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치유21) 내일을 위한 오늘의 현재

소검201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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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오늘의 현재

 

행복은 저기에 있지 않다. 여기가 행복이며 여기에서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다. 환상의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이룰 때 환상의 행복이 이루어지게 된다.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행복이 행복다울 때 내일의 행복이 행복답게 된다. 내세를 위하여 현세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현세를 현세답게 준비하여야 내세가 내세답게 된다. 내세를 준비하는 것이 현세며, 현세를 준비하는 것이 내세가 아니다.

   인간세상의 가장 심각한 망상은 허상의 내세를 그려놓고 왜곡된 오늘을 사는 것이며, 그리하여 왜곡된 오늘은 현생을 무의미한 삶이라는 생각에 미래를 무시하고, 오늘만을 위한 삶을 산다고 하는 근시안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니, 그러한 오늘의 삶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세상이 보이지 않는 다고 말하는 삶이 되어, 인간세상이 원래 암흑의 세상이라고 말하며 암흑의 세상으로 만들게 된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육체를 육체답게 살아야 영혼이 영혼답게 된다. 영혼을 준비하는 것이 육체며, 육체를 준비하는 것이 영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은 내일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며, 내일이 없는 오늘에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은 사라진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오늘을 오늘답게 준비하여야 내일이 내일답게 된다.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오늘이며, 오늘을 준비하는 것이 내일이 아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만을 위하여 오늘을 살라고 하는 인간으로 인하여, 인간세상은 이기주의와 현실도외적 인생을 살게 된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만을 위하여 살라고 하는 말로 인하여 오늘을 죽음의 오늘이 되게 하니, 오늘 사는 것은 내일 사는 것이며, 오늘 죽는 것은 내일 죽는 것임을 알라.

 

종교적 대상의 명령에 따른 의무적 실천으로 인하여 인류에 수많은 죄악적인 짓을 저질러놓고도, 그러한 종교적 대상의 명령에 따른 의무적 삶을 살고 있다는 인간은 과거의 모든 죄악적인 짓을 자기 것으로 하고, 또한 그러한 죄악적인 짓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나의 삶은 나의 것이다. 종교적 대상이 나의 삶을 준 것이 아니며, 종교적 대상이 나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 스스로 자신의 노력하는 자신의 삶에서 행복한 삶과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어 하느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어떠한 귀신이 감히 하느님의 자손인 나의 삶을 책임져주겠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한 귀신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망령적 귀신을 붙잡고 인류를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인간이 있을 뿐임을 알라.

 

소수의 죄악적인 짓에서도 오늘을 있게 한 조상님들을 훌륭하게 생각하여야 하고, 과거의 시대에 죄악적인 짓을 저지른 인간을 존경해서는 안 된다. 소수의 죄악적인 인간들로 인하여 다수의 조상님들이 고통을 당했는데, 그러한 고통을 당한 조상님을 경멸하고 소수의 죄악적인 짓을 한 사악한 인간의 사상을 물려받아 오늘을 사는 인간은, 또한 다수의 인간에게 죄악적인 짓을 하며 오늘을 사는 다수의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인간은 알아야 할 것이니, 오늘의 인간이 내일의 조상이 되며, 오늘의 자기자신 또한 후세의 조상임을 알아야 한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는 인간으로 인하여 부정한 인간세상이 이어짐을 알라.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현재를 현재답게 준비하여야 미래가 미래답게 된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현재며, 현재를 준비하는 것이 미래가 아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으며, 현재가 있기에 미래가 있다.

 

불행한 과거가 있기에 불행한 현재가 있고, 불행한 현재는 불행한 미래를 낳는다. 그러한 불행한 과거를 없다고 무시하며 현재의 행복을 이루려하거나, 불행한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왜곡된 현재의 삶을 이루어 현재만을 생각하고 오늘만을 생각하는 포기적인 현재의 삶을 살게 된다. 불행한 과거를 벗어나는 것은 불행한 과거의 원인을 현재에서 지우고 반복하지 않는 것이며, 불안한 미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행한 과거의 원인을 현재에서 철저하게 지우고 새로운 현재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과거를 괴롭게 생각하여 현재를 경멸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 모두 무책임한 짓이며, 지난 과거를 괴롭게 한 원인을 현재에도 안고 있으면서,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여 현재를 두렵고 무겁게 만드는 것은 현재를 방임하는 짓이다. 그러한 인생은 현재를 기쁘게 살려고 하지만, 그 기쁨은 경멸에 따른 도피적 기쁨이며, 현재를 자유롭게 살려고 하지만, 그 자유는 방임에 따른 구속적 자유가 됨을 알라.

