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의식의 한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의식하는 것만으로 실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식에 의한 실제적 실천에서 삶의 실체를 이루고, 존재론적 실체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혼은 그 영혼을 인식한다고 하여 그 영혼이 실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이루는 수행적 수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세상은 인간을 잉태하고 있는 산모와 같으며, 인간은 영혼을 잉태하고 있는 산모와 같다. 인간세상의 모든 실체 속에서 실체를 이루는 삶이 되어야 실체를 이루게 되는 것인즉, 자신의 영혼의 실체를 이루기 위한 것이 인간의 삶이다. 영혼의 실체를 이루는 중심은 정신이며, 정신은 소리가 감싸고, 소리는 마음이 감싸고, 마음은 육체가 감싸고 있다. 그런즉 인간이 정신을 바로 갖추면 하늘이 내려오고, 하늘이 내려오면 공기가 감싸고, 땅이 감싸고, 인간 인연법이 감싸니, 그 존재를 이루지 못할 이유도 조건도 없게 되어 영혼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인간세상이 실체가 아니고 허상이라면 인간세상이 잉태하고 있는 인간도 허상이고, 인간이 허상이라면 인간이 잉태하고 있는 영혼도 허상이다. 그런즉 인간의 현상계를 부정하고, 인간세상을 허상으로 취급하고, 환상으로 오도하고, 실체가 아닌 그림자라고 말한다면, 그 영혼은 실체를 이루지 못하고 그림자가 같은 인생이 되어 그 영혼이 쭉정이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세상은 인형극에서 인형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그러한 꼭두각시 인생이 아니다.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인형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신이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인간을 조정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게 된다. 인간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인간세상 위에 군림하여 인간을 노예 부리듯 지배하려는 사악한 인간이나 집단에서 하는 짓이니, 그러한 인간이야말로 사악한 귀신에 조정 받고 있는 인간이며, 그러한 집단이 사악한 귀신이 조정하고 있는 집단이다.
하늘은 변함없이 밝고 높게 둘려 쌓여 있고, 밤하늘은 끊임없이 별빛을 쏟아내며 아름답게 인간세상을 감싸고 있다. 공기는 맑고 신선하여 생명체들의 삶을 감싸고 있으며, 땅은 포근하고 풍부하게 인간의 삶을 넉넉하고 즐겁게 하며 튼튼하게 삶의 바탕을 지켜주고 있다. 울창한 나무들은 생명체들이 생기를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생기를 뿜어내고, 출렁거리는 바다는 아름다운 생명체들을 풍부하게 키우며 공기와 땅을 정화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의 너그러움 속에서 인간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만약 어떠한 존재가 있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왜 인간의 삶을 이러한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에 두었을까? 인간의 감성으로 생각하면 인간세상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그러한 우연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인간의 삶이 이루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부함 속에서 존재하고, 그러한 자연의 너그러움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이성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라 인간을 우연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취급한다면 인간과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자신을 버리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우연한 것에서 자신을 찾으며, 인간의 현상계를 부정하는 인간이 인간세상을 무기력한 세상으로 보고 현상 밖의 어떠한 곳에서 우연한 존재로 존재를 기대하며 무기력한 삶을 산다.
인간이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이 신의 세계는 존재하지만, 신의 세계 또한 인간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존재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신은 빛과 소리의 물질로써 존재하고 있고, 인간은 신과 같이 빛과 소리의 물질로 존재하지만, 땅의 색채도 있다는 것이 신과의 차이일 뿐이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적 삶에서 존재를 이루어 빛과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며, 존재를 이루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먼저 색채를 잘못 다스려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면, 자연의 산물로써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죽음과 동시에 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즉, 영혼의 실체를 이루어야 가능하다. 존재론적 실체를 이루어야 죽음의 다리를 건너 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지 않고, 빛과 소리의 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으며, 그리하여 신의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혹시 신의 세계에서 특정한 신이 영혼을 갖추지 못한 인간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구해주려 한다면, 자신이 최소한 신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을 갖추어야 가능하다면 가능할 것이다. 있지도 않은 존재를 도와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영혼의 실체를 이루라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머리 중심에 영혼의 씨를 심으셨건만, 그 씨를 개발하여 존재를 이루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존재를 이루지 못한 인간을 어떻게 도울 수 있으며, 누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러한 이치도 없으며, 그렇게 할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영혼의 씨를 받았고, 그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자연과 자연의 풍부함에서 삶을 이루고 존재를 이루도록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씨를 버리고, 자연을 한갓 허상의 세계로 취급하여, 허상을 믿고 허상에 떨어져 허무하게 사라지니,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것인가? 만약 이러한 자연의 은혜로움이 한갓 허상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허상의 세계에 허상의 존재로 인간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인간이 믿는 종교적 대상이 허상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의 실체를 부정하고 허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의 영혼
밝고 선한 삶을 보면서 밝고 선한 삶을 알게 되고, 어둡고 악한 삶을 보면서 어둡고 악한 삶을 알게 되며, 그리고 인간은 아는 데로 행할 뿐이다. 밝은 책을 읽으면 정신과 소리가 밝아지고 어두운 책을 잃으면 정신과 소리가 어두워지며,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정신과 소리에 따라갈 뿐이다. 밝은 예술을 보면 영혼이 밝아지고 어두운 예술을 보면 영혼이 어두워지며, 인간의 영혼은 인식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원래 이성적이고 현명한 인간이 종교적 쇄뇌가 되면, 비상식적인 이치적 현상이나 현실을 왜곡적으로 판단하고, 또한 오히려 그것이 더 이성적이고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있다. 그리하여 그 영혼을 어둡게 하고, 악을 용인하며, 비굴한 영혼의 굴욕적인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 노예적인 사상과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선봉장이 된 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이러한 기이하고 불합리한 인간의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밝은 양심과 현명한 이성이, 욕망이나 욕심으로 기울게 되면 양심이 빛을 잃어 어두운 음심이 되고, 이성이 감성과 혼동을 일으켜 이성적 마비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할 때, 어떤 인간은 욕망과 욕심에 따른 치졸한 만족감에 빠져 더욱 양심과 이성을 잃어 가는가 하면, 어떤 인간은 헛 욕망과 헛 욕심의 부질없음을 알고, 양심과 이성을 찾아 인간의 본성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욕망과 욕심에 따른 치졸한 만족감은 영혼을 중독 시켜 끝까지 인간의 양심을 속이게 하고, 이성의 마비에서 풀려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게 만들게 된다. 자기자신의 영혼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영혼을 잃은 인간에게 영혼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고, 영혼을 잃게 하는 장소로부터 피하라.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밝은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라. 인간은 스스로 영혼을 잃지 않는다.
누구든지 쇄뇌를 당하기 시작하면 영혼을 잃게 되지만, 영혼을 잃는 것은 영혼을 잃었는지도 모르게 되어 다시 찾기가 힘들게 되며, 또한 영혼을 잃은 인간이 되어 다른 인간에게 퍼트리는 과정에서 더더욱 영혼을 찾아 회복하기가 힘들게 된다. 영혼을 잃은 인간에게 영혼을 잃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싶으면, 자신의 주체적 영혼의 삶에서 행복하고 보람된 인간의 삶을 살아라.
이념에 쇄뇌된 인간을 설득하여 바른 삶을 찾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삶 자체의 차이에서 스스로 깨닫게 할 때, 스스로 깨달아 영혼을 찾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론적 자아를 완성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러한 인간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잃게 하여 그 인생을 포기적인 인생이 되게 하려는 인간이며, 선의 길을 포기하고 악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는 사악한 인간임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영혼의 한계
인간은 현실에 살고 있으며, 현실에서 행복한 삶을 이루어야 하고, 현실에서 존재를 이루어야, 신의 세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이 비현실 속에 살고 있으면, 비현실에서 불행을 행복이라 착각하고, 비현실에서 존재를 이루었다는 착각을 하고, 신의 세계로 착각한 귀신으로 끝나게 된다.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의 진보는 없으며, 육체의 한계 안에서 영혼의 진보는 이루어지는 것이니, 육체의 한계에서 영혼이 진보할 수 있는 한계는 하느님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영혼으로까지 진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진보하는 것은 진보할 수 있는 실천적인 수행에서 진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수행은 하지 않고, 그저 믿음만 가지고 영혼이 진보하기를 바라는 것은, 씨를 심지 않고 싹이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이며,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이며, 산꼭대기 올라가 해물을 찾는 것이며, 바다 속에 들어가 산나물을 찾는 것과 같이 참으로 황당무계한 인생이니, 그러한 삶은 현실을 외면한 황당무계한 믿음 속에서 망상에 빠진 인간의 삶이다.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육체 안에서 영원한 존재를 이룰 수 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존재를 찾는 것은 망상에 빠진 정신질환자의 공허한 헛손질이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신비한 것은 인간의 육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도 인체의 원리와 이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즉, 신비하다는 것은 아직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재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원리도 무시한 신비한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에 빠진 인간의 말장난일 뿐이며, 인간으로서 진실한 삶을 거부하고 귀신의 속삭임에 영혼을 잃어버린 인간의 몽상일 뿐이다.
