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인마와 통화를 했다 - 9

무념무상201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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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웃대, 피더스님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이태껏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내 머리통이 원망스럽다. 대채 나는 이리도 간단하고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걸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


나는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시선을 눈 뒤로 향했다. 그렇다고 정말 내 머릿속이 보이는 것도 아니였다. 생각을 할때에 나오는 내 버릇. 그 뿐이였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혹시 22일 새벽 두 시반 쯔음에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의심.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단어가 딱 떠올랐다. 나는 지금 의심받고 있는건가? 내가 그 사람을 죽였다고?


“전 지금 의심받고 있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중간하게 돌려말해봤자, 이 형사에겐 똑 부러진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형사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형사짓을 해왔다고 말하는 노련미가 온 몸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질문입니다. 시체의 최초 목격자시니까요.”


내 귀에는 그렇게 말하는게 형식적인 단어로 들렸다. 나는 아주 잠시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커피 잔을 들어 거칠게 목을 축인 뒤,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시간쯤이면 아마 자고있었겠네요. 그 날은 소설이 안 써져서 곧바로 침대에 누웠거든요.”


“아, 그러십니까. 글이란건 분위기와 컨디션에 따라 질이 달라지니까요.”


마치 자신이 작가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꽤나 오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걸 밖으로 표출시키진 않았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컨디션과 분위기는 글의 질을 좌우한다. 그 날,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모두 한 명의 여자 때문에.


일단 그 여자에 대해선 꺼내지 않기로 했다. 지금 상황은 나에게 좋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나는 지금 최초 목격자임과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이다. 싸이코패스의 전화를 받고, 그 여자가 죽는걸 내 귀로 들었다. 라는 증언을 꺼내기엔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다. 오히려 내가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일단은, 일단은 지켜보자.


“알리바이가 없네요, 집에는 저 혼자 살고있어서 증언을 뒷받침해줄 사람도 없고. 전 이제 범인이 되는건가요? 하하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형사에게 말했다. 형사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를 형식적으로라도 나를 위로하는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말없이 커피 잔을 기울일 뿐. 그 사실이 더욱 나를 옭죄어오는 것 같았다.


“이젠 아까 드렸던 질문의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질문이요?”


“그 살인에 대한 구상 말입니다.”


아아, 백견. 나는 잠시 백견을 집필할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구상? 구상이란걸 어떻게 했다고 말해야하는거지? 그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소재를 컴퓨터에 글자로 옮긴 것 뿐이다.


“그저 떠올랐을겁니다. 소설가란 직업이 대게 다 그렇듯이.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과 사건, 배경을 그대로 글로 옮겨서 쓰는 것 뿐이죠. 아마 그럴겁니다. 백견을 쓴 지도 이제 거의 일 년이 되가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그렇습니까.”


박태현 형사는 여전히 펜을 긁적이고 있을 뿐이였다. 내가 내뱉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커피 잔을 기울일 뿐, 그 이상의 행동은 둘 모두 자제했다.


이윽고, 강현우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라고 말하는 형식적인 인사도 역시 빼놓지 않았다. 나 또한 ‘질문은 끝났나요?’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현우 형사는 안 주머니에서 트럼프카드 크기 정도의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제 번홉니다. 혹시 생각나는게 있으시면 전화주시길 바랍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옅은 미소를 띄며 말하자, 그도 대답해신 웃음으로 대답했다. 박태현 형사 역시 강현우 형사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서며 내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행동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해주고, 나는 아직 강현우 형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범인에 관한건, 아직 밝혀지지 않은겁니까?”


그러자 그는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아직까진 조금 힘들다 정도로 대답해두겠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두 형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랫층 계단까지 내려간 강현우 형사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던 나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조만간 또 뵙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 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였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내가 살고있던 빌라를 떠났다. 문을 닫고, 나는 곧바로 책상 앞에 달려가 의자에 앉았다.


