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5. 경제성장의 사회적 바탕과 비용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을 두고 당시의 사회적 조건만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박정희의 지도력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 일어난 사회환경, 국내 여건은 갑자기 탄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 축적돼왔기 때문에 경제성장 이전 시기에 대해서도 분석해보아야 한다. 개발 연대 이전에는 한국 사회가 어떤 인적·물적 자원과 역량을 축적해왔는가, 그것이 경제개발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를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개발 연대 이후에 어떤 부산물과 문제점이 드러났는가, 그리고 그것을 처리·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개발독재에 의한 산업화란 경제성장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정책이 수행된 것이어서 다른 부문에 많은 부담과 희생을 야기했다. 그것은 국가 영역별 불균형과 국민 불평등이라는 큰 문제를 남겨놓았다. 그런 문제들을 치유하고 정상화하지 않으면 경제성장의 목표가치 자체가 흔들린다. ‘무엇을 위한 경제성장이며 산업화인가’라는 의문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적된 폐해와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들어가는 사후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성과라고 하는 경제성장과 이 사후비용을 연계해서 손익을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경제개발 한답시고 후대에 오래도록 계속되는 사후비용을 남겼다면 그것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경제성장 이전의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5·16쿠데타 세력이 처음 수입대체와 자립경제를 위한 산업화에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전환한 것은 신국제분업질서에 운 좋게 부합됐지만, 이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국내에 해외의존적 수출경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국내에 조직적인 반대세력이 존재했다면 저항행동이 나올 수도 있었다. 196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유신체제 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체제폭력의 공포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적 저항행동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1963년~1964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도 야당, 대학생, 일반 시민들이 광범하게 참여한 저항이었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도 신국제분업질서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으나 한국과는 달리 그런 국가전략을 선택하지 못했다. 큰 이유 중 하나는 국내 중산층 상인이나 농업 지주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 국내에 저항할 만한 힘을 가진 계층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6·25동란과 1950년대의 농지개혁으로 기존 계층 구조가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6·25동란과 농지개혁 이후 전통적인 사회계층 구조가 와해되고 새로운 구조가 형성돼 있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경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농지개혁과 전쟁으로 인한 지주계급의 해체로 도시 중심의 산업화에 저항할 조직적인 정치 또는 경제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ㅓ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소규모 자영농은 ‘자루 속에 든 감자’에 비유되는 수준이었으며, 동질적 이익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사회계층이 되지 못했다. 이런 농민층은 도시 중심의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주계급이 없어진 것만으로 수출지향적 산업화로의 전환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1950년대에 추진되었다면 자유당 행정부와 지대 및 임대료를 추구하는 자본가들 간에 형성된 전근대적 정경유착 연대의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들은 생필품 산업과 국내 시장을 중심으로 한 수입대체 산업화를 고수하는 연합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치인들은 그런 수입대체 산업화 연합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이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중심에 서는 새로운 지배연합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산업화 과정의 새로운 정경유착인 수출산업에 대한 특혜 구조였다. 군사 정치인들이 수입대체 산업화 연합을 쉽게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지배연합이 최소한의 대중적 기반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제활동과 이권이란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매개로 자유당 행정부와 맺어진 정치적 연계망으로 유지되어왔을 뿐 일반 국민과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었다. 1950년대 말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계속 감소되어가는 상황에서 원조물자에 의존하고 있던 이 경제세력에게 군부에 기득권 유지를 주장할 만한 힘이 있을 리 없었다.
○ 씻을 수 없는 상처 치유하는 데 약값을 따져봐야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유리한 사회경제적 환경은 박정희와 5·16쿠데타 세력이 갑자기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발전과정의 산물로 물려받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내적으로 농지개혁에 의한 지주계급의 몰락과 자본가계급의 육성 촉진, 다수 농민의 자작농화, 그리고 6·25동란 이후 강화돤 공안통치 이데올로기로 인한 진보혁신 세력의 입막음 등이 개발독재체제를 순항시켰다.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토지를 상실하고 지가증권을 받았는데, 상인들과 자본가계급은 이 지가증권을 사들여 귀속재산을 불하받는 등 자본을 축적했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농지개혁 후 자본가계급으로 변신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들이 소유하던 자산은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그 뒤의 자본주의화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또 농지개혁을 통하여 지주계급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권이 자본가계급에 유리한 공업화정책을 보다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농지개혁은 또한 우수한 노동력을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이 된 농민들은 더 이상 소작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에 자녀들을 교육시킬 여력이 생겼다. 박정희 집권 체제 아래서 고도성장의 원동력은 ‘양질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이며 이 노동력은 대부분 우수한 임금노동자가 공급된 것이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다.