영혼의 책임
존재론적 자아를 찾아 이루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내부에 자아를 심어라. 그것이 시작이니 시작없는 결실은 없다. 자아가 자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종교적 대상에 자아를 구속시킨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은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희망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니, 절망적인 삶에서 인생을 끝없는 고통의 나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인간의 영혼을 책임져 줄 능력이 있는 존재는 없으며, 어떠한 존재도 인간을 구속시킬 자격이 없다.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거늘, 어떠한 존재가 있어 인간의 영혼을 책임지고, 어떠한 존재가 감히 인간의 영혼을 구속한다는 말인가? 모두 사악한 인간들의 짓일 뿐이다.
영혼의 지식
영혼의 본질은 자유이며, 영혼의 자유에서 지식을 바르게 습득할 수 있다. 수많은 지식에서 영혼은 영혼의 본질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같은 지식을 스스로 가려서 밝음을 이루다. 이것은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에 있는 수많은 영양분에서 나무에게 필요한 절대적인 영양분만을 흡수하여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만약, 그 땅을 척박하게 만들게 되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이, 지식이 빈약하면 영혼이 죽게 된다.
나무는 그 뿌리가 내리고 있는 땅이 척박하면 죽지만, 인간의 영혼이 죽으면 그 자리에 귀신이 들어앉게 된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영혼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지식의 습득에 따라 영혼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서 인위적으로 가려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편협적인 지식이 되어 영혼의 밭을 척박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한 환경적 지식으로 인하여 영혼을 굶주림의 기아상태로 몰아가게 되니, 그럴 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절망이다.
지식에서 지능과 지혜가 이루어지고, 지능은 현재론적 삶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하며, 지혜는 존재론적 삶을 유익하게 하여 영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지식이 부족한 지능은 배타적인 성품으로 삶을 불행하게 하고, 지식이 부족한 지혜는 영혼을 기아상태로 만들어 결국 잃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기초적인 학문은 두루 섭력하고, 그러한 학문의 바탕위에서 삶에 필요한 학문과 존재론적 자아에 필요한 학문을 심도 있게 하는 것이 바른 학문이 되며, 그러한 학문에서 지능과 지혜가 원활한 진보를 이루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게 된다.
종교적 이념에 쇄뇌된 인간이 그 쇄뇌에 필요한 것 외의 모든 학문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니, 그러한 인간으로 인하여 인간의 지능과 지혜가 퇴보하게 되고, 인간세상은 진리와 멀어져, 하느님의 길이 끊기고 귀신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에도 벗어나는 편협적인 학문 아닌 학문으로 인하여, 인간의 이성이 퇴보하고, 감성이 조잡한 것에 끌리게 되니,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져 영혼을 잃게 되고, 감성이 사악해져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배타적인 성품을 이루어 세상을 암울하게 만들게 된다. 지능과 지혜를 진보시키는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며, 지능과 지혜를 퇴보시키는 추상적인 지식이나 편협적인 지식은 가식에서 가식으로 끝나게 되니, 그러한 지식은 망령적 지식이 된다.
영혼의 무지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는 지식의 부족함이나 마음의 양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정신과 마음에 지식이나 양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는 새로이 알 것이 없으며, 알고 있는 것에서 오히려 부담을 느낀다. 소중한 지혜는 진실한 삶에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는데 사용하지 않으며, 죽어서 잘살 것만을 생각하고, 현실의 지혜는 그저 먹고 자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에만 활용을 한다. 그러한즉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는 지식이 필요가 없다. 철학도 과학도 그저 쓸모없는 장난이 되고, 삶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필요없는 정신적 낭비가 된다.
영혼이 없는 인간은 어떠한 것이 조화로운 것이며, 어떻게 해야 조화롭게 되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어떠한 것이 불합리한 것이며, 어떻게 해야 불합리하게 되는 지에만 관삼이 있다. 그러한 영혼이 없는 인간은 사랑을 미움으로 변질시키고,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며 조화로운 삶을 깨고 불화를 일으킨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배워도 배워도 배움이 부족하여 갈증을 느끼지만, 영혼이 없는 인간은 배우면 배울수록 지나치게 넘쳐 괴롭게 되니, 그것은 그 배움의 용량이 작기 때문이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모르는 것을 스스로 노력하여 배우려고 하지만, 영혼이 없는 인간은 모르는 것을 스스로 노력하여 알려고 하지 않고, 남이 힘들게 노력하여 안 것을 몇 마디 말로 물러서 얻으려고 하는 지식적 구걸을 하면서도, 그렇게 묻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모르는 것을 묻는 것에 창피함을 모르고 뻔뻔하다. 그리하여 그러한 인간에게 가르쳐주면 고마운 줄은 모르고 뒤돌아서서 야비하게 웃으며, 가르쳐주지 않으면 험담을 하고 헐뜯으며 비난한다.
힘들게 노력하여 안 인간은 그것을 알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인간에게 고생을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기를 원하며, 가르쳐 주는 것 자체에 보람을 느끼고, 또한 가르쳐주는 것으로 자기자신에게 위안을 삼지만, 상대를 비난하거나 책망하지 않으니, 그것은 그 어려움을 경험을 통하여 알기 때문이다. 모르는 자는 모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물어서 알 때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그 부끄러움은 상대가 힘들게 고생하여 안 것을 자신은 쉽게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즉, 그렇지 않고 모르는 것을 남에게 물어서 알면서도 뻔뻔한 인간은 그러한 인간이 영혼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니, 영혼이 없는 인간은, 고마움이 무엇인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뻔뻔함이 무엇인지, 그것을 가릴 수 있는 기본적인 정신적 도덕률이 없기 때문이다.
위선적 영혼
진리는 어떠한 시대를 거친다 하더라도 같으니, 그 같은 것이 영원한 진리며, 거짓은 어떠한 시대를 거친다 하더라고 같지 않으니, 그 같지 않은 것이 영원한 거짓이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한 진리에 따르는 삶에서 영원해지며, 영원한 거짓에 따르는 삶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은 영혼을 탄생시키는 것에 있으며, 영혼의 탄생은 육체를 떠나서는 이룰 수 없다.
영혼은 뇌간을 뿌리로 하고 육체가 가지와 잎이 되어 나무가 자라듯이 자란다. 영혼을 자라게 하는 식량은 정신과 소리에 의하여 생산되며, 마음은 탁한 색채를 거두어 지우는 것이다. 마음이 탁하면 영혼의 성장을 더디게 하고, 마음이 탁하면 육체에 질병이드니, 그 질병이 영혼의 질병이다.
영혼은 세 가지로 완성을 이루며, 육체를 떠나는 죽음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가 하나를 이루어 영혼이 실체를 이루게 된다. 이 세 가지는 정신과 소리와 마음을 갖기 다스리는 수련에서 이루어지며, 실천적 수련을 하지 않고 믿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정신에 두고 정신을 완성하는 것이며, 믿음을 소리에 두고 소리를 완성하는 것이며, 믿음을 마음에 두고 마음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믿음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이것 외에 믿음은 허공에 뿌리를 내리려는 믿음인즉, 실천적 수행을 위한 믿음에서 믿음의 힘이 나타나게 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있는 숭고한 능력이다.
모든 것은 갖추는 것에서 베풀어진다. 갖추지 않고 베푸는 것은 없는 것이니, 영혼이 밝지 않고 무엇으로 선행을 하겠는가? 영혼이 밝지 않은 인간이 선행을 한다는 것은, 다른 인간의 밝은 영혼을 빼앗는 짓이니. 그것은 악행이 되어 더욱 그 영혼이 어두워짐을 알라. 그런즉, 선행을 할 대상을 찾기 전에 자신에게 어떠한 선행심이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선행심이 없다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실천적 수련을 해야 하며, 선행심이 있다면, 선행할 일이 저절로 찾아오니 찾아다닐 일이 아니다. 찾아다니는 자체가 인위적이며, 그러한 인위적인 선행은 선행 할 그 무엇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체를 해치는 것은 영혼을 해치는 것이지만, 영혼을 해치는 것은 그 존재를 망가트리는 짓이며, 인간의 영혼을 해치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무덤을 파는 짓인즉, 용서받을 이치적 방법이 없다.
