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기(1896~1912)] 올림픽 대회가 지속적인 형태를 갖게 된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시기에 거행된 5회의 올림픽 경기중 1896년 아테네 대회, 1900년 파리 대회,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 등 초반의 세 대회는 다소 무계획한 행사였다. 그러나 참가선수들은 광범위했고, 각국의 가장 훌륭한 선수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대회에 포함된 경기종목은 상당히 다양했으나, 어떤 경기가 정말로 올림픽 대회의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확연하게 단정짓기는 불가능하다. 파리 대회에서는 골프와 테니스 종목에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고 세인트루이스 대회에서는 양궁에도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다. 1908년 런던 대회는 여러 관련 스포츠 단체들에 의해 조직된 최초의 대회였다. 올림픽이 세계박람회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많은 장려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비록 런던 세퍼드부시에서 열린 영국궵조壕?박람회가 6만 6,000명의 수용시설을 갖춘 새로운 주경기장인 화이트시티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지만, 스포츠 이사회가 이 모든 일들을 관장했다. 22개국에서 2,000명 이상의 선수가 파견되었고 17개 경기, 100여개 이상의 종목이 치러졌다. 그러나 여자 선수는 겨우 36명만이 참가했다. 1908년 런던 대회에는 양궁과 테니스가 포함되었다. 1912년 스톡홀름 대회는 참가국 수가 28개국으로 증가했고 참가선수도 2,5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3개의 여자수영 종목이 포함되었다. 1916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지 않았다.
[제2기(1920~36)] 이 시기는 중·장 거리 경주 부문에서 핀란드가 독주한 시기이며, 특히 제시 오언의 성적을 포함한 단거리 경주 부문에서의 기록이 놀랍게 성장한 시기로 육상에 있어서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는 5차례의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1918년 11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2년이 안 되서, 벨기에가 전후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했다. 이 대회는 국왕 알베르트 1세의 개회사와 함께 안트웨르펜에서 거행되었다. 많은 새로운 참가국들을 포함해서 29개국이 2,500명 이상의 선수들을 파견했고, 이들은 19개 경기, 150개가 넘는 종목에서 기량을 겨루었다. 참가선수 중 여자 선수는 여전히 적어서 60여 명만이 참가했다. 4년 후 파리 대회에서는 참가국이 44개국으로 증가했고, 참가선수도 3,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사격과 요트 경기에서 지나치게 종목 수를 많이 줄여 137개 종목으로 축소되었다. 파리 대회의 경우는 100명이 넘는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고, 수영과 테니스뿐만 아니라 펜싱 경기도 가졌다. 1924년 이후 테니스 경기부문에 있어서 출전선수의 자격이 문제시되었고, 이로 인해 IOC는 이후에 거행된 올림픽에서 테니스 경기를 제외시켰다.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여자 트랙 및 필드 경기 5개 종목과 여자 체조 1개 종목이 선보였다. 46개국에서 이전 대회처럼 3,000명 이상의 선수가 참가했고, 그중 여자 선수는 파리 대회 136명의 2배가 넘는 290명이 참가했다. 4년 뒤 올림픽 대회는 2번째로 대서양을 건너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는 37개국에서 1,500명도 안 되는 선수가 참가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먼 거리와 당시 대공황으로 인해 참가선수가 감소한 것이었다. 1936년 대회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베를린에서 개최되었으며 4,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제3기(1948~68)] 이 시기에는 여자 선수의 수와 여자 경기종목 수에서 상당한 증가를 보였다. 그리고 트랙 및 필드 경기보다 수영과 같은 경기가 인기종목이 되었다. 무엇보다 동계 및 하계 올림픽 경기의 텔레비전 중계방송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올림픽 경기 시청자 수가 증가했다. 1940, 1944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했다. 1948년 대회는 단지 3년간의 준비기간만으로 런던에서 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비록 전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많은 용구들과 물자를 국가들이 효과적으로 분담함으로써 많지 않은 비용으로 거행될 수 있었다. 참가국의 수는 59개국이었으며 참가선수의 수는 4,000여 명이었고, 그중 여자 선수는 385명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여자 필드 및 트랙 경기종목에서 200m 달리기, 멀리뛰기, 포환던지기 등의 종목이 추가되어, 여자 육상종목은 모두 9개 종목으로 증가했다. 1952년 대회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개최되었으며, 참가국의 수가 69개국으로 증가했다. 참가선수도 총 5,900여 명에 달했으며, 그중 여자 선수의 수도 500명을 넘어섰다. 1956년에는 처음으로 남반구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멜버른에서 치러진 1956년 올림픽은 11~12월에 행해졌으며, 처음으로 경기 중 1개 종목이 다른 국가에서 치러져야 했다. 말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검역규정으로 인해서, 승마경기는 스톡홀름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멜버른 대회도 유럽으로부터의 거리상의 문제로 참가선수의 수가 줄어들어 1,500여 명만이 참가했다. 