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일본으로부터 회복된지 수십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과거의 수치만을 돌아보며 일본의 사죄만을 거듭 촉구하는 데서 벗어나 우리 나라가 이런 고난을 겪고도 이만한 나라를 이루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앞으로의 문제에 전념하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식의 생각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한국의 용서 없이는 양국 관계가 정상화 될 수 없다고 말한 점이 상치합니다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잘못을 늬우치지 않는 사람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나라의 앞날이 중요해도 앙금을 가진 채로 두 국가가 잘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상의 차이이지 문후보자가 일본의 두둔하는 장은 아니고 일본의 침략이 우리 나라에게 이익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KBS는 문후보자의 말을 왜곡보도함으로써 일본에게 좋은 먹잇감을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민들도 문후보자의 글이나 동영상을 다 찾아보고 참뜻을 알려는 사람들은 적을텐데
일본이 과연 그렇게 좋은 먹잇감을 두고 그렇게 노력할까요?
KBS는 일본 방송인가요?
2012년 8월 14일 일부 발췌독=>친일파를 경계하고 애국자들의 처우 개선을 말함
애국심은 집단본능에서 나온다. 올림픽을 응원하면 애국심이 생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때뿐이라는 것이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우리는 각기 제 갈 길로 간다. 다시 개별이익에 몰두한다. 이 애국심이 마음속에 늘 자리잡게 할 수는 없을까? 집단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모두 개별이익을 확대할 때 누군가 이를 던져버리고 집단을 위해 희생하면 그 집단은 살아남는다. 안중근의 희생 때문에 대한인의 자존심과 명예가 지켜질 수 있었다. 우리 선수들의 빛나는 승리 뒤에는 개개인의 크고 작은 희생이 있었다. 올림픽 때의 응원이 항구적인 애국심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것은 응원에는 대부분 즐거움만 있을 뿐 이러한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대한민국’을 외칠 때, 저 선수들처럼 이 나라를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보았는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아름다운 수고와 희생을 높이 사 주고 기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도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애국심이 자리잡는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살던 친일파는 계속 잘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못사는 나라라면 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집단본능을 이용코자 하는 정치세력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과거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가 그런 것들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 중에도 개인의 인기를 위해,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집단본능을 이용했던 일이 많았다. 애국을 가장 많이 외치는 부류는 정치인들이다. 선거철이 오면 후보자들은 누구나 애국을 말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 자기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나라의 분열까지도 이용하려는 사람은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거나 희생할 의사가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애국심이 없는 것이다. 헌신 없이 나라 사랑은 없다. 애국은 자기희생이 따라야만 완성되게 되어 있다. 이번 올림픽의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2012년 7월 31일 발췌 => 여야 국회의원을 잘못을 모두 비판함
그동안 신문과 방송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 편싸움을 벌였다. 공정과 진실보다 한쪽 편을 드는 데 더 몰두했다. 권력은 이를 부추겼다. 그 결과 신뢰를 잃어버렸다. 정당은 어떤가. 여당 의원은 뇌물을 받아도 자기 당 의원들이 감싸 구속이 안 된다. 뇌물을 받은 야당 원내대표는 국회를 피신처로 삼아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국회가 범인을 숨겨주는 은신처가 됐으니 누가 국회를, 정당을 믿어 주겠는가.