어느 순간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확 사라졌다. 무엇 때문일까. 나는 괜시리 짜증이 밀려왔다. 중요하고, 간단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나에 대한 분노일까, 아니면 지금껏 나를 속여왔던 그 여자에 대한 분노일까.


아무래도 두 가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사이다 병을 거칠게 들어올려 입 안으로 부어버렸다. 컵 따위는 사용하지 않았다. 컵에 음료를 따르는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곧바로 후회해버렸다. 손이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형사와의 대화로 인해 손에 땀이 찼던 걸까, 나는 사이다 병을 놓치고 말았다. 마치 데자뷰처럼, 나는 사이다로 샤워를 한 듯 상의 전체를 적셔버렸고, 손에서 빠져나간 사이다 병은 이제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아오! 신발!”


나는 최대한 크게 소리쳤다. 이 정도 크기면 건물 밖에 있을 형사가 듣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들으라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뭐든 알고있다는 식의 말투도, 정중한 척 하면서도 무례한 그 태도가.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그래. 오만, 오만이다. 그 형사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단어가 떠올랐다. 오만하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숨기고 있지만 내면에 가득 차,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그 오만덩이리가 나에게는 보이는 듯 했다.


일곱개의 욕망 중, 오만. 마치 그 오만이 사람의 형태로 이 세상에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이였다. 젠장할! 나는 그 형사를 생각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알 수 없는 분노, 짜증과 짜증이 섞여 만들어낸 분노.


대채 이 짜증의 근원은 어디일까. 나로써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그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여자. 싸이코패스, 미친년, 그리고 동네 이웃. 신발.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패턴을 거칠게 풀곤, 곧바로 통화기록으로 들어갔다. 「미친년」.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꽤나 신경질적으로.


혹시, 이 여자의 컬러링도 ‘운명’ 일까?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정도 우연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듯이, 내 귀에 들려오는건 새와 물소리였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안도되는 느낌이다. 이 여자와 내가 그 정도는 운몀은 아니라는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아저씨 혹시 또 술마셨어? 아니, 약했나? 아저씨가 나한테 먼저 전화 건 거 처음아니야?”


통화가 연결되자 말자, 그 여자는 시끄럽게 떠들었다. 처음엔 그 목소리 조차도 소름돋았다.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섣불리 대답할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리마저 짜증으로 변하는 듯 했다.


“닥쳐, 본론만 말한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할까? 아니, 말해야한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더 이상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같은 동네에 살고, 어젯밤에는 나와 마주쳤다. 심지어는 내가 쓴 소설에서 등장하는 살해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가능성이 높던말던 확실하다.


“너 첫날에 나한테 뭐라 그랬어. 죽이고 싶은 사람 있냐 그랬지.”


“어, 그랬는데.”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했어. 있지만, 어떻게 죽일건지 생각해본 적 없다고. 그래, 그렇게 말했어.”


“어, 그랬어. 아저씨? 진짜 술 마셨어? 목소리가 떨리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갈 뿐이였다.


“그랬더니 니가 뭐라 그랬어, 그럼 내가 대신 골라준다고, 대신 생각해준다고. 그랬지? 어? 신발, 그랬잖아.”


“응, 그랬어. 왜 아저씨, 그때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라니까 이제 곧….”


“입 닥쳐!”


내가 소리쳤다. 아주 큰 소리로. 아랫집, 혹은 윗집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짜증과 분노가 나를 가득 뒤덮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판단 능력조차 흥분 속으로 넘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였다. 지금껏 이토록 짜증을 낸 적이 있던가?


“너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냐?”


의문형으로 끝마쳤지만, 상대에게서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방금전의 내 목소리를 듣고 무서워진건가? 아니, 그럴리가. 상대는 미치광쟁이 살인마다. 욕설섞인 고함 한번 들었다고 쫄 정도로 약한 상대가 아니였다. 그렇다면? 진지한 것 같아서 한번 들어보려는건가? 뭐, 어찌됐든 상관없지.


