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지하 셋방 500에 25만원 월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따로 방 얻어 놓고 한 달에 몇 번씩 외박을 하며 집에만 오면 온갖 트집을 잡으며 못마땅해 했고, 한 달에 260만원 씩 받으면서 생활비로 100만원을 줄 때도 있고 어떤 달은 50만원 주고 또 어떤 달은 아예 주지도 않으면서 카드는 400만원이 넘게 쓰고 다닙니다.
지 자식이 둘 있는데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할 때도 가끔 있어서 유전자 검사도 해보라고 했었는데 어떻게 이게 한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결국 유전자 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그 말은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습니다.
저희 남편은 자식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비 한 번 내준 적 없고 학원도 제대로 보내보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반면 저는 20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며 먹고 살기 바빴습니다만 남편은 자기가 번 돈 자기 혼자 쓰기도 바빴으며 돈 한 푼 안주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여기에 제가 살아오며 남편이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 적어볼까 합니다. 다소 긴 글이 되겠지만 끝까지 읽어주시어 제 억울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결혼 전에는 남편과 저 서로 가진 거 하나 없이 시작하여 성실하고 건강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어떤 고난이든 함께 이겨내자고 다짐했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던 탓일까요, 운 좋게도 회사에서 주택청약을 넣어둔 게 작은 아파트에 당첨되어 신혼 초기부터 집을 장만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게 벌써 1983년, 31년 전 일이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1987년 시어머니가 당뇨, 혈압 합병증으로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남편에게는 형(시숙)과 동생(시동생)이 있었는데도 병원비 한 푼 내주는 자식이 없어 제가 회사를 퇴사하고 퇴직금 받아 어머니 병원비를 대신 내드렸었습니다.
1989년,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받아 집에 모셔와 숨을 거두시고, 장례를 치르는 데도 돈을 보태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 돈도 결국 제가 마련하여 장례를 지냈지만 무슨 염치로 시댁 식구들이 어머니 산소를 쓰자고 말을 하여 이번에는 제가 빚까지 얻어가며 시어머니 산소도 쓰게 해드렸습니다. 제 친정어머니도 못해드린 산소를요.. 저희 어머니 이야기는 뒤에 나옵니다.
그 후, 시숙이 문제(사기)를 일으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 운 좋게 당첨되었던 집을 팔아서 형을 빼내오자고 남편이 그러더군요. 당시 저는 시숙이 유치장 신세를 지다가 감옥에 가게 되면 빨간줄 새겨서 앞으로의 인생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사람 하나 인생 살려보자고 남편에게 그러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숙은 제가 신경 써서 집을 팔아 돈을 마련한 것을 모르는지 계속 염치 불구한 행실을 했고 그 때마다 남편은 시숙 편을 들며 돈을 마련해 달라고 제게 설득 아닌 설득을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시동생은 또 남편 명의를 빌려 1000만원을 대출 받고 보험을 보험료 260만원을 납부하고 시동생 본인이 개인적인 용도로 500만원을 쓴 뒤 남은 240만원을 주었습니다. 저는 이 돈이 시어머니가 병원 계실 때 대신 내드렸던 병원비와 장례비, 산소 임대비 등을 주는 줄 알고 당장 급한 빚을 막았으나 뒤 늦게 제가 모르던 남편의 빚 720만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화가 나는 건 그 돈을 갚지도 않아 남편은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1994년에 개인택시 자격을 어찌어찌 취득하여 원호대상자로 개인택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개인택시를 받자마자 다단계 업체에 빠져들어 택시 운전은 하지 않고 미팅 간다, 교육장 간다, 지방에 스폰서의 교육 들으러 간다는 둥 핑계를 대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때 남편은 다단계 업체의 미팅과 교육을 핑계로 다른 여자들이랑 부산에 예산에 놀러 다니며 그 여자의 집에 살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도중에 다단계 업체로 2년 가까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는 또 다른 다단계 업체에 발을 들였고 택시 손님으로 만난 일본 가이드라고 하는 인천 살던 여자와 정동진까지 놀러가는 등 다시 또 가정이 있는 남자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행들을 저질렀습니다. 이 일은 남편이 새벽 5시가 넘어서 나간 뒤 밤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는데 그 여자가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바람에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1998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에 건축업을 하던 시숙이 빌라를 신축하여 저희에게 이사를 오라고 했지만 저는 안 간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가지고 있던 택시를 팔아 자기 형에게 입주비로 준다고 했습니다만 당신이 다단계에 빠져 있을 때, 얻었던 빚을 갚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죠. 다단계 업체 물건을 구입 하느라 그 때에도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다가 썼었거든요. 그런데도 남편이 막무가내로 이사를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돈을 빌렸던 지인 중 한 분에게 이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남편이 택시를 팔거든 바로 돈 받으러 오시라고요. 가뜩이나 빚도 많은데 그 빚을 갚을 생각은 안하고 자기 형부터 생각하는 그 모습에 조금씩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결국 저희는 남편의 강행으로 시숙이 지은 빌라에 입주하였고, 개인택시를 판 돈을 시숙한태 다 주고,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이들을 등록금이 비싼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이때에도 남편은 일을 하지 않고 결국 제가 가사를 하며 틈틈이 부업으로 일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시숙이 1500만원이면, 단종면허를 사서 건축업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고 해서, 남편이 제게 돈을 마련해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게 돈을 마련해보라고 하면 저한테만 뭐라 그러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는 아이들까지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심하게 혼내는데 정말 너무 마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괜히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걸 볼 수가 없었기에 친정에 가서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만 이야기 하고 동네 어르신들께 이자돈을 빌렸습니다.
