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4.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성장의 내외조건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와 경제성장 정책에서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은 1960년대의 세계경제 구조상 신국제분업질서(New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 덕택도 컸다. 1960년대에 이르면 세계 자본주의 진영의 선발국들은 임금 수준이 높아서 노동비용이 크게 오르고 임금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과 같이 노동비용이 낮은 개발도상국의 생산조건과 상품가격 경쟁력이 유리했다.
후진국은 선진국에 자원을 싼 값에 공급하고 선진국은 그 원자재로 상품을 제조해서 후진국에 비싼 가격으로 파는 고전적은 국제자본주의 시장질서가 바뀌고 있었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특히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국제 자본 투자가들이 노동력이 싼 후진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가는 추세였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부품과 중간재를 후진국에 공급하고 후진국은 그것을 가공 조립해서 다시 선진국 시장에 수출하는 신국제분업질서로 재편된 것이다. 1960년대~1970년대에 한국의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가발이나 의류의 보세가공무역이 바로 그런 신국제분업질서 덕택으로 호황을 누린 대표적 예다.
그러나 이런 신국제분업질서가 생겼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박정희 군사독재 신봉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수출산업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박정희와 쿠데타 군부 세력이 처음부터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 군부 세력은 초기에 권력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해 민중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시도했다. 쿠데타 이후 처음 나온 경제조치인 농어촌 고리채 정리나 부정축재 처리가 그런 정책이었다.
정통성이 취약한 쿠데타 군부 세력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내놓는 정책이란 것은 대체로 다 똑같다. 1980년 내란 과정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도 이른바 ‘사회정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는 박정희 정권이 농어촌 고리채를 동결시킨 것처럼 서민들을 울리는 악덕 사채업자들을 청소하여 삼청교육대에 집어 넣었다. 그 삼청교육대에는 조직폭력배와 사기꾼이라는 죄목으로 잡혀와 고된 지옥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초법적인 조치를 함으로써 내란 정권은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 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는 농촌소득의 향상을 통한 자립경제의 달성이었다. 당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한편 국민의식 속에 내재돼 있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영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수출은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아니라 국제수지의 개선이라는 2차적 역할로 한정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필요한 투자재원의 대부분은 국내 저축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위해서 화폐개혁까지 단행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일련의 정책 오류로 인해 투자재원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심한 인플레를 초래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경제개발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8월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이때 비로소 수출지향 산업화로 방향을 잡는다. 이는 산업화 전략 자체의 변경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다른 모든 부문이 실패했으나, 영세하나마 자영업자 중심의 수출은 성공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여기에 고무됐으며, 미국도 내수산업 진흥을 통한 자립경제 구호가 자칫 한국을 민족주의로 가게 만들 수도 있어 수출산업화 쪽을 권유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부터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전략을 변경하면서 신국제분업질서라는 국제적 호조건에 부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민들의 교육 수준과 기강, 꿈을 이뤄보겠다는 의지가 갖추어지지 못했다면 외부환경에서 주어진 기회가 경제개발 성공으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생산계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서구식 보편교육을 받은 세대다. 이 세대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교육을 이식받았으며, 열심히 노력해서 서구 선진국들처럼 잘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더구나 일제 식민통치기의 고통을 생각하면 자유로운 독립자주권을 되찾은 나라에서는 어떤 어려운 일도 감내할 의지가 넘쳤다.
○ 후대 위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는 한국적 가치관이 진정한 동력
역사적인 경험이나 문화에서 우리와 비슷한 나라가 동아시아에서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다. 이들이 우리와 동일한 국제 자본주의 환경을 배경으로 거의 동질적인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1970년대~1980년대 유행어가 됐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한국을 포함해서 바로 이 나라들이다.
