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짜라투스트라 1,2,3 을 읽고 새로운 의식으로 숙성되어 세상을 다시보기 바란다.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Nietzsche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출생 - 사망1844 ~ 1900대표분야형이상학대표이론생철학대표저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관련철학자쇼펜하우어생애 해설
1844년 10월 15일 독일 뢰켄에서 전통적인 목사집안의 첫 아들로 태어난다. 1851년, 칸디다텐 베버라는 사설 교육기관에 들어가,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운다. 1858년, 추어 포르테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철저한 인문계 중등교육을 받는다. 이 당시에 이미 소년 니체의 고전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 문학적 능력, 음악에 대한 자질들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1864년,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 예술사 공부를 시작한다. 한 학기 후에는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헌학자 리츨의 문헌학 강의에 전념한다. 1865년 겨울학기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학교를 옮긴다. 라이프치히에서 니체는 리츨의 지도를 받은 문헌학 공부와 쇼펜하우어의 발견에 힘입어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늦가을에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니체를 철학적 사유로 입문하게 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 그는 한동안 매료되었으며, 『비극의 탄생』은 그 자극 하에서 쓰여 진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에 의거한 세계 해석은 니체에게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하는 칸트 철학에 관심 갖게 한다.
1866년, 테오그니데아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자료들에 대한 문헌학적 작업을 시작한다. 디오게네스에 관한 논문은 1867년 『문헌학을 위한 라인 박물관』이라는 잡지에 게재된다. 이 논문과 스승 리츨 교수의 니체에 대한 높은 평가는 문헌학자 니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활발한 문헌학적 활동을 하면서도 니체는 철학으로의 학적 전회를 꿈꾼다. 피셔의 책을 통해 친숙해진 칸트에 관계되는 철학박사논문을 기획한다. 1868년 11월 8일 동양학자인 브로크하우스의 집에서 바그너를 처음 만난다. 쇼펜하우어와 독일 철학 그리고 오페라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눈 바그너라는 인물은 니체에게 깊이 각인된다.
이 시기에 니체는 첫 번째 철학적 글인 「목적론에 대하여」를 쓴다. 1869년 4월, 스물 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에 고전어와 고전문헌학의 비전임 교수로 위촉된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문헌학을 위한 라인 박물관』에 발표된 논문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대한 연구를 인정하여 니체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다. 1869년 이후에 니체는 본격적으로 철학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언어의 근원에 대하여」(1869/70), 「디오니소스적 세계관」(1870), 「수사학」(1874) 등이 대표적인 글들이다.
1870년 4월에 정교수가 된다. 7월, 독일-프랑스 전쟁에 자원의무병으로 참가하기 위해 대학에 휴가를 낸다. 그렇지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9월에 의가사 제대를 한다.
1872년, 니체의 첫 철학적 저술인 『비극의 탄생』이 출판된다. 이 책은 니체의 독창적이고도 철학적인 초기 사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니체의 후기 철학적 사유들로 향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예술가 형이상학, 신화의 포기불가능성 제기,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과 아폴론적 예술충동의 관계,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에 의한 그리스 비극의 몰락 등 이 책이 포함하고 있는 사유는 문헌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 결과 『비극의 탄생』은 비-문헌학자들로부터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동료 문헌학자들로부터는 극도로 모욕적인 평가와 공개적인 반박들을 받게 된다. 이로써 문헌학자 니체의 이름은 실추되어버린다.
『비극의 탄생』이 남긴 여파로 상처를 받은 니체는 바그너의 문화프로그램을 위한 전위대 역할을 자처하기 시작한다. 5월에 행한 ‘우리 교육의 미래에 대하여’에 대한 5개의 강연에는, 문헌학자가 아니라 독일의 정치적 교육자가 되기를 원하는 니체의 소망이 놓여있다. 그 이후 니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새로운 문화의 조건들에 대해 물으며, 이 조건을 찾기 위해 그리스 문화로 항상 되돌아간다.