생활비는 주지 않고 애들 등록금은 밀려있고, 전화요금도 못내 전화도 안되고 친정에서 빌려온 이자돈도 못주고,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생활비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데 네 멋대로 하라고 해서 이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친정에 연락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저는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딸을 데리고 친정에 내려갔습니다. 친정집에 머물면서 일해서 빚을 갚겠다는 일념으로요. 아들은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제가 내려간 친정집에서 근처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차로 1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어서 전학수속을 밟기가 조금 힘들었었습니다. 반면 초등학교는 걸어서 5분정도의 거리라 바로 수속을 밟아줄 수 있어서 딸을 먼저 데리고 갔었던 거죠. 그러나 이게 원인이 되었습니다.
친정집에 왔어도 취업이 쉬운 게 아니었고 아들을 떼어놓고 오니 마음이 편치 못해 밥도,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친정에서 버티다가 1달이 되었을 무렵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왔더군요.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마련할 테니 다시 올라오라고... 아들이 울면서 같이 살자고 해서 부모님의 만류에도 다시 마석으로 갔습니다.
1999년 4월, 친정어머니를 통해 빌려 온 돈의 이자도 제대로 드리지도 못하고 연락도 드리지 못하다가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17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계시다가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생각 했던 건 제가 돈을 빌린 것 때문에 주위 신경을 너무 많이 쓰셔서, 저희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마석 빌라에서는 은행 빚을 또 갚지 못해 집이 경매에 올라갔고 저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1999년 8월, 시숙이 은행 대출을 받아 풍납동에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세를 놓아 그 돈으로 잘 살아보자고 하여 제 명의를 빌려주었고 제 명의를 이용해서 2억을 대출받고 차도 사고, 휴대폰도 5개나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은행 이자에 차 할부금, 자동차 세, 벌금 등 뭐 하나 돈을 내주는 게 없었습니다. 자동차는 타보지도 못했는데 돈 200만원을 빌렸던 것 때문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차를 대신 가져가고 대포차 운행을 하며 벌금이 몇 백 만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2001년, 남편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신용불량자는 채용이 안 된다고 하기에 제가 데리고 살았던 동생 중 한 명에게 은행에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고 그 돈으로 남편의 빚을 갚아 신용불량을 풀어주어 모 증권 회사에 취업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은 잊고 남편이 착실하게 일 해서 조금씩 빛 갚고 살 수 있겠구나, 희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03년,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급여가 입금되는 통장을 제게 맡겨주긴 했지만, 자기가 버는 봉급의 2배가 넘는 카드요금이 매달 청구 되었고 가계에 보탬이 되긴 커녕 오히려 생활이 더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심지어는 회사가 부도나서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고 말하고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퇴직금을 받아 고스란히 자기 혼자 중국도 갔다 오고, 일본도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 일하는 데 쫒아 다닌다고 10달을 놀더군요. 그때 저는 군자역 2번 출구에서 제가 포장마차를 하며 간신히 생활을 이어나가던 때였습니다.