2011년 11월 23일 발췌
우리들 사이에서 언제부터인가 ‘애국심’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애국’을 말하면 어쩐지 촌스러운 것 같고, 시대에 뒤처진 듯한 인상을 준다. 지식인들은 애국주의를 낡은 사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사회주의자는 애국을 국수주의로 몰거나 민중을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받든다. 그러나 나라는 이념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가치다. 보수가 시장경제를 외치지만 시장경제가 결코 나라보다 앞설 수 없다. 진보가 분배를 말하지만 나라가 있은 다음에 분배도, 복지도 있는 것이다. 애국은 진보와 보수를 모두 수렴한 더 큰 가치이자 우리의 지향점이다
2011년 9월 6일 발췌 => 한민족의 우수성과 끈질김 언급함
유대인에게 ‘통곡의 벽’이 있듯이 한민족에게는 ‘통곡의 땅’이 있다. 중앙아시아…. 우리에게는 멀고 아득한 나라들이다. 지난주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은 70여 년 전 고려인 디아스포라 현장인 우즈베키스탄을 찾았다. 1937년 9월 어느 날 소련은 연해주 지방에서 번영하고 있던 약 18만 한인 전부를 예고 없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불과 몇 시간의 여유만 주고 떠나도록 명령했다. 고려인들은 짐승처럼 시베리아 화물열차로 5000㎞ 이상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내쫓겼다. 근 한 달 뒤 이들은 거친 들판에 혹은 갈대만 무성한 습지에 버려졌다. 그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은 끈질기고 우수했다. ‘김병화 콜호스’ 기념관에는 한국판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들은 갈대를 베어 움막을 만들었고 시베리아의 칼바람을 온돌로 버티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갈대밭을 엎어 볍씨를 심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쌀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밀과 면화도 심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할당된 목표 수확량보다 몇 배의 결실을 보았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웠다. 소련 정부는 고려인 집단농장의 김병화에게 두 번이나 노력 영웅상을 주었다. 2세, 3세부터는 전문직 종사자도 많아졌다. 교육열 덕분이다. 시베리아 과학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 톰스크 등에서 과학자로 활약하고 있는 많은 한인 후손이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30만 명, 소련 전체로는 60만 명의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다.
2011년 4월 19일
독도 주변은 평균 수심이 1500m 이상이다. 이런 깊은 바다 속에서 어떻게 바위섬 하나가 우뚝 솟아났는지 불가사의하다. 독도가 없었다면 동해는 우리 바다가 될 수 없었다. 독도가 동해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올랐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우리 바다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도가 소중한 것이다. 독도는 동해의 푸른 물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요, 보석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섬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우리 국민이 이토록 독도의 귀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 어쩌면 3000개 섬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지 않았을까? 일본이 이 섬을 넘봄으로써 우리는 강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이 물려준 한 뼘의 땅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각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일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대해 생각했다. 한·일 양국이 경제나 문화적으로 가까워졌고 미래에는 안보협력도 필요할 텐데 왜 이렇게 삐걱거리는 것일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협력하며 사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 상처는 무엇인가. 일본의 영토 욕심에 한반도가 희생된 일이다. 화해가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일본이 영토 확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독도가 자기 영토라 주장하는 일본은 아직 진심으로 변화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러니 신뢰가 쌓이지 않는 것이다. 화해를 하려면 진심 어린 사과와 이를 받아들이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쓰나미를 당한 일본을 보고 연민의 감정으로 도왔다. 진정한 용서로 이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 마음을 외면했다.
강토는 그냥 보전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다. 조국이 부를 때 “여기 내가 있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강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5001함에는 20대의 처녀 경찰 4명이 남자 대원들과 똑같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그녀들의 기상이 갸륵했다. 밤이 되자 특별행사가 배 안에서 벌어졌다. 해양경찰에 배속된 전투 경찰대원들을 위한 세족식이었다. 함장을 포함하여 간부들이 무릎을 꿇고 이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나도 고생하는 50여 명 전체 대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씻겨주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혹시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을 대표하는 함장님의 발을 제가 씻겨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함장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듯했지만 말없이 양말을 벗었다. 나는 독도를 지키는 우리 아들딸들의 발을 정성을 다해 씻었다. 반달이 어스름히 비치는 독도의 밤, 우리는 어느덧 나라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2011년 1월 10일=>일본의 반성을 촉구함 & 한국의 용서를 주장함
비록 그것이 극히 초기 단계라 할지라도 일본과 군사협정으로 진입하기 전에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한·일 두 나라가 과연 군사협정을 맺을 수 있을 만큼 서로 신뢰하고 있는 사이인가라는 문제다. 단지 일시적인 힘의 균형을 위해 맺는 협정이라면 끝없는 의심과 배반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 협정이라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이는 취약한 일시적 구조일 뿐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안보협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눈앞의 계산보다는 두 나라가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연결돼야 한다. 한·일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나라다. 함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이웃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해결할 일이 있다. 두 나라가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일본이 과거 문제를 진정으로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 더 이상 독도 문제로 시비하는 일도 옳지 않다. 한국도 과거사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원한을 털고 마음을 열고 용서를 할 때다. 이렇게 진정한 사과와 용서가 있은 후에야 믿음이 생긴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안보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2010년 8월 30일 =>이 부분이 국민들의 시각과 어긋나서 친일파로 매도되어 국민의 질타를 듣고 있음
