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차대전 소련군에서 활약한 독일계 러시아인 스파이. 1차대전 참전용사였으며 2차대전당시 일본에서 스파이 활동을 벌여 소련이 승전국이 되는데 기여하였다.
조르게는 소련에 의해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어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유럽의 여러나라에 파견되었다
1930년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났고,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조르게에게 일본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기자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소련 정보당국은 조르게에게 일본으로 가서 첩보망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조르게는 일단 독일로 돌아가서 철저한 나치스로 위장하고, 새로운 신문사에 들어갔다. 특히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1933년 9월 6일 조르게는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과 외국인, 그리고 사업가와 신문기자등으로 구성된 첩보망을 조직하였다. 그의 요원들은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특히 오자키 호츠미는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정책보좌역이 되어 일본정부의 기밀문서를 빼내 조르게에게 넘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주일 독일대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고급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대사였던 오이겐 오토(Eugen Otto)와 매우 친밀했고, 오토의 아내와도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 일본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 (6월 22일, 혹은 그보다 앞선 6월 20일로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 를 전달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여 소련군의 대패를 초래하였다.
소련은 서쪽을 침공한 독일에 발맞추어 동맹국 일본도 아시아쪽에서 협공할 것을 우려하였는데, 1941년 9월 14일 조르게는 이에 관련한 일본군의 동향을 전달하였다. 그것은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는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군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 첩보에 근거하여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에 맞서 극동에 배치된 정예 병력을 빼내 서부로 돌렸고, 이 병력은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되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처음으로 패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일본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1941년 10월 14일 먼저 체포되었고 조르게는 10월 18일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는 이를 듣고 놀랐다. 사실 조르게는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하면서 일부를 독일대사관 측에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는 조르게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본은 조르게를 독일 국방군의 첩보기관인 아프베어(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프베어는 이를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조르게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르게와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그보다 조금 이른시간에 처형되었다. 조르게는 일단 스가모 형무소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있던 2000년까지 계속 조르게의 묘를 찾았다.
1961년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영화를 관람한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첩보기관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에게 이 영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고 물었다. 조르게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 흐루쇼프는 1964년 조르게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고, 조르게가 공식적으로 자국요원임을 인정하였다. 또한 조르게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에게 연금을 주었다. 한편 주일본 소련 대사는 부임후 그의 묘소를 찾는 것이 관례였고, 현재는 러시아 대사도 마찬가지로 그의 묘소를 찾는다고 한다.
동독에서도 파시스트 체제에 대항했던 조르게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전기가 발표되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의 기념사업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폴란드에서는 그를 다룬 만화가 출판되었다.
2003년 일본에서도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여러 편의 책이 그를 주제로 씌여졌다. 특히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은
그를 높게 평가해 이를 모티브로 제임스 본드를 창안하였다.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첩보원이었다" (이언 플레밍 '007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
제임스 본드의 모티브가 된 전설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양차대전 소련군에서 활약한 독일계 러시아인 스파이. 1차대전 참전용사였으며 2차대전당시 일본에서 스파이 활동을 벌여 소련이 승전국이 되는데 기여하였다.조르게는 소련에 의해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어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유럽의 여러나라에 파견되었다
1930년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났고,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조르게에게 일본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기자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소련 정보당국은 조르게에게 일본으로 가서 첩보망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조르게는 일단 독일로 돌아가서 철저한 나치스로 위장하고, 새로운 신문사에 들어갔다. 특히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1933년 9월 6일 조르게는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과 외국인, 그리고 사업가와 신문기자등으로 구성된 첩보망을 조직하였다. 그의 요원들은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특히 오자키 호츠미는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정책보좌역이 되어 일본정부의 기밀문서를 빼내 조르게에게 넘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주일 독일대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고급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대사였던 오이겐 오토(Eugen Otto)와 매우 친밀했고, 오토의 아내와도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 일본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 (6월 22일, 혹은 그보다 앞선 6월 20일로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 를 전달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여 소련군의 대패를 초래하였다.소련은 서쪽을 침공한 독일에 발맞추어 동맹국 일본도 아시아쪽에서 협공할 것을 우려하였는데, 1941년 9월 14일 조르게는 이에 관련한 일본군의 동향을 전달하였다. 그것은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는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군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 첩보에 근거하여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에 맞서 극동에 배치된 정예 병력을 빼내 서부로 돌렸고, 이 병력은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되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처음으로 패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일본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1941년 10월 14일 먼저 체포되었고 조르게는 10월 18일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는 이를 듣고 놀랐다. 사실 조르게는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하면서 일부를 독일대사관 측에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는 조르게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본은 조르게를 독일 국방군의 첩보기관인 아프베어(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프베어는 이를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조르게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르게와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그보다 조금 이른시간에 처형되었다. 조르게는 일단 스가모 형무소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있던 2000년까지 계속 조르게의 묘를 찾았다. 1961년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영화를 관람한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첩보기관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에게 이 영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고 물었다. 조르게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 흐루쇼프는 1964년 조르게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고, 조르게가 공식적으로 자국요원임을 인정하였다. 또한 조르게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에게 연금을 주었다. 한편 주일본 소련 대사는 부임후 그의 묘소를 찾는 것이 관례였고, 현재는 러시아 대사도 마찬가지로 그의 묘소를 찾는다고 한다.
동독에서도 파시스트 체제에 대항했던 조르게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전기가 발표되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의 기념사업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폴란드에서는 그를 다룬 만화가 출판되었다.
2003년 일본에서도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여러 편의 책이 그를 주제로 씌여졌다. 특히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은 그를 높게 평가해 이를 모티브로 제임스 본드를 창안하였다.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첩보원이었다" (이언 플레밍 '007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