거기다 특히 한국인들은 가족과 고향, 그리고 국가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영예로 삼았다. 자기 몸을 던져 이웃과 나라를 구하는 ‘살신성인’의 행동규범을 소중히 여겼다. 자식과 후손의 밝은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다. 이는 서구 사람들이 주목하는 아시아적 가치관이나 유교적 전통보다도 한층 더 정제된 한국적 봉사정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의 지도력이 아니라 여러 자질을 갖춘 국민들이 있었기에 성공했다. 국제경제의 환경이 후진국에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해도 질 좋은 노동력과 생산성을 발휘하는 인적 자원을 보유한 나라가 아니면 천우신조의 기회를 발전의 계기로 포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근대화의 조건은 국민들이 갖추고 있었으며 박정희 정권은 거기에 부응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기에 외부에서 주어진 또 하나의 호조건은 미국의 세계전략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그 자체가 독립변수이기보다는 여러 측면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라 종속되어 있는 요소가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40년대 후반 시작된 미국의 지역통합전략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일종의 자본주의 전선의 한 축으로서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를 인정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을 축으로 해서 동아시아 반공기지를 구축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운 미국에게 이승만은 거추장스럽고 전망 없는 부패한 독재자였을 뿐이었다. 여기서 미국은 4·19민중혁명으로 ‘내키지 않는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으며, 그 전 이승만이 구상했던 한국을 국제경제권에 통합시키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5·16쿠데타 세력은 처음엔 자립경제를 목표로 수입대체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것은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개발 방식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이렇게 독자적인 노선으로 가면 결국 배타적 민족주의의 길을 걷는 제3세계 국가군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것을 적극 만류하고 개방체제와 수출입국 쪽으로 전환하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이에 부응하자 미국은 ‘자비로운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한국의 산업화를 지원한다. 미국은 직접적으로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한국의 수출상품이 미국 시장에 많이 들어가도록 관세 등 진입장벽을 낮추어주었다. 미국은 또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대출에서 한국에 상당한 혜택을 주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이렇게 호의를 베푼 것은 물론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냉전체제 아래서 한국이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의 최전방 기지 노릇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식 개발독재의 길을 가는 것을 용인했다. 여기서 야기되는 인권탄압 등 반민주행위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로 인해 한국의 민주화운동 진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과 냉전 상황에서의 세계전략을 우선순위에 두고 한국의 민주화는 차순위로 밀어두었다. 미국이 한국 군부의 인권탄압에 적극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거의 지미 카터 정권 때뿐이었다. 박정희가 긴급조치권으로 통치하던 유신독재체제 말기인 1979년 초 카터 정권은 박정희에게 인권상황의 개선과 민주화를 강력히 종용한다. 카터 정권은 한국주둔 미국군의 철수나 감축을 내걸고 경고했다. 한국이 아무리 동아시아 지역 냉전체제의 보루라고 하더라도 야당은 물론이려니와 언론인, 대학생, 노동자, 진보주의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체제의 라이벌로 소련이 엄존했지만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동아시아 전략을 수정했다. 박정희는 이미 1970년대 초부터 미국과 중국의 화해와 관계개선에 대해 “강대국 간의 화해가 한반도 국지안보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유신헌정을 강행했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호의적 지원은 유신독재체제 말기 일단 종식되는 듯 했다. 그러나 한국의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성장은 상당한 궤도에 올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카터 정권의 한국주둔 미국군 철수 경고에 대해 박정희는 “미국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 이를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유신독재가 계속되는 한 필경 미국이 한국을 버릴 것이며 그럴 경우 국가안보 위기가 초래될 것을 우려했다. 김재규는 미국이 손을 떼면 한국은 태평양 가운데 일엽편주나 다름없는 신세라고 보았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은 박정희 개인의 리더십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의 객관적인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5·16쿠데타와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외적으로는 1949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의 결실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군사안보의 우산을 제공하며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한국 상품의 수출시장이 돼준 것이다. 박정희가 전략적으로 잘 판단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세계정치 구조상 호조건이 주어졌던 것이다.