역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고 잊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한일병합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조선의 멸망은 외부와 내부의 두 요인에 의한 것이다. 지난 100년 우리의 시각은 밖에 대한 원망이 더 우세했다. 제국주의가 요동치던 세계사적 입장에서 볼 때 약소국인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조선 역시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어느 강대국에 기대어야 할지만이 관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붕괴 원인은 내부에도 있다. 앞에서 보듯 집권층이 무능한 데다 나라 생각은 뒷전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일본만을 탓하며 지내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과 못남은 없었는가? 우리의 잘못은 덮어두고 남의 탓만을 하는 마음이 올바른가? 이는 고종이 내부의 역량을 모으려 하지 않고 강대국에 기대려고만 했던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일본 탓은 이제 그만하면 족하다. 언제까지 남의 탓만 할 것인가. 남의 탓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기대려 했다가 실망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다시 그런 수치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사회문제도 마찬가지다. 내가 못사는 것이, 실패한 것이 다른 사람의 탓, 제도의 탓이라고만 생각할 때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주어진 여건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소홀히 했나를 돌아보는 마음들이 많아질 때 나라도 건강해진다.
2009년 8월 31일 전문
보통사람인 우리는 일상에 묻혀 살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잠시나마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의 덕을 기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라’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지만 보통 때는 그 나라를 잊고 산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이 지난주 안중근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현지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당연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안중근이었지만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를 너무 몰랐고, 그를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일제의 침략 증거로 보존되고 있는 뤼순 감옥에는 안 의사가 갇혔던 독방, 교수형 당한 집행실 등이 남아 있다. 그는 사형 전날 두 동생에게 최후의 유언을 했다. “내가 죽은 뒤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의 무덤이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감옥 공동묘지에 몰래 매장했다. 중국 정부는 집단 매장된 중국인 희생자들을 발굴하여 해골과 뼈가 남은 나무통 관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 의사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공동묘지 자리에는 아파트 건축이 한창이어서 붉은 감옥 담장 밖으로 크레인 머리들만 보였다.
-그렇게 원하시던 국권은 회복되고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승리의 만세를 부르실 당신을 그려 봅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당신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병사의 시신조차도 끝까지 찾기 위해 애쓰는 나라들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관동도독부 재판청사도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판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오.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니 만국공법(국제법)으로 처리토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이토의 죄악 15개 조목을 밝혔다. 이 재판을 참관한 영국의 그래픽지 기자는 “이 세계적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스스로 한 명의 의군(義軍)이 되어 희생을 택하신 당신은 3000만을 의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을 썼던 당신은 글씨마다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과 함께 무명지 없는 왼손을 낙관 대신 찍었습니다. 당신의 간절한 소망은 대한국인, 즉 대한의 국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 국민 됨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하얼빈역은 혼잡했다. 안 의사가 저격했던 곳은 지금 1번 플랫폼이 되었다. 저격한 장소와 이토가 쓰러진 자리는 단지 색깔 다른 타일 한 장이 깔려 있을 뿐 작은 기념 동판조차 없어 모두 무심히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안 의사는 저격 후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사진사는 “안중근은 놀랄 만큼 침착했다”고 진술했다. 홍콩의 화자일보(華字日報)는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손이 안정되었다. 손이 안정되었기에 탄알이 명중하였다”(1909년 11월 9일)고 썼다.
-물맷돌 하나를 들고 거인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는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손이었다면 그의 이마를 명중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손도 떨리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이 당신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회원들은 각자의 소회를 밝히는 기회를 가졌다. 한 여성이 “언제부턴가 나는 심장은 뛰지만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제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낀다. 한 어머니로서 나는 안 의사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했다. 안 의사 어머니는 사형 판결 소식을 듣고 “옳은 일을 했으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며 상고를 포기케 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는 글을 실었다.
일상에 다시 묻혀 살아야 할 우리,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돌아왔다.
문창극 후보자가 친일파인가? kbs가 친일파인가?