영혼의 자유
영혼의 구속은 모든 것을 구속한다. 영혼의 자유를 부정하고 구속시키는 인간은 하느님의 빛을 거부하는 인간이니, 그러한 인간은 영혼의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화를 당하고, 무엇인가에 항시 두려움을 느끼고, 무엇인가 항시 부족하다는 생각이 일어나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그 영혼이 구속된 인간이다. 그러한 것이 구속된 영혼이 자유를 얻기 위한 몸부림인 줄을 모르고 더욱 구속시키니 더욱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과를 분명히 보고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인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짓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원인과 결과에서 결과만을 보고 인간의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원인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과 능력을 망각한 것이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이거늘, 원인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원인을 결과로 고정시켜 놓았다는 말이다. 인간의 본질은 자유이며, 자유의 본질은 영혼에 있다.
자유의 본질이 육체에 있다면 그것은 땅의 이치적 삶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고, 자유의 본질인 영혼을 구속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적 삶을 이루고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영혼을 구속된 원인으로 결정된 뒤의 인간의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인간의 의지라는 말은 그럴 듯하게 같다 붙이는 한갓 미사어구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결과에 있지 않고 원인에 있다. 그 원인을 왜곡함으로 해서 인간의 의지에 따른 영적인 자유로운 삶을 왜곡하게 된다. 영혼의 본질은 빛이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빛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빛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하느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영혼의 길이 신의 구속적 지배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영혼을 하느님께서는 왜 창조를 하셨을까?
만약 그러려고 했다면 인간의 차원을 짐승의 차원에 묶어 두면 될 것을, 왜 인간에게 이러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머리를 주시어 영혼을 따지고, 삶을 따지고, 존재를 따지고, 신을 따지게 했을까? 영혼은 인간의 삶에서 존재를 이루어 하느님의 세계에 탄생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하느님의 씨이다. 그 씨인 영혼은 빛의 본질에 따라 생장을 한다. 그 어떠한 존재도 영혼을 구속할 수 없으며, 구속할 존재도 없다. 즉 하느님을 능가할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왜 인간이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의 말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인간이 타인의 영혼을 구속하고 그 삶을 지배하기 위하여, 허상의 신을 설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와 삶의 목적을 변질시켜 꿰어 맞춘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구속시키는 것은 존재론적 목적을 망각하여 자아를 죽이는 짓이며, 현재론적 삶을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짓이다.
스스로 그러한 구속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영혼의 본질에 따라 자유로운 영적 삶을 이룰 때, 그 길이 하느님의 길이 되고, 그러한 길에서는 어떠한 존재도 해치지 못하게 되니, 그러한 길은 하늘과 공기와 땅에서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길을 해치는 인간은 하늘과 공기와 땅으로부터 그에 따른 댓가가 분명히 치러진다. 이러한 것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에 따라 인간의 영혼이 자유로운 인간세상이 되어야 불행을 끊고 행복한 인간세상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구속
영혼이 구속당하면, 그 삶이 아무리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어도 불행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며, 가치 없는 인생과의 싸움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영혼이 억압당하면 이기주의적 무지에 빠지고, 또한 공포와 죄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방법을 찾지 못하고, 항시 외부적 의존의 대상이나, 외적 현실에 끌려가는 삶이되기 때문이다.
정신과 마음이 타율적 지배에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영혼이 구속당한 것이며, 영혼이 구속당한 뒤의 정신과 마음은, 노예적 정신과 노예적 마음을 이루어 무가치한 것에서 가치를 찾게 되니, 행복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삶이 되고 만다. 자신의 내면에 있어야 할 영혼이 외부적 대상에 영혼을 빼앗긴다면, 삶의 모든 면에서 자유를 잃게 된다. 삶에서 자신이 뭔가에 묶여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낀다면, 시야를 안으로 돌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동물의 가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육체의 자유보다 영혼의 자유를 이루어야 진정한 자유가 된다. 인간으로서 영혼의 자유는 하느님의 세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즉, 영혼의 자유를 잃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까지 모두 잃게 된다.
남을 지배하려는 인간이 지배를 당하고, 지배를 당한 인간이 남을 지배하려 한다. 영혼을 구속하려는 인간이 구속을 당하고, 영혼이 구속당한 인간이 남의 영혼을 구속하려 한다. 그런즉 영혼이 구속당하여 노예정신이 있는 인간을 조심하라. 그들은 너의 영혼을 훔치기 위하여 자나 깨나 고심하고 있음을 알라. 영혼을 잃으면 바로 노예가 되고, 그 영혼을 되찾기 전에는 노예에서 탈출할 수 없으나, 영혼을 되찾도록 가만 놔두지를 않고 계속적인 구속의 삶이 되도록 정신을 혼미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불행과 괴로움을 호소하거나, 심리적 갈등에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일으키게 한다면, 그러한 인간은 영혼이 구속된 인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한 어떤 인간이 살살거리며 말하거나, 굽실거리며 아첨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 위한 짓임을 알라. 영혼을 구걸하는 인간은 모든 삶이 구걸적 삶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기보다 남의 노력을 훔치기 위하여 온갖 짓을 다하니, 그러한 인간에게 무엇을 빼앗기는 것은 결국 영혼까지도 빼앗기게 됨을 알라.
영혼의 노예
영혼이 구속된 인간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인간인즉, 현재론적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그러한 삶을 당연하게 여기니, 그러한 눈먼 봉사와 같은 정신으로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노예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으니, 노예에게는 배려라는 말 자체가 없다. 자기와 같은 노예와는 똘똘 뭉치고 자기와 같지 않는 노예가 아닌 인간은 무조건 적으로 여기며, 자기와 같이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은 자기를 헤치는 존재들이라 의심하고 무조건 공격을 한다.
영혼이 구속된 노예에게는 선악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선이고,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무조건 악이기 때문이다. 노예적 삶의 운명은 두 가지로 영혼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가 더하여 세 가지로 영혼을 잃고 사라진다. 하나는 노예적인 삶에서 희망을 버리는 것은 노예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니, 그것이 영혼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이 영혼이 잃은 삶이라고 생각하며, 또 하나는 충실한 노예의 삶에서 더욱 불행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그것이 영혼을 잃지 않는 노예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하여 충실하게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이다.
충실한 노예의 삶이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충성할 수 있는 것만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자신의 배우자와 자식과 형제들까지도 모두 버려야 한다. 또한, 자신의 육체는 자신의 육체가 아닌지라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는 집착을 버려야 하고, 인간다운 행복을 가질 자격이 없으니,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이루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인즉, 그렇게 하여 주인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주인이 불행한 삶을 살라고 말하면 불행하게 살아야 하고, 주인이 원하는 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여야 하며,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하고, 주인이 다른 인간을 살생하라고 하면 인간을 살생해야 하며,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정신이 위대한 노예의 정신이며, 그러한 주인을 비난하는 인간은 잔인하게 공격을 하고, 노예에서 탈피하려는 노예는 비굴한 인간으로 그러한 인간은 영혼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저주를 한다.
충실한 노예적인 삶을 사는 노예가, 정상적이고 바르게 사는 인간이 삶에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는 것을, 그 틈을 이용하여 고생스러운 짐을 버리고 노예가 되라 말하고, 노예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며, 노예의 삶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보다 덜 힘들고 삶의 짐이 덜 무거우니, 노예가 되라고 그 검은 손길을 인간세상에 함부로 내민다.
그렇게 충실한 노예적인 삶에서 주인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할 때,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혼의 노예가 인간세상에 있는 이상, 인간세상은 하느님의 밝은 기운을 잃게 되고, 귀신의 인간세상이 되며, 그러한 인간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에는 그 무엇도 찾거나 이룰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인간세상은 참으로 비굴하고 더러워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까지도 의심이 가게 하지만, 또한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라는 존재인지 의심을 하신다.
영혼을 잃은 인간
영혼을 잃은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가식이다. 물질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서 물질에 목숨을 걸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죽음이후만을 꿈꾼다. 진리도 없고 진리도 모르면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본적인 교양도 없으면서 교양이 있다고 생각한다. 속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있으면서 겉으로는 말쑥하게 옷을 차려 입고 교양이 있는 척 하며, 머리에는 온갖 잡된 생각을 꽉 채워놓고, 입으로는 고상한척 말을 하고 교양이 있는 척하고 있다.
보편적인 진리와 보편적인 상식을 알고 있는 인간은 교양이라는 말도 필요없이 모든 상대와 원활한 삶을 이룬다. 그러나 영혼을 잃은 인간은 편협적이고 인위적인 단순한 진리를 진리라 말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면서 자신은 교양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교양을 내세운다. 그러한 인간의 생활은 가식적인 생활이 되어 항시 겉을 중요시 하니, 그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숨기려는 것이며, 언어적 표현을 고상한 척 하지만 그 말속에는 온갖 죄악을 품고 있다.
