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7. ‘바람’으로 탄생한 최초의 ‘시민’ 대통령 ⑵
대모달201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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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의 신호탄 그리고 예고된 수구반동과의 전쟁
노무현은 집권 초기에 수행해야 할 우선과제로 검찰과 언론 그리고 정치 개혁을 꼽았다. 특히 인권변호사 시절에 검찰의 문제점을 절실하게 겪었던 그는 검찰개혁에 공을 들였다.
법무부 장관에 판사 출신의 강금실 변호사가 임명되고, 이어서 3월 6일 검찰에 통보된 ‘법무부 인사지침’이 알려지면서 이른바 검찰의 ‘인사파동’이 시작되었다. 말이 ‘인사파동’이지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전국 평검사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집단성명을 내는 등 파문이 일었다. 강 장관이 사시 17기를 법무부 차관에 내정한 데 이어, 검찰 고위간부 인사를 앞두고 파격적인 인사지침을 내놓자 대검 간부를 포함한 검사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인사권에 도전한 것이다.
검찰개혁 첫 단계에서부터 도전을 받게 된 노무현은 인사문제를 둘러싼 검찰의 집단반발 사태와 관련하여 강경하게 대응했다. 주동검사들에게 “징계사유에 해당된다면 징계하겠다”고 천명했다. 검찰이 기득권에 안주하여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의 소리를 외면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 인사와 개혁을 장관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대통령 인사권에 도전하는 상황이어서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면서, 문제를 제기한 검사들이 면담을 원할 경우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과 면담 대표로 선정된 50명의 평검사들과의 공개토론회가 3월 9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공중파 TV방송이 중계하는 가운데 열렸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검찰개혁을 위해 구시대의 낡은 경험을 벗지 못한 사람들, 개인적으로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빨리 교체하는 것이 개혁의 지름길”이라고 천명했다. 군사독재 시대에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국민의 인권을 짓밟아온 검사들을 퇴출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발언에 나선 어느 검사가 “취임 전 유세 당시, 부산 동부지청에 청탁 전화를 넣지 않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노무현은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지요”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한때 이 말이 시중에 회자되고 대통령이 조롱되기도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의 대화’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자 “상상할 수 없는 발언들도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마무리했다.
노무현은 김각영 검찰총장이 대통령의 검찰 수뇌부에 대한 불신임 표명과 검찰 인사파동 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후임으로 송광수 대구고검장을 지명햇다. 한편 법무부는 대검차장에 김종빈 대검 중수부장을 승진 발령하고, 법무부 차관에 정상명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임명하는 등 검사장급 이상 고위 간부 38명에 대한 대규모 전보인사를 단행했다.
노무현은 3월 17일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정부와 검찰간의 과거 유착관계를 확실히 청산하자”고 강조하면서 “검찰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두려워하고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권을 두려워하는 관계, 그러다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서로 협의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언급했다.
노무현은 역대 권력자들이 정권안보의 도구로 이용해온 검찰권을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검찰의 자율에 맡기고자 했다. 그리고 검찰의 자정을 바랐다. 하지만 폭압정권에는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던 검찰이 민주정권에는 오만무례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홍윤기는 한국 검찰의 그런 일그러진 행태를 개탄했다. “광주항쟁 때 누구도 계엄군에게 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고 발뺌하는 데 총탄은 병사들 총부리에 자발적으로 튀어나갔다고, 그래서 애초 광주학살이 성공한 쿠데타라고 했다가 금세 반국가 변란이라고 손바닥 뒤집듯 견해를 바꾼 대한민국 검찰은 끝내 발포 주동자를 찾지 못했다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고 지금껏 산다.”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처럼 특정 언론으로부터 심한 왜곡보도와 색깔론에 시달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끝까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서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중에 중앙일간지에 대해 세무조사를 했다가 사주 일가의 탈세·횡령 등은 덮어둔 채 ‘언론탄압’ 타령만 일삼는 이들의 역공에 시달려야 했다. 노무현은 취임 초부터 언론개혁을 서둘렀다. 어디까지나 신문이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언론이 언론 본분을 잃고 언론권력으로 행세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오래 전부터의 생각이었다.