문창극 후보자의 칼럼들은 꽤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나 식민사관을 가진 분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KBS가 그의 동영상의 논조를 왜곡했다는 생각뿐입니다
교회강연을 1시간씩 듣기 힘든 분들을 위해 그의 칼럼들을 일부 발췌하여 올립니다
이 분은 친일파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이 분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다른 점은 일본의 침략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우리 나라의 문제점을 인정한 점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회복된지 수십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과거의 수치만을 돌아보며 일본의 사죄만을 거듭 촉구하는 데서 벗어나 우리 나라가 이런 고난을 겪고도 이만한 나라를 이루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앞으로의 문제에 전념하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식의 생각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한국의 용서 없이는 양국 관계가 정상화 될 수 없다고 말한 점이 상치합니다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잘못을 늬우치지 않는 사람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나라의 앞날이 중요해도 앙금을 가진 채로 두 국가가 잘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상의 차이이지 문후보자가 일본의 두둔하는 장은 아니고 일본의 침략이 우리 나라에게 이익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KBS는 문후보자의 말을 왜곡보도함으로써 일본에게 좋은 먹잇감을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민들도 문후보자의 글이나 동영상을 다 찾아보고 참뜻을 알려는 사람들은 적을텐데
일본이 과연 그렇게 좋은 먹잇감을 두고 그렇게 노력할까요?
KBS는 일본 방송인가요?
2012년 8월 14일 일부 발췌독=>친일파를 경계하고 애국자들의 처우 개선을 말함
애국심은 집단본능에서 나온다. 올림픽을 응원하면 애국심이 생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때뿐이라는 것이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우리는 각기 제 갈 길로 간다. 다시 개별이익에 몰두한다. 이 애국심이 마음속에 늘 자리잡게 할 수는 없을까? 집단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모두 개별이익을 확대할 때 누군가 이를 던져버리고 집단을 위해 희생하면 그 집단은 살아남는다. 안중근의 희생 때문에 대한인의 자존심과 명예가 지켜질 수 있었다. 우리 선수들의 빛나는 승리 뒤에는 개개인의 크고 작은 희생이 있었다. 올림픽 때의 응원이 항구적인 애국심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것은 응원에는 대부분 즐거움만 있을 뿐 이러한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대한민국’을 외칠 때, 저 선수들처럼 이 나라를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보았는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아름다운 수고와 희생을 높이 사 주고 기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도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애국심이 자리잡는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살던 친일파는 계속 잘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못사는 나라라면 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집단본능을 이용코자 하는 정치세력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과거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가 그런 것들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 중에도 개인의 인기를 위해,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집단본능을 이용했던 일이 많았다. 애국을 가장 많이 외치는 부류는 정치인들이다. 선거철이 오면 후보자들은 누구나 애국을 말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 자기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나라의 분열까지도 이용하려는 사람은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거나 희생할 의사가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애국심이 없는 것이다. 헌신 없이 나라 사랑은 없다. 애국은 자기희생이 따라야만 완성되게 되어 있다. 이번 올림픽의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2012년 7월 31일 발췌 => 여야 국회의원을 잘못을 모두 비판함
그동안 신문과 방송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 편싸움을 벌였다. 공정과 진실보다 한쪽 편을 드는 데 더 몰두했다. 권력은 이를 부추겼다. 그 결과 신뢰를 잃어버렸다. 정당은 어떤가. 여당 의원은 뇌물을 받아도 자기 당 의원들이 감싸 구속이 안 된다. 뇌물을 받은 야당 원내대표는 국회를 피신처로 삼아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국회가 범인을 숨겨주는 은신처가 됐으니 누가 국회를, 정당을 믿어 주겠는가.
