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 군 복무 중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지형(가명) 씨. 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군 내부의 무관심과 가혹행위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의 한 맺힌 젊은 죽음을 잊지못한 부모님의 눈물겨운 노력은 15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 9시 5분에 멈춰버린 어머니의 시계>
어머니는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가슴이 뛴다. 저녁상을 차리면서도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밥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설거지를 하면서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흘긋흘긋 시계를 보다가 저녁 9시가 가까워지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어김없이 그 시각이 온다. 저녁 9시 5분. 어머니의 귀에 총성이 두 발 ‘탕, 탕’ 들리고 가슴에서 붉고 뜨거운 피가 콸콸 나오는 것 같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곳이 길거리건, 베란다건, 시장 한복판이건 가리지 않고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 숨죽여 운다. 외아들인 지형(가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왔을 때 어머니는 울었다.‘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죽은 지형에게 물었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가까스로 오열이 가라앉았을 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이 왜 그랬을까,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고통스러웠을까. 죽고 싶을 만큼. 아들은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르고 허약했다. 성격도 적극적이라기 보다 소극적인 편에 가까웠다. 영장이 나왔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군에 잘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들 가는 군대였다. 아들도 잘 해내리라 믿었다. 군에 갔다 오면 사내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아들도 씩씩한 군인이 되어 나라도 지키고 가정도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어 돌아올 줄로 믿었다. 그런 아들이 두 발의 총탄을 가슴에 박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엇 때문에 자살했는지 알아야 했다. 내 자식이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어미가 알아야 했다. 이미 늦었다고 해도 알아야 했다. 아들은 군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아들이 무슨 일이든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동작이 느리고 고참이 불러도 관등성명을 크게, 빨리 대지 못했다고 했다. 근무 중 간부들이 지나가면 암구호를 대야 하는데 졸다가 놓친 적이 몇 번 있어서 선임병들은 같이 근무서기 싫어했다고 했다. 아들은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욕설을 들었다. 철책근무를 하는 부대의 특성상 선임들의 폭행과 기합이 심한 곳이 기도 했다. 전화도 할 수 없고 정기휴가 외에 면회나 외박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등병들이 편지를 쓰면 싸가지 없다는 욕설이 돌아왔다. 아들은 행동이 느리다거나, 사소한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심한 욕설과 함께 머리박기, 쪼그려 뛰기, 제자리 앉았다 일어서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다. 양팔을 쭉 편 채 5분간 소총 2자루를 들고 서 있게도 했다. 개머리판으로 맞기도 하고 깍지끼고 팔굽혀펴기를 해야 했다. 전투화 발로 엉덩이를 수차례 걷어차이기도 했다.
< 아들의 죽음에 ‘보상’이 아닌 ‘인정’을 받고 싶어 > 사람들은 아들이 항상 혼비백산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식사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두 세배의 양을 먹었다고 했다. 동기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도 여러번 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자살시도 당시 아들의 심리상태는 ‘주요 우울 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즉각적인 보호, 치료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혼비백산한 아들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상상만 해도 안쓰러워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그만 자식을 가슴속에 묻으라고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잔인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보훈지청에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을 했다.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이 되면 보훈 급여와 교육, 의료, 대부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보상을 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이 스스로 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하던 중 사망한 숭고한 희생이란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군은 거부했다. 자살이라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물러설 수 없었다. 행정소송을 거쳐 대법원 소송까지 갔지만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또 다른 자살자의 유공자 인정과 관련한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군 복무중 자살의 경우에는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또다시 보훈지청에 고인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달라며 재등록을 신청했다. 하지만 보훈지청은 고인이 자살을 해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사유도 없이 고충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본인 과실이 경합된 것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거부했다. 아니다. 아들은 노력했다. 자살할 것이라는 암시도 했고, 간담회 때 소대장과 분대장에게 전출을 보내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들의 말을 무시했다. 심지어 소대장은 아들이 ‘쇼’를 한다고까지 했다. 아무도 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들은 스스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
< 마지막 시도, 행정심판을 통해 맺힌 한을 풀다 > 이미 몇 차례나 거부당한 어머니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지막 한 군데가 있다고 했다. 억울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곳. 국민권익위원회에 가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다시 일어섰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접수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계바늘은 어김없이 매일 저녁 9시 5분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상급자로부터의 강요 등 가혹행위와 구타·욕설 등으로 인한 고인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확인됐고, 자살하겠다는 뜻을 비치거나 전출을 보내달라는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소속 지휘관이 이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을 다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보훈지청의 처분이 위법·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매일 저녁 9시 5분이 되면 어머니는 지형을 가슴속에서 불러내 조용히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무덤이 되어 아들을 품어줄 때까지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 사례 자세히 보기 >
1998년 12월 군 복무 중 선임병들로부터 욕설, 구타 등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로 사망한 고 (故) 이모 씨는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2012년 다시 국가유공자 인정신청을 내고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중앙행심위는 상급자로부터의 강요 등 가혹행위와 그로 인한 영향이 군대의 통제성과 폐쇄성으로 인하여 일반사회보다 훨씬 크다는 점, 구타·가 혹행위, 욕설 등으로 인한 고인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확인된 점, 자살하겠다는 뜻을 비추거나 분위기가 무섭다고 전출을 보내달라는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소속 지휘관이 이를 예방하거나 시정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다하지 않은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할 때 고인의 자살이 본인 과실이 경합되어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며 보훈지청의 처분이 위법·부당하다고 판단했다.