그는 “새 정부에서는 기존의 정권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완전히 끊고 원칙대로 해나갈 생각이다. 취임 후 한두 달 안에 저녁 가판 구독을 전부 금지할 것이며 정부 각 부처도 마찬가지다. 언론과 비정상적 협상을 일체 금지하는 대신 사실과 다른 보도에 대해 원칙대로 정정ㆍ반론 보도를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또 “정부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언론과 약간의 긴장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적당하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식으로 넘어가지 말 것”이며, “앞으로 정부 각 부처는 정책상황 보고와 함께 자기 부처 업무와 관련된 언론보도 중 오보성 기사와 왜곡보도에 대한 사안별 대응조치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밖에도 그는 “언론은 구조적으로 대단히 집중된 권력을 갖고 있지만 국민으로부터 검증이나 감사받은 적이 없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 검증받지 않은 권력은 대단히 위험하다” “군사정권이 끝난 후에도 몇몇 족벌 언론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다. 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받아왔고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론개혁은 언론 스스로, 그리고 국민 사이에서 시대의 기운처럼 일어나야 할 문제이지 정부가 정책을 내놓고 깃발을 흔드는 것은 언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론이 정치권력을 탄생시키겠다는 생각이나 무의식적으로라도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부나 언론이) 누가 더 쎈가 힘겨루기를 하다 보면 누구도 승리할 수 없으며, 서로가 공존하는 방법을 익히지 않고 뭔가를 바꾸려 한다면 서로가 어려울 것이다” “언론보도는 각종 정보기관의 보고보다 훨씬 정보가치가 있어서 중요하며 언론보도는 정부활동에 대한 국민적 평가와도 관련돼 있으므로 더욱 중요하다” “공직사회가 합리적이지 않은 강자의 힘에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 권력과 언론이 ‘강자 카르텔’을 형성하지 않도록 절제해 달라” “언론이 공정한 의제와 정확한 정보, 냉정한 논리를 갖고 ‘공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언론과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빚어져도 감수하고 해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정권과 언론은 소위 야합의 관계였고, 그것을 고치자는 것이다. 나는 언론을 탄압할 힘도 의지도 없다. 다만 언론과 적당하게 지내지 않는 대통령일 뿐이다” 등의 발언을 통해 언론개혁의 의지를 피력했다.
노무현은 언론의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론의 공정한 보도와 진실된 비판을 요구한 것이다. 권력이 언론과 유착하거나 ‘언론의 권력화’를 비판하고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각료, 청와대 비서진 그리고 공직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투명하게 일하고, 비리 때문에 언론과 유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참여정부는 3월 14일 개방·공평·정보공개의 원칙에 따라 출입기자제를 일정 요건을 갖춘 모든 매체에 개방하는 등록제로 전환하고, 기자실을 없애는 대신 브리핑룸을 만들어 정레 브리핑을 시행하겠다는 ‘기자실 운영방안’을 내놓았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각 부처에 그 동안의 관행에 따라 특정 언론사 기자들만 출입이 허용되고 지방지나 특수지, 신생 인터넷 매체의 기자들은 출입이 제한되거나 기자단 출입이 불허되는 등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조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성명을 내고 언론의 취재가 극심한 제한을 받게 되고 국민의 알 권리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족벌신문들은 ‘언론탄압’이라고 몰아갔다.
노무현 정권은 언론탄압이나 유착관계 대신 언론의 오보나 왜곡 보도에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정부 출범 이후 7월까지 5개월 동안 청와대가 언론 왜곡보도에 법적 대응을 한 건수는 언론중재위 정정보도 청구 4건, 명예훼손 고소 1건, 정정보도 청구 1건 등 총 20건에 이르렀다. 정부수립 이후 크게 달라진 정부와 언론관계의 현주소였다.
민주당의 국민경선 과정에서부터 노무현에 적대적이었던 일부 족벌신문들은 서구 선진국들에서 지켜온 새 정부 출범 1년의 스위트홈 기간은커녕 출범 직후부터 온갖 비난과 음해를 일삼았다. 이 같은 행태는 집권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그가 야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청부사 노릇을 했다.
● 뜨거운 감자, 대북송금 특검 그리고 이라크 파병
노무현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국회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되어 좌지우지했다. 취임 당일인 2월 25일부터 국회는 한나라당이 제안한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검법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의견 차이로 본회의조차 열지 못했다. 이튿날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특검법안을 변칙 처리하여 노무현 정권에 파상적인 공세를 취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송두환의 특별검사팀이 구성되어 4월 중순부터 70일간 수사가 진행되고, 김대중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북화해정책(햇볕정책)이 샅샅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핵심 측근인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구속되었다.
