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치유18) 성공의 밑거름

소검2014.06.03
조회41

성공의 밑거름

 

인간이라는 존재의 끝을 모르는 인간이 인간의 삶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끝을 가본 인간은 인간의 삶의 길을 바르게 제시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끝을 가보지 못한 인간은 인간의 삶에 대하여 함부로 예언을 한다. 그것은 끝을 가본 인간은 성공의 길을 말할 수 있으며, 끝을 가보지 못한 인간은 실패의 길을 점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실패를 점치는 것에 끌려, 실패의 인생에서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실패를 성공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말을 요사스럽게 꾸미기 때문이니, 특히 이성에서 벗어나면 진리는 우습게 보이고, 거짓은 참되고 화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끝을 가보지 못한 인간이 인간위에 군림하여 실패하는 인간들을 비웃고, 그 실패의 원인을 아는 체하며 인간을 구박한다. 그러한 우월감에 빠진 인간으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떨어지며, 하느님의 자손으로서 떳떳하게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을 비굴한 삶이 되게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경멸하는 인간은 그 인생이 경멸당한 인간이며, 인간의 삶을 비굴하게 만드는 인간은 그 정신이 비굴한 인간이며, 그 마음이 간악한 인간이다. 인간세상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말아야 하며, 인간의 삶을 비굴한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거짓된 밑거름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 되고, 실패는 성공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실패가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목적은 성공이다. 밑거름이 된 실패와 밑거름이 된 훌륭한 스승으로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러한 실패는 실패로 끝나게 되니, 남는 것은 고통과 허무뿐이다. 인생이 고통과 허무만을 남긴다면 그러한 인생이 왜 필요하며, 무엇을 위해서 필요할 것인가? 이것은 실패한 인생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다른 인생들도 실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게 되니, 더 이상의 실패적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과정 끝에 진리를 얻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 해서 인간은 소중한 가치적 진리를 갖게 된다. 고통과 시련이 함께한 시간과 노력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그러한 시간과 노력은 무엇이 되는가? 만약 그러한 고통과 시련이 함께한 시간과 노력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면, 그러한 인생은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은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 방법이 목적을 수반하지 못한다면 그 방법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인간세상에서 실패한 인생들이 각각의 실패적 방법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실패한 방법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인간들이 실패한 방법에서 헤맨다. 그리고 목적은 사라진다. 그렇게 하여 암울한 인간세상의 역사는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을 지경이 되니, 참으로 인간에게는 허망하고 안타까운 인생이 된다.

 

실패한 인생들은 입을 다물어라. 비판을 한 다음에 사유에 들어가는 것은, 아름다운 꽃들을 짓밟아 놓고 꽃밭에 들어가 그 중에서 아름다운 꽃을 고르려는 것과 같다. 비판을 한다는 것은 관념의 벽을 더하는 것이다. 관념의 벽을 가지고 꽃밭에 들어가는 것은 꽃을 짓밟는 것이거늘, 거기에 또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더욱 꽃을 짓밟겠다는 것이니,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벌래먹은 과일이 더 맛있다고 멀쩡한 과일을 벌래먹게 해야 하는가?

   청소하는 것은 깨끗하게 하기위함이다. 그렇다고 깨끗한 방을 먼저 더럽혀야 하는가? 방법이 목적을 짓밟는가? 자유로운 사유에서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다. 그런데 사유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사유를 구속해야 하는가? 영혼을 찾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영혼을 죽여야 하는가? 건강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병이 들어야 하는가? 인간의 삶을 찾고 이루기 위해서 먼저 인간을 죽여야 하는가? 그 다음에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진리를 짓밟은 다음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운 꽃밭에 깨달음이 있다. 벌래먹지 않은 깨끗하게 잘 익은 과일에 진리가 있다.

 

칭찬의 인간

칭찬(稱讚)이란, 인간의 본질적 윤리인 진실과 정성과 사랑의 진선미에 대한 실천적 행위에 대하여, 갈채와 격려를 기리듯 보내는 것을 말한다. 칭찬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회적 상보성에 의하여 서로를 이익되게 하는 아름다운 삶의 문화적 성품이라 할 수 있으며, 진선미를 권장하고 탐진치를 거부하는 권선징악의 사회적 효과도 있게 된다.