이렇게 영혼을 잃은 인간은 진실로 교양있는 상대를 만나면 그것을 시기하여 비웃고 그 교양을 뺏으려하며,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을 보면, 오히려 가식적인 삶이라 비웃으며 훼방을 놓는다. 그렇게 영혼을 잃은 인간은 가식적인 삶에서 타인의 삶을 핍박하고 그러한 짓을 즐기며, 죽음을 찬양하고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인간임을 알라.
영혼을 지켜야 한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라, 자신으로부터 하느님을 찾는 것에서 그 삶이 밝아지게 될 것이니, 인간에게 위압감을 갖게 하는 거대한 건물과 그와 같은 인조물에는 하느님께서 내려오시지 않는다. 자신이 거주하는 집이 그러한 거대한 건물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이 가장 거대한 곳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천지만물의 모든 이치가 함축되어 존재하는 인간의 육체에 비하면, 그러한 거대한 건물들은 하나의 먼지만도 못함을 알라.
진정한 믿음은 자기자신 안에 있으며, 자기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영혼의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영혼의 빛을 이루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의 영혼을 지키며, 상대와 이웃을 향한 선행심을 갖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시작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자기자신을 지켜갈 때, 인간세상은 밝아질 것이며, 모든 불의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할 때 인간세상은 허상의 종교적 대상에 놀아나 그 영혼을 잃지 않을 것이며, 선이 아닌 악의 종교에 빠져 인생을 허망하게 끝내지 않을 것인즉, 이성에서 벗어난 종교적 미신과, 인간의 감정을 사악하게 만드는 시기와 질투의 귀신으로부터, 자신의 영혼과 세상의 영혼을 지켜야 한다.
노예적 영혼
주체적 영혼은 영혼의 빛을 강하고 밝게 하며, 노예적 영혼은 영혼의 빛을 약하고 흐리게 한다. 주체적 영혼에게는 인생을 통한 모든 경험과 지식들이 영혼의 지혜로 남게 되니, 자아의 영적 빛이 강하고 밝아진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의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닌지라 모든 경험과 지식은 지혜로 남지 못하니, 자아의 영적 빛은 퇴보하게 되는 것이다.
주체적 영혼에게서의 인생의 역경은 땅의 삶에 의한 영혼의 때를 벗겨 영적자아의 빛을 더욱 밝게 닦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에게서의 인생의 역경은 오히려 땅의 삶에 의한 영혼의 때가 영적자아의 빛을 흐리게 만든다. 주체적 영혼의 인생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적 기쁨의 인생이 될 수 있지만, 노예적 영혼의 인생은 귀신과 함께 하게 되니 귀신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귀신의 성품에 따라 원망의 인생이 되게 된다.
주체적 영혼의 인생길은 개인의 영적성숙 뿐만 아니라 상대 또한 영적성숙을 하게 한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의 인생길은 개인의 영적퇴보 뿐만이 아니라 상대 또한 영적퇴보를 하게 한다. 나의 영적성숙은 상대의 영적성숙을 도와주고, 상대의 영적성숙은 나의 영적성숙을 일으킨다. 인간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어도 이러한 주체적 영혼의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적 화합과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며, 인류적 평화와 안정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들은 그 근본이 상대를 인정할 수 있는 영적성숙이 없기에 무조건적인 시기질투에 의한 반목과 투쟁을 즐기고, 본인도 모르는 죄책감에 의한 두려움으로 단 두 사람의 화합도 이간하여 적대적으로 대하게 만들며, 그렇게 상대들이 적대적이 되는 것에서 안정감을 갖는다. 이것은 노예적 영혼들에게는 일종의 중독성이기에 그 어떤 교육이나 사회적 교훈도 달리 해석하여 상대의 영적성숙을 방해하는 것에서 위로적(慰勞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주체적 영혼은 그 바탕이 하느님의 정신과 마음인지라 상대를 포용하려는 포용성이 보편적 성품이 되게 한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은 그 바탕이 하느님의 정신과 마음을 잃어버린 영혼인지라 귀신의 성품에 따라 상대를 포용할 수 없는 배타성이 특이적 성품이 되게 한다. 인간세상의 모든 평등적 아름다움은 주체적 영혼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인간세상의 모든 차별적 추함은 노예적 영혼들에 의하여 발생한다. 주체적 영혼에게 있어 상대의 즐거움은 자신의 즐거움이 되고, 상대의 고통 또한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지만, 노예적 영혼에게 있어 상대의 즐거움은 자신의 고통이 되고, 상대의 고통은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주체적 영혼에게 있어 진리는 영적발달의 기회로 삼아 자아의 영혼의 빛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며, 선함을 입에 담아 상대의 영적성숙을 돕는 것으로 자아의 영혼의 빛을 더욱 이루기 위하여 실천하며, 상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그 아름다움을 또한 자신의 영적 아름다움으로 삼아 영혼의 밝은 빛을 이룬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에게 있어 진리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기의 대상이 되어 오만과 탐욕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방해하며, 악함을 입에 담아 상대의 영적성숙을 방해하고 선함은 질투의 대상이 되어 분노와 원한으로 자아의 영혼의 빛을 스스로 죽이며, 상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미움의 대상으로 삼아, 사악한 이간질로 상대를 추하게 만들어 자신과 상대의 영혼의 빛을 모두 더럽힌다.
인류의 모든 선행의 뿌리는 주체적 영혼들이며, 인류의 모든 악행의 뿌리는 노예적 영혼들이다. 주체적 영혼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감이 있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과 행동에 거짓과 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감이 없기에 거짓과 변명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정당함을 주장한다.
주체적 영혼은 상대의 도덕성을 따지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상대의 도덕성을 공격하지 않아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밝게 한다. 또한 상대의 약점을 자신의 약점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에 채찍질을 하여 자아의 영적발달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은 자신의 도덕성은 숨기고 상대의 도덕성만을 따져 상대를 공격하여 구석으로 몰아 부치기를 좋아한다. 또한 상대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위안으로 삼고, 상대의 약점을 근거로 내세워 자신의 비뚤어진 도덕성을 정당화 한다.
속죄의 영혼
영혼을 믿는 다고 하여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의식한다고 하여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영혼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삶을 위험하게 할 이유나 존재는 없다. 그것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영혼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한 시간과 영원한 공간에 존재하고, 모든 만물이 신 안에 있으며, 모든 인간이 신의 세계로부터 탄생을 이루어 신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인간의 삶이 그리고 인간세상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무기체처럼 아무 느낌이나 감정이 없어도 그냥 돌아가는가? 유기체적 생명체들도 아무 생각없이 살면 그냥 돌아가는 것인가? 인간 또한 유기체적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니 아무 생각없이 살다보면 돌아가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아도 돌아갈 것이며, 선을 쌓든 악을 쌓든 아무 관계없이 돌아갈 것이 아닌가? 즉 신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든 신이 어떻게 생겼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또는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돌아갈 수 있는 노력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만 하면 되는가? 욕심껏 재물을 모아서 신전에 같다 바치면 되는 것인가? 그런 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열심히 인간세상에 알리면 되는 것인가? 종교적 이념에 따라 노예가 되어 그저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인가? 다른 종교를 핍박하고, 다른 문화를 파괴시키고, 종교적 이념이 다른 인간을 공격하고, 남녀를 차별하여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점검을 하고, 여자에게는 사악한 마귀가 있을 수 있다고 가려서 처형하면 되는 것인가?
다른 인종에게는 영혼도 없으니 종교적 사명 아래 인간을 살상하여 멸종시키면 되는 것인가? 행복한 인간이나 행복한 부부가 존재하는 것은 진리를 거역하는 것이니, 모든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모든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면 되는 것인가? 부자는 모두 사악한 존재들이니 모든 인간을 가난하게 만들면 되는 것인가? 아무것에나 신을 갖다 붙이지 말고, 아무 개념이나 진리라고 말하지 말라.
신을 믿는 다면 인간을 믿어야 할 것이니, 만약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는 신이 있다면, 인간으로서 인간을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 내릴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믿고, 나와 상대를 믿고, 내 가정과 이웃을 믿고, 내 민족과 타 민족을 믿는 다면, 인간세상이 하느님의 세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즉, 하느님께서 바라는 인간세상이 그러한 세상이다.
죄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속죄할 것이요,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여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 것이며,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라. 죄는 누가 용서를 하여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죄에서 사라지는 것이며, 자신의 죄만을 스스로 속죄할 것이요 남에게까지 속죄하라는 짓을 하지 말라. 너만 죄가 있고 남은 죄가 없으니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함부로 속죄하라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선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을 것이며, 신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든, 영혼이 있든 없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이성을 갖추고 존재론적 자아를 찾아 이루는 행복한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른 믿음에 의한 삶임을 알라.
