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6. 한국 근대화 역사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필요했는가
우리 나라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위해서는 박정희 같은 독재자가 꼭 필요했을까? 일각에서는 그렇다고 역사적 필연론을 주장한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산업화와 소득증대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은 그를 가리켜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칭송하곤 했다. 박정희 독재권력의 그늘 아래서 영달을 누린 사람이니 그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쨌거나 우리 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성과도 좋았다는 역사적 필연론을 검증해야 한다.
역사적 필연론을 펴는 사람들은 모두가 박정희 신봉자들이다. 그의 통치철학과 개발독재 방식에 의한 산업화를 지지한다. 이들은 절대빈곤의 상태에 있었던 1960년대 한국에서 국민들을 기아로부터 구출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식 독재정치가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방식은 정책결정에 시간이 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관료들의 효율적인 정책집행을 방해하며 선거 때의 표를 의식한 각종 선심성 사업에 맹목적으로 매몰되기 때문에 국가 근대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국가정책을 일사분란하게 실천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문관료적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역사적 필연론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분석해야 한다. 첫째는 박정희가 채택한 권위주의적 국가 근대화의 이론적 내용이다. 둘째는 우리나라의 역사발전 과정에서 1960년대~1970년대에 과연 권위주의적 근대화가 반드시 필요했느냐는 문제다.
우선 권위주의적 국가 근대화론은 산업화 초기에 권위주의가 필요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근대화에 반대하는 조직적 사회계층의 저항을 돌파할 수 있는 강압적인 힘이다. 말하자면 어떤 정책에 대해서든지 사회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른 지지와 반대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정부가 필요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권위주의적 독재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특히 대부분 후진국들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다. 후진국 국민들은 자율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1950년대 중반에 주창했던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가 대표적인 권위주의적 국가발전론에 속한다. 수카르노는 1956년 말 정치적 반대그룹인 사회당·민중당 등 야당들을 매장시키고 의회민주주의와 기업 활동의 자유를 폐지했다. 그는 교도민주주의와 교도경제를 제창하고 영도자의 역할로 교도와 보호를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서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도 고래로부터 촌락별로 토의(무즈자와라)와 합의(토파카트)의 방식이 존재하므로 인도네시아 전통에 맞는 민주주의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식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 교도민주주의는 수카르노 자신의 독재를 공식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는 마치 박정희가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 내놓은 정당화 논리와 비슷하다. 즉, 한국 사람이 입는 옷은 한국 사람의 체격에 맞아야 하듯이 민주주의도 ‘한국적 민주주의’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절대권력자의 길을 걸은 두 사람의 말로도 비슷하게 끝난다. 수카르노는 호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66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음모를 진압하러 동원된 육군 작전사령관 수하르토 장군에게 전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어쨌든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독재정치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문화가 취약하고 민도 수준이 낮은 나라에나 적용되는 가설이다.
○ 근대화 위해 개발독재 필요하다는 가설, 한국엔 안 맞아
경제성장과 근대화에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필연이라는 주장의 두번째 근거는 초기의 경제적 축적을 위해서는 임금인상과 소비억제 정책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진국이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운용해야 할 투자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후진국 근대화의 첫 단계가 자본축적이라 할 수 있다. 국내에 자본축적이 돼 있지 않으면 국제부흥개발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금융기구나 부자 나라들로부터 차관을 받아야 한다.
해외에서 빚을 얻지 않으려면 국내 자본축적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임금을 높이는 분배가 아니라 저임금을 유지하며 기업의 내부 축적에 유리한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임금노동자와 월듭 생활자들이 소비를 억제하고 근검 절약하여 저축률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절약을 계속해서 감내하기 어렵다. 여기서 노동운동과 임금인상 투쟁이 폭발한다. 이럴 경우 정부에게 분출되는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강제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화 정부 아래서는 노동기본권과 노조활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또 소비생활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축적을 성공시키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억압적 자본축적보다는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금융정책이 훨씬 효과적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외환위기 때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금 모으기가 민주적인 경제정책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였다.