2011년 11월 23일 발췌
우리들 사이에서 언제부터인가 ‘애국심’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애국’을 말하면 어쩐지 촌스러운 것 같고, 시대에 뒤처진 듯한 인상을 준다. 지식인들은 애국주의를 낡은 사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사회주의자는 애국을 국수주의로 몰거나 민중을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받든다. 그러나 나라는 이념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가치다. 보수가 시장경제를 외치지만 시장경제가 결코 나라보다 앞설 수 없다. 진보가 분배를 말하지만 나라가 있은 다음에 분배도, 복지도 있는 것이다. 애국은 진보와 보수를 모두 수렴한 더 큰 가치이자 우리의 지향점이다
2011년 9월 6일 발췌 => 한민족의 우수성과 끈질김 언급함
유대인에게 ‘통곡의 벽’이 있듯이 한민족에게는 ‘통곡의 땅’이 있다. 중앙아시아…. 우리에게는 멀고 아득한 나라들이다. 지난주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은 70여 년 전 고려인 디아스포라 현장인 우즈베키스탄을 찾았다. 1937년 9월 어느 날 소련은 연해주 지방에서 번영하고 있던 약 18만 한인 전부를 예고 없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불과 몇 시간의 여유만 주고 떠나도록 명령했다. 고려인들은 짐승처럼 시베리아 화물열차로 5000㎞ 이상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내쫓겼다. 근 한 달 뒤 이들은 거친 들판에 혹은 갈대만 무성한 습지에 버려졌다. 그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은 끈질기고 우수했다. ‘김병화 콜호스’ 기념관에는 한국판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들은 갈대를 베어 움막을 만들었고 시베리아의 칼바람을 온돌로 버티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갈대밭을 엎어 볍씨를 심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쌀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밀과 면화도 심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할당된 목표 수확량보다 몇 배의 결실을 보았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웠다. 소련 정부는 고려인 집단농장의 김병화에게 두 번이나 노력 영웅상을 주었다. 2세, 3세부터는 전문직 종사자도 많아졌다. 교육열 덕분이다. 시베리아 과학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 톰스크 등에서 과학자로 활약하고 있는 많은 한인 후손이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30만 명, 소련 전체로는 60만 명의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다.
2011년 4월 19일
독도 주변은 평균 수심이 1500m 이상이다. 이런 깊은 바다 속에서 어떻게 바위섬 하나가 우뚝 솟아났는지 불가사의하다. 독도가 없었다면 동해는 우리 바다가 될 수 없었다. 독도가 동해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올랐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우리 바다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도가 소중한 것이다. 독도는 동해의 푸른 물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요, 보석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섬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우리 국민이 이토록 독도의 귀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 어쩌면 3000개 섬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지 않았을까? 일본이 이 섬을 넘봄으로써 우리는 강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이 물려준 한 뼘의 땅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각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일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대해 생각했다. 한·일 양국이 경제나 문화적으로 가까워졌고 미래에는 안보협력도 필요할 텐데 왜 이렇게 삐걱거리는 것일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협력하며 사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 상처는 무엇인가. 일본의 영토 욕심에 한반도가 희생된 일이다. 화해가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일본이 영토 확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독도가 자기 영토라 주장하는 일본은 아직 진심으로 변화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러니 신뢰가 쌓이지 않는 것이다. 화해를 하려면 진심 어린 사과와 이를 받아들이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쓰나미를 당한 일본을 보고 연민의 감정으로 도왔다. 진정한 용서로 이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 마음을 외면했다.
강토는 그냥 보전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다. 조국이 부를 때 “여기 내가 있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강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5001함에는 20대의 처녀 경찰 4명이 남자 대원들과 똑같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그녀들의 기상이 갸륵했다. 밤이 되자 특별행사가 배 안에서 벌어졌다. 해양경찰에 배속된 전투 경찰대원들을 위한 세족식이었다. 함장을 포함하여 간부들이 무릎을 꿇고 이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나도 고생하는 50여 명 전체 대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씻겨주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혹시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을 대표하는 함장님의 발을 제가 씻겨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함장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듯했지만 말없이 양말을 벗었다. 나는 독도를 지키는 우리 아들딸들의 발을 정성을 다해 씻었다. 반달이 어스름히 비치는 독도의 밤, 우리는 어느덧 나라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2011년 1월 10일=>일본의 반성을 촉구함 & 한국의 용서를 주장함
비록 그것이 극히 초기 단계라 할지라도 일본과 군사협정으로 진입하기 전에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한·일 두 나라가 과연 군사협정을 맺을 수 있을 만큼 서로 신뢰하고 있는 사이인가라는 문제다. 단지 일시적인 힘의 균형을 위해 맺는 협정이라면 끝없는 의심과 배반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 협정이라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이는 취약한 일시적 구조일 뿐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안보협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눈앞의 계산보다는 두 나라가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연결돼야 한다. 한·일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나라다. 함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이웃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해결할 일이 있다. 두 나라가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일본이 과거 문제를 진정으로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 더 이상 독도 문제로 시비하는 일도 옳지 않다. 한국도 과거사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원한을 털고 마음을 열고 용서를 할 때다. 이렇게 진정한 사과와 용서가 있은 후에야 믿음이 생긴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안보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2010년 8월 30일 =>이 부분이 국민들의 시각과 어긋나서 친일파로 매도되어 국민의 질타를 듣고 있음
