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인맥으로 사람을 구한 동생

콜로라도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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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트 괴링(나미비아 원주민을 학살한 아버지 에른스트 괴링과 나치의 2인자였던 형 헤르만과는 달리 인간애를 지닌 사람이었다.)

  알베르트 괴링은 베를린 교외에 1895년 3월 9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미비아 총영사관에 근무했던 에른스트 하인리히 괴링이었다.
1차대전 독일 공군의 에이스로 독일 최고훈장을 수훈받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위해 노력한 헤르만과 달리 동생은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영화계에 생업을 둔 그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생을 보낸다. 하지만 나치가 집권하면서 알베르트는 나치의 반유대정책과 폭력성을 경멸하고 혐오하게 된다. 이런 알베르트에 대한 나치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잘 나타났다. 1962년 오스트리아 시나리오 작가 에른스트 노히바흐가 한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빈의 한 상점에서 그의 노모가 수모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독일군 병사가 75세가 된 그의 노모에게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건 채로 상점의 진열대에 앉아 있게 한것이다. 그떄 알베르트가 괴링의 성이 기입된 그의 신분증으로 보여주어 그의 노모를 구해준다.
다른 이야기는 그가 일했던 회사의 전 사장이었던 유대인 오스카 필처가 체포되기 전에 빼돌렸고 반나치 인사들의 탈출을 위해 형의 사인을 위조하여 통행증을 만들었고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는 형의 배경을 이용하여 풀려났다.

 동생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동생을 보호했던 나치공군의 수장 헤르만 괴링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상치료를 위해 사용한 모르핀에 중독되어 이후 마약에 찌들게 된다.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유대인 학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의 부하가 실력이 있을경우 유대인이라도 "이 자가 유대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한다"며 보호했다.

 


이렇듯 나치의 유대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곧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향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반나치, 반히틀러를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무사했는데 위에 상술했다시피 형이 다름아닌 나치의 제2인자였던만큼 게슈타포도 그에게는 손을 쓰지 못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토디 사에서 수출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유대인 노동자의 사보타주를 독려하는가 하면 체코의 레지스탕스와 몰래 접촉하여 그들을 지원하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수용소에서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데려와서는 중립국인 스위스와 모나코에 풀어주기까지 하였다.


전후 알베르트는 연합국과 체코 정부에 의해 두번의 재판을 받게되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는 무사히 풀려났다. 형이 자살하기 직전에 한번 면회를 올 수 있었는데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게된다. 당시에 크게 슬퍼했다고한다 하지만 그의 성씨인 괴링은 전후 혐오의 대상으로 변모했고 그는 이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살게된다.(독일에 살았던 히틀러의 친척도 당시 소련군에 의해 집단학살당했고 일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독일 정부로부터 연금생활을 하던 그는 작가 또는 번역가로 일을 하였다.


죽기 전에 알베르트는 결혼을 한 경우, 자신이 사망하게 되면 자신의 연금이 아내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1966년에 알베르트는 그의 가정부와 결혼했다. 일주일 후, 그는 자신의 전시 활동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