셋째는 외부환경인 세계체제의 압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기에도 권위주의 체제가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권위주의 정권이 1인독재로 타락하면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때문이지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단기적으로는 배타적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가능한 모델은 결코 될 수 없다. 박정희도 유신체제 선포 이후 미국 국무부가 인권 개선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을 때 그것에 반발하면서 자주노선을 내세우려 했지만 결국 종말에 이르고 말았다.
이 같은 권위주의적 국가 근대화론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1960년대~1970년대에 그 가설이 들어맞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국내 근대화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애초에 그럴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도시 중심 산업화나 혹은 수출지향 산업화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지주계급은 이미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둘째, 노동계급의 저항은 1960년대 농촌 인구의 대대적인 도시 유입으로 노동력 공급이 넘쳐나면서 가능하지 않았다. 한국의 개발 연대에는 그만흠 유휴 노동력이 많았으며 노동계급의 임금인상 투쟁 등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노동시장 원리에 의해 해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셋째, 외부 세계체제의 압력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도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 필요했다고 주장하지만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을 둘러싼 자본주의 진영의 환경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특히 자본주의 진영의 주도국가인 미국은 ‘자비로운 헤게모니’라 불릴 만큼 한국에 압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적극 원조했다. 세계정치적 특수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개발독재로 인한 어느 정도의 반민주적 행위까지도 용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권위주의적 정권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 정부였다면 더욱 미국의 지원과 협력을 원활하게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10·26궁정동총격사건에 의한 박정희 정권의 종식도 지나친 유신독재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이면에서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자신과 강경파의 미국에 대한 반발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국가안보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이 10·26총격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라졌지만 그가 만들어놓은 독재체제는 그 친위대장 전두환에게 넘겨져 광주시민항쟁 살상진압과 같은 엄혹한 복고반동이 일어나게 된다. 국민의 힘에 의한 독재 종식이 아닌 탓에 건너뛸 수 없는 역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8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Ⅲ. ‘한강의 기적’ 누가 주역인가
6. 한국 근대화 역사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필요했는가
우리 나라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위해서는 박정희 같은 독재자가 꼭 필요했을까? 일각에서는 그렇다고 역사적 필연론을 주장한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산업화와 소득증대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은 그를 가리켜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칭송하곤 했다. 박정희 독재권력의 그늘 아래서 영달을 누린 사람이니 그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쨌거나 우리 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성과도 좋았다는 역사적 필연론을 검증해야 한다.
역사적 필연론을 펴는 사람들은 모두가 박정희 신봉자들이다. 그의 통치철학과 개발독재 방식에 의한 산업화를 지지한다. 이들은 절대빈곤의 상태에 있었던 1960년대 한국에서 국민들을 기아로부터 구출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식 독재정치가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방식은 정책결정에 시간이 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관료들의 효율적인 정책집행을 방해하며 선거 때의 표를 의식한 각종 선심성 사업에 맹목적으로 매몰되기 때문에 국가 근대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국가정책을 일사분란하게 실천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문관료적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역사적 필연론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분석해야 한다. 첫째는 박정희가 채택한 권위주의적 국가 근대화의 이론적 내용이다. 둘째는 우리나라의 역사발전 과정에서 1960년대~1970년대에 과연 권위주의적 근대화가 반드시 필요했느냐는 문제다.