이로써 한때 전·현직 대통령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되고, DJ 지지층에서 노무현을 원망하는 기류가 확산되었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으로 기소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장이 현대사옥에서 투신자살하여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6대 대선 과정에서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 6·15남북정상회담 전후로 청와대·국정원·현대그룹이 공모해 거액을 북한에 송금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노무현 정권 출범과 함께 한나라당이 특검 구성안을 제기하여 특검이 구성되었다. 특검 결과 대북송금 5억 달러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현대그룹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이슈가 된 배경에 의문이 따랐다. 특검의 수사관 중 한 명이었던 김승교 변호사는 대북송금 폭로 배경에 의문을 제시했다. “대북송금 의혹의 최초 폭로자가 미국이며 이 폭로로부터 특검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 이 폭로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미국의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다. 당시 코앞에 닥친 한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대선에 개입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대선 직전에 김대중 정권의 큰 업적으로 꼽히는 대북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미국이 제기하고, 이것을 <월간조선>이 대서특필하면서 한나라당이 이슈화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북문제에 진보적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고 미국의 부시 정권이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당선되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정권에서 특검이 구성되어 김대중 정권의 대북사업 관련 핵심 인사들이 속속 구속된 것이다.˝ - 김삼웅,『후광 김대중 평전』, 시대의 창, 2010년, 418쪽.
특검을 통해서 각종 의혹과 정치공세 내용이 대부분 허위로 드러났다. 특검의 김승교 변호사는 뒷날 “수사 결과 발표와 달리 언론은 대체로 특검팀이 대북송금을 정상회담 대가로 결론 내린 것처럼 단정적으로 보도해 많은 사람들이 정상회담 대가로 이해하는 듯 하다”며 왜곡 보도한 일부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수사결과대로 ‘송금이 정상회담과 연관성이 있다’는 정도를 넘어 ‘정상회담 대가’로 보기는 어려우며 ‘정책적 차원의 대북지원금’정도로 보는 게 무난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족벌신문들은 김대중이 서거한 뒤에도 이 사건을 ‘5억 달러 퍼주기’로 왜곡보도를 그치지 않았다.
노무현이 특검을 받아들인 이유로는 새 정부 출범과 때를 같이하여 제기한 한나라당과의 관계 정상화, 전 정부와의 차별성, 새 정부의 대북관계를 지연시키려는 미국 측의 작용, 이 기회에 이른바 ‘대북송금’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지적되었다. 이 사건으로 노무현은 상당한 정치적 상처를 입게 되었다. 김대중 측과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배신감’을 갖게 하고, 대북관계를 풀어가는 데도 상당기간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취임식 바로 다음날 여의도에서 ‘고약한 선물’이 왔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던 한나라당이 ‘대북송금특검법안’을 단독처리해 정부로 보낸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때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몰래 북으로 보낸 것이 문제였다. 박지원 청와대비서실장이 산업은행을 통해 그 돈을 송금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청와대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이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지만 나는 특검법안을 수용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30쪽.
