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전도연 분)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에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 가서 정착한다.
인구 11만이 사는 경상남도의 작은 도시 밀양이 그곳이었다.
그녀의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 800만원 넘는 정도.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그곳 주민들에게
돈 많은 여자로 소문이 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들이 납치된다.
그러나 그녀의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 800만원.
그녀는 그 돈을 전부 유괴범에게 보내지만
결국 아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아들만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신애는 절망에 빠진다.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찢어지는 듯한 가슴을 부여안고 괴로워 하던 신애는,
어느 날 이리 저리 걷다가 어느 교회에 다다르게 된다.
'영혼을 치유하는 기도회.'
그 기도회에 참석해서 신애는 오열한다.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고통과 슬픔을
엉엉 울며 쏟아버린다.
그날로부터 신애는 신자가 되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하루 하루 신앙을 통해 마음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신애.
그리고 어느 날 성경으로부터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내용의 구절을 알게 된다.
신애는 곧 교회 신자들의 앞에서 선언한다.
자기는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겠노라고.
교회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다소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신애의 믿음이 깊어졌다며 칭찬의 말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유괴범이 갇힌 교도소를
교회 사람들과 함께 방문하는 신애.
신애는 그곳에서 아들을 죽인 원수를 다시 대면한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다"고.
그런데 정작 유괴범은 그런 신애의 앞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고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애의 용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듯 이렇게 말을 한다.
감옥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인 자기를 용서해 주셔서
요즘은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다고.
유괴범은 신애를 향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으니
신애에게는 더 이상 사과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그런 유괴범의 모습을 보면서
신애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다.
무엇이 그렇게 그녀를 화가 나게 했을까?
그 유괴범이 그 순간에 정말로 해야 했던 것은
신애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로 사과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괴범은 그러지 않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전부 끝" 이렇게 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신애를 충격과 발작에 빠뜨린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3, 24절)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그 안에 "책임"이란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용어이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먼저 그 피해를 보상해주고 그 피해자에게 가서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로 성경이 말하는 용서의 의미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만 용서를 빌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피해를 입힌 상대방에게도 가서
제대로 책임 있게 보상을 하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교회 안을 들여다 보면
"용서"라는 용어는 보이는데
그 안에 "책임"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라는 용어가 부패와 잘못을
감추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자주 볼 수 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있는 행동을 하기 전까지
"용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성경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