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치유12) 종교적 신념의 불행

소검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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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신념의 불행

 

인간의 본질로부터 존재론적 본능은 어떠한 결점도 없이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구체적인 갖춤은, 정신으로부터 영혼의 본질에 따른 씨를 틔워 키울 수 있고, 마음으로부터 영혼의 실체를 실체적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키울 수 있으며, 소리로부터 정신의 빛을 더하고 마음의 색을 밝게 하며 정신과 마음의 조화를 이루어 영혼을 성숙시킬 수 있다. 이 이상 완벽한 이치적 본능은 없으며,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영혼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인간의 본질적 본능을 갖추게 한 것이다.

   인간이 정신을 쓸 때 하늘은 빛을 더해주고, 인간이 마음을 다스릴 때 땅은 색을 더해주며, 인간이 소리를 다스릴 때 공기는 색채적 기운을 더해준다. 인간이 이러한 완벽한 존재론적 본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존재론적 자아인 영혼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것은, 정신과 마음과 소리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빛과 땅의 색과 공기의 색채적 기운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이치를 말하며, 이러한 진리는 보편타당한 하느님의 길에서 이루어진다. 보편타당한 하느님의 길이란, 인간의 감성에 의하여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루는 길을 말하며,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존재론적 자아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말한다. 또한 인간의 도리에 맞는 길을 말하며, 인간의 도덕률과 상식에 맞는 길을 말한다.

   그러나 종교적 대상인 그 대상 자체를 진리라고 말하고, 종교적 신앙이 진리를 믿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실천적 신앙의 삶이 진리를 실천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진리를 뜬구름 잡듯 만들어놓고, 인간의 이성을 망각하게 하여 영혼을 잃도록 만들어 하느님의 길을 단절시키고, 인간의 감성을 사악하게 하여 영혼을 악의 영혼으로 만드니, 그리하여 인간의 현재론적 행복과 존재론적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본질에 갖추어진 믿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영혼을 잃게 되면, 허무와 좌절에 떨어져 불의의 사고나 심적고통을 견지지 못하고 자살행위를 하기도 하게 된다. 인간이 존재론적 영혼을 잃는 가장 심각한 원인이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니, 진리를 이루기 위한 것이 인간의 삶이며, 진리의 길을 안내해야하는 것이 종교이지만, 오히려 종교에 인간의 삶을 빼앗기고 종교에서 진리를 찾고 종교에서 진리를 이루려하는 것에서, 진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해서 불행한 삶과 영혼을 잃는 부재의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다스림에서 행복한 현재의 삶과 존재의 결실을 이룰 수 있으며,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이성이나 감성을 배제한 어떠한 길에도 행복한 삶과 영혼의 탄생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데 종교적 신앙으로 행복한 삶을 이루고 영혼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보완적 약점 아닌 약점을 이용하여 영혼을 잃게 만들고, 불행한 삶의 늪에 빠지게 하려는 간악한 짓임을 알아야 한다.

 

종교는 인간의 삶을 안내하는 것이고, 죽음을 안내하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 아니며, 종교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안내하는 것이고, 불행한 삶을 안내하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 아니다. 또한, 종교는 인간의 자기완성을 안내하는 것이고, 자기실패를 안내하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 아니며, 종교는 하느님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고, 귀신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러한즉, 인간은 종교의 본질을 분명히 알고, 인간의 길을 잃지 않는 인간세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종교가 인간의 삶을 안내한다고 하여 종교에 인간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며, 종교가 인간의 행복한 삶을 안내한다고 하여 종교에 인간의 행복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종교가 인간의 자기완성을 안내한다고 하여 종교에 인간의 자기완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종교가 하느님의 길을 안내한다고 하여 종교에 하느님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사는 것이며, 인간의 행복한 삶은 인간이 누리는 것이고, 인간의 자기완성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이루는 것이며,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은 인간이 가는 것이지 종교가 가는 것이 아님을 알라.

