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당시 조선의 형편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대략 40%가 노비였다. 보통 왕족은 만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양반은 백명, 평민은 10명정도 거느리는게 보통이다.
현종10년(1669) 3년간 대기근으로 100만명이 굶어주었다. 대략 인구의 10%다.
쌀이 부족하지 세금을 옷감으로 변경했다. 묘를 파헤쳐 염옷을 가져가는등 옷을뺏는도둑이 횡행 하고 감옥에 있는 죄수들 대부분이 얼어죽었다.
숙종25년(1695) 5년간 대기근으로 200만명이 굶어죽었다.
조선의 산림은 17세기 이미 황폐화되어 민둥산이라 소나무하나 없었다.
이로인해 잦은 가뭄, 수해, 한해가 일상적 일이 되어버렸다.
배 한 척 만들기 위해 크고 작은 소나무 2-3백주가필요하다.
숙종10년(1684) 정조12년(1788) 큰 소나무 10그루를 베면 사형, 한 그루 베면 곤장60대라는 포고가 계속 나온다.
1881년에는 중국에서 오는 칙사를 대접할 쌀이 없었고 인플레는 폭발적이었다.
고종19년(1882) 결국 재정이 파탄되고 임오군란으로 이어진다. 솔직히 조선은 통치할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민비가 예산의 70%를 써버리는 상황에서 민씨 일족들이 매관 하는 상황에서 민란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 1894년 동학난이 터졌을 때 5연발 다무라 신식총으로 무장된 일본군에게 동학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들을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인간사냥 놀이로 즐겼다. 동학군이 당한 수모와 비통함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제는 1910년 1200만의 조선인을 대한 제국으로부터 인수받아 불과 30년만에 2배인 2500만으로 불려 났다. 일본 총독은 조선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면 즉시 그곳의 기관장을 문책했다. 일본인 관리들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인 부자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여 굶어주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것을 조선인 수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완용의 (1858-1926) 부친은 30년간, 이완용은 20년간 탈없이 벼슬자리를 지켰다. 처세술에 뛰어 났고 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완용은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고 취미라 해봤자 집안에서 책 읽고 서예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선비가 심심해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음주가무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다.
이완용은 미국 유학을 갔다 왔고,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를 거쳤다. 대세에 따르려는 것이었다. 그는 친일파이면서 일본말을 하지 못했다.
이완용은 1885년 초대 교육부 장관이 되어 교육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1895년 민비가 서울 한복판에서 살해되어 세계 외교가를 놀라게 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은 내각에게 알아서 합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을사조약을 맺은 것이 어째서 고종은 비난이 없고 그 내각 특히 이완용에게 만 쏠려야 했는지. 그는 대세에 따라 합병은 하되 문구를 유리하게 고치는 타협안을 내놓았을 뿐인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줄 것을 손병희로 부터 제의를 받지만, 3.1운동한다고 해서 반역자를 애국자로 받아주겠는가 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26년 이완용은 많은 재산을 모았고 숱한 사회봉사 활동을 했으며 3억의 사회기금을 내놓고 그는 지병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치뤄진 그의 장례식은 순종의 애도와 박영효의 헌사, 그리고 총독부에의해 다큐멘터리로 촬영이 되었다.***
친일파 이완용에 관해
우선 당시 조선의 형편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대략 40%가 노비였다. 보통 왕족은 만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양반은 백명, 평민은 10명정도 거느리는게 보통이다.
현종10년(1669) 3년간 대기근으로 100만명이 굶어주었다. 대략 인구의 10%다.
쌀이 부족하지 세금을 옷감으로 변경했다. 묘를 파헤쳐 염옷을 가져가는등 옷을뺏는도둑이 횡행 하고 감옥에 있는 죄수들 대부분이 얼어죽었다.
숙종25년(1695) 5년간 대기근으로 200만명이 굶어죽었다.
조선의 산림은 17세기 이미 황폐화되어 민둥산이라 소나무하나 없었다.
이로인해 잦은 가뭄, 수해, 한해가 일상적 일이 되어버렸다.
배 한 척 만들기 위해 크고 작은 소나무 2-3백주가필요하다.
숙종10년(1684) 정조12년(1788) 큰 소나무 10그루를 베면 사형, 한 그루 베면 곤장60대라는 포고가 계속 나온다.
1881년에는 중국에서 오는 칙사를 대접할 쌀이 없었고 인플레는 폭발적이었다.
고종19년(1882) 결국 재정이 파탄되고 임오군란으로 이어진다. 솔직히 조선은 통치할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민비가 예산의 70%를 써버리는 상황에서 민씨 일족들이 매관 하는 상황에서 민란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 1894년 동학난이 터졌을 때 5연발 다무라 신식총으로 무장된 일본군에게 동학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들을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인간사냥 놀이로 즐겼다. 동학군이 당한 수모와 비통함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제는 1910년 1200만의 조선인을 대한 제국으로부터 인수받아 불과 30년만에 2배인 2500만으로 불려 났다. 일본 총독은 조선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면 즉시 그곳의 기관장을 문책했다. 일본인 관리들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인 부자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여 굶어주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것을 조선인 수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완용의 (1858-1926) 부친은 30년간, 이완용은 20년간 탈없이 벼슬자리를 지켰다. 처세술에 뛰어 났고 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완용은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고 취미라 해봤자 집안에서 책 읽고 서예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선비가 심심해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음주가무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다.
이완용은 미국 유학을 갔다 왔고,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를 거쳤다. 대세에 따르려는 것이었다. 그는 친일파이면서 일본말을 하지 못했다.
이완용은 1885년 초대 교육부 장관이 되어 교육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1895년 민비가 서울 한복판에서 살해되어 세계 외교가를 놀라게 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은 내각에게 알아서 합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을사조약을 맺은 것이 어째서 고종은 비난이 없고 그 내각 특히 이완용에게 만 쏠려야 했는지. 그는 대세에 따라 합병은 하되 문구를 유리하게 고치는 타협안을 내놓았을 뿐인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줄 것을 손병희로 부터 제의를 받지만, 3.1운동한다고 해서 반역자를 애국자로 받아주겠는가 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26년 이완용은 많은 재산을 모았고 숱한 사회봉사 활동을 했으며 3억의 사회기금을 내놓고 그는 지병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치뤄진 그의 장례식은 순종의 애도와 박영효의 헌사, 그리고 총독부에의해 다큐멘터리로 촬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