그러나 4년 뒤 로마 대회에서는 참가선수의 수가 5,000명을 넘어섰고, 참가국 수도 80개국을 넘었으며 경기종목도 150개 종목에 달했다. 1964년에는 처음으로 올림픽이 아시아에서 개최되었다. 개최지는 도쿄〔東京〕였는데 이 도시는 1940년 올림픽을 유치했다가 개최하지 못한 곳이었다. 도쿄 대회는 참가국·참가인원·경기종목 수에서 기록적인 수치를 보여 94개국에서 5,500여명이 162개 종목에서 경기를 가졌다. 1968년 대회는 멕시코 시에 유치되었는데 이 대회는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논쟁은 2,300m가 넘는 고도 때문에 대다수 장거리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비난을 둘러싼 것이었다. 그러나 125개국에서 총 6,500여 명이 넘는 선수가 이 대회에 참가했고, 여자 선수도 800여 명이나 되었다. 경기종목 수는 총 172개에 달했다.
[제4기(1972~)] 이 시기는 정치적 분열과 폭력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는 124개국 8,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거의 200개 종목의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아랍의 팔레스타인 테러 분자들이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 이스라엘에 있는 아랍포로 20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2명을 사살하고 9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았다. 경찰이 구출작전을 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서 9명의 인질과 인질범들 중 5명, 서독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는 인종차별정책을 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뉴질랜드의 대회 참가를 반대했던 여러 국가들이 마지막 순간에 선수단을 철수시킴으로써 참가선수의 수는 400여 명 가량이 줄어들었다. 제22회 올림픽은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1979년 12월 발생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60여 개 국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81개국에서 총 5,923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나, 동구권 출신의 심판들이 경기판정에 편견을 두었고,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부 선수들이 스테로이드 약물을 복용하는 등 2가지 중요한 문제점들이 나타나 이 대회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약물복용 문제는 1979년 약물복용으로 검거되었던 7명의 선수에게 국제 아마추어 경기연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출전자격이 주어짐으로써 대회 개최 직전에 더욱 악화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최준비는 여러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문제들에는 악명 높은 로스앤젤레스의 스모그 현상이 선수들에게 미칠 생리적 영향, 여러 법집행기관들의 안전문제에 관한 관할권분쟁, 인내력을 요구하는 여자 경기종목의 진행절차에 관한 법정소송 문제, 그리고 소련과 많은 소련 동맹국들의 대회 불참결정 등이 있었다. 1988년의 올림픽은 아시아에서는 2번째로 서울에서 열렸는데`, 냉전의 영향을 받았던 앞서 2차례 올림픽의 불운을 씻고 동·서 화합의 분위기 속에서 양 진영의 160개국에서 1만 3,000명 이상이 참가하고, 경기종목도 237개 종목에 달하는 등 사상 최대규모의 대회로 기록되었다. 1992년의 올림픽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었다. 169개국 9,3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30년 만에 처음으로 불참을 선언한 나라가 없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동유럽을 휩쓸었던 극적인 정치적 변화가 올림픽 대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단일 팀으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지만 옛 소련은 단일 팀으로 참가하는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근대 올림픽 대회 100주년을 기념하는 1996년 올림픽 대회는 미국의 애틀랜타에서 개최되었다.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 197개 전 회원국이 참가했다. 새 천년의 첫 올림픽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 개막식에서는 한국과 북한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해 최고의 화제가 되었다. 또한 2000년은 올림픽에 여자 선수가 출전하기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는데, 마치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대회 내내 아시아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896년 근대 올림픽 창설 당시 구호는 '남성의 스포츠, 여성의 환호 갈채'였으나 여성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2000년, 아시아 남성들은 여성들의 활약에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한편 이번 대회는 그린 앤 그린(Green and Green)을 표방한 환경 올림픽이라는 데 관심이 모아졌다. 쓰레기 더미 위에 지어진 올림픽 파크나 대중 교통을 최대한 활용한 교통 정책 등이 환경 올림픽을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극심한 바가지 상혼과 약물 복용으로 인한 연이은 선수 탈락, 심판 판정 시비 등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근대 올림픽의 역사