앞에서 노무현이 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로 거론된 몇 가지를 언급했는데, 사실 그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주셔야 했다.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역사 앞에 부끄럼이 없다. 법 위반은 작은 것이고 남북관계는 큰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참모가 대통령 모르게 한 일까지 ‘통치행위론’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31쪽~232쪽.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승계하겠다고 다짐해온 노무현에게 대북송금 특검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결국 이는 두 진영 사이에 감정의 골을 남겼지만, 그에게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고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송두환 특검은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 문제만 정확하게 수사했다. 다른 것은 손대지 않아 남북관계에도 큰 타격은 없었다. 박지원 실장을 비롯해서 유죄 선고를 받은 모든 관련자들을 형이 확정되자마자 사면했다. 나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결과도 가장 바람직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실장에게도 전후 사정을 다 설명해드렸다. 김 대통령도 처음에는 서운해하셨지만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나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이간시키려 했다.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취임 첫해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 문제 등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미국은 이라크 파병을 요청하면서 과거에도 늘 그랬듯이 남한 주둔 미국군 제2사단 재배치와 감축문제를 파병문제와 연계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남한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있어서 북한을 압도하면서도 안보의 절대적인 비중을 남한 주둔 미국군의 존재에 두었다. 역대 보수정권이 꾸준히 주창하고 세뇌해온 대미의존의 당연성이 부지불식간에 국민 일반에게 그대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대외 파병은 1964년~73년의 베트남 파병으로부터 1991년의 소말리아 파병(공병대대), 1994년의 서부사하라(의료지원단), 그루지아(군 옵서버), 인도·파키스탄 파병(군 옵서버), 1995년~97년 앙골라 파병(공병대대), 1999년 동티모르 파병(보병부대), 2001년 아프가니스탄 파병(해·공군 수송지원단과 공병, 의료진) 등은 하나같이 정부가 내세운 명분과는 상관없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그때마다 ‘주한미군병력 감축’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위협’했고, 수구세력은 이에 장단을 맞춰 해외 파병을 지지하고, 이를 반대하면 반미 또는 좌경으로 매도했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 직면한 ‘대통령’ 노무현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자주국방의 원칙과 전시작전지휘권(전작권) 조기 회수 등을 구상해온 터였기에 고뇌는 더욱 깊었다.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요청과 수구세력의 압력, 자신을 지지해 온 진보진영의 반대가 확연하게 대치하는 중차대한 사안이 되었다. 미국은 독자적 작전수행 능력을 갖춘 전투병력의 파병을 요청해왔다.
정부는 3월 21일 대통령 주재로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600명 규모의 국군 건설공병지원단과 100명 안쪽의 의무지원단을 이라크에 파병하는 내용의 국군부대 이라크 전쟁 파견동의안을 의결하여 국회에 이송했다. 이라크 파병동의안이 국회로 넘어가자 진보·보수 단체 간에 파병 저지와 파병 촉구 시위 및 집회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비롯 광화문 광장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노무현은 4월 2일 취임 후 첫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이라크전 파병 결정과 관련하여 “명분을 앞세워 한미관계를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것보다 우호관계와 동맹의 도리를 존중해 어려울 때 미국을 도와주고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히고,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조속히 처리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날 국회는 파병동의안을 본회의 표결에 부쳐 찬성 179표, 반대 68표, 기권 9표로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정부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전비 투입과 인명 희생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내부에서 반전운동도 점점 거세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 정권은 한국에 전투병 5천명의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으로서는 갈수록 어려운 부담일 수밖에 없는 외교적 딜레마였다. 이라크 파병은 역설적으로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으로부터 찬성·지지를 받게 되고, 진보민주진영으로부터는 반대·비판을 받게 되었다.
노무현은 뒷날 오연호〈오마이뉴스〉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파병의 문제는,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보아도 우리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어려웠던 입장을 토로했다.
노무현은 집권 초기에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다. 참모들과 전문가들을 불러 이해득실을 따지고, 거부했을 경우 전개될 한미관계와 안보 문제 등을 폭넓게 점검했다. 그 결과 그는 ‘오류’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파병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당해 “대통령 자리가 참 어렵고 무겁다”고 토로했다. “그 당시 나는 대통령이 역사에 오류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기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스스로 이것은 역사에 오류로 남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가 있구나. 그런 것을 새삼 느끼면서 아, 대통령 자리가 참 어렵고 무겁다.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이 불가피하다면,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어쩔 수 없이 보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 파병외교는 아주 효율적인 외교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당시에 특히 한국의 보수진영에서는 적어도 1만명 이상을 전투병부대로 보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청와대 안에서도 생각이 두 쪽으로 쫙 갈라져 있었다. 안보팀에서는 1만명 이상 보내자는 거고, 다른 쪽에서는 안 된다고 했고…. 결국 전투병인데 비전투 임무로 3천명을 보내게 된 것이다.”
