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8. 탄핵과 총선정국의 회오리 ⑵

대모달2014.07.25
조회64

 

 

● ‘의회쿠데타’에 맞선 시민들의 촛불

 

뚜렷한 귀책사유도 없이 ‘감정적으로’ 저질러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의회쿠데타’를 두고 국민들의 비판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여론은 대체로 “대통령이 사과했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찬성하지만 탄핵소추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탄핵 발의를 ‘총선을 앞둔 정략적인 대통령 흔들기’로 보는 견해도 50퍼센트가 앞섰다.

 

‘의회쿠데타’가 자행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이번에도 민초들이 거대한 저항의 물결을 이루었다. 탄핵안이 처리되던 날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탄핵 반대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3월 13일부터 광화문과 종로에는 연일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특별한 잘못도 없이 수구세력에 의해 직무가 정지되고 청와대에 유폐된 데 대해 분노를 터뜨리며 연일 서울시청광장을 촛불로 수놓았다.

 

따지고 보면 노무현은 행복한 사람이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민초들이,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이, 광장으로 투표장으로 몰려나와서 구해줬다. 이번에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노무현에게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한 것은 무명의 민초들이었다. 광화문과 종로 거리에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항의집회가 그치지 않았다.

 

탄핵소추결의서가 헌법재판소에 송달된 다음날인 3월 13일 고건 국무총리를 불러 국정에 차질이 없도록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한 노무현은 청와대 관저에서 칩거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 밤부터 잠을 잤다.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직원들이 계속 기다리기 때문에 세 끼 밥은 제때 먹어야 했다. 그 시간 빼고는 계속 잤다. 자도 자도 잠이 끝없이 밀려왔다. 일주일은 자고 나니 정신이 들고 기운이 났다. 책을 읽었다.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내가 거실에서 책을 읽으면 아내는 안방에서 읽었고, 내가 탁자에서 읽으면 아내는 소파에서 읽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낮에는 책만 읽었다.

오후 6시가 넘어 부속실 직원들이 퇴근하면 그제서야 관저 마당으로 나갔다. 관저 인수문 밖으로 나간 일은 거의 없었다. 오찬 모임을 가끔 했던 상춘재에 갈 때도 앞뜰에는 나가지 않고 사잇문을 통해 뒤뜰에만 나갔다.

툇마루에 앉아 뒤뜰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둘이 거기 앉아 옛날 이야기도 하고 책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주 가끔 몇 사람의 참모들과 뒷산에 올라간 것 말고는 63일 동안 관저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몇 년씩 불법가택연금을 당했던 김대중 대통령에 비하면, 63일의 칩거는 그저 잠깐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벼운 일이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37쪽~240쪽.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국회는 지체 없이 탄핵소추결의서 정본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여 노무현에 대한 탄핵심판을 청구했다. 대통령 측에서는 문재인이 중심이 되어 재야 법조인들을 소송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대통령으로부터 대리인단 구성 및 법적 대응과 관련하여 전권을 위임받은 문재인은 “당시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진영”으로 대리인단을 구성했다. “대리인들은 중립적이면서 명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분들을 모시기로 했다.(……)처음 모였을 때 회의 분위기는 자신감과 사명감으로 충만했다. 우리가 법적으로 제대로만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확신했다. 다수당의 수적 횡포일 뿐, 법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탄핵이었다. 민의를 거스른 다수당의 쿠데타였다. 민주 헌정의 위기였다. 그런 일을 바로잡지 못하면 우리 나라 헌정의 앞날의 암울해질 것이었다.”

 

탄핵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탄핵을 주도한 야당과 족벌신문, 원외 수구세력은 총궐기하다시피 헌법재판소를 압박했다. 반대로 광화문에서는 연일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수구세력이 유독 노무현에게만 과민반응을 일으키고 격렬하게 공격한 데는 ‘피해의식’에 더해 그들이 가진 ‘죄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해왔다. 이런 어둡고 부도덕한 과거는 필연적으로 죄의식을 동반하게 된다. 죄의식을 가진 사람은 천벌과 보복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세상에 대한 지독한 과민반응을 하게 마련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처럼, 이들은 겉으로는 떵떵거리지만 그들의 내면은 땅굴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고슴도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반성문이나 한 장 받으려고 하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 미친 듯이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죄의식이 심한 사람은 자신의 병적인 심리와 분노감정을 엉뚱한 대상에게 투시하는데, 여기에 걸려드는 사람은 영락없이 희생양이 되고 만다.〃- 김태형,『심리학자의 눈으로 노무현과 오바마를 분석하다』, 194쪽~195쪽, 예담, 2009년.