2009년 남편이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하다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향남에 내려가 10개월 동안 생활비를 한 푼도 안주고 전화요금이 80만원, 40만원이 넘게 나오도록 쓰기에 그것 때문에 또 싸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060, 080으로 통화를 했더라구요. 일명 폰팅이라고 불리는... 당시 남편이 쓰던 휴대폰이 아들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아들까지 신용불량자가 될까봐 또 싸우게 되었고 남편은 다시 서울의 집으로 돌아와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일들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6월부터 남편이 어떤 분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분 핑계를 대고 7월에 보증금 200, 월세 35만원 짜리 방을 얻어 나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와서 아들 신용카드로 살게 있다고 해서 카드를 내주었습니다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카드를 사용하였고 카드 대금을 막을 길이 없어 다시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으로부터 카드를 받아, 쓰지 않고 카드 값을 막는 일에만 신경 쓰고 있었지만 남편이 다시 집으로 와서는 카드를 달라고 하길래 지금 카드대금을 막고 있으니 또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때리고 아들이 말리는 데도 멱살을 잡아 팽개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제가 마트로 일도 나가야 했고 아들이 말리고 있어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만 며칠 후 다시 집으로 온 남편이 카드를 달라고 하기에 이번에는 아예 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렸으니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자르지는 않았고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남편은 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배 위에 올라타 가위로 찔러 죽인다고 난리를 치고, 아들이 없어서 집에 있던 딸이 나와 남편을 겨우겨우 말려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2012년 4월, 보증금과 월세가 더 싼 집으로 이사하고 집을 나가있던 남편이 그달 말에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동안은 조용히 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2013년 1월 남편이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가요주점에서 몇 십 만원씩 쓰고 모텔에서 자고 다음 날 9시가 되도록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 남편이 잠든 사이에 스마트폰을 살펴보니 남편이 모시는 분의 비서와 새벽 4시에 오랫동안 통화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가족들 모르게 방을 얻어 놓고 생활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2013년, 일주일에 몇 번씩 모시는 분 핑계를 대고 늦게 오고 심지어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아지며 그런 일이 반복되자 생활비도 안주면서 자기 혼자 돈을 쓰고 다니는 일에 저는 물론이고 아들과 딸의 불만은 높아지고 남편을 없는 사람처럼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랬더니 가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2014년 6월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상대적으로 저와 가장 오래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아지가 저를 잘 따르더군요. 7월에 남편이 방을 얻어 나가려고 할 때부터 강아지가 아침, 저녁으로 으르렁거리며 남편을 물고 뜯고 저 대신 분풀이를 해주는 것 같아 내심 고마웠습니다.
한 번은 이 녀석(강아지)이 남편이 자고 있을 때 남편의 스마트폰이 꽂혀있는 충전기 줄을 물고 오길래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고 하다가 꺼진 화면에 남아있는 손자국이 스마트폰 잠금 패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남편행실이 행실이었던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스마트폰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그 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어떤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꽃 선물까지 해서 따졌더니 저보고 자기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며 화를 내면서 꽃을 보낼 만하니까 보낸 건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며 애들 있는데서 되려 더 소리 지르고 때릴 듯이 다가와 아들이 말렸었구요.
남편이 가족보다 다른 여자들하고 즐기고 주변 사람들한테는 아내가 술 먹고 또라이 짓 한다며 떠들고 다닌다는 소리도 들었고 남편이 7월에 세를 또 얻으려고 수도 없이 알아보고 있는걸 알았는데 세 놓는 여자와 문자를 주고받은 걸 보게 되었습니다. 둘이서만 등산을 가고 싶다느니, 삼성동에 있다느니... 그래서 당신은 세 들어오는 사람한테 새벽에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느냐고 따지기도 했죠. 그랬더니 별사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별 사이 아니면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온갖 욕을 하며 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과 이혼도장을 찍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남남은 아니니 그 여자에게 처신 똑바로 하라고 했지만 그 여자는 저를 또라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정말, 남편과 놀아나는 여자한테까지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화가 나고 억울합니다. 이렇게 참고 살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여기에라도 제 이야기를 올려 조금이라도 여러분들의 관심과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결혼해서 30년 세월, 요약해서 적었지만 아쉽고 내 가정 지키려고 애쓰고 산 저의 노력이 거품처럼 사라지려하니 가슴이 너무 아리고 슬프네요. 이제야 내 자식한테 모든 사실을 고합니다. 내가 왜 참고 살았는지 내 자식만이라도 알아주길 바랍니다.
(스압) 제가 미친년인가요?