가정치유03) 영혼의 실체적 삶
영혼의 실체적 삶
인간의 삶은 의식의 한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의식하는 것만으로 실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식에 의한 실제적 실천에서 삶의 실체를 이루고, 존재론적 실체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혼은 그 영혼을 인식한다고 하여 그 영혼이 실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이루는 수행적 수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세상은 인간을 잉태하고 있는 산모와 같으며, 인간은 영혼을 잉태하고 있는 산모와 같다. 인간세상의 모든 실체 속에서 실체를 이루는 삶이 되어야 실체를 이루게 되는 것인즉, 자신의 영혼의 실체를 이루기 위한 것이 인간의 삶이다. 영혼의 실체를 이루는 중심은 정신이며, 정신은 소리가 감싸고, 소리는 마음이 감싸고, 마음은 육체가 감싸고 있다. 그런즉 인간이 정신을 바로 갖추면 하늘이 내려오고, 하늘이 내려오면 공기가 감싸고, 땅이 감싸고, 인간 인연법이 감싸니, 그 존재를 이루지 못할 이유도 조건도 없게 되어 영혼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인간세상이 실체가 아니고 허상이라면 인간세상이 잉태하고 있는 인간도 허상이고, 인간이 허상이라면 인간이 잉태하고 있는 영혼도 허상이다. 그런즉 인간의 현상계를 부정하고, 인간세상을 허상으로 취급하고, 환상으로 오도하고, 실체가 아닌 그림자라고 말한다면, 그 영혼은 실체를 이루지 못하고 그림자가 같은 인생이 되어 그 영혼이 쭉정이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세상은 인형극에서 인형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그러한 꼭두각시 인생이 아니다.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인형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신이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인간을 조정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게 된다. 인간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인간세상 위에 군림하여 인간을 노예 부리듯 지배하려는 사악한 인간이나 집단에서 하는 짓이니, 그러한 인간이야말로 사악한 귀신에 조정 받고 있는 인간이며, 그러한 집단이 사악한 귀신이 조정하고 있는 집단이다.
하늘은 변함없이 밝고 높게 둘려 쌓여 있고, 밤하늘은 끊임없이 별빛을 쏟아내며 아름답게 인간세상을 감싸고 있다. 공기는 맑고 신선하여 생명체들의 삶을 감싸고 있으며, 땅은 포근하고 풍부하게 인간의 삶을 넉넉하고 즐겁게 하며 튼튼하게 삶의 바탕을 지켜주고 있다. 울창한 나무들은 생명체들이 생기를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생기를 뿜어내고, 출렁거리는 바다는 아름다운 생명체들을 풍부하게 키우며 공기와 땅을 정화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의 너그러움 속에서 인간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만약 어떠한 존재가 있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왜 인간의 삶을 이러한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에 두었을까? 인간의 감성으로 생각하면 인간세상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그러한 우연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인간의 삶이 이루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부함 속에서 존재하고, 그러한 자연의 너그러움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이성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라 인간을 우연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취급한다면 인간과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자신을 버리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우연한 것에서 자신을 찾으며, 인간의 현상계를 부정하는 인간이 인간세상을 무기력한 세상으로 보고 현상 밖의 어떠한 곳에서 우연한 존재로 존재를 기대하며 무기력한 삶을 산다.
인간이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이 신의 세계는 존재하지만, 신의 세계 또한 인간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존재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신은 빛과 소리의 물질로써 존재하고 있고, 인간은 신과 같이 빛과 소리의 물질로 존재하지만, 땅의 색채도 있다는 것이 신과의 차이일 뿐이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적 삶에서 존재를 이루어 빛과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며, 존재를 이루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먼저 색채를 잘못 다스려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면, 자연의 산물로써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죽음과 동시에 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즉, 영혼의 실체를 이루어야 가능하다. 존재론적 실체를 이루어야 죽음의 다리를 건너 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빛과 소리의 실체를 이루지 않고, 빛과 소리의 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으며, 그리하여 신의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혹시 신의 세계에서 특정한 신이 영혼을 갖추지 못한 인간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구해주려 한다면, 자신이 최소한 신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을 갖추어야 가능하다면 가능할 것이다. 있지도 않은 존재를 도와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영혼의 실체를 이루라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머리 중심에 영혼의 씨를 심으셨건만, 그 씨를 개발하여 존재를 이루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존재를 이루지 못한 인간을 어떻게 도울 수 있으며, 누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러한 이치도 없으며, 그렇게 할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영혼의 씨를 받았고, 그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자연과 자연의 풍부함에서 삶을 이루고 존재를 이루도록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씨를 버리고, 자연을 한갓 허상의 세계로 취급하여, 허상을 믿고 허상에 떨어져 허무하게 사라지니,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것인가? 만약 이러한 자연의 은혜로움이 한갓 허상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허상의 세계에 허상의 존재로 인간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인간이 믿는 종교적 대상이 허상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의 실체를 부정하고 허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의 영혼
밝고 선한 삶을 보면서 밝고 선한 삶을 알게 되고, 어둡고 악한 삶을 보면서 어둡고 악한 삶을 알게 되며, 그리고 인간은 아는 데로 행할 뿐이다. 밝은 책을 읽으면 정신과 소리가 밝아지고 어두운 책을 잃으면 정신과 소리가 어두워지며,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정신과 소리에 따라갈 뿐이다. 밝은 예술을 보면 영혼이 밝아지고 어두운 예술을 보면 영혼이 어두워지며, 인간의 영혼은 인식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원래 이성적이고 현명한 인간이 종교적 쇄뇌가 되면, 비상식적인 이치적 현상이나 현실을 왜곡적으로 판단하고, 또한 오히려 그것이 더 이성적이고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있다. 그리하여 그 영혼을 어둡게 하고, 악을 용인하며, 비굴한 영혼의 굴욕적인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 노예적인 사상과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선봉장이 된 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이러한 기이하고 불합리한 인간의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밝은 양심과 현명한 이성이, 욕망이나 욕심으로 기울게 되면 양심이 빛을 잃어 어두운 음심이 되고, 이성이 감성과 혼동을 일으켜 이성적 마비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할 때, 어떤 인간은 욕망과 욕심에 따른 치졸한 만족감에 빠져 더욱 양심과 이성을 잃어 가는가 하면, 어떤 인간은 헛 욕망과 헛 욕심의 부질없음을 알고, 양심과 이성을 찾아 인간의 본성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욕망과 욕심에 따른 치졸한 만족감은 영혼을 중독 시켜 끝까지 인간의 양심을 속이게 하고, 이성의 마비에서 풀려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게 만들게 된다. 자기자신의 영혼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영혼을 잃은 인간에게 영혼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고, 영혼을 잃게 하는 장소로부터 피하라.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밝은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라. 인간은 스스로 영혼을 잃지 않는다.
누구든지 쇄뇌를 당하기 시작하면 영혼을 잃게 되지만, 영혼을 잃는 것은 영혼을 잃었는지도 모르게 되어 다시 찾기가 힘들게 되며, 또한 영혼을 잃은 인간이 되어 다른 인간에게 퍼트리는 과정에서 더더욱 영혼을 찾아 회복하기가 힘들게 된다. 영혼을 잃은 인간에게 영혼을 잃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싶으면, 자신의 주체적 영혼의 삶에서 행복하고 보람된 인간의 삶을 살아라.
이념에 쇄뇌된 인간을 설득하여 바른 삶을 찾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삶 자체의 차이에서 스스로 깨닫게 할 때, 스스로 깨달아 영혼을 찾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론적 자아를 완성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러한 인간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잃게 하여 그 인생을 포기적인 인생이 되게 하려는 인간이며, 선의 길을 포기하고 악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는 사악한 인간임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영혼의 한계
인간은 현실에 살고 있으며, 현실에서 행복한 삶을 이루어야 하고, 현실에서 존재를 이루어야, 신의 세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이 비현실 속에 살고 있으면, 비현실에서 불행을 행복이라 착각하고, 비현실에서 존재를 이루었다는 착각을 하고, 신의 세계로 착각한 귀신으로 끝나게 된다.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의 진보는 없으며, 육체의 한계 안에서 영혼의 진보는 이루어지는 것이니, 육체의 한계에서 영혼이 진보할 수 있는 한계는 하느님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영혼으로까지 진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진보하는 것은 진보할 수 있는 실천적인 수행에서 진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수행은 하지 않고, 그저 믿음만 가지고 영혼이 진보하기를 바라는 것은, 씨를 심지 않고 싹이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이며,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이며, 산꼭대기 올라가 해물을 찾는 것이며, 바다 속에 들어가 산나물을 찾는 것과 같이 참으로 황당무계한 인생이니, 그러한 삶은 현실을 외면한 황당무계한 믿음 속에서 망상에 빠진 인간의 삶이다.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육체 안에서 영원한 존재를 이룰 수 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존재를 찾는 것은 망상에 빠진 정신질환자의 공허한 헛손질이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신비한 것은 인간의 육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도 인체의 원리와 이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즉, 신비하다는 것은 아직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재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원리도 무시한 신비한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에 빠진 인간의 말장난일 뿐이며, 인간으로서 진실한 삶을 거부하고 귀신의 속삭임에 영혼을 잃어버린 인간의 몽상일 뿐이다.