노무현 행정부는 2004년 6월 3천명의 비전투병력을 이라크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 키르쿠크에 파견될 부대의 공식명칭은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으로 하고, 상징 명칭은 올리브를 의미하는 아랍어 ‘자이툰’으로 정했다. ‘자이툰’ 부대 파병을 둘러싸고 진보진영에서는 노무현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노무현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대북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 문제로 지지층의 이반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7. ‘바람’으로 탄생한 최초의 ‘시민’ 대통령 ⑵
● 개혁의 신호탄 그리고 예고된 수구반동과의 전쟁
노무현은 집권 초기에 수행해야 할 우선과제로 검찰과 언론 그리고 정치 개혁을 꼽았다. 특히 인권변호사 시절에 검찰의 문제점을 절실하게 겪었던 그는 검찰개혁에 공을 들였다.
법무부 장관에 판사 출신의 강금실 변호사가 임명되고, 이어서 3월 6일 검찰에 통보된 ‘법무부 인사지침’이 알려지면서 이른바 검찰의 ‘인사파동’이 시작되었다. 말이 ‘인사파동’이지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전국 평검사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집단성명을 내는 등 파문이 일었다. 강 장관이 사시 17기를 법무부 차관에 내정한 데 이어, 검찰 고위간부 인사를 앞두고 파격적인 인사지침을 내놓자 대검 간부를 포함한 검사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인사권에 도전한 것이다.
검찰개혁 첫 단계에서부터 도전을 받게 된 노무현은 인사문제를 둘러싼 검찰의 집단반발 사태와 관련하여 강경하게 대응했다. 주동검사들에게 “징계사유에 해당된다면 징계하겠다”고 천명했다. 검찰이 기득권에 안주하여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의 소리를 외면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 인사와 개혁을 장관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대통령 인사권에 도전하는 상황이어서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면서, 문제를 제기한 검사들이 면담을 원할 경우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과 면담 대표로 선정된 50명의 평검사들과의 공개토론회가 3월 9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공중파 TV방송이 중계하는 가운데 열렸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검찰개혁을 위해 구시대의 낡은 경험을 벗지 못한 사람들, 개인적으로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빨리 교체하는 것이 개혁의 지름길”이라고 천명했다. 군사독재 시대에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국민의 인권을 짓밟아온 검사들을 퇴출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발언에 나선 어느 검사가 “취임 전 유세 당시, 부산 동부지청에 청탁 전화를 넣지 않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노무현은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지요”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한때 이 말이 시중에 회자되고 대통령이 조롱되기도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의 대화’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자 “상상할 수 없는 발언들도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마무리했다.
노무현은 김각영 검찰총장이 대통령의 검찰 수뇌부에 대한 불신임 표명과 검찰 인사파동 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후임으로 송광수 대구고검장을 지명햇다. 한편 법무부는 대검차장에 김종빈 대검 중수부장을 승진 발령하고, 법무부 차관에 정상명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임명하는 등 검사장급 이상 고위 간부 38명에 대한 대규모 전보인사를 단행했다.
노무현은 3월 17일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정부와 검찰간의 과거 유착관계를 확실히 청산하자”고 강조하면서 “검찰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두려워하고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권을 두려워하는 관계, 그러다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서로 협의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언급했다.
노무현은 역대 권력자들이 정권안보의 도구로 이용해온 검찰권을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검찰의 자율에 맡기고자 했다. 그리고 검찰의 자정을 바랐다. 하지만 폭압정권에는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던 검찰이 민주정권에는 오만무례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홍윤기는 한국 검찰의 그런 일그러진 행태를 개탄했다. “광주항쟁 때 누구도 계엄군에게 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고 발뺌하는 데 총탄은 병사들 총부리에 자발적으로 튀어나갔다고, 그래서 애초 광주학살이 성공한 쿠데타라고 했다가 금세 반국가 변란이라고 손바닥 뒤집듯 견해를 바꾼 대한민국 검찰은 끝내 발포 주동자를 찾지 못했다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고 지금껏 산다.”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처럼 특정 언론으로부터 심한 왜곡보도와 색깔론에 시달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끝까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서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중에 중앙일간지에 대해 세무조사를 했다가 사주 일가의 탈세·횡령 등은 덮어둔 채 ‘언론탄압’ 타령만 일삼는 이들의 역공에 시달려야 했다. 노무현은 취임 초부터 언론개혁을 서둘렀다. 어디까지나 신문이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언론이 언론 본분을 잃고 언론권력으로 행세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오래 전부터의 생각이었다.