   이러한 칭찬은 칭찬의 상대나 대상이 있게 되니, 그리하여 칭찬을 듣는 자와 칭찬을 하는 자가 있게 되며, 또한, 칭찬을 듣는 자는 칭찬듣기를 좋아하는 인간과 칭찬받기를 즐기는 인간이 있고, 칭찬을 하는 자는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인간과 칭찬하기를 즐기는 인간이 있다. 그런즉, 칭찬이라 하여 다 같은 칭찬이 아니며, 성품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칭찬듣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그 영혼이 아름다운 인간이고, 칭찬받기를 즐기는 인간은 허영심이 강한 인간이며,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그 영혼이 밝은 인간이고, 칭찬하기를 즐기는 인간은 간사함이 몸에 베인 인간이다. 그리하여 칭찬듣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비난을 들으면, 스스로 자신을 뉘우치고 개선하여 칭찬들을 일을 실천하는 밝은 삶을 이루지만, 칭찬받기를 즐기는 인간이 비난을 들으면, 자신과 상대에게 화를 내고 더욱 비난받을 짓을 꾸미는 어두운 삶을 이루게 된다. 또한,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비난을 들으면, 자신과 상대를 보며 생각을 하고 허물을 만들지 않지만, 칭찬하기를 즐기는 인간이 비난을 들으면, 변명을 내세우며 화를 내고 상대를 공격하여 허물을 만들게 된다.

 

칭찬듣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항시 겸손하여 지나침이 없도록 노력하며, 칭찬받기를 즐기는 인간은 자만심에 빠져 망상에 따른 허영심으로, 그 삶에 자신과 상대에게 진실함이 없게 한다. 인간의 삶이 항시 칭찬만을 받거나 항시 비난만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인간은 칭찬에서 자신을 돋보이고, 비난에서 자신을 닦으며, 자만심이 강한 인간은 칭찬에서 상대를 비웃고, 비난에서 자신과 상대를 더욱 비난한다.

   또한,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머리에 상대에 대한 존재를 항시 포함시키는 인간이며, 허영된 인간은 자신의 머리에 상대에 대한 존재는 없고, 오로지 자기자신만의 망상에 빠져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겸손한 인간이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존경의 대상으로부터 장점을 취하여 자기 것으로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며, 허영된 인간이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존경의 대상으로부터 허물을 취하여 자기 것으로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인간은 칭찬들을 일을 하여 칭찬을 들어도 그것을 자신의 명성으로 나타내려 하지 않으며, 자만심이 강한 인간은 칭찬받을 일을 꾸며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자신의 명성으로 나타내려 한다. 머리 좋은 인간일수록 자존심이 강하고, 머리 나쁜 인간일수록 자만심이 강하다. 그리하여 자존심이 강한 인간은 좋은 머리로 겸손하게 칭찬들을 일을 하고, 자만심이 강한 인간은 나쁜 머리로 허영되게 칭찬받을 일을 꾸민다.

   칭찬은 인간관계를 신뢰하게 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실천적 도구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칭찬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사욕을 부리려는 인간으로 인하여 칭찬이 퇴색되니, 그리하여 인간관계의 신뢰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근원은 겸손과 허영으로부터 나타나는 결과임을 아라.

 

칭찬과 비난의 영혼

칭찬의 본질은 영혼을 밝게 하고, 비난의 본질은 영혼을 어둡게 한다. 그리하여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칭찬을 받고 그 영혼이 더욱 밝아지며,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비난을 받고 그 영혼이 더욱 어두워진다. 그러나 칭찬받기만을 좋아하는 인간은 비난을 못 참으니 그 영혼이 쉽게 어두워지고, 비난받기만을 좋아하는 인간은 칭찬을 못 참으니 그 영혼이 쉽게 밝아지지 않는다.

 

거름이 되는 칭찬은 그 영혼을 밝게 하고, 거름이 되는 비난은 그 영혼을 정화한다. 그러나 오물이 되는 칭찬은 그 영혼을 어둡게 하고, 오물이 되는 비난은 그 영혼을 더럽힌다. 또한, 칭찬받을 일이 아닌데 칭찬받는 것을 사양하면, 거름이 되어 운명이 밝게 되고, 비난받을 일이 아닌데 비난받는 것을 잘 참으면, 거름이 되어 운명이 밝고 풍부하게 되며, 비난은 비난한 자에게 되돌아간다.

   또한, 남에게 칭찬받을 일을 하고 칭찬을 받는 것은, 그 영혼이 밝아지고 운명이 밝고 풍부해지며, 남에게 비난받을 일을 하고 비난을 받는 것은, 그 영혼이 어두워지고 운명이 어둡고 빈약해진다. 그러나 상대로부터 칭찬받기 위한 행동은 그 삶이 행복이 부족한 인간이니 더욱 행복이 부족해지고, 상대로부터 비난받기 위한 행동은 그 영혼이 썩은 인간이니 그 영혼이 더욱 썩는다.