초기 그리스를 그는 문화적 자기창조의 전형으로, 독일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이 의도에 의해 1873년까지 「쓰이지 않은 다섯 권의 책을 위한 다섯 서론」,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독일인에 대한 경고」 등이 작성된다. 이외에도 니체의 초기 철학적 사유를 아주 명료하게 결집한 텍스트인 「도덕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가 작성된다.
1873년, 『반시대적 고찰』의 첫 권이 발간된다(「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가와 저술가」) 여기서 니체는 자신을 정치 저술가 혹은 정치 교육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지배적인 시대정신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화의 지반을 준비하고자 한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을 원래 10~13개의 논문들로 구성할 계획이었지만, 4개의 주제들로 대체한다. 1권은 다비드 슈트라우스를 교양 있는 속물의 전형으로 보고 있으며(「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문필가」), 2권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다룬다(「삶에 대한 역사의 이로움과 해로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라는 제목의 3권은 원래의 의도인 독일인들에 대한 경고에 충실하다.
바그너와의 문제를 다룬 4권(「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에서는 바그너에 대한 표면적인 긍정적 평가 밑에 가시 돋친 비판을 숨기고 있다. 2권과 3권과 4권은 1874년에 출간된다.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가 출판된 직후, 첫 번째 바이로이트 축제의 마지막 리허설의 준비가 한창일 때, 니체는 바이로이트를 떠난다. 바그너로부터 니체의 결별을 예고하는 행보였다.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니체는 바그너라는 인물에 집중되었던 낭만적-국가적인 문화이념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바그너 숭배자 겸 새로운 독일 문화에 대한 예언가가 아니라, 계몽가와 심리학자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3월에는 제네바에 있는 볼테르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정신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잠언에 수록하고자 한다.
이때 니체의 육체적 고통이 점점 심각해진다. 심한 편두통, 만성적 위장장애, 정상적인 빛마저도 견디어 내지 못하는 그의 눈은 니체에게 일상인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그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온화한 기후를 찾아다니는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사회적 삶은 꼭 필요한 사교와 편지왕래로만 제한된다.
9월에 요양생활에서 돌아온 니체는 다시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내용을 페더 가스트에게 받아 적게 할 정도로 그의 몸은 여전히 불편했다. 결국 니체는 1879년 3월에 강의를 중단하고 제네바로 휴양을 떠나게 된다. 5월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그만둔다.
자유정신으로의 이행을 시도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II 권에서 니체의 사유는 파괴의 시기로 들어선다. 심리학자로서 그리고 계몽가로서 그는 새로운 가치와 더 높은 삶의 조건들을 제시하고 싶어 한다. 이 과제를 위해서 전승된 가치와 덕목들에 대한 비판적 파괴와 해체작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9월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부의 「혼합된 의견 및 격언들」이, 1880년에는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가 발간된다.
1881년 7월에는 『아침놀』이 발간된다. 며칠 후 실스 마리아로 간다. 여기서의 한 소풍길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에는 처음으로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감격한다. 후에 니체는 이 작품을 바그너의 음악과 맞서는 음악의 이상적 전형으로 제시한다(『바그너의 경우』 1, 2). 아침놀이란 신의 황혼 후에 따르는 인간의 아침놀이다. 인간의 아침놀은 기존의 도덕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리고 초월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힘을 의식하면서 준비된다.
1882년 초에 니체는 『아침놀』의 뒤를 이을 것들을 쓰기 시작하여, 8월에 『즐거운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4월에는 로마의 모이센부르크의 집에서 살로메를 소개받고, 5월에는 누이동생과 살로메와 함께 타우텐부르크에서 정신적 긴장이 감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실험적 철학함의 분위기와 방법론을 보여 준다: 인식자와 실험자는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명랑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명랑성은 모든 것의 무토대성에 대한 인지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 근거하며, 특히 『즐거운 학문』에서 처음 선포되는 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는 니체 후기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진리비판이 격렬해지고, 비도덕주의가 명료하게 드러나며, 힘에의 의지나 가치의 전도 그리고 영원회귀 사유가 예비 되고 있다.