그는 “새 정부에서는 기존의 정권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완전히 끊고 원칙대로 해나갈 생각이다. 취임 후 한두 달 안에 저녁 가판 구독을 전부 금지할 것이며 정부 각 부처도 마찬가지다. 언론과 비정상적 협상을 일체 금지하는 대신 사실과 다른 보도에 대해 원칙대로 정정ㆍ반론 보도를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또 “정부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언론과 약간의 긴장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적당하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식으로 넘어가지 말 것”이며, “앞으로 정부 각 부처는 정책상황 보고와 함께 자기 부처 업무와 관련된 언론보도 중 오보성 기사와 왜곡보도에 대한 사안별 대응조치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밖에도 그는 “언론은 구조적으로 대단히 집중된 권력을 갖고 있지만 국민으로부터 검증이나 감사받은 적이 없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 검증받지 않은 권력은 대단히 위험하다” “군사정권이 끝난 후에도 몇몇 족벌 언론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다. 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받아왔고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론개혁은 언론 스스로, 그리고 국민 사이에서 시대의 기운처럼 일어나야 할 문제이지 정부가 정책을 내놓고 깃발을 흔드는 것은 언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론이 정치권력을 탄생시키겠다는 생각이나 무의식적으로라도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부나 언론이) 누가 더 쎈가 힘겨루기를 하다 보면 누구도 승리할 수 없으며, 서로가 공존하는 방법을 익히지 않고 뭔가를 바꾸려 한다면 서로가 어려울 것이다” “언론보도는 각종 정보기관의 보고보다 훨씬 정보가치가 있어서 중요하며 언론보도는 정부활동에 대한 국민적 평가와도 관련돼 있으므로 더욱 중요하다” “공직사회가 합리적이지 않은 강자의 힘에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 권력과 언론이 ‘강자 카르텔’을 형성하지 않도록 절제해 달라” “언론이 공정한 의제와 정확한 정보, 냉정한 논리를 갖고 ‘공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언론과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빚어져도 감수하고 해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정권과 언론은 소위 야합의 관계였고, 그것을 고치자는 것이다. 나는 언론을 탄압할 힘도 의지도 없다. 다만 언론과 적당하게 지내지 않는 대통령일 뿐이다” 등의 발언을 통해 언론개혁의 의지를 피력했다.
노무현은 언론의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론의 공정한 보도와 진실된 비판을 요구한 것이다. 권력이 언론과 유착하거나 ‘언론의 권력화’를 비판하고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각료, 청와대 비서진 그리고 공직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투명하게 일하고, 비리 때문에 언론과 유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참여정부는 3월 14일 개방·공평·정보공개의 원칙에 따라 출입기자제를 일정 요건을 갖춘 모든 매체에 개방하는 등록제로 전환하고, 기자실을 없애는 대신 브리핑룸을 만들어 정레 브리핑을 시행하겠다는 ‘기자실 운영방안’을 내놓았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각 부처에 그 동안의 관행에 따라 특정 언론사 기자들만 출입이 허용되고 지방지나 특수지, 신생 인터넷 매체의 기자들은 출입이 제한되거나 기자단 출입이 불허되는 등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조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성명을 내고 언론의 취재가 극심한 제한을 받게 되고 국민의 알 권리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족벌신문들은 ‘언론탄압’이라고 몰아갔다.
노무현 정권은 언론탄압이나 유착관계 대신 언론의 오보나 왜곡 보도에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정부 출범 이후 7월까지 5개월 동안 청와대가 언론 왜곡보도에 법적 대응을 한 건수는 언론중재위 정정보도 청구 4건, 명예훼손 고소 1건, 정정보도 청구 1건 등 총 20건에 이르렀다. 정부수립 이후 크게 달라진 정부와 언론관계의 현주소였다.
민주당의 국민경선 과정에서부터 노무현에 적대적이었던 일부 족벌신문들은 서구 선진국들에서 지켜온 새 정부 출범 1년의 스위트홈 기간은커녕 출범 직후부터 온갖 비난과 음해를 일삼았다. 이 같은 행태는 집권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그가 야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청부사 노릇을 했다.
● 뜨거운 감자, 대북송금 특검 그리고 이라크 파병
노무현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국회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되어 좌지우지했다. 취임 당일인 2월 25일부터 국회는 한나라당이 제안한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검법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의견 차이로 본회의조차 열지 못했다. 이튿날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특검법안을 변칙 처리하여 노무현 정권에 파상적인 공세를 취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송두환의 특별검사팀이 구성되어 4월 중순부터 70일간 수사가 진행되고, 김대중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북화해정책(햇볕정책)이 샅샅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핵심 측근인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구속되었다.