저는 지금 지하 셋방 500에 25만원 월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따로 방 얻어 놓고 한 달에 몇 번씩 외박을 하며 집에만 오면 온갖 트집을 잡으며 못마땅해 했고, 한 달에 260만원 씩 받으면서 생활비로 100만원을 줄 때도 있고 어떤 달은 50만원 주고 또 어떤 달은 아예 주지도 않으면서 카드는 400만원이 넘게 쓰고 다닙니다.
지 자식이 둘 있는데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할 때도 가끔 있어서 유전자 검사도 해보라고 했었는데 어떻게 이게 한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결국 유전자 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그 말은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습니다.
저희 남편은 자식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비 한 번 내준 적 없고 학원도 제대로 보내보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반면 저는 20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며 먹고 살기 바빴습니다만 남편은 자기가 번 돈 자기 혼자 쓰기도 바빴으며 돈 한 푼 안주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여기에 제가 살아오며 남편이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 적어볼까 합니다. 다소 긴 글이 되겠지만 끝까지 읽어주시어 제 억울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결혼 전에는 남편과 저 서로 가진 거 하나 없이 시작하여 성실하고 건강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어떤 고난이든 함께 이겨내자고 다짐했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던 탓일까요, 운 좋게도 회사에서 주택청약을 넣어둔 게 작은 아파트에 당첨되어 신혼 초기부터 집을 장만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게 벌써 1983년, 31년 전 일이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1987년 시어머니가 당뇨, 혈압 합병증으로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남편에게는 형(시숙)과 동생(시동생)이 있었는데도 병원비 한 푼 내주는 자식이 없어 제가 회사를 퇴사하고 퇴직금 받아 어머니 병원비를 대신 내드렸었습니다.
1989년,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받아 집에 모셔와 숨을 거두시고, 장례를 치르는 데도 돈을 보태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 돈도 결국 제가 마련하여 장례를 지냈지만 무슨 염치로 시댁 식구들이 어머니 산소를 쓰자고 말을 하여 이번에는 제가 빚까지 얻어가며 시어머니 산소도 쓰게 해드렸습니다. 제 친정어머니도 못해드린 산소를요.. 저희 어머니 이야기는 뒤에 나옵니다.
그 후, 시숙이 문제(사기)를 일으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 운 좋게 당첨되었던 집을 팔아서 형을 빼내오자고 남편이 그러더군요. 당시 저는 시숙이 유치장 신세를 지다가 감옥에 가게 되면 빨간줄 새겨서 앞으로의 인생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사람 하나 인생 살려보자고 남편에게 그러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숙은 제가 신경 써서 집을 팔아 돈을 마련한 것을 모르는지 계속 염치 불구한 행실을 했고 그 때마다 남편은 시숙 편을 들며 돈을 마련해 달라고 제게 설득 아닌 설득을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시동생은 또 남편 명의를 빌려 1000만원을 대출 받고 보험을 보험료 260만원을 납부하고 시동생 본인이 개인적인 용도로 500만원을 쓴 뒤 남은 240만원을 주었습니다. 저는 이 돈이 시어머니가 병원 계실 때 대신 내드렸던 병원비와 장례비, 산소 임대비 등을 주는 줄 알고 당장 급한 빚을 막았으나 뒤 늦게 제가 모르던 남편의 빚 720만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화가 나는 건 그 돈을 갚지도 않아 남편은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1994년에 개인택시 자격을 어찌어찌 취득하여 원호대상자로 개인택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개인택시를 받자마자 다단계 업체에 빠져들어 택시 운전은 하지 않고 미팅 간다, 교육장 간다, 지방에 스폰서의 교육 들으러 간다는 둥 핑계를 대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때 남편은 다단계 업체의 미팅과 교육을 핑계로 다른 여자들이랑 부산에 예산에 놀러 다니며 그 여자의 집에 살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도중에 다단계 업체로 2년 가까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는 또 다른 다단계 업체에 발을 들였고 택시 손님으로 만난 일본 가이드라고 하는 인천 살던 여자와 정동진까지 놀러가는 등 다시 또 가정이 있는 남자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행들을 저질렀습니다. 이 일은 남편이 새벽 5시가 넘어서 나간 뒤 밤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는데 그 여자가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바람에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1998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에 건축업을 하던 시숙이 빌라를 신축하여 저희에게 이사를 오라고 했지만 저는 안 간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가지고 있던 택시를 팔아 자기 형에게 입주비로 준다고 했습니다만 당신이 다단계에 빠져 있을 때, 얻었던 빚을 갚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죠. 다단계 업체 물건을 구입 하느라 그 때에도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다가 썼었거든요. 그런데도 남편이 막무가내로 이사를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돈을 빌렸던 지인 중 한 분에게 이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남편이 택시를 팔거든 바로 돈 받으러 오시라고요. 가뜩이나 빚도 많은데 그 빚을 갚을 생각은 안하고 자기 형부터 생각하는 그 모습에 조금씩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결국 저희는 남편의 강행으로 시숙이 지은 빌라에 입주하였고, 개인택시를 판 돈을 시숙한태 다 주고,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이들을 등록금이 비싼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이때에도 남편은 일을 하지 않고 결국 제가 가사를 하며 틈틈이 부업으로 일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시숙이 1500만원이면, 단종면허를 사서 건축업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고 해서, 남편이 제게 돈을 마련해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게 돈을 마련해보라고 하면 저한테만 뭐라 그러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는 아이들까지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심하게 혼내는데 정말 너무 마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괜히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걸 볼 수가 없었기에 친정에 가서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만 이야기 하고 동네 어르신들께 이자돈을 빌렸습니다.