1883년 여름의 “완전히 청명한 날들의 연속”에 힘입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가 쓰인 이후, 아주 빠른 속도로 3부까지 집필된다. 1884년 1월에 4부를 완성하면서 니체는 자신의 최고의 책을 썼다고 믿었다. 그의 건강은 비교적 좋았고, 정신적인 고조를 경험하면서 그의 사유는 정점에 올라있었다. 그는 이 책과 함께 자신의 철학적 과제가 수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라는 페르시아 현자의 문학적 부활을 통해 니체는 자기극복의 고통과 기쁨을 갖는, 자유정신과 육체와의 통일이 마련하는 건강한 미래의 인간을 제시한다. 이 인간은 상승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자신 안에 있는 모순적인 면들을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이상적인 삶의 비전을 제시한다. 한편 이 시기에 여동생 및 어머니와의 다툼과 화해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여동생이 반유대주의자이고 바그너 숭배자이며, 종족주의적 원칙에 따라 파라과이에 독일 식민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푀르스터와 약혼을 결정하면서 여동생과의 불화는 점점 심화된다.
1885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그의 주저가 될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저술 제목으로서 ‘힘에의 의지’는 1885년 8월의 노트에 처음 등장한다. 그 사이 1886년에 『선악의 저편』이 출판된다. 늙은 페르시아 현자의 입을 통한 문학적 형식을 띤 예언은 이 책과 함께 끝을 맺고, 니체는 다시 개념적 사유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아포리즘 양식을 다시 사용한 이 책에서 니체는 자신을 자유정신으로 재등장시킨다. 자유정신이 제시하는 주제들은 니체 후기 사유를 이해하는 열쇠역할을 한다.
그 사이 니체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불러와 확대된 사유지평을 통해 구제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이전에 출판된 작품들을 위한 새로운 서문을 작성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새로운 서문, 『비극의 탄생』을 위한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서문,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의 서문 등이 작성된다. 그가 불러온 과거는 새로운 창조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 창조적 분위기에서 쓰인 유고들에는 니체 후기 철학의 거의 모든 중심 사유들이 산발적인 형태로 담겨있다.
1887년 11월, 도덕에 대한 논쟁서인 『도덕의 계보』가 출판된다. 1887년 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그의 건강상태는, 6월에 살로메의 결혼소식을 접하면서 우울증이 겹치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이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합적이고도 체계적인 해석을 내놓고 싶어 하는 그의 의지는 점점 강해진다.
이런 사유가적 의지는 1885년부터 구상되기 시작한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을 갖게 될 책을 계속 준비하게 한다. 하지만 사유의 아나키즘이 그를 엄습하면서, 이 저술계획은 1888년 8월에 포기되어버린다. 그 대신에 ‘가치의 전도’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책을 재구상한다. 1888년 9월 3일에는 이 책을 위한 서문까지도 작성하지만, 이 책도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이 결단이 엄청난 체계적인 작업을 위한 그 자신의 힘의 부족을 인식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기획이 원칙적으로 수행 불가능했음을 인식해서든, 니체는 이제 그 기획 대신 다른 작품들을 통해 현대 세계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 좌절된 저술 기획의 일환으로 이미 작성되어있던 소묘들의 일부가 『우상의 황혼』과 이것의 쌍둥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안티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특히 그리스도교는 데카당스 현대의 전형이자, 데카당스 현대를 만든 주범으로 니체의 분노를 산다. 이보다 먼저 1888년 7월에는 『바그너의 경우』가 완성된다. 여기서는 바그너의 예술이 그 전형인, 현대에 대한 공격이 감행된다.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가 완성되는 동안 『바그너의 경우』에 대한 아주 격렬한 비판과 더불어 아주 긍정적인 반향들이 일었고, 이에 고무된 니체는 몇 주 안 가서 『니체 대 바그너』로 응답한다.