이로써 한때 전·현직 대통령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되고, DJ 지지층에서 노무현을 원망하는 기류가 확산되었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으로 기소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장이 현대사옥에서 투신자살하여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6대 대선 과정에서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 6·15남북정상회담 전후로 청와대·국정원·현대그룹이 공모해 거액을 북한에 송금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노무현 정권 출범과 함께 한나라당이 특검 구성안을 제기하여 특검이 구성되었다. 특검 결과 대북송금 5억 달러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현대그룹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이슈가 된 배경에 의문이 따랐다. 특검의 수사관 중 한 명이었던 김승교 변호사는 대북송금 폭로 배경에 의문을 제시했다. “대북송금 의혹의 최초 폭로자가 미국이며 이 폭로로부터 특검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 이 폭로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미국의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다. 당시 코앞에 닥친 한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대선에 개입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대선 직전에 김대중 정권의 큰 업적으로 꼽히는 대북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미국이 제기하고, 이것을 <월간조선>이 대서특필하면서 한나라당이 이슈화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북문제에 진보적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고 미국의 부시 정권이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당선되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정권에서 특검이 구성되어 김대중 정권의 대북사업 관련 핵심 인사들이 속속 구속된 것이다.˝ - 김삼웅,『후광 김대중 평전』, 시대의 창, 2010년, 418쪽.
특검을 통해서 각종 의혹과 정치공세 내용이 대부분 허위로 드러났다. 특검의 김승교 변호사는 뒷날 “수사 결과 발표와 달리 언론은 대체로 특검팀이 대북송금을 정상회담 대가로 결론 내린 것처럼 단정적으로 보도해 많은 사람들이 정상회담 대가로 이해하는 듯 하다”며 왜곡 보도한 일부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수사결과대로 ‘송금이 정상회담과 연관성이 있다’는 정도를 넘어 ‘정상회담 대가’로 보기는 어려우며 ‘정책적 차원의 대북지원금’정도로 보는 게 무난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족벌신문들은 김대중이 서거한 뒤에도 이 사건을 ‘5억 달러 퍼주기’로 왜곡보도를 그치지 않았다.
노무현이 특검을 받아들인 이유로는 새 정부 출범과 때를 같이하여 제기한 한나라당과의 관계 정상화, 전 정부와의 차별성, 새 정부의 대북관계를 지연시키려는 미국 측의 작용, 이 기회에 이른바 ‘대북송금’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지적되었다. 이 사건으로 노무현은 상당한 정치적 상처를 입게 되었다. 김대중 측과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배신감’을 갖게 하고, 대북관계를 풀어가는 데도 상당기간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취임식 바로 다음날 여의도에서 ‘고약한 선물’이 왔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던 한나라당이 ‘대북송금특검법안’을 단독처리해 정부로 보낸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때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몰래 북으로 보낸 것이 문제였다. 박지원 청와대비서실장이 산업은행을 통해 그 돈을 송금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청와대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이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지만 나는 특검법안을 수용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30쪽.
