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혐] 일본군의 전쟁범죄 - 난징 대학살 그리고

한숨만201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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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중국어: 南京大屠殺(난징 대도살)
일본어: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혹은 난징 사건(南京事件)
영어: Nanking Massacre (혹은 The Rape of Nanking)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만행

 

이 문제는 나치의 인종학살과 더불어 가장 심각한 문제로써 아시안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이 사건을 그냥 묵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앞으로 똑같은 실수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학습하고, 배워야합니다.

 

 

희생당한 중국인과 일본 우익들의 살인 협박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일본군의 만행을 조사한 많은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대학살 사건.


 

일본군은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참고로 20~30만 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당연히 난징 한곳에서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 진행 됬으며 현재 학계에 보고된 결과에 따르면 5만명에서 30만명이 학살당했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난징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루리웹 여러분들은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일본군은 1937년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파죽지세로 중화민국의 거점도시인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일본군은 기세등등하여 "3개월만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막히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상하이 한 도시에서만 3개월이란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약봤지만 중국군의 저항을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륙의 기상이었죠

 

특히 일본군은 상륙작전까지 실패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장제스는 자신의 친위부대를 상하이에 지원시켰으니

일본군의 분노와 악은 상상 이상으로 달해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 특유의 폭력적이고 금욕적인 병영문화까지 겹쳐 당시 일본군은 미친 악마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4개월이 지난 11월 드디어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난징을 향해 총구를 돌렸습니다.

 

 

탕셩즈 장군은 난징전투당시 중국군 지휘관이었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러 정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937년 난징 전투 지도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지만 탕셩즈 장군과 휘하부대는 끝내 거부했습니다.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습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결국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습니다.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하였죠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했습니다.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입성을 다룬 1937년 당시 아사히 뉴스

 

 

난징 외곽 양자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중국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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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포로의 목을 벨 준비를 하는 일본군 (뒤에 남성은 웃고있다)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고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습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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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중국군 포로를 이용한 총검술 훈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했습니다.

 

 

일본군들이 수천명에 달하는 중국여성들을 잡아갔다.

여성들은 위안소로 보내지거나 윤간당한 후 살해당했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습니다.

'집단윤간', '선간후살'(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습니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다음과 같다.

(히로타 고키는 문관으로써 유일한 A급 전범으로써 전범 재판때 처형당했다.)

 

특별소식: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 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日외무, 1938년 비밀전문서 "난징에서 최소 30만명 살육"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난징에 있는 욘 라베의 집. 난징대학살 당시 욘 라베는 이 곳을 중심으로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피난하는 중국인들을 도왔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는 외교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습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으며

난징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욘 라베의 헌신 덕분에 수십만명의 난징시민들이 다른 도시로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한 기사

 

그러나 끔찍한 살인구역에선 기적보다 악몽이 더 많았습니다.

 

일본군 장교인 무카이 도시야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는 100명의 목을 베는 학살경쟁을 벌였고

각각 106명과 105명을 학살하였습니다.

 

1937년 11월 30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12월 13일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화시켰고

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이들은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총살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들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했으며 신문 보도 또한 창작기사라고 반박하였습니다.

또 현재도 무카이 소위의 딸과 노다 소위의 아내, 손녀가 현재 일본의 마이니치신문과 아사히 신문에게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받으며 대법원에서 재판을 했으나 패소했습니다.

 

이 100인 목베기 경쟁 외에도 300목베기를 달성한 다나카 군키치 육군 대위의 이야기도 1940년 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되었는데

다나카 군키치 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 두 소위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무카이, 노다 소위와 함께 총살되었습니다.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과연 누가 치료해줄까요?)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일본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고

1938년 1월 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습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습니다.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었습니다.

이를 난징판 731부대라 불리는 'Ei 1644부대'라 명명했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를 정부수반으로 친일성향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일방적으로 세워진 왕징웨이의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 등 일본군, 일본인들은 중화민국의 군대가 난징에 입성하기 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습니다.

 

그 후 중국은 일본에게 심판을 내렸습니다. 난징 전범재판 말입니다.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습니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습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되었습니다.

 

 

조 이사무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 난징전투 당시 아사카 야스히코의 참모.

난징대학살에 깊게 관여했고 포로 학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 일본의 황족으로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 함락될 당시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상 난징 대학살의 주요 책임자 4인

 

극동국제군사재판 즉 도쿄전범재판에서 아사카 야스히코를 제외한 세명은 A급 전범이란 판결이 내려졌고

모두 교수형을 당한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자중 한명이었던 아사카 야스히코만은 히로히토 천황의 삼촌이란 이유만으로 면죄부가 주어졌고

심지어 재판소에서도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죄없는 자들을 죽였음에도 천수를 누리고 눈을 감았다. 개 씨1발새1끼

 

또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학살명령을 내린 거물급 전범들을 제외한 직접 손에 피를 묻힌 학살의 당사자들을 재판소에 출석시키지 않았다.