다음으로 6·25남북전쟁도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계급역학관계를 조성했다. 전란을 통해서 한편으로 전근대적인 신분관계가 청산됨으로써 자유로운 노동력이 창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 사회운동 역량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앰으로써 자연히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가 크지 않았다.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단과 내전 상황 아래서 국민의 기본권을 비롯한 민중적 요구가 억압됐고, 그에 따른 정치적 안정은 외국자본이 선호하는 투자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부의 구조적 변혁이 있었기에 한국은 모든 후진국이 처한 국제경제적 여건을 딛고 신흥공업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봉건시대 유물인 지주제를 철폐하여 기생적 요소를 크게 감소시킨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에 전쟁을 겪으면서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적 역학 관계가 자본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된 것이 자본주의화를 촉진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조건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국가에 주어진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한 조건 위에 성립된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을 후진국 공업화 전반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좀 더 긴 안목으로 보면 해방 후 한국 사회는 광범한 변화가 일어났다. 분단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민족해방운동 및 사회주의 세력이 거의 완벽하게 제거되는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던 군인·경찰·관료집단이 부활했다. 이는 반역사적이고 퇴행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 등 자본주의적 성장전략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거의 제거됐다. 북한과의 대결구도 아래 남한의 농지개혁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성장전략이 관철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 외에도 한국 사회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근검과 절약의 기풍,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가 남긴 국민의 복종 의무와 규율,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놓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4·19민중혁명이 만들어놓은 근대화에 대한 열망 등을 물려받았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효과는, 그 효과가 나타난 이후에 그에 따른 부산물과 문제들을 해소시키기 위한 비용까지 함께 고려해야만 제대로 평가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노동자가 돈 1만원을 받았는데 너무 무리하게 일해서 5천원을 약값으로 썼다면 사실은 5천원만 벌은 셈일 뿐이다. 그런데 보통 1만원 받은 것만 이야기하고 5천원 지출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5천원을 이후에도 계속 몇십년 동안 지출해야 될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이 고려되지 않은 계산법은 경제적인 성과를 말하는 논리로는 맞지 않다.
박정희 군사정권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얼마만큼이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독재가 반민주적 인권탄압과 지역감정의 구조화, 국민 평등권 파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만은 확실하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들어갈 약값을 따져보지 않은 채 개발독재의 성과만 칭송한다면 만성적 후진성에 머무르면서, 결코 선진사회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7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5. 경제성장의 사회적 바탕과 비용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을 두고 당시의 사회적 조건만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박정희의 지도력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 일어난 사회환경, 국내 여건은 갑자기 탄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 축적돼왔기 때문에 경제성장 이전 시기에 대해서도 분석해보아야 한다. 개발 연대 이전에는 한국 사회가 어떤 인적·물적 자원과 역량을 축적해왔는가, 그것이 경제개발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를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개발 연대 이후에 어떤 부산물과 문제점이 드러났는가, 그리고 그것을 처리·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개발독재에 의한 산업화란 경제성장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정책이 수행된 것이어서 다른 부문에 많은 부담과 희생을 야기했다. 그것은 국가 영역별 불균형과 국민 불평등이라는 큰 문제를 남겨놓았다. 그런 문제들을 치유하고 정상화하지 않으면 경제성장의 목표가치 자체가 흔들린다. ‘무엇을 위한 경제성장이며 산업화인가’라는 의문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적된 폐해와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들어가는 사후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성과라고 하는 경제성장과 이 사후비용을 연계해서 손익을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경제개발 한답시고 후대에 오래도록 계속되는 사후비용을 남겼다면 그것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경제성장 이전의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5·16쿠데타 세력이 처음 수입대체와 자립경제를 위한 산업화에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전환한 것은 신국제분업질서에 운 좋게 부합됐지만, 이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국내에 해외의존적 수출경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국내에 조직적인 반대세력이 존재했다면 저항행동이 나올 수도 있었다. 196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유신체제 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체제폭력의 공포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적 저항행동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1963년~1964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도 야당, 대학생, 일반 시민들이 광범하게 참여한 저항이었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도 신국제분업질서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으나 한국과는 달리 그런 국가전략을 선택하지 못했다. 큰 이유 중 하나는 국내 중산층 상인이나 농업 지주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 국내에 저항할 만한 힘을 가진 계층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6·25동란과 1950년대의 농지개혁으로 기존 계층 구조가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6·25동란과 농지개혁 이후 전통적인 사회계층 구조가 와해되고 새로운 구조가 형성돼 있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경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농지개혁과 전쟁으로 인한 지주계급의 해체로 도시 중심의 산업화에 저항할 조직적인 정치 또는 경제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ㅓ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소규모 자영농은 ‘자루 속에 든 감자’에 비유되는 수준이었으며, 동질적 이익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사회계층이 되지 못했다. 이런 농민층은 도시 중심의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주계급이 없어진 것만으로 수출지향적 산업화로의 전환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1950년대에 추진되었다면 자유당 행정부와 지대 및 임대료를 추구하는 자본가들 간에 형성된 전근대적 정경유착 연대의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들은 생필품 산업과 국내 시장을 중심으로 한 수입대체 산업화를 고수하는 연합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치인들은 그런 수입대체 산업화 연합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이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중심에 서는 새로운 지배연합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산업화 과정의 새로운 정경유착인 수출산업에 대한 특혜 구조였다. 군사 정치인들이 수입대체 산업화 연합을 쉽게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지배연합이 최소한의 대중적 기반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제활동과 이권이란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매개로 자유당 행정부와 맺어진 정치적 연계망으로 유지되어왔을 뿐 일반 국민과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었다. 1950년대 말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계속 감소되어가는 상황에서 원조물자에 의존하고 있던 이 경제세력에게 군부에 기득권 유지를 주장할 만한 힘이 있을 리 없었다.