1888년 크리스마스에 완성된 이 책은 니체와 바그너의 대척자 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혹독한 판단은 니체 자신의 폭발적인 기분을 계속 유지하게 한다. 이런 기분은 1888년 가을에 완성된 니체의 작품들에 대해 세간의 주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고무된다. 특히 코펜하겐 대학의 브란데스(G. Brandes) 교수가 니체 철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는 소식은 니체를 흥분시켰다.
당시 유럽에서 이미 저술가로 유명해져있던 브란데스가 그를 높이 평가하자, 니체는 처음으로 자신이 공정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일 내에서도 니체의 작품에 대한 공공연한 반향들이 점차로 늘어가자, 니체는 갑자기 자신의 영향이 백 년 아니 심지어는 이백년에 이를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그는 철학적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를 쓴다. 니체처럼 아주 오랫동안 세간의 외면과 오해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해명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888년 말부터는 불행의 징조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는 거의 매일 친구들이나 여러 지기에게 편지를 써서 아주 위대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고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는 일이 닥쳐오고 있으며, 그 일은 바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쟁이라는 경고성 편지를 독일 황제에게 보내려 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현실적인 자기평가 능력이 사라지는 징후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작업을 수행하려는 그의 의지와 정열은 그를 아직은 쓰러지게 놔두지 않는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나 『디오니소스 송가』의 교정을 꼼꼼히 할 정도로 의식이 명료했으며, 출판사에 대한 요구나 반응도 지나치리만큼 정확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 송가』의 교정을 마친 직후, 1889년 1월 3일(혹은 1월 7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니체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이후 그는 정신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며, 바젤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 사이 『우상의 황혼』,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가 출판된다. 그의 상태는 1891년부터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해서, 1893년부터는 사람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며, 집안에서도 휠체어에 의존할 정도로 육체적 기능도 약화된다. 1894년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1900년 8월 25일 정오 경에 니체는 더 이상 고뇌하지 않아도 되는 긴 어둠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Nietzsche]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굳이 기억해야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출생 - 사망1844 ~ 1900대표분야형이상학대표이론생철학대표저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관련철학자쇼펜하우어생애 해설1844년 10월 15일 독일 뢰켄에서 전통적인 목사집안의 첫 아들로 태어난다. 1851년, 칸디다텐 베버라는 사설 교육기관에 들어가,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운다. 1858년, 추어 포르테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철저한 인문계 중등교육을 받는다. 이 당시에 이미 소년 니체의 고전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 문학적 능력, 음악에 대한 자질들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1864년,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 예술사 공부를 시작한다. 한 학기 후에는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헌학자 리츨의 문헌학 강의에 전념한다. 1865년 겨울학기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학교를 옮긴다. 라이프치히에서 니체는 리츨의 지도를 받은 문헌학 공부와 쇼펜하우어의 발견에 힘입어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늦가을에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니체를 철학적 사유로 입문하게 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 그는 한동안 매료되었으며, 『비극의 탄생』은 그 자극 하에서 쓰여 진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에 의거한 세계 해석은 니체에게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하는 칸트 철학에 관심 갖게 한다.
1866년, 테오그니데아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자료들에 대한 문헌학적 작업을 시작한다. 디오게네스에 관한 논문은 1867년 『문헌학을 위한 라인 박물관』이라는 잡지에 게재된다. 이 논문과 스승 리츨 교수의 니체에 대한 높은 평가는 문헌학자 니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활발한 문헌학적 활동을 하면서도 니체는 철학으로의 학적 전회를 꿈꾼다. 피셔의 책을 통해 친숙해진 칸트에 관계되는 철학박사논문을 기획한다. 1868년 11월 8일 동양학자인 브로크하우스의 집에서 바그너를 처음 만난다. 쇼펜하우어와 독일 철학 그리고 오페라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눈 바그너라는 인물은 니체에게 깊이 각인된다.