“날카로운 칼로, 얼굴 다섯 번 긁고, 배 다섯 번 찌르고. 마지막에, 응? 마지막에! 목에, 목에 칼 꽃는다고. 그랬지. 칼 꽃고 그대로 놔둔다고.”


목소리는 심히 떨렸다. 중간중간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상대가 재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이였지만, 다행히도 잘 알아들은 듯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짧은 한 마디. 짜증은 더욱 솟구쳤다.


“그 방법. 그 방법 어디서 주워들은거야. 네가 생각한거 아니지. 그렇지. 영화에서 본거야? 드라마? 아니면….”


말의 간격을 넓혔다. 이 여자를 상대로 말 꼬투리를 늘리는 건 처음이였다. 항상 저 쪽에서 나에게 해왔던 일이니까. 대화의 주도권을 내가 잡은걸까. 상대는 말없이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책에서?”


생각하는걸까. 상대는 곧바로 대답해오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흘렀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수화기 너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먼저 침묵을 깬 건, 두 사람의 말 소리가 아니였다.


달그닥 소리? 물건, 또는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이 여자도 나랑 마찬가지로 손에 땀이 찬 모양이다. 전화기를 잡고있다가 반대로 잡았다. 확실하다. 확실히, 지금 이 여자 역시 지금 내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저씨, 뭐 알아냈죠.”


“아니, 먼저 대답해. 그 방법, 어디서 봤어.”


“아저씨가 말한대로예요. 소설 책에서 봤어요. 미스터리 소설.”


“그 책의 이름은, 이름은 뭐야.”


또 다시 이어지는 짧은 침묵. 3초 정도의 시간이 흐린 뒤에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도 입을 열었다.


“백견.”


“백견.”


수화기에서 울려퍼지는 ‘백견’ 의 이름. 그녀가 말하는 동시에 나 역시 대답했다. 당황했을까? 당황했을게 틀림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를 향한 내 공격이다. 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아저씨도, 그 책 봤어요?”


“그래, 봤어. 여러번.”


당연히 봤지, 그것도 여러번이 아니라 수십 번. 내가 썼으니까. 내가 생각하고 내가 글로 옮겼으니까. 수정을 몇 번을 거쳤으니까. 당연했다. 사실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내 몸 가득 뒤덮혀있던 흥분이 조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저씨 이제 내 질문에 답해봐요. 뭐 알아냈죠. 나에 대해서? 아니면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아무튼 아저씨 뭐 알았어. 뭐 알고있지?”


“아직 질문 안끝났으니까, 넌 닥치고 있어봐. 대답만해. 질문하지 말고.”


나는 욕설을 섞어가며, 상대의 말을 무시했다.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됀다. 이 여자는 똑똑하다. 어느 순간, 이 여자가 다시 주도권을 되찾을지 모른다.


“백견에서 등장한 살해방법을 실제로 쓴 이유가 뭐야?”


이윽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별 일 없는 듯이.


“그냥요. 이유? 이유가 어딨어요. 그냥 그 책 읽고, 감명 받았거든요. 범인한테 말이예요. 그래서 그냥 떠오른거예요. 아 이렇게 죽여야지, 하고.”


“그럼. 그럼 나한테 전화건 이유는 대채 뭐야? 랜덤으로 걸었는데 내가 받았다, 그딴 개소리 지껄이지는 마라. 넌 랜덤으로 번호를 누른게 아니잖아? 어? 신발, 나 알고 전화건거잖아.”


나는 거칠게 물었다. 어느 정도 사라졌던 흥분이 다시금 밀려오기 시작하는 기분이다. 중요한 질문. 러시안 룰렛 도중, 내 차례에 걸려버렸던 총알이 지금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총구를 치울 순 없었다. 끝을 보자. 그 생각이였다. 그리고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랜덤이였고, 진짜 우연이었다. 이렇게 대답하면 어떡하실거예요?”