〈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6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4.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성장의 내외조건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와 경제성장 정책에서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은 1960년대의 세계경제 구조상 신국제분업질서(New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 덕택도 컸다. 1960년대에 이르면 세계 자본주의 진영의 선발국들은 임금 수준이 높아서 노동비용이 크게 오르고 임금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과 같이 노동비용이 낮은 개발도상국의 생산조건과 상품가격 경쟁력이 유리했다.
후진국은 선진국에 자원을 싼 값에 공급하고 선진국은 그 원자재로 상품을 제조해서 후진국에 비싼 가격으로 파는 고전적은 국제자본주의 시장질서가 바뀌고 있었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특히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국제 자본 투자가들이 노동력이 싼 후진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가는 추세였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부품과 중간재를 후진국에 공급하고 후진국은 그것을 가공 조립해서 다시 선진국 시장에 수출하는 신국제분업질서로 재편된 것이다. 1960년대~1970년대에 한국의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가발이나 의류의 보세가공무역이 바로 그런 신국제분업질서 덕택으로 호황을 누린 대표적 예다.
그러나 이런 신국제분업질서가 생겼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박정희 군사독재 신봉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수출산업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박정희와 쿠데타 군부 세력이 처음부터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 군부 세력은 초기에 권력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해 민중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시도했다. 쿠데타 이후 처음 나온 경제조치인 농어촌 고리채 정리나 부정축재 처리가 그런 정책이었다.
정통성이 취약한 쿠데타 군부 세력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내놓는 정책이란 것은 대체로 다 똑같다. 1980년 내란 과정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도 이른바 ‘사회정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는 박정희 정권이 농어촌 고리채를 동결시킨 것처럼 서민들을 울리는 악덕 사채업자들을 청소하여 삼청교육대에 집어 넣었다. 그 삼청교육대에는 조직폭력배와 사기꾼이라는 죄목으로 잡혀와 고된 지옥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초법적인 조치를 함으로써 내란 정권은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 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는 농촌소득의 향상을 통한 자립경제의 달성이었다. 당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한편 국민의식 속에 내재돼 있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영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수출은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아니라 국제수지의 개선이라는 2차적 역할로 한정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필요한 투자재원의 대부분은 국내 저축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위해서 화폐개혁까지 단행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일련의 정책 오류로 인해 투자재원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심한 인플레를 초래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경제개발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8월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이때 비로소 수출지향 산업화로 방향을 잡는다. 이는 산업화 전략 자체의 변경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다른 모든 부문이 실패했으나, 영세하나마 자영업자 중심의 수출은 성공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여기에 고무됐으며, 미국도 내수산업 진흥을 통한 자립경제 구호가 자칫 한국을 민족주의로 가게 만들 수도 있어 수출산업화 쪽을 권유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부터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전략을 변경하면서 신국제분업질서라는 국제적 호조건에 부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민들의 교육 수준과 기강, 꿈을 이뤄보겠다는 의지가 갖추어지지 못했다면 외부환경에서 주어진 기회가 경제개발 성공으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생산계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서구식 보편교육을 받은 세대다. 이 세대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교육을 이식받았으며, 열심히 노력해서 서구 선진국들처럼 잘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더구나 일제 식민통치기의 고통을 생각하면 자유로운 독립자주권을 되찾은 나라에서는 어떤 어려운 일도 감내할 의지가 넘쳤다.
○ 후대 위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는 한국적 가치관이 진정한 동력
역사적인 경험이나 문화에서 우리와 비슷한 나라가 동아시아에서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다. 이들이 우리와 동일한 국제 자본주의 환경을 배경으로 거의 동질적인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1970년대~1980년대 유행어가 됐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한국을 포함해서 바로 이 나라들이다.