영혼의 책임
존재론적 자아를 찾아 이루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내부에 자아를 심어라. 그것이 시작이니 시작없는 결실은 없다. 자아가 자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종교적 대상에 자아를 구속시킨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은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희망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니, 절망적인 삶에서 인생을 끝없는 고통의 나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인간의 영혼을 책임져 줄 능력이 있는 존재는 없으며, 어떠한 존재도 인간을 구속시킬 자격이 없다.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거늘, 어떠한 존재가 있어 인간의 영혼을 책임지고, 어떠한 존재가 감히 인간의 영혼을 구속한다는 말인가? 모두 사악한 인간들의 짓일 뿐이다.
영혼의 지식
영혼의 본질은 자유이며, 영혼의 자유에서 지식을 바르게 습득할 수 있다. 수많은 지식에서 영혼은 영혼의 본질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같은 지식을 스스로 가려서 밝음을 이루다. 이것은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에 있는 수많은 영양분에서 나무에게 필요한 절대적인 영양분만을 흡수하여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만약, 그 땅을 척박하게 만들게 되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이, 지식이 빈약하면 영혼이 죽게 된다.
나무는 그 뿌리가 내리고 있는 땅이 척박하면 죽지만, 인간의 영혼이 죽으면 그 자리에 귀신이 들어앉게 된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영혼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지식의 습득에 따라 영혼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서 인위적으로 가려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편협적인 지식이 되어 영혼의 밭을 척박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한 환경적 지식으로 인하여 영혼을 굶주림의 기아상태로 몰아가게 되니, 그럴 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절망이다.
지식에서 지능과 지혜가 이루어지고, 지능은 현재론적 삶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하며, 지혜는 존재론적 삶을 유익하게 하여 영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지식이 부족한 지능은 배타적인 성품으로 삶을 불행하게 하고, 지식이 부족한 지혜는 영혼을 기아상태로 만들어 결국 잃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기초적인 학문은 두루 섭력하고, 그러한 학문의 바탕위에서 삶에 필요한 학문과 존재론적 자아에 필요한 학문을 심도 있게 하는 것이 바른 학문이 되며, 그러한 학문에서 지능과 지혜가 원활한 진보를 이루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게 된다.
종교적 이념에 쇄뇌된 인간이 그 쇄뇌에 필요한 것 외의 모든 학문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니, 그러한 인간으로 인하여 인간의 지능과 지혜가 퇴보하게 되고, 인간세상은 진리와 멀어져, 하느님의 길이 끊기고 귀신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에도 벗어나는 편협적인 학문 아닌 학문으로 인하여, 인간의 이성이 퇴보하고, 감성이 조잡한 것에 끌리게 되니,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져 영혼을 잃게 되고, 감성이 사악해져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배타적인 성품을 이루어 세상을 암울하게 만들게 된다. 지능과 지혜를 진보시키는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며, 지능과 지혜를 퇴보시키는 추상적인 지식이나 편협적인 지식은 가식에서 가식으로 끝나게 되니, 그러한 지식은 망령적 지식이 된다.
영혼의 무지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는 지식의 부족함이나 마음의 양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정신과 마음에 지식이나 양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는 새로이 알 것이 없으며, 알고 있는 것에서 오히려 부담을 느낀다. 소중한 지혜는 진실한 삶에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는데 사용하지 않으며, 죽어서 잘살 것만을 생각하고, 현실의 지혜는 그저 먹고 자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에만 활용을 한다. 그러한즉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는 지식이 필요가 없다. 철학도 과학도 그저 쓸모없는 장난이 되고, 삶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필요없는 정신적 낭비가 된다.
영혼이 없는 인간은 어떠한 것이 조화로운 것이며, 어떻게 해야 조화롭게 되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어떠한 것이 불합리한 것이며, 어떻게 해야 불합리하게 되는 지에만 관삼이 있다. 그러한 영혼이 없는 인간은 사랑을 미움으로 변질시키고,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며 조화로운 삶을 깨고 불화를 일으킨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배워도 배워도 배움이 부족하여 갈증을 느끼지만, 영혼이 없는 인간은 배우면 배울수록 지나치게 넘쳐 괴롭게 되니, 그것은 그 배움의 용량이 작기 때문이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모르는 것을 스스로 노력하여 배우려고 하지만, 영혼이 없는 인간은 모르는 것을 스스로 노력하여 알려고 하지 않고, 남이 힘들게 노력하여 안 것을 몇 마디 말로 물러서 얻으려고 하는 지식적 구걸을 하면서도, 그렇게 묻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모르는 것을 묻는 것에 창피함을 모르고 뻔뻔하다. 그리하여 그러한 인간에게 가르쳐주면 고마운 줄은 모르고 뒤돌아서서 야비하게 웃으며, 가르쳐주지 않으면 험담을 하고 헐뜯으며 비난한다.
힘들게 노력하여 안 인간은 그것을 알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인간에게 고생을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기를 원하며, 가르쳐 주는 것 자체에 보람을 느끼고, 또한 가르쳐주는 것으로 자기자신에게 위안을 삼지만, 상대를 비난하거나 책망하지 않으니, 그것은 그 어려움을 경험을 통하여 알기 때문이다. 모르는 자는 모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물어서 알 때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그 부끄러움은 상대가 힘들게 고생하여 안 것을 자신은 쉽게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즉, 그렇지 않고 모르는 것을 남에게 물어서 알면서도 뻔뻔한 인간은 그러한 인간이 영혼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니, 영혼이 없는 인간은, 고마움이 무엇인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뻔뻔함이 무엇인지, 그것을 가릴 수 있는 기본적인 정신적 도덕률이 없기 때문이다.
위선적 영혼
진리는 어떠한 시대를 거친다 하더라도 같으니, 그 같은 것이 영원한 진리며, 거짓은 어떠한 시대를 거친다 하더라고 같지 않으니, 그 같지 않은 것이 영원한 거짓이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한 진리에 따르는 삶에서 영원해지며, 영원한 거짓에 따르는 삶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은 영혼을 탄생시키는 것에 있으며, 영혼의 탄생은 육체를 떠나서는 이룰 수 없다.
영혼은 뇌간을 뿌리로 하고 육체가 가지와 잎이 되어 나무가 자라듯이 자란다. 영혼을 자라게 하는 식량은 정신과 소리에 의하여 생산되며, 마음은 탁한 색채를 거두어 지우는 것이다. 마음이 탁하면 영혼의 성장을 더디게 하고, 마음이 탁하면 육체에 질병이드니, 그 질병이 영혼의 질병이다.
영혼은 세 가지로 완성을 이루며, 육체를 떠나는 죽음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가 하나를 이루어 영혼이 실체를 이루게 된다. 이 세 가지는 정신과 소리와 마음을 갖기 다스리는 수련에서 이루어지며, 실천적 수련을 하지 않고 믿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정신에 두고 정신을 완성하는 것이며, 믿음을 소리에 두고 소리를 완성하는 것이며, 믿음을 마음에 두고 마음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믿음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이것 외에 믿음은 허공에 뿌리를 내리려는 믿음인즉, 실천적 수행을 위한 믿음에서 믿음의 힘이 나타나게 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있는 숭고한 능력이다.
모든 것은 갖추는 것에서 베풀어진다. 갖추지 않고 베푸는 것은 없는 것이니, 영혼이 밝지 않고 무엇으로 선행을 하겠는가? 영혼이 밝지 않은 인간이 선행을 한다는 것은, 다른 인간의 밝은 영혼을 빼앗는 짓이니. 그것은 악행이 되어 더욱 그 영혼이 어두워짐을 알라. 그런즉, 선행을 할 대상을 찾기 전에 자신에게 어떠한 선행심이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선행심이 없다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실천적 수련을 해야 하며, 선행심이 있다면, 선행할 일이 저절로 찾아오니 찾아다닐 일이 아니다. 찾아다니는 자체가 인위적이며, 그러한 인위적인 선행은 선행 할 그 무엇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체를 해치는 것은 영혼을 해치는 것이지만, 영혼을 해치는 것은 그 존재를 망가트리는 짓이며, 인간의 영혼을 해치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무덤을 파는 짓인즉, 용서받을 이치적 방법이 없다.