 

이것을 왜곡하여 인간의 삶과 존재론적 자아를 훼손시키는 종교는 악의 종교인즉, 귀신의 종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종교는 인간의 존재론적 삶을 안내하는 안내소이다. 그러한 안내는 산을 오르는 등산길을 안내하는 것과 같다. 그런즉 어떠한 종교가 있다하더라도 각자 그 길이 다를지는 모르지만 결국 산 정상에 도달하는 것은 같으며 또한 같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그러나 만약 “진정한 종교는 오직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왜곡한 편협된 악귀의 종교이기 때문이며,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思惟)가 아닌, 귀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시기와 질투의 사유(私有)로, 모든 것이 자기만의 소유라는 독단적 이기주의가 종교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렇게 되는 것은 산 정상을 오르는 산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지 못하는 길을 안내하여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니,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종교가 가상의 정상을 만들어 유일한 종교라고 하여 인간을 속이고, 그렇게 하여 속은 인간은 영혼을 잃게 되어 불행한 삶과 존재론적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고, 종교는 인간을 개선시킬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를 개선시키려 하는 것에서 인간의 본능을 무력하게 만들고, 종교적 이념에 따라 사회를 개선시키려 하는 것에서 세상은 불행하게 된다. 종교적 신념은 오로지 자기자신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며,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각자 그러한 노력에서 스스로 자기자신을 개선시킬 때, 사회는 인위적인 억압에 의한 고통스러운 불행한 역사를 만들지 않게 될 것임을 알라.

 

귀납적 두미왜곡(頭尾歪曲)

인간의 본능에 따른 이성의 본질은 자유며, 이성의 본질에 따른 자유에 의하여 믿음과 불신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믿음과 불신은 내부적 인간의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주체적 심성이며, 외부적 대상으로부터 발생하는 상대적 심성이 아니다. 그런데, 외부적 대상인 종교가 인간의 내부적 본질을 외부적 대상에 위치적 자리바꿈을 시켜 진리와 거짓을 왜곡한다. 하느님은 존재론적 절대진리며, 부모님은 현재론적 절대진리다.

   이러한 절대진리에는 믿음이나 불신이라는 말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종교적 대상을 놓고 창조주라고 하는 것은 존재론적 상대적 가설이며, 종교적 대상을 놓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은 현재론적 상대적 가설이다. 이러한 상대적 가설로 인하여 모든 종교가 각기 다른 종교적 대상을 놓고 믿음을 갖게 되며, 또한 불신을 갖게 된다.

 

진리와 거짓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귀납적 가설 중의 하나는, “무신론자의 무신론은 유신론으로부터 발생한 무신론인즉, 무신론이라는 말에는 벌써 유신론을 인정한 것.” 또는, “불신자의 불신은 믿음으로부터 발생한 불신인즉, 불신이라는 말에는 벌써 믿음을 인정한 것.” 이라고 하는 말이다.

 

‘가’ 라는 종교가 있고 ‘나’ 라는 종교가 있다면, ‘가’ 라는 종교를 믿는 것은 ‘나’ 라는 종교를 불신하는 것이며, ‘나’ 라는 종교를 믿는 것은 ‘가’라는 종교를 불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 라는 종교를 불신한다고 하여 ‘나’ 라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며, ‘나’ 라는 종교를 불신한다고 하여 ‘가’ 라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 라는 종교를 불신하는 것은 ‘가’ 라는 종교를 불신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불신은 ‘가’ 라는 종교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불신이기에 ‘가’ 라는 종교를 믿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편협적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정신착란을 일으킨 무지몽매한 인간의 말이다.

 

특정종교를 믿지 않는 것이 특정종교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특정종교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특정종교를 불신하는 것은 특정종교의 믿음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므로, 그 불신은 그 특정종교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에 의한 자기모순에 빠진 정신분열적 증상이 있는 인간의 말인 것이다.

   이것은, 뱀 머리가 뱀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행위와 같다. “뱀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뱀 꼬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즉, 뱀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꼬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며, 뱀 꼬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머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의 머리를 믿지 않는 것은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다.”, “거짓의 꼬리를 믿지 않는 것은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다.” 거짓의 머리를 믿지 않는 것이 거짓의 꼬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며, 거짓의 꼬리를 믿지 않는 것이 거짓의 머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믿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이며, 거짓을 믿는 것은 거짓을 믿는 것이다.”,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며,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은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진리를 믿는 것이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며, 거짓을 믿는 것이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 거짓을 믿는 것이 아니며,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믿는 것은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은 거짓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며, 거짓을 믿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것이, 머리와 꼬리의 자리바꿈에 진리와 거짓을 놓고 혼동시켜,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키는 두미왜곡(頭尾歪曲)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의 무신론은 유신론으로부터 발생한 무신론인즉, 무신론이라는 말에는 벌써 유신론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불신자의 불신은 믿음으로부터 발생한 불신인즉, 불신이라는 말에는 벌써 믿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또는 믿음이든 불신이든, 그 이전에 먼저, 그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