○ 씻을 수 없는 상처 치유하는 데 약값을 따져봐야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유리한 사회경제적 환경은 박정희와 5·16쿠데타 세력이 갑자기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발전과정의 산물로 물려받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내적으로 농지개혁에 의한 지주계급의 몰락과 자본가계급의 육성 촉진, 다수 농민의 자작농화, 그리고 6·25동란 이후 강화돤 공안통치 이데올로기로 인한 진보혁신 세력의 입막음 등이 개발독재체제를 순항시켰다.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토지를 상실하고 지가증권을 받았는데, 상인들과 자본가계급은 이 지가증권을 사들여 귀속재산을 불하받는 등 자본을 축적했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농지개혁 후 자본가계급으로 변신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들이 소유하던 자산은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그 뒤의 자본주의화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또 농지개혁을 통하여 지주계급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권이 자본가계급에 유리한 공업화정책을 보다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농지개혁은 또한 우수한 노동력을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이 된 농민들은 더 이상 소작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에 자녀들을 교육시킬 여력이 생겼다. 박정희 집권 체제 아래서 고도성장의 원동력은 ‘양질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이며 이 노동력은 대부분 우수한 임금노동자가 공급된 것이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다.
다음으로 6·25남북전쟁도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계급역학관계를 조성했다. 전란을 통해서 한편으로 전근대적인 신분관계가 청산됨으로써 자유로운 노동력이 창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 사회운동 역량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앰으로써 자연히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가 크지 않았다.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단과 내전 상황 아래서 국민의 기본권을 비롯한 민중적 요구가 억압됐고, 그에 따른 정치적 안정은 외국자본이 선호하는 투자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부의 구조적 변혁이 있었기에 한국은 모든 후진국이 처한 국제경제적 여건을 딛고 신흥공업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봉건시대 유물인 지주제를 철폐하여 기생적 요소를 크게 감소시킨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에 전쟁을 겪으면서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적 역학 관계가 자본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된 것이 자본주의화를 촉진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조건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국가에 주어진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한 조건 위에 성립된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을 후진국 공업화 전반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좀 더 긴 안목으로 보면 해방 후 한국 사회는 광범한 변화가 일어났다. 분단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민족해방운동 및 사회주의 세력이 거의 완벽하게 제거되는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던 군인·경찰·관료집단이 부활했다. 이는 반역사적이고 퇴행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 등 자본주의적 성장전략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거의 제거됐다. 북한과의 대결구도 아래 남한의 농지개혁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성장전략이 관철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 외에도 한국 사회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근검과 절약의 기풍,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가 남긴 국민의 복종 의무와 규율,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놓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4·19민중혁명이 만들어놓은 근대화에 대한 열망 등을 물려받았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효과는, 그 효과가 나타난 이후에 그에 따른 부산물과 문제들을 해소시키기 위한 비용까지 함께 고려해야만 제대로 평가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노동자가 돈 1만원을 받았는데 너무 무리하게 일해서 5천원을 약값으로 썼다면 사실은 5천원만 벌은 셈일 뿐이다. 그런데 보통 1만원 받은 것만 이야기하고 5천원 지출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5천원을 이후에도 계속 몇십년 동안 지출해야 될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이 고려되지 않은 계산법은 경제적인 성과를 말하는 논리로는 맞지 않다.
박정희 군사정권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얼마만큼이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독재가 반민주적 인권탄압과 지역감정의 구조화, 국민 평등권 파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만은 확실하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들어갈 약값을 따져보지 않은 채 개발독재의 성과만 칭송한다면 만성적 후진성에 머무르면서, 결코 선진사회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