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날로부터는 두달이 다 되어가고, 헤어졌어야 했던 날로부터는 세달이 돼가네. 시간의 단위라는게 이렇게까지 가혹한 줄은 몰랐다.
너와 나의 관계는 우리라는 사이는 언제가 시작이었고 어디가 끝이었을까. 처음 만난 비냄새가 나는 그곳에서 던져진 그 우스갯소리가 시작이었을까, 눈이 내리던 그곳에서 모든게 통하던 그 느낌이 시작이었을까. 넌 애들에게 들었던 거에 비해 나에게 첫인상이 좋진 않았으니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을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나눴던 대화 속에서 '아 이 아이구나' 한 적도 없으니 그때도 아니었을거야. 그냥 그 순수했던 시절, 너는 나의 습관같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옆에 서면 그 어리던 가슴이 떨리는 사람이 되어있었지.
그때 우리가, 우리 무리가 나눴던 우정은 꽤나 대단했었는지 난 결국 내 마음을 숨겼다. 그렇게 내 모든 생활을 등지고 난 이곳에 와버렸고, 넌 거기 남았지. 그리고 몇년만에 한 재회. 너는 딱 내가 변하지 않은 만큼 변하지 않았고, 나는 딱 니가 변한 만큼만 변해 있었다. 넌 여전히 나한텐 친구가 아닌 친구였다. 우리를 막는 것들은 정말 여러가지였다. 모든 것이 장애물이었고 모든 것이 난관이었다. 하지만 둘만 남게 될 때면 묘해지는 분위기는, 서로 간의 간격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 넘고 싶을 만큼의 설레는 희망을 내게 주었다. 내가 손을 먼저 내밀고 난 뒤에도 머뭇거리던 너를 나는 낚아채 나와 그 고된 길을 걷게 했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이 흘렀고 우린 함께이지 않은 채로 함께이기로 약속했다.
흔한 장거리 커플들을 비웃으며 이정돈 돼야 장거리라고, 우린 특별하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괜시리 헛웃음이 나온다. 세상에 별다른 인연 없고, 별다른 사이 없다던 그말이 왜 다 지나고나니 뼈저리게 와닿는 걸까. 미리 알았다면 우리 관계에 그렇게까지 근거없는 희망을 품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무리 영원할거라 믿게 하는 것이 사랑이 가진 속임수고 속성이라지만, 어쩜 그리 아둔했던건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넌 반년만에 보여줬다. 우리의 어렸던 추억도, 길었던 시간도, 좋았던 날들조차도 결국 저 뻔한 문장에 다 부질없어져 버렸다. 만나질 못하니 온몸으론 느낄 수 없었지만, 가슴 저 깊숙히서부터 울려오던 그 불안감은, 그건 니 변화가 일으킨 내 마음의 파장이었다.
괜찮았다. 사람 사이란게 늘 좋을 수 만은 없는거니까. 이시간을 잘 견디고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지겠지. 우린 다른걸. 우린.. 우린 그래 우린 다르니까. 아니 우린 다르지 않았다 결국. 아니 적어도 너는 수많은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니가 흔한 남자라면 내가 더 흔하지 않은 여자가 되면 될 줄 알았다. 내가 더 이해하고 덜 조급해하면 될 줄 알았다. 마음이 변한 것이 하루에 수십번씩 느껴져도 당연하다 여겼다. 변해서 변한 티가 나는 걸 어쩌겠나. 자기도 나한테 얼마나 미안해 할까 생각했다. 그렇게 서운해도 서운하다 하지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했다. 새벽에 삼킨 사랑한다는 말이 아침엔 보고싶다는 말이 되어 턱 끝까지 차올라도, 혀를 깨물며 참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너에게 부담으로 얹혀져 돌아오는 니 걸음을 더디게 할까봐. 그렇게 나는 너에게서 받은 모든 상처를 유배시켰고, 오히려 니 걱정으로 그 허전함을 메웠다.