이 시기에 니체는 첫 번째 철학적 글인 「목적론에 대하여」를 쓴다. 1869년 4월, 스물 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에 고전어와 고전문헌학의 비전임 교수로 위촉된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문헌학을 위한 라인 박물관』에 발표된 논문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대한 연구를 인정하여 니체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다. 1869년 이후에 니체는 본격적으로 철학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언어의 근원에 대하여」(1869/70), 「디오니소스적 세계관」(1870), 「수사학」(1874) 등이 대표적인 글들이다.
1870년 4월에 정교수가 된다. 7월, 독일-프랑스 전쟁에 자원의무병으로 참가하기 위해 대학에 휴가를 낸다. 그렇지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9월에 의가사 제대를 한다.
1872년, 니체의 첫 철학적 저술인 『비극의 탄생』이 출판된다. 이 책은 니체의 독창적이고도 철학적인 초기 사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니체의 후기 철학적 사유들로 향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예술가 형이상학, 신화의 포기불가능성 제기,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과 아폴론적 예술충동의 관계,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에 의한 그리스 비극의 몰락 등 이 책이 포함하고 있는 사유는 문헌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 결과 『비극의 탄생』은 비-문헌학자들로부터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동료 문헌학자들로부터는 극도로 모욕적인 평가와 공개적인 반박들을 받게 된다. 이로써 문헌학자 니체의 이름은 실추되어버린다.
『비극의 탄생』이 남긴 여파로 상처를 받은 니체는 바그너의 문화프로그램을 위한 전위대 역할을 자처하기 시작한다. 5월에 행한 ‘우리 교육의 미래에 대하여’에 대한 5개의 강연에는, 문헌학자가 아니라 독일의 정치적 교육자가 되기를 원하는 니체의 소망이 놓여있다. 그 이후 니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새로운 문화의 조건들에 대해 물으며, 이 조건을 찾기 위해 그리스 문화로 항상 되돌아간다.
초기 그리스를 그는 문화적 자기창조의 전형으로, 독일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이 의도에 의해 1873년까지 「쓰이지 않은 다섯 권의 책을 위한 다섯 서론」,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독일인에 대한 경고」 등이 작성된다. 이외에도 니체의 초기 철학적 사유를 아주 명료하게 결집한 텍스트인 「도덕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가 작성된다.
1873년, 『반시대적 고찰』의 첫 권이 발간된다(「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가와 저술가」) 여기서 니체는 자신을 정치 저술가 혹은 정치 교육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지배적인 시대정신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화의 지반을 준비하고자 한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을 원래 10~13개의 논문들로 구성할 계획이었지만, 4개의 주제들로 대체한다. 1권은 다비드 슈트라우스를 교양 있는 속물의 전형으로 보고 있으며(「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문필가」), 2권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다룬다(「삶에 대한 역사의 이로움과 해로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라는 제목의 3권은 원래의 의도인 독일인들에 대한 경고에 충실하다.
바그너와의 문제를 다룬 4권(「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에서는 바그너에 대한 표면적인 긍정적 평가 밑에 가시 돋친 비판을 숨기고 있다. 2권과 3권과 4권은 1874년에 출간된다.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가 출판된 직후, 첫 번째 바이로이트 축제의 마지막 리허설의 준비가 한창일 때, 니체는 바이로이트를 떠난다. 바그너로부터 니체의 결별을 예고하는 행보였다.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니체는 바그너라는 인물에 집중되었던 낭만적-국가적인 문화이념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바그너 숭배자 겸 새로운 독일 문화에 대한 예언가가 아니라, 계몽가와 심리학자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3월에는 제네바에 있는 볼테르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정신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잠언에 수록하고자 한다.
이때 니체의 육체적 고통이 점점 심각해진다. 심한 편두통, 만성적 위장장애, 정상적인 빛마저도 견디어 내지 못하는 그의 눈은 니체에게 일상인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그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온화한 기후를 찾아다니는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사회적 삶은 꼭 필요한 사교와 편지왕래로만 제한된다.