앞에서 노무현이 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로 거론된 몇 가지를 언급했는데, 사실 그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주셔야 했다.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역사 앞에 부끄럼이 없다. 법 위반은 작은 것이고 남북관계는 큰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참모가 대통령 모르게 한 일까지 ‘통치행위론’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31쪽~232쪽.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승계하겠다고 다짐해온 노무현에게 대북송금 특검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결국 이는 두 진영 사이에 감정의 골을 남겼지만, 그에게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고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송두환 특검은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 문제만 정확하게 수사했다. 다른 것은 손대지 않아 남북관계에도 큰 타격은 없었다. 박지원 실장을 비롯해서 유죄 선고를 받은 모든 관련자들을 형이 확정되자마자 사면했다. 나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결과도 가장 바람직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실장에게도 전후 사정을 다 설명해드렸다. 김 대통령도 처음에는 서운해하셨지만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나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이간시키려 했다.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취임 첫해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 문제 등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미국은 이라크 파병을 요청하면서 과거에도 늘 그랬듯이 남한 주둔 미국군 제2사단 재배치와 감축문제를 파병문제와 연계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남한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있어서 북한을 압도하면서도 안보의 절대적인 비중을 남한 주둔 미국군의 존재에 두었다. 역대 보수정권이 꾸준히 주창하고 세뇌해온 대미의존의 당연성이 부지불식간에 국민 일반에게 그대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대외 파병은 1964년~73년의 베트남 파병으로부터 1991년의 소말리아 파병(공병대대), 1994년의 서부사하라(의료지원단), 그루지아(군 옵서버), 인도·파키스탄 파병(군 옵서버), 1995년~97년 앙골라 파병(공병대대), 1999년 동티모르 파병(보병부대), 2001년 아프가니스탄 파병(해·공군 수송지원단과 공병, 의료진) 등은 하나같이 정부가 내세운 명분과는 상관없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그때마다 ‘주한미군병력 감축’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위협’했고, 수구세력은 이에 장단을 맞춰 해외 파병을 지지하고, 이를 반대하면 반미 또는 좌경으로 매도했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 직면한 ‘대통령’ 노무현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자주국방의 원칙과 전시작전지휘권(전작권) 조기 회수 등을 구상해온 터였기에 고뇌는 더욱 깊었다.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요청과 수구세력의 압력, 자신을 지지해 온 진보진영의 반대가 확연하게 대치하는 중차대한 사안이 되었다. 미국은 독자적 작전수행 능력을 갖춘 전투병력의 파병을 요청해왔다.
정부는 3월 21일 대통령 주재로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600명 규모의 국군 건설공병지원단과 100명 안쪽의 의무지원단을 이라크에 파병하는 내용의 국군부대 이라크 전쟁 파견동의안을 의결하여 국회에 이송했다. 이라크 파병동의안이 국회로 넘어가자 진보·보수 단체 간에 파병 저지와 파병 촉구 시위 및 집회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비롯 광화문 광장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노무현은 4월 2일 취임 후 첫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이라크전 파병 결정과 관련하여 “명분을 앞세워 한미관계를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것보다 우호관계와 동맹의 도리를 존중해 어려울 때 미국을 도와주고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히고,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조속히 처리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날 국회는 파병동의안을 본회의 표결에 부쳐 찬성 179표, 반대 68표, 기권 9표로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정부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전비 투입과 인명 희생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내부에서 반전운동도 점점 거세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 정권은 한국에 전투병 5천명의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으로서는 갈수록 어려운 부담일 수밖에 없는 외교적 딜레마였다. 이라크 파병은 역설적으로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으로부터 찬성·지지를 받게 되고, 진보민주진영으로부터는 반대·비판을 받게 되었다.
노무현은 뒷날 오연호〈오마이뉴스〉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파병의 문제는,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보아도 우리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어려웠던 입장을 토로했다.
노무현은 집권 초기에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다. 참모들과 전문가들을 불러 이해득실을 따지고, 거부했을 경우 전개될 한미관계와 안보 문제 등을 폭넓게 점검했다. 그 결과 그는 ‘오류’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파병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당해 “대통령 자리가 참 어렵고 무겁다”고 토로했다. “그 당시 나는 대통령이 역사에 오류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기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스스로 이것은 역사에 오류로 남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가 있구나. 그런 것을 새삼 느끼면서 아, 대통령 자리가 참 어렵고 무겁다.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이 불가피하다면,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어쩔 수 없이 보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 파병외교는 아주 효율적인 외교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당시에 특히 한국의 보수진영에서는 적어도 1만명 이상을 전투병부대로 보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청와대 안에서도 생각이 두 쪽으로 쫙 갈라져 있었다. 안보팀에서는 1만명 이상 보내자는 거고, 다른 쪽에서는 안 된다고 했고…. 결국 전투병인데 비전투 임무로 3천명을 보내게 된 것이다.”
노무현 행정부는 2004년 6월 3천명의 비전투병력을 이라크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 키르쿠크에 파견될 부대의 공식명칭은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으로 하고, 상징 명칭은 올리브를 의미하는 아랍어 ‘자이툰’으로 정했다. ‘자이툰’ 부대 파병을 둘러싸고 진보진영에서는 노무현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노무현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대북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 문제로 지지층의 이반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