우선 권위주의적 국가 근대화론은 산업화 초기에 권위주의가 필요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근대화에 반대하는 조직적 사회계층의 저항을 돌파할 수 있는 강압적인 힘이다. 말하자면 어떤 정책에 대해서든지 사회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른 지지와 반대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정부가 필요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권위주의적 독재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특히 대부분 후진국들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다. 후진국 국민들은 자율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1950년대 중반에 주창했던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가 대표적인 권위주의적 국가발전론에 속한다. 수카르노는 1956년 말 정치적 반대그룹인 사회당·민중당 등 야당들을 매장시키고 의회민주주의와 기업 활동의 자유를 폐지했다. 그는 교도민주주의와 교도경제를 제창하고 영도자의 역할로 교도와 보호를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서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도 고래로부터 촌락별로 토의(무즈자와라)와 합의(토파카트)의 방식이 존재하므로 인도네시아 전통에 맞는 민주주의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식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 교도민주주의는 수카르노 자신의 독재를 공식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는 마치 박정희가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 내놓은 정당화 논리와 비슷하다. 즉, 한국 사람이 입는 옷은 한국 사람의 체격에 맞아야 하듯이 민주주의도 ‘한국적 민주주의’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절대권력자의 길을 걸은 두 사람의 말로도 비슷하게 끝난다. 수카르노는 호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66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음모를 진압하러 동원된 육군 작전사령관 수하르토 장군에게 전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어쨌든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독재정치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문화가 취약하고 민도 수준이 낮은 나라에나 적용되는 가설이다.
○ 근대화 위해 개발독재 필요하다는 가설, 한국엔 안 맞아
경제성장과 근대화에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필연이라는 주장의 두번째 근거는 초기의 경제적 축적을 위해서는 임금인상과 소비억제 정책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진국이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운용해야 할 투자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후진국 근대화의 첫 단계가 자본축적이라 할 수 있다. 국내에 자본축적이 돼 있지 않으면 국제부흥개발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금융기구나 부자 나라들로부터 차관을 받아야 한다.
해외에서 빚을 얻지 않으려면 국내 자본축적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임금을 높이는 분배가 아니라 저임금을 유지하며 기업의 내부 축적에 유리한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임금노동자와 월듭 생활자들이 소비를 억제하고 근검 절약하여 저축률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절약을 계속해서 감내하기 어렵다. 여기서 노동운동과 임금인상 투쟁이 폭발한다. 이럴 경우 정부에게 분출되는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강제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화 정부 아래서는 노동기본권과 노조활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또 소비생활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축적을 성공시키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억압적 자본축적보다는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금융정책이 훨씬 효과적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외환위기 때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금 모으기가 민주적인 경제정책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였다.
셋째는 외부환경인 세계체제의 압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기에도 권위주의 체제가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권위주의 정권이 1인독재로 타락하면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때문이지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단기적으로는 배타적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가능한 모델은 결코 될 수 없다. 박정희도 유신체제 선포 이후 미국 국무부가 인권 개선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을 때 그것에 반발하면서 자주노선을 내세우려 했지만 결국 종말에 이르고 말았다.
이 같은 권위주의적 국가 근대화론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1960년대~1970년대에 그 가설이 들어맞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국내 근대화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애초에 그럴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도시 중심 산업화나 혹은 수출지향 산업화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지주계급은 이미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둘째, 노동계급의 저항은 1960년대 농촌 인구의 대대적인 도시 유입으로 노동력 공급이 넘쳐나면서 가능하지 않았다. 한국의 개발 연대에는 그만흠 유휴 노동력이 많았으며 노동계급의 임금인상 투쟁 등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노동시장 원리에 의해 해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셋째, 외부 세계체제의 압력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도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 필요했다고 주장하지만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을 둘러싼 자본주의 진영의 환경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특히 자본주의 진영의 주도국가인 미국은 ‘자비로운 헤게모니’라 불릴 만큼 한국에 압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적극 원조했다. 세계정치적 특수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개발독재로 인한 어느 정도의 반민주적 행위까지도 용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권위주의적 정권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 정부였다면 더욱 미국의 지원과 협력을 원활하게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10·26궁정동총격사건에 의한 박정희 정권의 종식도 지나친 유신독재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이면에서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자신과 강경파의 미국에 대한 반발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국가안보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이 10·26총격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라졌지만 그가 만들어놓은 독재체제는 그 친위대장 전두환에게 넘겨져 광주시민항쟁 살상진압과 같은 엄혹한 복고반동이 일어나게 된다. 국민의 힘에 의한 독재 종식이 아닌 탓에 건너뛸 수 없는 역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