15년만에 인정받은 아들의 죽음(군 복무중 자살병사 국자유공자인정 행정심판)
지난 1998년 군 복무 중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지형(가명) 씨. 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군 내부의 무관심과 가혹행위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의 한 맺힌 젊은 죽음을 잊지못한 부모님의 눈물겨운 노력은 15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 9시 5분에 멈춰버린 어머니의 시계>
어머니는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가슴이 뛴다. 저녁상을 차리면서도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밥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설거지를 하면서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흘긋흘긋 시계를 보다가 저녁 9시가 가까워지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어김없이 그 시각이 온다. 저녁 9시 5분. 어머니의 귀에 총성이 두 발 ‘탕, 탕’ 들리고 가슴에서 붉고 뜨거운 피가 콸콸 나오는 것 같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곳이 길거리건, 베란다건, 시장 한복판이건 가리지 않고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 숨죽여 운다. 외아들인 지형(가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왔을 때 어머니는 울었다.‘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죽은 지형에게 물었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가까스로 오열이 가라앉았을 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이 왜 그랬을까,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고통스러웠을까. 죽고 싶을 만큼. 아들은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르고 허약했다. 성격도 적극적이라기 보다 소극적인 편에 가까웠다. 영장이 나왔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군에 잘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들 가는 군대였다. 아들도 잘 해내리라 믿었다. 군에 갔다 오면 사내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아들도 씩씩한 군인이 되어 나라도 지키고 가정도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어 돌아올 줄로 믿었다. 그런 아들이 두 발의 총탄을 가슴에 박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엇 때문에 자살했는지 알아야 했다. 내 자식이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어미가 알아야 했다. 이미 늦었다고 해도 알아야 했다. 아들은 군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아들이 무슨 일이든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동작이 느리고 고참이 불러도 관등성명을 크게, 빨리 대지 못했다고 했다. 근무 중 간부들이 지나가면 암구호를 대야 하는데 졸다가 놓친 적이 몇 번 있어서 선임병들은 같이 근무서기 싫어했다고 했다. 아들은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욕설을 들었다. 철책근무를 하는 부대의 특성상 선임들의 폭행과 기합이 심한 곳이 기도 했다. 전화도 할 수 없고 정기휴가 외에 면회나 외박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등병들이 편지를 쓰면 싸가지 없다는 욕설이 돌아왔다. 아들은 행동이 느리다거나, 사소한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심한 욕설과 함께 머리박기, 쪼그려 뛰기, 제자리 앉았다 일어서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다. 양팔을 쭉 편 채 5분간 소총 2자루를 들고 서 있게도 했다. 개머리판으로 맞기도 하고 깍지끼고 팔굽혀펴기를 해야 했다. 전투화 발로 엉덩이를 수차례 걷어차이기도 했다.
< 아들의 죽음에 ‘보상’이 아닌 ‘인정’을 받고 싶어 >
사람들은 아들이 항상 혼비백산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식사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두 세배의 양을 먹었다고 했다. 동기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도 여러번 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자살시도 당시 아들의 심리상태는 ‘주요 우울 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즉각적인 보호, 치료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혼비백산한 아들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상상만 해도 안쓰러워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그만 자식을 가슴속에 묻으라고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잔인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보훈지청에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을 했다.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이 되면 보훈 급여와 교육, 의료, 대부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보상을 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이 스스로 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하던 중 사망한 숭고한 희생이란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군은 거부했다. 자살이라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물러설 수 없었다. 행정소송을 거쳐 대법원 소송까지 갔지만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또 다른 자살자의 유공자 인정과 관련한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군 복무중 자살의 경우에는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또다시 보훈지청에 고인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달라며 재등록을 신청했다. 하지만 보훈지청은 고인이 자살을 해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사유도 없이 고충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본인 과실이 경합된 것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거부했다. 아니다. 아들은 노력했다. 자살할 것이라는 암시도 했고, 간담회 때 소대장과 분대장에게 전출을 보내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들의 말을 무시했다. 심지어 소대장은 아들이 ‘쇼’를 한다고까지 했다. 아무도 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들은 스스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
< 마지막 시도, 행정심판을 통해 맺힌 한을 풀다 >
이미 몇 차례나 거부당한 어머니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지막 한 군데가 있다고 했다. 억울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곳. 국민권익위원회에 가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다시 일어섰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접수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계바늘은 어김없이 매일 저녁 9시 5분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상급자로부터의 강요 등 가혹행위와 구타·욕설 등으로 인한 고인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확인됐고, 자살하겠다는 뜻을 비치거나 전출을 보내달라는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소속 지휘관이 이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을 다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보훈지청의 처분이 위법·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매일 저녁 9시 5분이 되면 어머니는 지형을 가슴속에서 불러내 조용히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무덤이 되어 아들을 품어줄 때까지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 사례 자세히 보기 >
1998년 12월 군 복무 중 선임병들로부터 욕설, 구타 등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로 사망한 고 (故) 이모 씨는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2012년 다시 국가유공자 인정신청을 내고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중앙행심위는 상급자로부터의 강요 등 가혹행위와 그로 인한 영향이 군대의 통제성과 폐쇄성으로 인하여 일반사회보다 훨씬 크다는 점, 구타·가 혹행위, 욕설 등으로 인한 고인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확인된 점, 자살하겠다는 뜻을 비추거나 분위기가 무섭다고 전출을 보내달라는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소속 지휘관이 이를 예방하거나 시정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다하지 않은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할 때 고인의 자살이 본인 과실이 경합되어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며 보훈지청의 처분이 위법·부당하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