[제1기(1896~1912)]
올림픽 대회가 지속적인 형태를 갖게 된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시기에 거행된 5회의 올림픽 경기중 1896년 아테네 대회, 1900년 파리 대회,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 등 초반의 세 대회는 다소 무계획한 행사였다. 그러나 참가선수들은 광범위했고, 각국의 가장 훌륭한 선수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대회에 포함된 경기종목은 상당히 다양했으나, 어떤 경기가 정말로 올림픽 대회의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확연하게 단정짓기는 불가능하다. 파리 대회에서는 골프와 테니스 종목에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고 세인트루이스 대회에서는 양궁에도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다. 1908년 런던 대회는 여러 관련 스포츠 단체들에 의해 조직된 최초의 대회였다. 올림픽이 세계박람회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많은 장려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비록 런던 세퍼드부시에서 열린 영국궵조壕?박람회가 6만 6,000명의 수용시설을 갖춘 새로운 주경기장인 화이트시티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지만, 스포츠 이사회가 이 모든 일들을 관장했다. 22개국에서 2,000명 이상의 선수가 파견되었고 17개 경기, 100여개 이상의 종목이 치러졌다. 그러나 여자 선수는 겨우 36명만이 참가했다. 1908년 런던 대회에는 양궁과 테니스가 포함되었다. 1912년 스톡홀름 대회는 참가국 수가 28개국으로 증가했고 참가선수도 2,5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3개의 여자수영 종목이 포함되었다. 1916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지 않았다.
[제2기(1920~36)]
이 시기는 중·장 거리 경주 부문에서 핀란드가 독주한 시기이며, 특히 제시 오언의 성적을 포함한 단거리 경주 부문에서의 기록이 놀랍게 성장한 시기로 육상에 있어서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는 5차례의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1918년 11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2년이 안 되서, 벨기에가 전후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했다. 이 대회는 국왕 알베르트 1세의 개회사와 함께 안트웨르펜에서 거행되었다. 많은 새로운 참가국들을 포함해서 29개국이 2,500명 이상의 선수들을 파견했고, 이들은 19개 경기, 150개가 넘는 종목에서 기량을 겨루었다. 참가선수 중 여자 선수는 여전히 적어서 60여 명만이 참가했다. 4년 후 파리 대회에서는 참가국이 44개국으로 증가했고, 참가선수도 3,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사격과 요트 경기에서 지나치게 종목 수를 많이 줄여 137개 종목으로 축소되었다. 파리 대회의 경우는 100명이 넘는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고, 수영과 테니스뿐만 아니라 펜싱 경기도 가졌다. 1924년 이후 테니스 경기부문에 있어서 출전선수의 자격이 문제시되었고, 이로 인해 IOC는 이후에 거행된 올림픽에서 테니스 경기를 제외시켰다.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여자 트랙 및 필드 경기 5개 종목과 여자 체조 1개 종목이 선보였다. 46개국에서 이전 대회처럼 3,000명 이상의 선수가 참가했고, 그중 여자 선수는 파리 대회 136명의 2배가 넘는 290명이 참가했다. 4년 뒤 올림픽 대회는 2번째로 대서양을 건너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는 37개국에서 1,500명도 안 되는 선수가 참가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먼 거리와 당시 대공황으로 인해 참가선수가 감소한 것이었다. 1936년 대회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베를린에서 개최되었으며 4,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제3기(1948~68)]
이 시기에는 여자 선수의 수와 여자 경기종목 수에서 상당한 증가를 보였다. 그리고 트랙 및 필드 경기보다 수영과 같은 경기가 인기종목이 되었다. 무엇보다 동계 및 하계 올림픽 경기의 텔레비전 중계방송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올림픽 경기 시청자 수가 증가했다. 1940, 1944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했다. 1948년 대회는 단지 3년간의 준비기간만으로 런던에서 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비록 전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많은 용구들과 물자를 국가들이 효과적으로 분담함으로써 많지 않은 비용으로 거행될 수 있었다. 참가국의 수는 59개국이었으며 참가선수의 수는 4,000여 명이었고, 그중 여자 선수는 385명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여자 필드 및 트랙 경기종목에서 200m 달리기, 멀리뛰기, 포환던지기 등의 종목이 추가되어, 여자 육상종목은 모두 9개 종목으로 증가했다. 1952년 대회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개최되었으며, 참가국의 수가 69개국으로 증가했다. 참가선수도 총 5,900여 명에 달했으며, 그중 여자 선수의 수도 500명을 넘어섰다. 1956년에는 처음으로 남반구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멜버른에서 치러진 1956년 올림픽은 11~12월에 행해졌으며, 처음으로 경기 중 1개 종목이 다른 국가에서 치러져야 했다. 말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검역규정으로 인해서, 승마경기는 스톡홀름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멜버른 대회도 유럽으로부터의 거리상의 문제로 참가선수의 수가 줄어들어 1,500여 명만이 참가했다. 