 

● 선거혁명으로 대통령을 복귀시킨 시민의 힘

 

그런 가운데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총선’은 탄핵세력에게는 민심이 발사한 공포의 ‘총성’이 되었다. 국회에 부여한 탄핵소추권을 남용하여 ‘총선용’으로 써먹으려던 불순한 세력은 부메랑으로 돌아온 ‘탄핵의 총탄’에 심장이 꿰뚫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반면에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여 지방조직도 마무리하기 전에 탄핵이라는 폭풍을 맞은 채 총선을 치른 여당은 원내 과반의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다. 민심의 무서움을 여실히 보여준 총선이었다.

 

4·15총선은 가히 민심의 혁명이었다. 불과 47석의 미니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에 과반을 넘긴 157석을 안김으로써 ‘유폐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총선을 앞두고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한나라당은 50석도 넘기지 못 하리라던 최악의 전망을 ‘지역감정’에 호소하여 반전시키고 121석이나 얻었으나 국회 제2당으로 전락했다. 민주당의 추락은 더욱 비참했다. 탄핵을 주도했던 당 대표를 비롯하여 중진들이 줄줄이 낙선한 가운데 9석을 얻는 데 그침으로써 정당 득표율(민주당 7.1퍼센트, 민노당 13퍼센트)에서 거의 2배나 앞서 10석을 얻은 민주노동당에도 밀렸다. 대통령 탄핵에 참여했던 자민련은 지역구 4석에, 정당 득표율 2.8퍼센트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여 정당의 존립기반마저 무너졌다.

 

민의를 거스른 대가는 이처럼 엄혹했다. 저들의 몽니와 억지 그리고 부패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개혁진보세력을 화끈하게 밀어줌으로써 저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다. 외신들은 일제히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주의자들이 과반의석을 넘어섰다고 전했으며, 역사학자 서중석은 “수준 높은 국민의식을 보여준” 선거라고 진단했다.

 

˝탄핵에 대한 비판이나 반발로 노무현이 지지한 신당에 민심이 확 쏠린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서 노무현 중심으로 평가를 하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고 봅니다.

노무현이 한나라당ㆍ민주당의 탄핵 위협에 굴하지 않고, 그래서 대다수가 기대했던 것처럼 사과하지 않고 잘 버텨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해내기 어려웠던 대단한 버티기였지요.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별것도 아닌 이유로 국민이 방금 뽑은 사람을 대통령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이런 식의 정치는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수준 높은 국민의식을 보여줬다는 점을 아주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ㆍ15선거 후반에 들어서면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박근혜가 선도해 분위기가 바뀜으로서 그쪽 표가 달라지긴 했지만요.˝ - 서중석,「대한민국의 선거 이야기」, 256쪽, 역사와 비평, 2008년.

 

군사독재정권이나 사이비 문민정부는 제쳐두더라도 민주화정부에서 집권당이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5년 내내 거대야당의 발목잡기로 개혁과 국정운영에 크게 차질을 빚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4월혁명 뒤 민주당이 원내 3분의 2석을 넘었으나 곧 분당)정부와 의회권력을 민주주의 진영이 장악하게 되었다.

 

총선이 끝나고도 헌법재판소의 심리는 지지부진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사안을 넘겨받은 헌재로서는 보통 난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여론의 중압도 무시하기 어려웠을 터이고, 자칫 헌정 중단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런 위기국면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한 신문사의 청탁으로〈국회가 탄핵을 철회해야 하는 이유〉를 써서 넘겼으나 웬일인지 지면에 실리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원고의 요지는 “이번 탄핵소추는 헌법정신에 크게 위배될 뿐 아니라 최소한의 법적 요건도 갖추지 못했으며, 민의에 비추어서도 정당성을 상실한 사안이므로(헌재의 심판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지금이라도 마땅히 국회에서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의 탄핵소추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노무현은 청와대에서 ‘유폐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참모들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간단한 보고서를 보내 주었다. 김우식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들과 매일 아침 현안점검회의를 열어 국정상황을 점검하고 고건 권한대행에게 보고서를 보낼 때 내게도 요약본을 준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할 경우 바로 업무에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국정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된 노무현은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변화를 선택한 리더들》·《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블루오션 전략》·《체인지 몬스터》·《대한민국 개조론》등이 포함되었다.