 

자신의 단점은 상대에게 있고, 상대의 단점은 자신에게 있으니, 상대의 단점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해친다. 그러한즉 상대의 단점을 보고 자신의 단점을 다스려 닦아야 운명이 밝고 건강해진다.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정직하게 운명을 다스려 가는 인생이라면, 인생을 통하여 몇 번 되지 않는 기회에 운명이 밝게 올라간다.

   그러한 밝음에 밝음이 더해지는 기회의 운명은 그 사이에서 명현현상이 일어나니 그것은 오만(傲慢)이다. 그러할 때의 비난은 약이 될 수 있으니, 잘 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오만한 성품을 가라앉히고 밝음을 이루어야 한다. 비난에도 오만한 성품이 닦이지 않으면 더 밝은 운명으로 되지 않으며, 그 오만이 그러한 오만이 아닌 가식에 따른 오만이라면, 비난에서 자신의 운명을 해치게 된다.

 

성품을 잘못 다스려 비난받는 것이 습관이 된 인간은 그 영혼의 빛이 죽은 인간이며, 다시 영혼의 빛이 일어날 가망성이 없는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성품을 더럽히게 되니, 멀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상대가 비난하고 공격하도록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그 상대의 화가 운명을 해치고, 그렇게 만든 자신에게는 다른 상대가 이자를 붙여 그 댓가를 치르게 한다. 인간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잘못이 없는데도 자신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도록 비난하고 공격하도록 만드는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가장 큰 복을 내리려는 인간이니, 단 한번만 참고 이겨내도 그 운명이 밝고 풍부해진다.

   인간의 삶이 칭찬과 비난이 어지럽게 오가는 삶이지만, 스스로 자기자신에게 칭찬은 하되 비난하지 않는 것에서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루게 되고, 상대를 칭찬은 하되 비난하지 않는 것에서 존재론적 자아인 영혼이 밝아지니, 자신의 중심에서 칭찬과 비난을 다스리면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중심에서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증오의 인내심

욕심이 극에 달하면 증오하게 된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상대에게 원인을 두기 때문이다. 증오(憎惡)란, 모질고 추악하게 상대를 미워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증오는 정신의 빛을 약하게 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계속적으로 정신의 빛을 외부로 방출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를 잘 내는 것은 소리에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소리에 덕이 부족하면 정신의 빛이 약해지고, 그리하여 또한 더욱 화를 내게 되는 것이며, 미워하는 것은 마음의 색채가 어둡기 때문이니, 마음의 어둠은 소리의 덕을 부족하게 한다. 증오는 상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화를 내는 것은 상대를 이기려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은 상대를 괴롭히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일어나게 되니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증오를 하는 것은 이성에 의한 철학적 사유에서와 같이 영혼의 빛을 강하게 발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영혼의 빛을 심하게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증오가 증오로 끝나면 영혼의 빛은 심한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증오를 참고 삭히는 것에서 영혼의 빛은 강해진다. 증오를 증오로 끌고 가지 않고 정신을 밝게 갖출 수 있다면, 그것은 깊은 사유와 같은 강한 영혼의 빛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니, 인간은 삶에서 자신의 영혼의 빛을 강하게 이루어야 하는 것이 존재의 첫 번째 목적이다.

 

삶에서 인간은 때때로 존재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정신이 밖으로 나가 현실적 물질세계에서 돌아올 줄을 모른다. 그럼으로 해서 영혼의 빛이 계속적으로 약해지다 보니, 영혼의 생존본능과 인간의 존재목적에 따라 증오해야 될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증오로부터 화를 낸다거나 심하게 미워한다거나 하게 되면, 그로써 영혼의 빛을 잃게 되는 고통에 빠지게 되니 그러할 때 참아야 한다.

 

증오할 일이 발생한 순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순간이 자신의 영혼을 강하게 할 수 있는 기회이며, 그것을 이겨낸다면 영혼의 차원이 달라진다. 영혼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은, 사물이나 대상에 대하여 폭넓게 볼 수 있는 여유와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이 형성된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운명의 차원이 달라지는 영적진보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증오에서 증오를 참는다고 하는 것은 포기적 회의가 아니다. 포기적 회의는 영혼의 빛을 포기하는 것이니 포기적 회의가 아닌, 다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증오의 원인이 상대에게 있든 자신에게 있든 관계가 없다. 또는 증오의 원인이 상대에게 있고, 또한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좀 더 힘들지 않게 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영혼의 빛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영혼의 빛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인간의 역사에서 “인내심”을 중요하게 다루어온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