9월에 요양생활에서 돌아온 니체는 다시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내용을 페더 가스트에게 받아 적게 할 정도로 그의 몸은 여전히 불편했다. 결국 니체는 1879년 3월에 강의를 중단하고 제네바로 휴양을 떠나게 된다. 5월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그만둔다.
자유정신으로의 이행을 시도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II 권에서 니체의 사유는 파괴의 시기로 들어선다. 심리학자로서 그리고 계몽가로서 그는 새로운 가치와 더 높은 삶의 조건들을 제시하고 싶어 한다. 이 과제를 위해서 전승된 가치와 덕목들에 대한 비판적 파괴와 해체작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9월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부의 「혼합된 의견 및 격언들」이, 1880년에는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가 발간된다.
1881년 7월에는 『아침놀』이 발간된다. 며칠 후 실스 마리아로 간다. 여기서의 한 소풍길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에는 처음으로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감격한다. 후에 니체는 이 작품을 바그너의 음악과 맞서는 음악의 이상적 전형으로 제시한다(『바그너의 경우』 1, 2). 아침놀이란 신의 황혼 후에 따르는 인간의 아침놀이다. 인간의 아침놀은 기존의 도덕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리고 초월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힘을 의식하면서 준비된다.
1882년 초에 니체는 『아침놀』의 뒤를 이을 것들을 쓰기 시작하여, 8월에 『즐거운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4월에는 로마의 모이센부르크의 집에서 살로메를 소개받고, 5월에는 누이동생과 살로메와 함께 타우텐부르크에서 정신적 긴장이 감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실험적 철학함의 분위기와 방법론을 보여 준다: 인식자와 실험자는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명랑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명랑성은 모든 것의 무토대성에 대한 인지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 근거하며, 특히 『즐거운 학문』에서 처음 선포되는 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는 니체 후기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진리비판이 격렬해지고, 비도덕주의가 명료하게 드러나며, 힘에의 의지나 가치의 전도 그리고 영원회귀 사유가 예비 되고 있다.
1883년 여름의 “완전히 청명한 날들의 연속”에 힘입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가 쓰인 이후, 아주 빠른 속도로 3부까지 집필된다. 1884년 1월에 4부를 완성하면서 니체는 자신의 최고의 책을 썼다고 믿었다. 그의 건강은 비교적 좋았고, 정신적인 고조를 경험하면서 그의 사유는 정점에 올라있었다. 그는 이 책과 함께 자신의 철학적 과제가 수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라는 페르시아 현자의 문학적 부활을 통해 니체는 자기극복의 고통과 기쁨을 갖는, 자유정신과 육체와의 통일이 마련하는 건강한 미래의 인간을 제시한다. 이 인간은 상승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자신 안에 있는 모순적인 면들을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이상적인 삶의 비전을 제시한다. 한편 이 시기에 여동생 및 어머니와의 다툼과 화해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여동생이 반유대주의자이고 바그너 숭배자이며, 종족주의적 원칙에 따라 파라과이에 독일 식민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푀르스터와 약혼을 결정하면서 여동생과의 불화는 점점 심화된다.
1885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그의 주저가 될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저술 제목으로서 ‘힘에의 의지’는 1885년 8월의 노트에 처음 등장한다. 그 사이 1886년에 『선악의 저편』이 출판된다. 늙은 페르시아 현자의 입을 통한 문학적 형식을 띤 예언은 이 책과 함께 끝을 맺고, 니체는 다시 개념적 사유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아포리즘 양식을 다시 사용한 이 책에서 니체는 자신을 자유정신으로 재등장시킨다. 자유정신이 제시하는 주제들은 니체 후기 사유를 이해하는 열쇠역할을 한다.
