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일궈온 옥구평야에 다시 찾아온 평화 < 새만금 송전선로 설치반대 갈등민원 조정사례 >
김남영2014.03.28
조회61
새만금산업단지에 부족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시작된 새만금 송전선로 건설사업. 그러나 공사가 반 넘게 완료된 시점에서 갑자기 모든 공사가 중단됐다. 공공기관과 주민의 갈등이 깊어지고 급기야 정면충돌까지 일어나면서 6년여 동안 공사는 제자리걸음만 이어갔다.
< 평생을 일궈온 옥구평야를 지키고 싶어 >
용범(가명)은 컨테이너 박스를 향해 갔다. 훤한 달밤이라 해도 혼자 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자물쇠에 손을 대자 찬 기운이 섬뜩하게 손에 달라붙었다. 용범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점퍼 주머니에서손전등을 꺼냈다. “수복이 놈이 여그다 흘린 것 같다고 했는디….여기가 맞는 거여?” 무섬증을 떨쳐버리려 용범은 일부러 혼잣말을 했다. 연신 투덜대면서도 수복이가 잃어버렸다는 휴대전화를 찾아 바닥을 더듬었다. 내일 얼굴이나 보여주러 찾아갈란다고, 용범은 병원에 있는 수복이에게 전화했다가 난데없이 휴대전화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용범과 수복은 불알친구다. 환갑을 넘긴 이때껏 눈 뜨면 들에서 만나고, 저녁이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늙어왔다. 부탁을 받았을 때 귀찮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이 오밤중에 그걸 찾으러 밭한가운데 있는 컨테이너 박스까지 갈 사람이 자기 한 사람뿐인 걸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복은 5년 전에 마누라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도대체가 말여, 어디다 흘린거여….” 용범은 구석구석 손전등을 비췄다. 칠순을 바라보는 수복이가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간 것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언제 날도둑놈 같은 용역 놈들이 들이닥쳐 컨테이너 박스를 치울지 몰랐다. 컨테이너 박스를 치우면 이 자리에 송전탑이 들어설 것이었다. 새만금지역 산업단지에 전력 을 공급하기 위해 옥구평야에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농사꾼들은 농사걱정부터 했다. 옥구평야는 예로부터 옥답이었다. 그런 땅에 60m가 넘는 송전탑이 90여개나 들어선다는 것이다. 농사는 고사하고 백혈병과 암 발생률이 높아진다는데 누가 옥구평야를 지킬 것인가. 토지 가격도 1조원 이상 하락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42기의 송전탑이 건설되었다. 회현면, 옥구읍, 미성동 주민들은 대책위를 꾸렸다. 시청까지 트랙터를 몰고나가 시위를 하고 소송도 불사했다.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컨테이너를 갖다 놓고 24시간 철야 감시를 하며 온 몸으로 막았다.
< 쌍방의 노력에도 깊어가는 갈등 > 수복이 밤을 새우던 날, 용역 놈들이 들이닥쳤다. 수복은 악착같이 놈들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장정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오른쪽 팔을 크게 다쳤다. 마을 사람들이 뒤늦게 달려와 컨테이너를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 뼈는 아물었지만 시름시름 앓더니 아예 병원에 가서 드러누웠다. 주민들의 반대에 송전탑 공사는 중단됐다. 하지만 공사가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십시일반 3,300만 원을 모아 ‘마을과 논밭을 우회하는 노선’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리고 타당성 검토를 통해 새만금 건설용지로 우회하는 노선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우회노선은 기존보다 훨씬 긴 39㎞에 철탑 96기를 세워야 하고, 비용이 600억원 넘게 늘어나 총 2,500억원이 들어갈 것이란 이유였다. 미군 부대도 문제였다. 대안노선이 미군부대 전투기 이착륙에 장애가 되 는지 미군 측에 세 차례에 걸쳐 물었지만 불가하다는 답변만을 받았다. 뾰족한 해결책도 없이 시간만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또 큰 충돌이있을지 몰랐다. “벌써 6년을 끌었어요. 주민들 편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중재해줄 곳을 찾아봐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커요”. 마을 회관에서 주민대책위원회 회의가 있던 날 위원장이 심각하게 말했다. “우리 겉은 농사꾼들 말을 들어줄 데가 있어야 말이제…”. 누군가 푸념했다. 그런 곳이라면…, 용범의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찾아가보면 어떤가?” 