차분한 목소리, 아니, 조금은 동요하고 있는건가? 서로의 목소리를 제외하곤 주변은 아주 조용했다. 마치 지금 상황의 분위기를 읽고있는 듯 고요하고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싫었다.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 그래서일까, 나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질문에 욕설로써 대답했다.


“성기까는 소리하지마, 넌 나 알고있어.”


어쩌면 나는 조금 더 신중했어야하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똑똑한 건 알고있었다. 이 여자가 싸이코패스란 것도 알고있었다. 아니, 여기까지는 괜찮을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이 여자가 아무리 똑똑해도 거기까지 답을 유추해내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의 나는 평소보다 더 냉철해지지 못했다. 분노와 흥분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없었기에, 아니. 어쩌면 나는 오만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 형사처럼.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있었기에, 당장이라도 그때의 진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서 오만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오만했다. 그래서 나는 이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그게 아니면 이런 우연이 있을리가 없지 신발.”


실수, 말을 내뱉은 그 순간.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연이라, 만약 정말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여자가 랜덤으로 번호를 눌렀고, 그걸 받은 게 하필 나였고, 하필이면 백견의 살인방법으로 살인을 했다면. 정말 그게 우연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이 여자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이루어져있는 지 알 길이 없었다. 우연이라는 단어가 지금 상황에서 등장할 단어라고는 전혀 생각치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쉽사리 그 단어를 입에 담고 말았다.


알아차릴까? 설마, 이 정도의 실수를, 이 정도의 단어 하나로. 그래, 아무리 이 여자가 똑똑하다 한들, 거기까진….


“우연?”


내 생각을 부정하듯이, 이 여자가 물어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딘가 모르게 조소를 띄고있음이 느껴졌다.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여자는 웃고있다.


“아저씨, 우연이라는 건 무슨 말이예요? 뭐가 우연이라는거지? 내가 랜덤으로 번호를 눌렀다는 걸 그리 강하게 부정한다? 그럼 아저씨 입장에선 그 사실이 우연이랑 연관 되는건가? 뭐지? 뭘까요?”


“내가 말했지, 닥치라고, 넌 대답만 하라고.”


뒤늦은 수습. 내가 말했지만, 상대는 가볍게 무시한 뒤,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백견…. 백견에 등장하는 살인방법. 그리고 그 살인방법을 선택한 이유. 그걸 왜 물어볼까? 아저씨도 백견을 읽어서? 아니, 그 정도였다면 아저씨가 말하는 ‘이 정도 우연’ 보다 임팩트가 약한데. 더 쎈 우연이 뭐가 있을까. 백견과, 백견에 등장하는 살인방법, 내가 랜덤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걸 안 믿고, 아저씨가 말하는 엄청난 우연….”


마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듯이 독백한 그녀는, 이윽고 말을 멈췄다. 나 또한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걸까.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고 있을까.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마에선 어느새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저씨, 나 중요한 사실을 알아버린거 같은데요.”


먼저 입을 연 건 그 쪽이였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상대의 말을 들을 뿐이였다. 뭐지?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디까지 알아 맞춘거지?


“아저씨.”


그녀가 말의 간격을 넓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그녀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가 내뱉을 다음 말을 기다리며 나는 나를 자책했다.


대채 우연이라는 말을 왜 지껄여서, 그 전까지만 말하고 있었으면 괜찮을지도 모르는데. 신발, 이 멍청한 새끼. 나는 오만했다. 일곱가지의 욕망 중, 오만.


“아저씨, 혹시 소설가예요? 그것도 백견을 쓴. 그렇지? 맞죠? 그럼 모든 게 딱 맞는데?”


그녀가 의문형을 띈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지금, 오만을 저지른 죄를 받는 걸지도 모른다. 젠장할, 아무래도 그 형사한테 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