그 사이 니체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불러와 확대된 사유지평을 통해 구제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이전에 출판된 작품들을 위한 새로운 서문을 작성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새로운 서문, 『비극의 탄생』을 위한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서문,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의 서문 등이 작성된다. 그가 불러온 과거는 새로운 창조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 창조적 분위기에서 쓰인 유고들에는 니체 후기 철학의 거의 모든 중심 사유들이 산발적인 형태로 담겨있다.
1887년 11월, 도덕에 대한 논쟁서인 『도덕의 계보』가 출판된다. 1887년 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그의 건강상태는, 6월에 살로메의 결혼소식을 접하면서 우울증이 겹치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이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합적이고도 체계적인 해석을 내놓고 싶어 하는 그의 의지는 점점 강해진다.
이런 사유가적 의지는 1885년부터 구상되기 시작한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을 갖게 될 책을 계속 준비하게 한다. 하지만 사유의 아나키즘이 그를 엄습하면서, 이 저술계획은 1888년 8월에 포기되어버린다. 그 대신에 ‘가치의 전도’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책을 재구상한다. 1888년 9월 3일에는 이 책을 위한 서문까지도 작성하지만, 이 책도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이 결단이 엄청난 체계적인 작업을 위한 그 자신의 힘의 부족을 인식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기획이 원칙적으로 수행 불가능했음을 인식해서든, 니체는 이제 그 기획 대신 다른 작품들을 통해 현대 세계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 좌절된 저술 기획의 일환으로 이미 작성되어있던 소묘들의 일부가 『우상의 황혼』과 이것의 쌍둥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안티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특히 그리스도교는 데카당스 현대의 전형이자, 데카당스 현대를 만든 주범으로 니체의 분노를 산다. 이보다 먼저 1888년 7월에는 『바그너의 경우』가 완성된다. 여기서는 바그너의 예술이 그 전형인, 현대에 대한 공격이 감행된다.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가 완성되는 동안 『바그너의 경우』에 대한 아주 격렬한 비판과 더불어 아주 긍정적인 반향들이 일었고, 이에 고무된 니체는 몇 주 안 가서 『니체 대 바그너』로 응답한다.
1888년 크리스마스에 완성된 이 책은 니체와 바그너의 대척자 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혹독한 판단은 니체 자신의 폭발적인 기분을 계속 유지하게 한다. 이런 기분은 1888년 가을에 완성된 니체의 작품들에 대해 세간의 주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고무된다. 특히 코펜하겐 대학의 브란데스(G. Brandes) 교수가 니체 철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는 소식은 니체를 흥분시켰다.
당시 유럽에서 이미 저술가로 유명해져있던 브란데스가 그를 높이 평가하자, 니체는 처음으로 자신이 공정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일 내에서도 니체의 작품에 대한 공공연한 반향들이 점차로 늘어가자, 니체는 갑자기 자신의 영향이 백 년 아니 심지어는 이백년에 이를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그는 철학적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를 쓴다. 니체처럼 아주 오랫동안 세간의 외면과 오해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해명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888년 말부터는 불행의 징조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는 거의 매일 친구들이나 여러 지기에게 편지를 써서 아주 위대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고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는 일이 닥쳐오고 있으며, 그 일은 바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쟁이라는 경고성 편지를 독일 황제에게 보내려 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현실적인 자기평가 능력이 사라지는 징후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작업을 수행하려는 그의 의지와 정열은 그를 아직은 쓰러지게 놔두지 않는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나 『디오니소스 송가』의 교정을 꼼꼼히 할 정도로 의식이 명료했으며, 출판사에 대한 요구나 반응도 지나치리만큼 정확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 송가』의 교정을 마친 직후, 1889년 1월 3일(혹은 1월 7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니체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이후 그는 정신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며, 바젤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 사이 『우상의 황혼』,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가 출판된다. 그의 상태는 1891년부터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해서, 1893년부터는 사람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며, 집안에서도 휠체어에 의존할 정도로 육체적 기능도 약화된다. 1894년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1900년 8월 25일 정오 경에 니체는 더 이상 고뇌하지 않아도 되는 긴 어둠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Nietzsche]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