언젠가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땐 억울한 심정을 들어주는 곳이 있긴 있구나, 하고 흘려버렸다. 그런데 수복이 병원에 실려가니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6년을 끈 갈등이 봉합되다 > 국민권익위원회는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해주었다. 열다섯 차례의 현장조사와 협의, 면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고, 그 결과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문제가 서서히 풀릴 기미가 보였다.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조정안은 철탑의 비행저촉여부에 대해 미군의 검토결과를 지켜본 후, 그 결과에 따라 대안노선 공사 또는 당초 계획안의 추진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아직 완전 해결에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6년을 지루하게 끌었던 갈등이 봉합되어 가고 있다. 용범이 병실에 들어서자 수복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반겼다. “이거 기다렸제?” 용범이 수복의 손에 휴대전화를 쥐어주었다. “고맙네, 고마워. 아무리 찾아도 없지 뭔가. 병원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니 거기 밖에 없겠드라고. 암튼 고마워.” “근데, 이거를 뭐 하러 그리 애타게 찾었나? 새로 산 휴대전화도 있잖여?” “으응….” 수복이 휴대전화에 충전기를 연결시켰다. 다행히 고장이 나진 않았다. 화 면에 수복의 처가 웃고 있는 사진이 떴다. 등 뒤로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수복의 처는 옥구평야의 품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가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여. 그동안 옥구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사 람 얼굴이 떠올랐는데 여기 있으니 영 감감해서…. ” 수복이 논두렁에 앉아 옥구평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이 용범의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처럼, 옥구평야가 이대로 평화로웠으면 좋겠다고 용범이 간절하게 바란 적은 없었다.
< 사례 자세히 보기 >
2008년 시작된 군산 새만금 송전선로 건설사업은 주민들의 반대로 2012년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 놓였다. 주민대책위와 공공기관 간 갈등이 심화되자 주민대책위는 권익위에 집단민원을 제기하였다. 권익위는 오랜 대화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고, 국민권익위원장 명의로 미군부대에 질의해 그 회신결과를 양측이 조건 없이 수용하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마침내 2013년 12월 12일 현장 조정회의에서 양측의 의견을 최종 조정하여 갈등해소의 길을 열었다.
평생을 일궈온 옥구평야에 다시 찾아온 평화 < 새만금 송전선로 설치반대 갈등민원 조정사례 >
새만금산업단지에 부족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시작된 새만금 송전선로 건설사업. 그러나 공사가 반 넘게 완료된 시점에서 갑자기 모든 공사가 중단됐다. 공공기관과 주민의 갈등이 깊어지고 급기야 정면충돌까지 일어나면서 6년여 동안 공사는 제자리걸음만 이어갔다.
< 평생을 일궈온 옥구평야를 지키고 싶어 >
용범(가명)은 컨테이너 박스를 향해 갔다. 훤한 달밤이라 해도 혼자 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자물쇠에 손을 대자 찬 기운이 섬뜩하게 손에 달라붙었다. 용범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점퍼 주머니에서손전등을 꺼냈다.
“수복이 놈이 여그다 흘린 것 같다고 했는디….여기가 맞는 거여?”
무섬증을 떨쳐버리려 용범은 일부러 혼잣말을 했다. 연신 투덜대면서도 수복이가 잃어버렸다는 휴대전화를 찾아 바닥을 더듬었다. 내일 얼굴이나 보여주러 찾아갈란다고, 용범은 병원에 있는 수복이에게 전화했다가 난데없이 휴대전화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용범과 수복은 불알친구다. 환갑을 넘긴 이때껏 눈 뜨면 들에서 만나고, 저녁이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늙어왔다. 부탁을 받았을 때 귀찮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이 오밤중에 그걸 찾으러 밭한가운데 있는 컨테이너 박스까지 갈 사람이 자기 한 사람뿐인 걸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복은 5년 전에 마누라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도대체가 말여, 어디다 흘린거여….”