영혼의 자유
영혼의 구속은 모든 것을 구속한다. 영혼의 자유를 부정하고 구속시키는 인간은 하느님의 빛을 거부하는 인간이니, 그러한 인간은 영혼의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화를 당하고, 무엇인가에 항시 두려움을 느끼고, 무엇인가 항시 부족하다는 생각이 일어나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그 영혼이 구속된 인간이다. 그러한 것이 구속된 영혼이 자유를 얻기 위한 몸부림인 줄을 모르고 더욱 구속시키니 더욱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과를 분명히 보고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인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짓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원인과 결과에서 결과만을 보고 인간의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원인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과 능력을 망각한 것이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이거늘, 원인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원인을 결과로 고정시켜 놓았다는 말이다. 인간의 본질은 자유이며, 자유의 본질은 영혼에 있다.
자유의 본질이 육체에 있다면 그것은 땅의 이치적 삶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고, 자유의 본질인 영혼을 구속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적 삶을 이루고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영혼을 구속된 원인으로 결정된 뒤의 인간의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인간의 의지라는 말은 그럴 듯하게 같다 붙이는 한갓 미사어구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결과에 있지 않고 원인에 있다. 그 원인을 왜곡함으로 해서 인간의 의지에 따른 영적인 자유로운 삶을 왜곡하게 된다. 영혼의 본질은 빛이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빛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빛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하느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영혼의 길이 신의 구속적 지배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영혼을 하느님께서는 왜 창조를 하셨을까?
만약 그러려고 했다면 인간의 차원을 짐승의 차원에 묶어 두면 될 것을, 왜 인간에게 이러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머리를 주시어 영혼을 따지고, 삶을 따지고, 존재를 따지고, 신을 따지게 했을까? 영혼은 인간의 삶에서 존재를 이루어 하느님의 세계에 탄생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하느님의 씨이다. 그 씨인 영혼은 빛의 본질에 따라 생장을 한다. 그 어떠한 존재도 영혼을 구속할 수 없으며, 구속할 존재도 없다. 즉 하느님을 능가할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왜 인간이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의 말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인간이 타인의 영혼을 구속하고 그 삶을 지배하기 위하여, 허상의 신을 설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와 삶의 목적을 변질시켜 꿰어 맞춘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구속시키는 것은 존재론적 목적을 망각하여 자아를 죽이는 짓이며, 현재론적 삶을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짓이다.
스스로 그러한 구속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영혼의 본질에 따라 자유로운 영적 삶을 이룰 때, 그 길이 하느님의 길이 되고, 그러한 길에서는 어떠한 존재도 해치지 못하게 되니, 그러한 길은 하늘과 공기와 땅에서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길을 해치는 인간은 하늘과 공기와 땅으로부터 그에 따른 댓가가 분명히 치러진다. 이러한 것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에 따라 인간의 영혼이 자유로운 인간세상이 되어야 불행을 끊고 행복한 인간세상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구속
영혼이 구속당하면, 그 삶이 아무리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어도 불행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며, 가치 없는 인생과의 싸움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영혼이 억압당하면 이기주의적 무지에 빠지고, 또한 공포와 죄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방법을 찾지 못하고, 항시 외부적 의존의 대상이나, 외적 현실에 끌려가는 삶이되기 때문이다.
정신과 마음이 타율적 지배에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영혼이 구속당한 것이며, 영혼이 구속당한 뒤의 정신과 마음은, 노예적 정신과 노예적 마음을 이루어 무가치한 것에서 가치를 찾게 되니, 행복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삶이 되고 만다. 자신의 내면에 있어야 할 영혼이 외부적 대상에 영혼을 빼앗긴다면, 삶의 모든 면에서 자유를 잃게 된다. 삶에서 자신이 뭔가에 묶여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낀다면, 시야를 안으로 돌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동물의 가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육체의 자유보다 영혼의 자유를 이루어야 진정한 자유가 된다. 인간으로서 영혼의 자유는 하느님의 세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즉, 영혼의 자유를 잃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까지 모두 잃게 된다.
남을 지배하려는 인간이 지배를 당하고, 지배를 당한 인간이 남을 지배하려 한다. 영혼을 구속하려는 인간이 구속을 당하고, 영혼이 구속당한 인간이 남의 영혼을 구속하려 한다. 그런즉 영혼이 구속당하여 노예정신이 있는 인간을 조심하라. 그들은 너의 영혼을 훔치기 위하여 자나 깨나 고심하고 있음을 알라. 영혼을 잃으면 바로 노예가 되고, 그 영혼을 되찾기 전에는 노예에서 탈출할 수 없으나, 영혼을 되찾도록 가만 놔두지를 않고 계속적인 구속의 삶이 되도록 정신을 혼미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불행과 괴로움을 호소하거나, 심리적 갈등에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일으키게 한다면, 그러한 인간은 영혼이 구속된 인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한 어떤 인간이 살살거리며 말하거나, 굽실거리며 아첨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 위한 짓임을 알라. 영혼을 구걸하는 인간은 모든 삶이 구걸적 삶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기보다 남의 노력을 훔치기 위하여 온갖 짓을 다하니, 그러한 인간에게 무엇을 빼앗기는 것은 결국 영혼까지도 빼앗기게 됨을 알라.
영혼의 노예
영혼이 구속된 인간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인간인즉, 현재론적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그러한 삶을 당연하게 여기니, 그러한 눈먼 봉사와 같은 정신으로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노예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으니, 노예에게는 배려라는 말 자체가 없다. 자기와 같은 노예와는 똘똘 뭉치고 자기와 같지 않는 노예가 아닌 인간은 무조건 적으로 여기며, 자기와 같이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은 자기를 헤치는 존재들이라 의심하고 무조건 공격을 한다.
영혼이 구속된 노예에게는 선악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선이고,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무조건 악이기 때문이다. 노예적 삶의 운명은 두 가지로 영혼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가 더하여 세 가지로 영혼을 잃고 사라진다. 하나는 노예적인 삶에서 희망을 버리는 것은 노예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니, 그것이 영혼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이 영혼이 잃은 삶이라고 생각하며, 또 하나는 충실한 노예의 삶에서 더욱 불행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그것이 영혼을 잃지 않는 노예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하여 충실하게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이다.
충실한 노예의 삶이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충성할 수 있는 것만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자신의 배우자와 자식과 형제들까지도 모두 버려야 한다. 또한, 자신의 육체는 자신의 육체가 아닌지라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는 집착을 버려야 하고, 인간다운 행복을 가질 자격이 없으니,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이루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인즉, 그렇게 하여 주인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주인이 불행한 삶을 살라고 말하면 불행하게 살아야 하고, 주인이 원하는 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여야 하며,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하고, 주인이 다른 인간을 살생하라고 하면 인간을 살생해야 하며,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정신이 위대한 노예의 정신이며, 그러한 주인을 비난하는 인간은 잔인하게 공격을 하고, 노예에서 탈피하려는 노예는 비굴한 인간으로 그러한 인간은 영혼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저주를 한다.
충실한 노예적인 삶을 사는 노예가, 정상적이고 바르게 사는 인간이 삶에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는 것을, 그 틈을 이용하여 고생스러운 짐을 버리고 노예가 되라 말하고, 노예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며, 노예의 삶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보다 덜 힘들고 삶의 짐이 덜 무거우니, 노예가 되라고 그 검은 손길을 인간세상에 함부로 내민다.
그렇게 충실한 노예적인 삶에서 주인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할 때,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혼의 노예가 인간세상에 있는 이상, 인간세상은 하느님의 밝은 기운을 잃게 되고, 귀신의 인간세상이 되며, 그러한 인간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에는 그 무엇도 찾거나 이룰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인간세상은 참으로 비굴하고 더러워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까지도 의심이 가게 하지만, 또한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라는 존재인지 의심을 하신다.
영혼을 잃은 인간
영혼을 잃은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가식이다. 물질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서 물질에 목숨을 걸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죽음이후만을 꿈꾼다. 진리도 없고 진리도 모르면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본적인 교양도 없으면서 교양이 있다고 생각한다. 속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있으면서 겉으로는 말쑥하게 옷을 차려 입고 교양이 있는 척 하며, 머리에는 온갖 잡된 생각을 꽉 채워놓고, 입으로는 고상한척 말을 하고 교양이 있는 척하고 있다.
보편적인 진리와 보편적인 상식을 알고 있는 인간은 교양이라는 말도 필요없이 모든 상대와 원활한 삶을 이룬다. 그러나 영혼을 잃은 인간은 편협적이고 인위적인 단순한 진리를 진리라 말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면서 자신은 교양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교양을 내세운다. 그러한 인간의 생활은 가식적인 생활이 되어 항시 겉을 중요시 하니, 그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숨기려는 것이며, 언어적 표현을 고상한 척 하지만 그 말속에는 온갖 죄악을 품고 있다.
