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6. 대선으로 가는 길, 감동과 반전의 드라마 ⑸

참의부201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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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면한 사대주의 역사 그리고 ‘반미주의’ 논란

 

노무현이 오래 전부터 추구했던 집권 구상은 단순히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국 이래 권력을 독점해온 타락하고 부패한 사대주의 세력을 교체하려는 ‘반정(反正)’이고 ‘혁명’이었다. 이를 위해 단기필마로 기득세력과 맞섰다. 근세 조선시대 세도정치세력의 ‘숭명(崇明)’·‘친청사대(親淸事大)’를 시작으로 구한말기 문벌귀족들의 ‘친일(親日)’, 해방전후기 독재권력과 반공(反共) 이데올로기 집단의 ‘종미(從美)’로 종주국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사대주의를 생존의 가치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 위에 군림해왔다고 비판했다.

 

노무현은 왕조사와 민중사를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다. 왕조사는 사대 굴욕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지만, 민중사는 외세의 침략과 온갖 수탈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면서 한민족의 주체가 되어왔다고 믿었다. 굴욕적인 왕조사와는 달리 자주적인 민중사를 믿은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서민 등 기층민중의 편에서 정치를 해왔다. 이를 두고 족벌신문과 극우세력은 ‘포퓰리즘’·‘민중주의’·‘친북좌파’ 등 온갖 음해와 색칠하기를 일삼았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미국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이 쟁점이 되었다. 해방 반세기가 지난 나라에서 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가 미국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는 나라는 지구상에 달리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아무리 ‘뼛속까지’ 친일파였던 자들도 상대를 이렇게까지 몰아치지는 않았다.

 

2002년 6월, 경기도 동두천에서 여중생 효순·미선 양이 미국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도 문제였지만, 미국군 당국이 사건을 은폐하고 범인들을 무죄 평결하는 등 한국을 멸시한 처사는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국적으로 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일어나 ‘반미감정’이 증폭되었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은 노무현이 명색 대통령 선거 후보로서 미국을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은 필시 ‘반미주의자’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이에 노무현은 “현안이 없는데 결코 사진 찍기 위해서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고 받아쳤다. 그러자 저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로 규정하고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이런 비난을 받으면 무조건 변명부터 하면서 몸을 낮추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인이라면 다들 그렇게 했다. ‘반미주의자’라는 낙인은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반미면 어떻습니까?” 노무현의 일갈에 수구정치세력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가지면 왜 안 되는지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들은 겉으로는 짐짓 화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을 비롯한 수구세력에게 노무현은 참으로 상대하기 거북한 존재였다. 좌경용공, 반미주의자 등으로 몰아치면 대부분 면명을 하거나 움츠려드는 데 비해 노무현은 직설어법으로 이를 돌파하고 역공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의 수많은 연설문이나 저서 어디에서도 그가 반미주의자라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친미주의자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미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하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외교관을 가졌다. 이런 그의 가치관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선거캠프 안에서는 미국 방문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미국에 가라고 했다. 명을 내리기만 하면 미국 조야의 지도자들과 월가의 큰 손들을 만나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미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비자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슨 결격 사유나 되는 것처럼 걱정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미국에 가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누구도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한국 대선에 개입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으니, 공해상에서 북한 화물선을 붙잡아 분쟁지역 불법무기 수출 선박으로 몰아 안보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른바 ‘북풍공작’이다. 나는 미국 정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고, 그렇다고 해서 꼭 내가 손해를 본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86쪽~187쪽.

 

노무현이 여러 차례 언급한 대로 잘못된 “우리 민족 600년 역사”의 첫 머리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열었다. 즉위한 다음날(1392년 7월 17일) 명나라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내 자신을 조선의 군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자신들을 ‘대국’으로 섬기면서 요동공격을 철회하고 ‘이소사대(以小事大)’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를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즉각 ‘조선왕’으로 인정한다는 칙지를 내렸다.

 

감읍한 이성계는 다음날 명나라의 황실에 정도전을 사은사(謝恩使)로 보내 사은의 예로 말 60필을 바치고 “황제의 훈계가 친절하고 황제의 은혜가 넓고 깊어 신이 온 나라 신민들과 더불어 감격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은혜를 마음 속에 새겨서 잊지 않을 것이며, 쇄골분신이 되어도 보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심을 다해 억만 년이 되어도 항상 조공하고 축복하는 정성을 바치겠습니다”라는 낯 뜨거운 표문을 지어 올려 사대굴욕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해방 뒤 분단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이 미국 측에 보인 행태도 이성계에 못지않았다. 그는 미국의 동아시아 경영의 충직한 하수인 노릇을 자처했다.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지만, 중국 경내의 애국지사들이 풍찬노숙을 하면서 목숨 바쳐 항일투쟁을 벌이는 동안에 미국에 안주한 채 호의호식하며 한가한 ‘외교론’이나 읊조리고 심지어는 독립운동자금 유용, 재미한인 사회의 분열을 일삼다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라디오 방송 이벤트로 ‘화려하게’ 등장하여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12년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민혁명으로 태어난 민주화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고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는 처음부터 미국의 ‘구애’를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당초 미국은 5·16쿠데타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반란세력의 친일·종미·반공의 충성심을 지켜보면서 지지로 돌아섰다. 감격한 박정희는 미국으로 달려가 비굴한 모습으로 ‘간택’을 받았다.