거기다 특히 한국인들은 가족과 고향, 그리고 국가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영예로 삼았다. 자기 몸을 던져 이웃과 나라를 구하는 ‘살신성인’의 행동규범을 소중히 여겼다. 자식과 후손의 밝은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다. 이는 서구 사람들이 주목하는 아시아적 가치관이나 유교적 전통보다도 한층 더 정제된 한국적 봉사정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의 지도력이 아니라 여러 자질을 갖춘 국민들이 있었기에 성공했다. 국제경제의 환경이 후진국에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해도 질 좋은 노동력과 생산성을 발휘하는 인적 자원을 보유한 나라가 아니면 천우신조의 기회를 발전의 계기로 포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근대화의 조건은 국민들이 갖추고 있었으며 박정희 정권은 거기에 부응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기에 외부에서 주어진 또 하나의 호조건은 미국의 세계전략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그 자체가 독립변수이기보다는 여러 측면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라 종속되어 있는 요소가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40년대 후반 시작된 미국의 지역통합전략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일종의 자본주의 전선의 한 축으로서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를 인정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을 축으로 해서 동아시아 반공기지를 구축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운 미국에게 이승만은 거추장스럽고 전망 없는 부패한 독재자였을 뿐이었다. 여기서 미국은 4·19민중혁명으로 ‘내키지 않는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으며, 그 전 이승만이 구상했던 한국을 국제경제권에 통합시키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5·16쿠데타 세력은 처음엔 자립경제를 목표로 수입대체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것은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개발 방식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이렇게 독자적인 노선으로 가면 결국 배타적 민족주의의 길을 걷는 제3세계 국가군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것을 적극 만류하고 개방체제와 수출입국 쪽으로 전환하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이에 부응하자 미국은 ‘자비로운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한국의 산업화를 지원한다. 미국은 직접적으로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한국의 수출상품이 미국 시장에 많이 들어가도록 관세 등 진입장벽을 낮추어주었다. 미국은 또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대출에서 한국에 상당한 혜택을 주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이렇게 호의를 베푼 것은 물론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냉전체제 아래서 한국이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의 최전방 기지 노릇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식 개발독재의 길을 가는 것을 용인했다. 여기서 야기되는 인권탄압 등 반민주행위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로 인해 한국의 민주화운동 진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과 냉전 상황에서의 세계전략을 우선순위에 두고 한국의 민주화는 차순위로 밀어두었다. 미국이 한국 군부의 인권탄압에 적극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거의 지미 카터 정권 때뿐이었다. 박정희가 긴급조치권으로 통치하던 유신독재체제 말기인 1979년 초 카터 정권은 박정희에게 인권상황의 개선과 민주화를 강력히 종용한다. 카터 정권은 한국주둔 미국군의 철수나 감축을 내걸고 경고했다. 한국이 아무리 동아시아 지역 냉전체제의 보루라고 하더라도 야당은 물론이려니와 언론인, 대학생, 노동자, 진보주의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체제의 라이벌로 소련이 엄존했지만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동아시아 전략을 수정했다. 박정희는 이미 1970년대 초부터 미국과 중국의 화해와 관계개선에 대해 “강대국 간의 화해가 한반도 국지안보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유신헌정을 강행했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호의적 지원은 유신독재체제 말기 일단 종식되는 듯 했다. 그러나 한국의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성장은 상당한 궤도에 올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카터 정권의 한국주둔 미국군 철수 경고에 대해 박정희는 “미국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 이를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유신독재가 계속되는 한 필경 미국이 한국을 버릴 것이며 그럴 경우 국가안보 위기가 초래될 것을 우려했다. 김재규는 미국이 손을 떼면 한국은 태평양 가운데 일엽편주나 다름없는 신세라고 보았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은 박정희 개인의 리더십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의 객관적인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5·16쿠데타와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외적으로는 1949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의 결실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군사안보의 우산을 제공하며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한국 상품의 수출시장이 돼준 것이다. 박정희가 전략적으로 잘 판단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세계정치 구조상 호조건이 주어졌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