역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고 잊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한일병합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조선의 멸망은 외부와 내부의 두 요인에 의한 것이다. 지난 100년 우리의 시각은 밖에 대한 원망이 더 우세했다. 제국주의가 요동치던 세계사적 입장에서 볼 때 약소국인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조선 역시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어느 강대국에 기대어야 할지만이 관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붕괴 원인은 내부에도 있다. 앞에서 보듯 집권층이 무능한 데다 나라 생각은 뒷전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일본만을 탓하며 지내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과 못남은 없었는가? 우리의 잘못은 덮어두고 남의 탓만을 하는 마음이 올바른가? 이는 고종이 내부의 역량을 모으려 하지 않고 강대국에 기대려고만 했던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일본 탓은 이제 그만하면 족하다. 언제까지 남의 탓만 할 것인가. 남의 탓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기대려 했다가 실망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다시 그런 수치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사회문제도 마찬가지다. 내가 못사는 것이, 실패한 것이 다른 사람의 탓, 제도의 탓이라고만 생각할 때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주어진 여건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소홀히 했나를 돌아보는 마음들이 많아질 때 나라도 건강해진다.
2009년 8월 31일 전문
보통사람인 우리는 일상에 묻혀 살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잠시나마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의 덕을 기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라’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지만 보통 때는 그 나라를 잊고 산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이 지난주 안중근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현지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당연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안중근이었지만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를 너무 몰랐고, 그를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일제의 침략 증거로 보존되고 있는 뤼순 감옥에는 안 의사가 갇혔던 독방, 교수형 당한 집행실 등이 남아 있다. 그는 사형 전날 두 동생에게 최후의 유언을 했다. “내가 죽은 뒤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의 무덤이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감옥 공동묘지에 몰래 매장했다. 중국 정부는 집단 매장된 중국인 희생자들을 발굴하여 해골과 뼈가 남은 나무통 관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 의사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공동묘지 자리에는 아파트 건축이 한창이어서 붉은 감옥 담장 밖으로 크레인 머리들만 보였다.
-그렇게 원하시던 국권은 회복되고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승리의 만세를 부르실 당신을 그려 봅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당신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병사의 시신조차도 끝까지 찾기 위해 애쓰는 나라들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관동도독부 재판청사도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판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오.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니 만국공법(국제법)으로 처리토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이토의 죄악 15개 조목을 밝혔다. 이 재판을 참관한 영국의 그래픽지 기자는 “이 세계적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스스로 한 명의 의군(義軍)이 되어 희생을 택하신 당신은 3000만을 의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을 썼던 당신은 글씨마다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과 함께 무명지 없는 왼손을 낙관 대신 찍었습니다. 당신의 간절한 소망은 대한국인, 즉 대한의 국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 국민 됨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하얼빈역은 혼잡했다. 안 의사가 저격했던 곳은 지금 1번 플랫폼이 되었다. 저격한 장소와 이토가 쓰러진 자리는 단지 색깔 다른 타일 한 장이 깔려 있을 뿐 작은 기념 동판조차 없어 모두 무심히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안 의사는 저격 후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사진사는 “안중근은 놀랄 만큼 침착했다”고 진술했다. 홍콩의 화자일보(華字日報)는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손이 안정되었다. 손이 안정되었기에 탄알이 명중하였다”(1909년 11월 9일)고 썼다.
-물맷돌 하나를 들고 거인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는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손이었다면 그의 이마를 명중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손도 떨리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이 당신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회원들은 각자의 소회를 밝히는 기회를 가졌다. 한 여성이 “언제부턴가 나는 심장은 뛰지만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제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낀다. 한 어머니로서 나는 안 의사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했다. 안 의사 어머니는 사형 판결 소식을 듣고 “옳은 일을 했으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며 상고를 포기케 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는 글을 실었다.
일상에 다시 묻혀 살아야 할 우리,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