생활비는 주지 않고 애들 등록금은 밀려있고, 전화요금도 못내 전화도 안되고 친정에서 빌려온 이자돈도 못주고,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생활비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데 네 멋대로 하라고 해서 이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친정에 연락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저는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딸을 데리고 친정에 내려갔습니다. 친정집에 머물면서 일해서 빚을 갚겠다는 일념으로요. 아들은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제가 내려간 친정집에서 근처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차로 1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어서 전학수속을 밟기가 조금 힘들었었습니다. 반면 초등학교는 걸어서 5분정도의 거리라 바로 수속을 밟아줄 수 있어서 딸을 먼저 데리고 갔었던 거죠. 그러나 이게 원인이 되었습니다.
친정집에 왔어도 취업이 쉬운 게 아니었고 아들을 떼어놓고 오니 마음이 편치 못해 밥도,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친정에서 버티다가 1달이 되었을 무렵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왔더군요.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마련할 테니 다시 올라오라고... 아들이 울면서 같이 살자고 해서 부모님의 만류에도 다시 마석으로 갔습니다.
1999년 4월, 친정어머니를 통해 빌려 온 돈의 이자도 제대로 드리지도 못하고 연락도 드리지 못하다가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17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계시다가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생각 했던 건 제가 돈을 빌린 것 때문에 주위 신경을 너무 많이 쓰셔서, 저희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마석 빌라에서는 은행 빚을 또 갚지 못해 집이 경매에 올라갔고 저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1999년 8월, 시숙이 은행 대출을 받아 풍납동에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세를 놓아 그 돈으로 잘 살아보자고 하여 제 명의를 빌려주었고 제 명의를 이용해서 2억을 대출받고 차도 사고, 휴대폰도 5개나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은행 이자에 차 할부금, 자동차 세, 벌금 등 뭐 하나 돈을 내주는 게 없었습니다. 자동차는 타보지도 못했는데 돈 200만원을 빌렸던 것 때문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차를 대신 가져가고 대포차 운행을 하며 벌금이 몇 백 만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2001년, 남편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신용불량자는 채용이 안 된다고 하기에 제가 데리고 살았던 동생 중 한 명에게 은행에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고 그 돈으로 남편의 빚을 갚아 신용불량을 풀어주어 모 증권 회사에 취업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은 잊고 남편이 착실하게 일 해서 조금씩 빛 갚고 살 수 있겠구나, 희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03년,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급여가 입금되는 통장을 제게 맡겨주긴 했지만, 자기가 버는 봉급의 2배가 넘는 카드요금이 매달 청구 되었고 가계에 보탬이 되긴 커녕 오히려 생활이 더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심지어는 회사가 부도나서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고 말하고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퇴직금을 받아 고스란히 자기 혼자 중국도 갔다 오고, 일본도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 일하는 데 쫒아 다닌다고 10달을 놀더군요. 그때 저는 군자역 2번 출구에서 제가 포장마차를 하며 간신히 생활을 이어나가던 때였습니다.