그러나 4년 뒤 로마 대회에서는 참가선수의 수가 5,000명을 넘어섰고, 참가국 수도 80개국을 넘었으며 경기종목도 150개 종목에 달했다. 1964년에는 처음으로 올림픽이 아시아에서 개최되었다. 개최지는 도쿄〔東京〕였는데 이 도시는 1940년 올림픽을 유치했다가 개최하지 못한 곳이었다. 도쿄 대회는 참가국·참가인원·경기종목 수에서 기록적인 수치를 보여 94개국에서 5,500여명이 162개 종목에서 경기를 가졌다. 1968년 대회는 멕시코 시에 유치되었는데 이 대회는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논쟁은 2,300m가 넘는 고도 때문에 대다수 장거리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비난을 둘러싼 것이었다. 그러나 125개국에서 총 6,500여 명이 넘는 선수가 이 대회에 참가했고, 여자 선수도 800여 명이나 되었다. 경기종목 수는 총 172개에 달했다.
[제4기(1972~)]
이 시기는 정치적 분열과 폭력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는 124개국 8,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거의 200개 종목의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아랍의 팔레스타인 테러 분자들이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 이스라엘에 있는 아랍포로 20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2명을 사살하고 9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았다. 경찰이 구출작전을 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서 9명의 인질과 인질범들 중 5명, 서독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는 인종차별정책을 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뉴질랜드의 대회 참가를 반대했던 여러 국가들이 마지막 순간에 선수단을 철수시킴으로써 참가선수의 수는 400여 명 가량이 줄어들었다. 제22회 올림픽은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1979년 12월 발생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60여 개 국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81개국에서 총 5,923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나, 동구권 출신의 심판들이 경기판정에 편견을 두었고,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부 선수들이 스테로이드 약물을 복용하는 등 2가지 중요한 문제점들이 나타나 이 대회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약물복용 문제는 1979년 약물복용으로 검거되었던 7명의 선수에게 국제 아마추어 경기연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출전자격이 주어짐으로써 대회 개최 직전에 더욱 악화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최준비는 여러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문제들에는 악명 높은 로스앤젤레스의 스모그 현상이 선수들에게 미칠 생리적 영향, 여러 법집행기관들의 안전문제에 관한 관할권분쟁, 인내력을 요구하는 여자 경기종목의 진행절차에 관한 법정소송 문제, 그리고 소련과 많은 소련 동맹국들의 대회 불참결정 등이 있었다. 1988년의 올림픽은 아시아에서는 2번째로 서울에서 열렸는데`, 냉전의 영향을 받았던 앞서 2차례 올림픽의 불운을 씻고 동·서 화합의 분위기 속에서 양 진영의 160개국에서 1만 3,000명 이상이 참가하고, 경기종목도 237개 종목에 달하는 등 사상 최대규모의 대회로 기록되었다. 1992년의 올림픽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었다. 169개국 9,3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30년 만에 처음으로 불참을 선언한 나라가 없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동유럽을 휩쓸었던 극적인 정치적 변화가 올림픽 대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단일 팀으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지만 옛 소련은 단일 팀으로 참가하는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근대 올림픽 대회 100주년을 기념하는 1996년 올림픽 대회는 미국의 애틀랜타에서 개최되었다.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 197개 전 회원국이 참가했다. 새 천년의 첫 올림픽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 개막식에서는 한국과 북한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해 최고의 화제가 되었다. 또한 2000년은 올림픽에 여자 선수가 출전하기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는데, 마치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대회 내내 아시아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896년 근대 올림픽 창설 당시 구호는 '남성의 스포츠, 여성의 환호 갈채'였으나 여성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2000년, 아시아 남성들은 여성들의 활약에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한편 이번 대회는 그린 앤 그린(Green and Green)을 표방한 환경 올림픽이라는 데 관심이 모아졌다. 쓰레기 더미 위에 지어진 올림픽 파크나 대중 교통을 최대한 활용한 교통 정책 등이 환경 올림픽을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극심한 바가지 상혼과 약물 복용으로 인한 연이은 선수 탈락, 심판 판정 시비 등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