론자들은 민주주의라는 것은 항상 낭비이며, 방종이고, 사회경제적 정체를 가져오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토대를 쌓는 것도 반대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몽적인 성군의 지도 아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좋은 사회란 질서 있는 사회, 윤리와 도덕이 지켜지는 사회를 뜻한다. 이들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현재까지도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으며, 그 유효성과 필요성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기보다는 여러 국내외적인 여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성과였다. 농촌 지주계급이 와해되어 도시 중심의 산업화를 추진하기 좋은 사회계층 구조가 형성돼 있었다. 이는 6·25남북전쟁과 1950년대 농지개혁의 결과다.

 

또한 미국의 동북아 자본주의화 정책과 함께 국제 분업구조가 한국에 매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처럼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 성공을 설명하는 이론에는 권위주의적 발전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조주의적 설명, 전략적 선택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①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지속가능한 모델 될 수 없어

 

정치체제가 경제성장과 국가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박정희 신봉자들의 견해와 관련해서 박정희식 경제모델이 과연 전형적인 발전지향적인가에 관해서 검증해봐야 한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 즉 발전을 위한 독재가 아니며 박정희는 장기 독재체제를 굳건히 만들기 위해 산업화 정책에 나섰다고 분석하는 학자들이 많은 편이다. 또 엘리트의 이익을 위한 권위주의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반드시 발전지향적 성격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거기에는 ‘약탈국가적’ 성격도 있다는 것이다. 국가 엘리트의 지배를 위한 체제로 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더구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국가 엘리트란 그의 친위대 군벌과 동향 출신 경제관료들로서 일종의 가신그룹에 해당한다.

 

모든 ‘국가 주도 경제’가 권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핀란드·오스트리아·일본도 민주주의적 제도 아래서 국가주의적인 경제발전을 훌륭하게 이루어냈다. 여기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도 산업화를 위해 권위주의가 반드시 필요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는 정부의 정책 수행이 과연 국가의 공공활동인지, 아니면 독재정권의 행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국가의 공공목표와 일치했다면 권위주의 독재와 노동자인권운동 등에 대한 탄압이 반드시 강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독재 자체가 정권의 목적이었기에 국민들을 냉혹하게 탄압하면서 산업화를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산업화의 심화’를 위해 권위주의 독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산업화를 명분으로 내걸었다. 정치학적으로나 또 역사적 경험을 더듬어 보아도 산업화가 민주화의 선행조건은 아니다. 산업화를 위해서 개발독재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역사적 필연론은 국민의 자율적 선택권을 무시하는 발상이며 논리적 타당성도 없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자유주의적 산업화는 선택의 문제이지 역사적 필연으로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국가주권의 담지자인 국민에게 있다. 어떤 지도자나 엘리트 그룹도 국민의 그 선택권을 빼앗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이 규범을 어긴 것이다.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유리한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독재 중 어느 쪽이 지속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기준이다. 박정희의 산업화 프로젝트는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은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기 어려운 불균형 발전모델이다. 산업화의 과실을 따먹는 소수와 소외당하는 다수가 불가피하게 갈등 대립하게 돼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와 월급쟁이들은 이 대립구조에서 소외당하는 다수에 속한다. 정치사회적 불안정과 극단적인 저항의 문화가 파생되는 배경이다.

 

박정희식 권위주의적 개발독재는 민주주의적 산업화와 달리 자율적 감시와 책임규율이 취약했다. 예를 들면 국가는 금융통제권을 활용하여 재벌을 통제하면서 재벌을 육성했으나, 궁극적으로 국가는 재벌에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 관치금융이야말로 재벌의 부실이 은행의 부실로 이어졌을 때 국가가 화폐 발행, 국채, 조세를 통해 부실의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연결고리의 출발점이다. 재벌의 경영 실패에 대해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장치가 결여되어 있을 때 재벌의 실패에 따른 비용은 채권자·예금자·주주·노동자, 그리고 국민 일반이 짊어지게 되고 성장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제아무리 독재권력을 휘둘러도 체제가 지속적으로 작동될 수는 없다. 즉 박정희식 권위주의 독재체제와 산업화는 지속가능한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