이렇게 영혼을 잃은 인간은 진실로 교양있는 상대를 만나면 그것을 시기하여 비웃고 그 교양을 뺏으려하며,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을 보면, 오히려 가식적인 삶이라 비웃으며 훼방을 놓는다. 그렇게 영혼을 잃은 인간은 가식적인 삶에서 타인의 삶을 핍박하고 그러한 짓을 즐기며, 죽음을 찬양하고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인간임을 알라.
영혼을 지켜야 한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라, 자신으로부터 하느님을 찾는 것에서 그 삶이 밝아지게 될 것이니, 인간에게 위압감을 갖게 하는 거대한 건물과 그와 같은 인조물에는 하느님께서 내려오시지 않는다. 자신이 거주하는 집이 그러한 거대한 건물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이 가장 거대한 곳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천지만물의 모든 이치가 함축되어 존재하는 인간의 육체에 비하면, 그러한 거대한 건물들은 하나의 먼지만도 못함을 알라.
진정한 믿음은 자기자신 안에 있으며, 자기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영혼의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영혼의 빛을 이루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의 영혼을 지키며, 상대와 이웃을 향한 선행심을 갖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시작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자기자신을 지켜갈 때, 인간세상은 밝아질 것이며, 모든 불의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할 때 인간세상은 허상의 종교적 대상에 놀아나 그 영혼을 잃지 않을 것이며, 선이 아닌 악의 종교에 빠져 인생을 허망하게 끝내지 않을 것인즉, 이성에서 벗어난 종교적 미신과, 인간의 감정을 사악하게 만드는 시기와 질투의 귀신으로부터, 자신의 영혼과 세상의 영혼을 지켜야 한다.
노예적 영혼
주체적 영혼은 영혼의 빛을 강하고 밝게 하며, 노예적 영혼은 영혼의 빛을 약하고 흐리게 한다. 주체적 영혼에게는 인생을 통한 모든 경험과 지식들이 영혼의 지혜로 남게 되니, 자아의 영적 빛이 강하고 밝아진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의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닌지라 모든 경험과 지식은 지혜로 남지 못하니, 자아의 영적 빛은 퇴보하게 되는 것이다.
주체적 영혼에게서의 인생의 역경은 땅의 삶에 의한 영혼의 때를 벗겨 영적자아의 빛을 더욱 밝게 닦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에게서의 인생의 역경은 오히려 땅의 삶에 의한 영혼의 때가 영적자아의 빛을 흐리게 만든다. 주체적 영혼의 인생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적 기쁨의 인생이 될 수 있지만, 노예적 영혼의 인생은 귀신과 함께 하게 되니 귀신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귀신의 성품에 따라 원망의 인생이 되게 된다.
주체적 영혼의 인생길은 개인의 영적성숙 뿐만 아니라 상대 또한 영적성숙을 하게 한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의 인생길은 개인의 영적퇴보 뿐만이 아니라 상대 또한 영적퇴보를 하게 한다. 나의 영적성숙은 상대의 영적성숙을 도와주고, 상대의 영적성숙은 나의 영적성숙을 일으킨다. 인간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어도 이러한 주체적 영혼의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적 화합과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며, 인류적 평화와 안정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들은 그 근본이 상대를 인정할 수 있는 영적성숙이 없기에 무조건적인 시기질투에 의한 반목과 투쟁을 즐기고, 본인도 모르는 죄책감에 의한 두려움으로 단 두 사람의 화합도 이간하여 적대적으로 대하게 만들며, 그렇게 상대들이 적대적이 되는 것에서 안정감을 갖는다. 이것은 노예적 영혼들에게는 일종의 중독성이기에 그 어떤 교육이나 사회적 교훈도 달리 해석하여 상대의 영적성숙을 방해하는 것에서 위로적(慰勞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주체적 영혼은 그 바탕이 하느님의 정신과 마음인지라 상대를 포용하려는 포용성이 보편적 성품이 되게 한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은 그 바탕이 하느님의 정신과 마음을 잃어버린 영혼인지라 귀신의 성품에 따라 상대를 포용할 수 없는 배타성이 특이적 성품이 되게 한다. 인간세상의 모든 평등적 아름다움은 주체적 영혼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인간세상의 모든 차별적 추함은 노예적 영혼들에 의하여 발생한다. 주체적 영혼에게 있어 상대의 즐거움은 자신의 즐거움이 되고, 상대의 고통 또한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지만, 노예적 영혼에게 있어 상대의 즐거움은 자신의 고통이 되고, 상대의 고통은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주체적 영혼에게 있어 진리는 영적발달의 기회로 삼아 자아의 영혼의 빛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며, 선함을 입에 담아 상대의 영적성숙을 돕는 것으로 자아의 영혼의 빛을 더욱 이루기 위하여 실천하며, 상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그 아름다움을 또한 자신의 영적 아름다움으로 삼아 영혼의 밝은 빛을 이룬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에게 있어 진리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기의 대상이 되어 오만과 탐욕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방해하며, 악함을 입에 담아 상대의 영적성숙을 방해하고 선함은 질투의 대상이 되어 분노와 원한으로 자아의 영혼의 빛을 스스로 죽이며, 상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미움의 대상으로 삼아, 사악한 이간질로 상대를 추하게 만들어 자신과 상대의 영혼의 빛을 모두 더럽힌다.
인류의 모든 선행의 뿌리는 주체적 영혼들이며, 인류의 모든 악행의 뿌리는 노예적 영혼들이다. 주체적 영혼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감이 있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과 행동에 거짓과 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감이 없기에 거짓과 변명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정당함을 주장한다.
주체적 영혼은 상대의 도덕성을 따지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상대의 도덕성을 공격하지 않아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밝게 한다. 또한 상대의 약점을 자신의 약점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에 채찍질을 하여 자아의 영적발달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노예적 영혼은 자신의 도덕성은 숨기고 상대의 도덕성만을 따져 상대를 공격하여 구석으로 몰아 부치기를 좋아한다. 또한 상대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위안으로 삼고, 상대의 약점을 근거로 내세워 자신의 비뚤어진 도덕성을 정당화 한다.
속죄의 영혼
영혼을 믿는 다고 하여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의식한다고 하여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영혼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삶을 위험하게 할 이유나 존재는 없다. 그것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영혼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한 시간과 영원한 공간에 존재하고, 모든 만물이 신 안에 있으며, 모든 인간이 신의 세계로부터 탄생을 이루어 신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인간의 삶이 그리고 인간세상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무기체처럼 아무 느낌이나 감정이 없어도 그냥 돌아가는가? 유기체적 생명체들도 아무 생각없이 살면 그냥 돌아가는 것인가? 인간 또한 유기체적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니 아무 생각없이 살다보면 돌아가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아도 돌아갈 것이며, 선을 쌓든 악을 쌓든 아무 관계없이 돌아갈 것이 아닌가? 즉 신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든 신이 어떻게 생겼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또는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돌아갈 수 있는 노력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만 하면 되는가? 욕심껏 재물을 모아서 신전에 같다 바치면 되는 것인가? 그런 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열심히 인간세상에 알리면 되는 것인가? 종교적 이념에 따라 노예가 되어 그저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인가? 다른 종교를 핍박하고, 다른 문화를 파괴시키고, 종교적 이념이 다른 인간을 공격하고, 남녀를 차별하여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점검을 하고, 여자에게는 사악한 마귀가 있을 수 있다고 가려서 처형하면 되는 것인가?
다른 인종에게는 영혼도 없으니 종교적 사명 아래 인간을 살상하여 멸종시키면 되는 것인가? 행복한 인간이나 행복한 부부가 존재하는 것은 진리를 거역하는 것이니, 모든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모든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면 되는 것인가? 부자는 모두 사악한 존재들이니 모든 인간을 가난하게 만들면 되는 것인가? 아무것에나 신을 갖다 붙이지 말고, 아무 개념이나 진리라고 말하지 말라.
신을 믿는 다면 인간을 믿어야 할 것이니, 만약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는 신이 있다면, 인간으로서 인간을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 내릴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믿고, 나와 상대를 믿고, 내 가정과 이웃을 믿고, 내 민족과 타 민족을 믿는 다면, 인간세상이 하느님의 세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즉, 하느님께서 바라는 인간세상이 그러한 세상이다.
죄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속죄할 것이요,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여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 것이며,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라. 죄는 누가 용서를 하여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죄에서 사라지는 것이며, 자신의 죄만을 스스로 속죄할 것이요 남에게까지 속죄하라는 짓을 하지 말라. 너만 죄가 있고 남은 죄가 없으니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함부로 속죄하라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선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을 것이며, 신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든, 영혼이 있든 없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이성을 갖추고 존재론적 자아를 찾아 이루는 행복한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른 믿음에 의한 삶임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