2009년 남편이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하다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향남에 내려가 10개월 동안 생활비를 한 푼도 안주고 전화요금이 80만원, 40만원이 넘게 나오도록 쓰기에 그것 때문에 또 싸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060, 080으로 통화를 했더라구요. 일명 폰팅이라고 불리는... 당시 남편이 쓰던 휴대폰이 아들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아들까지 신용불량자가 될까봐 또 싸우게 되었고 남편은 다시 서울의 집으로 돌아와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일들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6월부터 남편이 어떤 분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분 핑계를 대고 7월에 보증금 200, 월세 35만원 짜리 방을 얻어 나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와서 아들 신용카드로 살게 있다고 해서 카드를 내주었습니다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카드를 사용하였고 카드 대금을 막을 길이 없어 다시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으로부터 카드를 받아, 쓰지 않고 카드 값을 막는 일에만 신경 쓰고 있었지만 남편이 다시 집으로 와서는 카드를 달라고 하길래 지금 카드대금을 막고 있으니 또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때리고 아들이 말리는 데도 멱살을 잡아 팽개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제가 마트로 일도 나가야 했고 아들이 말리고 있어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만 며칠 후 다시 집으로 온 남편이 카드를 달라고 하기에 이번에는 아예 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렸으니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자르지는 않았고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남편은 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배 위에 올라타 가위로 찔러 죽인다고 난리를 치고, 아들이 없어서 집에 있던 딸이 나와 남편을 겨우겨우 말려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2012년 4월, 보증금과 월세가 더 싼 집으로 이사하고 집을 나가있던 남편이 그달 말에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동안은 조용히 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2013년 1월 남편이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가요주점에서 몇 십 만원씩 쓰고 모텔에서 자고 다음 날 9시가 되도록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 남편이 잠든 사이에 스마트폰을 살펴보니 남편이 모시는 분의 비서와 새벽 4시에 오랫동안 통화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가족들 모르게 방을 얻어 놓고 생활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2013년, 일주일에 몇 번씩 모시는 분 핑계를 대고 늦게 오고 심지어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아지며 그런 일이 반복되자 생활비도 안주면서 자기 혼자 돈을 쓰고 다니는 일에 저는 물론이고 아들과 딸의 불만은 높아지고 남편을 없는 사람처럼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랬더니 가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2014년 6월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상대적으로 저와 가장 오래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아지가 저를 잘 따르더군요. 7월에 남편이 방을 얻어 나가려고 할 때부터 강아지가 아침, 저녁으로 으르렁거리며 남편을 물고 뜯고 저 대신 분풀이를 해주는 것 같아 내심 고마웠습니다.
한 번은 이 녀석(강아지)이 남편이 자고 있을 때 남편의 스마트폰이 꽂혀있는 충전기 줄을 물고 오길래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고 하다가 꺼진 화면에 남아있는 손자국이 스마트폰 잠금 패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남편행실이 행실이었던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스마트폰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그 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어떤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꽃 선물까지 해서 따졌더니 저보고 자기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며 화를 내면서 꽃을 보낼 만하니까 보낸 건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며 애들 있는데서 되려 더 소리 지르고 때릴 듯이 다가와 아들이 말렸었구요.
남편이 가족보다 다른 여자들하고 즐기고 주변 사람들한테는 아내가 술 먹고 또라이 짓 한다며 떠들고 다닌다는 소리도 들었고 남편이 7월에 세를 또 얻으려고 수도 없이 알아보고 있는걸 알았는데 세 놓는 여자와 문자를 주고받은 걸 보게 되었습니다. 둘이서만 등산을 가고 싶다느니, 삼성동에 있다느니... 그래서 당신은 세 들어오는 사람한테 새벽에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느냐고 따지기도 했죠. 그랬더니 별사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별 사이 아니면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온갖 욕을 하며 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과 이혼도장을 찍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남남은 아니니 그 여자에게 처신 똑바로 하라고 했지만 그 여자는 저를 또라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정말, 남편과 놀아나는 여자한테까지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화가 나고 억울합니다. 이렇게 참고 살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여기에라도 제 이야기를 올려 조금이라도 여러분들의 관심과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결혼해서 30년 세월, 요약해서 적었지만 아쉽고 내 가정 지키려고 애쓰고 산 저의 노력이 거품처럼 사라지려하니 가슴이 너무 아리고 슬프네요. 이제야 내 자식한테 모든 사실을 고합니다. 내가 왜 참고 살았는지 내 자식만이라도 알아주길 바랍니다.
엄마가 못나서 이렇게밖에 못 살아줘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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