이것이 전범재판의 한계였으며, 현재 일본우익들의 개소리의 원동력의 도화선이 되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

이곳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의 혼이 잠들어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집니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 경쟁 가담자는 1948년,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였습니다.

 

일본군은 심지어 중국인 군인 포로들을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및 우익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환상설이나 부정론을 내세우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거나

"난징 사건"이라고 사건을 일축하는 등 오히려 난징 대학살 언급을 금기시되고 있어서 중국측과 대립하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난징 대학살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으로 엇갈리는데

일본 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 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표자인 가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司) 츠루 문과대학 교수나 와세다 대학교 교수였던 호라 도미오조차도 25만 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기타 20만 명설, 15만 명설, 1만 명설, 3천 명설, 심지어는 일본 우익 진영에서는 40~50명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 봐야 1~2명 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 극우 난징 대학살 부정파들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일본 극우 세력과 현 정부의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제작되어 난징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0년 5월 16일에는 1937년 일본군의 `난징(南京)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록영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습니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가인 아이리스 장

2004년 사망하였다

 

그녀는 1997년 The Rape of Nanking (난징의 강간)이란 난징 대학살에 대해 묵인하는 일본을 비판하는 책을 펴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1999년 힐러리 클린턴과 난징문제에 대해 상의를 하고, 특유의 논리적인 웅변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대사를 생방송으로 주미 일본대사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제대로 논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난징의 강간을 보고 분노한 일본 우익들의 살해협박에 시달려

결국 우울증으로 인해 2004년 11월 9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현재까지 일본은 난징 대학살에 대한 규모를 인정하지 않고있습니다.

심지어 학살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난징 침략을 진출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한 자료를 '난징'에서 일어났다는 증거가 없으니 난징 대학살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지 '증거 사진이 없으니 난징 대학살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허무맹랑하고 비약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본 극우, 부정파들은

'난징 대학살은 연합국과 중국이 일본군을 비방하기 위해 정보전, 선전용으로 날조한 것이며

일본 국민들에게 범죄 의식, 잘못했다는 의식 등을 심어주기 위한 선전용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게 일본을 비방하고 침몰시키기 위한 모략'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인간에 대해 악랄한 학살을 자행해놓고 현재까지도 일본은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어떤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있으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는 여태까지 학살의 규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영화 [욘 라베] 中

 

 

 

 

-난징 대학살 사건일지

 

 

1937년 10월, 일본군, 지난 점령.1937년 11월, 프랑스인 로마 가톨릭교회 자퀴노 드 베 사제, 상하이에 중립 지대 선포. 상하이 함락.

W.플러머 밀스의 제안으로 난징안전지대설치. 욘 라베(존 라베), 히틀러에게 난징의 상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냄.

국민당 탕셩즈 장군은 기자회견을 열고 난징 결사항전 선언.

1937년 12월 5일 아사카 야스히코, 도쿄 출발

1937년 12월 7일 마쓰이 이와네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지휘권이 아사카 야스히코에 넘어감. 100인 참수 경쟁 관련 기사 게재.

1937년 12월 8일 장제스, 난징 철수.

1937년 12월 9일 미국의 경비정인 파나이호 난징 철수. 난징국제위원회가 3일간의 휴전교섭을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이에 응하지 않고 일본은 폭격의 강도를 더욱 강화.

1937년  12월 11일 장제스, 탕셩즈 장군에 퇴각 명령.

1937년  12월 12일 일본해군, 난징 부근 양쯔강에서 미해군 경비정 파나이호 격침.(파나이사건)

1937년 12월 13일 난징 함락, 일본군 66대대에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 전달.

1937년 12월 17일 마쓰이 이와네, 난징 도착.

1937년  12월 24일 모든 민간인은 통행증을 받아야 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짐.

1937년 12월 28일 민간인 등록 시작.

1938년 1월 1일 친일성향인 난징자치위원회 구성.

1939년 4월, 1644부대중심으로 생체실험 실시.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를 수반으로 친일성향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수립.

1944년 3월, UN조사위 구성. 극동지역 소위원회 개설.

1945년 7월 26일, 연합군(미,영,중), 일본에 대해 포츠담 선언 발표.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일주일 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1945년 9월 9일  일본, 항복문서 서명.

1946년 8월 ~ 1947년 2월, 난징전범재판으로 B급, C급 전범 재판.

1946년 5월 3일, 극동국제군사재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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