 

노무현은 가파른 정치인생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이번의 위기는 과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만약 탄핵이 확정된다면 정치인으로서의 생애에 씻기 어려운 치욕이 될 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탄핵으로 한 번, 4·19민중혁명으로 두 번째 쫓겨났다. 박정희는 18년 장기독재 끝에 심복에게 피살당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퇴임 뒤에 구속되었다. 이와 같이 불행한 정치사를 지켜 보아온 노무현은 재임 중이나 퇴임 뒤에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싶었다.

 

그런 중에도 대통령을 변호할 대리인단은 바쁘게 돌아갔다. 전체적인 진행 실무와 홍보는 대리인단 간사인 문재인이 맡아서 했고 다들 역할을 나누어 빈틈이 없도록 했다.

 

˝역할 분담을 했다. 유현석 변호사께서 좌장역할을 맡았다. 한승헌 변호사가 총괄을 자임했다. 나머지 분들은 논점별로 분야를 나눠맡았다. 어떤 분야는 이용훈 변호사, 또 어떤 분야는 박시환 변호사 식으로 역할을 나눴다. 나눠 맡은 논점별로 연구도 발제도 서면도 직접 작성했다.

법정변론도 분담했다. 재판 때마다 발언할 대리인의 수와 순서, 발언할 내용,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 등 세부적 부분까지 모두 논의해 재판에 임했다.

민변에서도 가장 실력있고 꼼꼼하기로 발군의 평가를 받는다는 조용환, 백승헌 두 변호사는 대리인으로 나서지 않는 대신 법리적 연구와 실무적 뒷받침을 헌신적으로 해줬다. 두 분은 대리인답게 본격 가동되기 전 초기에, 탄핵재판제도에 대한 연구와 함께 우리쪽 법적대응의 뼈대를 세워줬다. 김선수 변호사도 함께 도왔다. 그들은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대리인으로 전면에 나서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 문재인,《문재인의 운명》, 296쪽~297쪽, 가교, 2011년.

 

헌재 심판을 기다리는 동안 권력에 담담하고 초연한 모습이었던 노무현은 황망한 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재판을 준비하면서 대통령과 대리인들이 한번 같이 만났다. 대통령이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재판준비 얘기는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대통령의 직접 출석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눈 정도였다. 저쪽에선 대통령이 직접 헌재 법정에 나오도록 신청했다. 대통령은 못 나갈 거 없다며 나가겠다고 했다. 그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나중에 헌법재판소도 그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오랜 유폐생활로 지치고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환담 끝날 무렵에 내가 대통령께 “마지막으로 대리인단에게 말씀이 있으면 하시라”고 했다.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 “저 대통령 다시 하게 좀 해 주십시오”라며 인사를 했다. 무거운 자리일수도 있었는데, 일행 모두가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 문재인,《문재인의 운명》, 298쪽~301쪽, 가교, 2011년.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수구기득권층에서는 크게 불안해하는 분위기였다. 이것은 5년 전 여론조사에서 김대중이 이회창을 앞지를 때와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여야 대선 후보가 보혁(保革) 구도로 가게 되고, 그가 당선될 경우 급격한 혁신정치를 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었다. 노무현은 그런 불안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왜 불안해하지요?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위해가 있을 것 같아서는 아니겠지요. 아마 부당하게 더 가진 것을 내놓게 될지 몰라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부당하게 가진 것 말고는 내놓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당하게 행사되는 권력, 남용되는 권리 외에는 시비를 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강자리는 사람들에게 ‘노무현을 미워할 자격이 있으려면, 불안하게 생각할 자격을 먼저 갖추라. 부당한 힘을 갖고 부당하게 행사하는 정도의 사람일 때 하라’고 하겠습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나는 적대행위를 한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안 할 것이고요.”

 

탄핵소추 청원일로부터 63일이 지난 5월 14일, 수구세력의 노무현 제거공작은 무위로 돌아갔다. 탄핵소추안이 기각된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헌법재판소 재판부는 “위법행위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대통령 탄핵을 정당화할 만큼 중대한 범법 행위는 없다”는 논거를 들어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이로써 노무현은 두 달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탄핵세력은 이미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은 데다 정략적 행패로 국정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5월 15일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탄핵에 이르는 사유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정치적·도의적 책임까지 모두 벗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대선자금과 주변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는 분명한 허물”이므로 “임기를 마치는 그 날까지 저의 허물을 결코 잊지 않고 마음의 부담으로 안고 갈 것이며, 항상 긴장된 자세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국민 여러분께 진 빚을 갚아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당장의 성과에 급급하기보다는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면서 국정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겠으며, 때로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인기가 떨어지는 일도,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길이라면 꿋꿋하게 원칙을 지켜 나갈 것”을 다짐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