용범은 구석구석 손전등을 비췄다. 칠순을 바라보는 수복이가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간 것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언제 날도둑놈 같은 용역 놈들이 들이닥쳐 컨테이너 박스를 치울지 몰랐다. 컨테이너 박스를 치우면 이 자리에 송전탑이 들어설 것이었다. 새만금지역 산업단지에 전력
을 공급하기 위해 옥구평야에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농사꾼들은 농사걱정부터 했다. 옥구평야는 예로부터 옥답이었다. 그런 땅에 60m가 넘는 송전탑이 90여개나 들어선다는 것이다. 농사는 고사하고 백혈병과 암 발생률이 높아진다는데 누가 옥구평야를 지킬 것인가. 토지 가격도 1조원 이상 하락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42기의 송전탑이 건설되었다. 회현면, 옥구읍, 미성동 주민들은 대책위를 꾸렸다. 시청까지 트랙터를 몰고나가 시위를 하고 소송도 불사했다.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컨테이너를 갖다 놓고 24시간 철야 감시를 하며 온 몸으로 막았다.
< 쌍방의 노력에도 깊어가는 갈등 >
수복이 밤을 새우던 날, 용역 놈들이 들이닥쳤다. 수복은 악착같이 놈들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장정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오른쪽 팔을 크게 다쳤다. 마을 사람들이 뒤늦게 달려와 컨테이너를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 뼈는 아물었지만 시름시름 앓더니 아예 병원에 가서 드러누웠다. 주민들의 반대에 송전탑 공사는 중단됐다. 하지만 공사가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십시일반 3,300만 원을 모아 ‘마을과 논밭을 우회하는 노선’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리고 타당성 검토를 통해 새만금 건설용지로 우회하는 노선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우회노선은 기존보다 훨씬 긴 39㎞에 철탑 96기를 세워야 하고, 비용이 600억원 넘게 늘어나 총 2,500억원이 들어갈 것이란 이유였다. 미군 부대도 문제였다. 대안노선이 미군부대 전투기 이착륙에 장애가 되
는지 미군 측에 세 차례에 걸쳐 물었지만 불가하다는 답변만을 받았다. 뾰족한 해결책도 없이 시간만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또 큰 충돌이있을지 몰랐다.
“벌써 6년을 끌었어요. 주민들 편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중재해줄 곳을 찾아봐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커요”.
마을 회관에서 주민대책위원회 회의가 있던 날 위원장이 심각하게 말했다.
“우리 겉은 농사꾼들 말을 들어줄 데가 있어야 말이제…”.
누군가 푸념했다. 그런 곳이라면…, 용범의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찾아가보면 어떤가?”
언젠가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땐 억울한 심정을 들어주는 곳이 있긴 있구나, 하고 흘려버렸다. 그런데 수복이 병원에 실려가니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6년을 끈 갈등이 봉합되다 >
국민권익위원회는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해주었다. 열다섯 차례의 현장조사와 협의, 면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고, 그 결과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문제가 서서히 풀릴 기미가 보였다.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조정안은 철탑의 비행저촉여부에 대해 미군의 검토결과를 지켜본 후, 그 결과에 따라 대안노선 공사 또는 당초 계획안의 추진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아직 완전 해결에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6년을 지루하게 끌었던 갈등이 봉합되어 가고 있다. 용범이 병실에 들어서자 수복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반겼다.
“이거 기다렸제?”
용범이 수복의 손에 휴대전화를 쥐어주었다.
“고맙네, 고마워. 아무리 찾아도 없지 뭔가. 병원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니 거기 밖에 없겠드라고. 암튼 고마워.”
“근데, 이거를 뭐 하러 그리 애타게 찾었나? 새로 산 휴대전화도 있잖여?”
“으응….”
수복이 휴대전화에 충전기를 연결시켰다. 다행히 고장이 나진 않았다. 화
면에 수복의 처가 웃고 있는 사진이 떴다. 등 뒤로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수복의 처는 옥구평야의 품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가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여. 그동안 옥구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사
람 얼굴이 떠올랐는데 여기 있으니 영 감감해서…. ”
수복이 논두렁에 앉아 옥구평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이 용범의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처럼, 옥구평야가 이대로 평화로웠으면 좋겠다고 용범이 간절하게 바란 적은 없었다.
< 사례 자세히 보기 >
2008년 시작된 군산 새만금 송전선로 건설사업은 주민들의 반대로 2012년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 놓였다. 주민대책위와 공공기관 간 갈등이 심화되자 주민대책위는 권익위에 집단민원을 제기하였다. 권익위는 오랜 대화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고, 국민권익위원장 명의로 미군부대에 질의해 그 회신결과를 양측이 조건 없이 수용하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마침내 2013년 12월 12일 현장 조정회의에서 양측의 의견을 최종 조정하여 갈등해소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