 

˝케네디는 흔들의자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누운 듯이 앉아서 가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정희의 인물을 관찰하듯 지그시 바라보아요. 히죽히죽 웃기도 하면서 여유있는 강자의 태도였어. 나는 아무리 작은 나라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지도 권력자인데 저렇게 깔보는 태도가 옳은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어. 그만큼 오만하더군. 자금성의 옥좌에 앉아서 조선에서 온 왕자나 그 대리자를 내려다보는 중국 역대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어. 한편 박정희는 마치 군주 앞에 불려나온 신하처럼 긴장했어. (……) 박정희는 금색 도금 테두리 짙은 색안경을 끼고 빳빳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 다리를 반듯이 모으기도 하고 꼬기도 하고 그랬다. 마치 군주 앞에 홀로 불려나온 신하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 리영희,《대화》, 139쪽, 한길사, 2005년.

 

1980년 12·12쿠데타와 5·18광주시민학살을 자행하면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은 박정희의 길을 성기아 미국의 승인을 받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전두환은 미국이 방미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김대중 사형 집행 중지’를 약속하고 1981년 2월 2일 미국으로 건너가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다. 전두환은 레이건 행정부 출범 이후 워싱턴을 방문한 첫 외국 국가원수가 되는 ‘명예’를 얻었다. 미국의 ‘승인’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민정당 대통령 선거 후보가 된 노태우는 대선을 석 달 앞둔 1987년 9월 14일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회담했다. 미국이 대선 후보에 불과한 노태우를 불러 회담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로써 노태우는 위상을 국내외에 과시하고, 미국이 지지하는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3당 야합을 통해 민자당의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로 떠오른 김영삼은 1991년 9월 23일 남북 유엔 동시가입 경축사절단의 일원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수행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 김영삼이 노태우와 함께 나와 미국 대통령 부시와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한국의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라는 메시지를 미국 조야에 주게 되고, 국내에는 미국이 인정하는 후보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두 차례 미국에 정치망명을 했던 김대중은 1997년 4월 야당의 대선 후보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으나 부시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미국 상공회의소와 국방대학원에서 초청 연설을 하게 되었다.

2002년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된 이회창은 1월에 워싱턴을 찾아가 체니 부통령과 파월 국방장관,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등 미국 고위 인사들과 잇따라 회담하고 돌아왔다. 이회창은 미국에서 김대중 행정부의 햇볕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들과 크게 달랐다.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 수괴들은 물론이고 대선 후보들이 줄줄이 미국으로 달려가 간택을 원하거나 충성을 다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2002년 4월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자마자 노무현은 “나는 미국에 한 번도 안 갔는데 바빠서 안 갔다”며 “유감스럽게도 정통성 없는 지도자들이 반드시 미국의 정치적 승인을 받아야 하는 관계가 있어서, 눈도장 찍고 절하고 돌아왔다. 지식인들도 미국이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면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그에게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미국 방문은 ‘사진 찍으러 가는 것’에 불과했다. 야당과 보수언론의 거센 비판에도 노무현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9월 11일 영남대학 특강에서 “미국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인가? 또 반미주의자면 어떤가?”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다시 한 번 파란을 일으켰다.

 

˝대선 후보들의 미국 추종 경향은 이명박 후보의 ‘해프닝’으로도 나타났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되자 이명박 진영은 이 후보가 10월 중순 미국을 방문, 부시와 면담한다고 발표했다. 한나라당은 “이번 면담은 미국이 이명박 후보의 위상을 인정한 것이고 차기 정부까지 내다본 결정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대국민 선전에 열을 올렸다. 족벌신문들은 이명박의 부시 면담이 “엉망이 된 한ㆍ미 동맹 관계와 신뢰를 회복하는 기회가 될 것을 기대한다”는 등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며칠 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명박과 부시(아들 부시)의 면담을 공식 부인하고 백악관도 면담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 오제현, ‘대선 후보들의 미국 나들이, 사대인가 외교인가’,「내일을 여는 역사」, 60쪽, 2007년 겨울호, 발췌.

 

미국 정부도 분별없이 찾아오는 한국 대선후보들의 행보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섣불리 대선에 개입했다가 역풍을 맞게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미국을 찾아가지 않았고 당선된 뒤에 제3국에서 정상적인 한·미 정상회담을 했다.

 

˝기나긴 논란 끝에 미국 방문 문제를 정리했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런데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갈 일도 없고 바쁘기도 해서 결국 미국을 가지 않은 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미국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일수록 더 그랬다. 어떤 불이익이 있을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국민들이 대통령후보가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이런 것에 휘둘려 일도 없이 사진 찍으려고 미국에 가는 것은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방문을 대통령 선거 후로 미루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87쪽.

 

“미국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인가? 또 반미주의자이면 어떤가?” 하는 노무현의 도발적인 질문은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에 의해 융단폭격을 당하는 구실이 되었다. ‘미친주의자(美親主義者)’들은 발언의 앞뒤를 잘라서 “반미(反美)면 어떤가?”라는 단순한 질문 내용으로 각색하고 좌경으로 윤색하여 집중포화를 날렸다.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광신도’들은 다시 노무현을 ‘종북주의자’로 몰았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는지, 대선에 노무현의 승리가 확정된 다음 날부터 매일 미국 CIA(중앙정보국) 요원 수십 명씩이 외교관, 관광, 비지니스 등 갖가지 명목의 비자로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