 

하나의 삶

인간의 현재론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론적 행복한 삶이 존재론적 삶을 침해하지 않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 삶이 현재론적 삶을 침해하지 않는 영혼의 진보적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론적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인간세상이 현재론적 삶을 물질적 노동에 구속시키기 때문이며, 존재론적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인간세상이 존재론적 영혼을 구속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노동에 구속된 삶은 존재론적 삶을 침해하여 영혼을 잃게 만들고, 존재론적 영혼이 구속된 삶은 현재론적 삶을 침해하여 불행한 삶이 되게 한다. 그런즉, 물질적 노동에 의한 행복한 삶은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는 뒷받침을 하는 삶이여야 하고, 존재론적 영혼을 이루는 삶은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루는 뒷받침을 하는 삶이여야 한다.

 

인간세상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현재론적 삶과 존재론적 삶을 이간하여 각기 따로 불행하게 만드니, 하나의 삶이 불행하면 또 다른 하나의 삶도 불행하게 되어, 모든 삶이 불행하게 된다. 그러한즉, 현재론적 행복과 존재론적 영혼을 따로 분리하여, 현재론적 삶이 불행해도 존재론적 영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거나, 존재론적 영혼을 무시하고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겠다는 말인즉, 현재론적 삶과 존재론적 삶을 이간시키려는 사악한 사상이나 간악한 인간의 말에 속아 인생을 허망하게 끝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한의 공간미래

종교적 믿음을 갖고 신앙을 하는 인간이, 인간의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온갖 죄악스러운 짓과 비열하고 간사한 짓을 서슴없이 한다. 내세에서 잘살기를 원한다는 인간이, 인간의 삶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과 남을 고통스럽게 하며 삶을 더럽힌다. 왜 인간이 스스로 영혼을 타락시켜 귀신의 질곡으로 떨어지려 하며, 왜 삶보다 죽기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인간이 너무 많아 생태학적으로 스스로 종자를 줄이기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러한 인간들이 진정 내세를 믿는 인간들인가? 아니면 내세에 갈 수 없음을 알고 포기적인 인생을 사는 것인가?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은 스스로 창조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인간의 현재론적 본질은 스스로 진화하도록 진화되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을 이루는 창조의 길은 영원함의 세계로 가는 길이며, 인간의 현재론적 목적을 이루는 진화의 길은 영혼함의 세계를 믿는 믿음의 길이다. 존재론적 창조를 이루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천에서 영원함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로 탄생되는 것이며, 현재론적 진화를 이루는 것은 자기자신을 믿는 믿음에서 이루어지고, 자기자신을 믿는 믿음에서 영원함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인생이 되게 된다.

 

존재론적 창조를 이룰 것이라고 믿는 인생은, 귀신으로 그 영혼이 타락하여 망각의 질곡으로 사라지게 되며, 현재론적 진화를 이룰 수 있는 인생을 믿지 않는 삶에서 불행한 영혼이 되어, 고통의 질곡으로 떨어지니, 또한 귀신의 끝없는 나락으로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육체가 소우주인 것은 대우주의 이치를 모두 갖춘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소우주로 창조된 것은 존재론적 “영혼”을 심고 키울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하기위함인즉, 인생에서 영혼이 저절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육체에 영혼이 없다면, 허무한 인생에서 그 육체적 삶이 하찮은 미물과 같은 인생이 된다.

 

인간에게는 그 누구도 명령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인간의 삶을 그 누구도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이 인간이며, 지금 내가 여기에 있어서 있는 것이며, 지금 내가 여기에 있어야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갈 수 있는 저 먼 아득한 곳에,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광활한 우주천지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없을 때, 무한한 시간의 과거와 무한한 공간의 미래를 영원히 알 수 없으며,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을 때, 무한한 시간의 과거와 무한한 공간의 미래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한한 시간의 과거와 무한한 공간의 미래는,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원인이며, 또한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서 “나”를 찾지 않고, 무한한 시간의 과거와 무한한 공간의 미래에서 나를 찾게 되면, 그 인생이 무상함에 떨어지니, “나”가 없는 영원한 무상함에서 공포에 따른 절망과 허무에 떨어진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인간이라는 종자가 거쳐 가고, 또한 수많은 인간이 같은 지구라는 땅에 존재하며,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종자가 탄생하며 역사를 이루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는 것에서 망각의 역사가 이어지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한한 시간의 과거와 무한한 공간의 미래 사이에서 그저 한낱 거처 가는 손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인생이 그저 바람결 같은 속절없는 꿈이 아니다. “나”의 과거는 무한한 사간의 과거며, “나”의 미래는 무한한 공간의 미래다. 이것이 진리인 것은,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으로 그 진리적 증명을 한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하는 허무한 인생에서, 하느님의 영원함의 세계로부터 탈락되는 인생이 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