근데 나도 별로 특별한 여자는 아니더라.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 힘이 들더라. 너는 너에 대한 내 무력함을 무기삼아 나를 막대하고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악랄하지는 못한 사람이고, 우리의 거리가, 함께한 시간 덕에 나에게 연락이 소홀해 지기엔 이미 그것은 의무이자 습관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몇주 동안 때로는 새벽에, 때로는 학교에서, 때로는 늦은 밤에 문득 그렇게 한계를 느끼곤 했다. 여긴가, 여기가 끝인가, 정말 여기서 끝인건가 하고. 근데 또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난 이렇게 끝을 부정하고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너는, 지금쯤일까, 이쯤이면 끝일까, 이정도면 끝날까 하고있지 않을까. 이렇게 사귀면 둘다 행복하지 않을텐데, 내가 먼저 정리해주면 너라도 행복해지는 걸텐데. 그럼 나도 시간이 지나면 행복해 질텐데. 맞아 그때 정말 옳은 결정이었어 하며 무릎을 탁 칠 그런 날이 올텐데. 둘 중 한명이라도, 단 며칠이라도 조금이나마 먼저 행복할 수 있는, 홀가분해질 수 있는 이 방법이 최선이겠지. 그 한명이 꼭 나일 필요는 없겠지.
그 생각을 하고 나서도 며칠을 망설이던 내가 결국 헤어지자고 한 그 이유는, 더이상 나때문에는 웃지도 않는 전화 넘어의 니 침묵 때문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라더니. 이젠 나를 사랑하려면 너에겐 노력이 필요한 거였다. 난 아직 널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건데, 너에게는 애를 써야하는 문제가 되어버린 거였다. 난 그렇게 몇번의 침묵에서 니 대답을 읽어냈다.
사실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진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충분히 비참해질 수 있었고, 뭐 내 마음 자체는 이미 비참했었지만. 아무튼 매달릴 수 있었다. 거리에 제한이 있었겠지만, 방법은 많았을 거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았던 건, 그것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 느낌 때문에. 그런 모습마저 보이면 너한테 있어서 여자로서의 내 마지막은 그냥 그저 그렇게 구질스럽던, 지치게만 하던, 미련스러운 사람일까봐.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그렇게 된 걸, 그 관계를 그렇게까지 몰아간 데에 자책이라도 할까봐. 그래서 난 여자들의 눈물의 호소라는 흔한 비장의 카드도 꺼내 보일 수 없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웃음을 보이던 나에게 나만큼 자길 좋아해줄 여잔 없을 거라는 걸 안다던 너. 아니 넌 알지 못한다. 안다면 넌 내가 가라고 했을 때 그렇게 떠나버리지 못했어야 한다. 여자든 남자든 진정으로 상대방이 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사람이 등을 떠밀어도 떠나지 않아야 한다. 너와 내가 우리이던 그때에 니가 어떤 밤들을 어떤 생각들로 보냈는지 모르듯이, 너도 내가 어떤 것들을 보냈는지 모른다. 난 너에게 징징거리지 않는 선에서 나의 불안감, 초조함, 막막함을 가끔씩 털어놓았고 너는 믿으라는 한마디로 내 수많은 밤들을 잠재웠다. 그런데 너는, 너는 니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울타리에 뭘 그리 지키려하는지 몇년을 보아왔고 여자친구이기까지한 나마저도 그렇게 그 밖에 세워두었다. 그래서 난 사귀는 내내 그걸 허물기 위해 니 삶에서 내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너에게, 너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위로하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 다 챙기는 모든 기념일을 챙겨주지 못함에 항상 마음이 아팠다. 부족했던 거다. 내 노력이나 마음이 부족했던 걸 수 도있고, 나라는 여자가 너에겐 부족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넌 나쁘지 않다. 나쁜 놈이라고 쉬이 단정짓지 않겠다. 나쁜 놈이기엔 넌 나못지 않게 받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었고, 주는 것에 대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유도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저 너의 마음은, 딱 반년짜리였을 뿐인 거다. 난 딱 그만큼의 기간 동안만 널 동요시킬 수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었고 대단할 것도 없던 우리 둘이다. 그저 순간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를 과대포장 시켰던 것 뿐이었다. 그러니 널 좋아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니가 내 첫사랑이라 다행이었고, 다른 사람이 아닌 니가 날 상처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입모아 말하듯이 넌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고, 사랑을 받고 자라 고유의 빛이 나는 그런 사람이고, 날 순수하게 하는 남자였고, 변화가 사랑의 시작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니까. 그런 따듯한 너에게 받은 상처라 시리진 않으니 그걸로 됐다.
정말 가장 순수했을 때 만났던 너. 그리고 조금 더 성숙해져서 다시 만난 너. 나는 어쩌면 니가 데려오던 그 시절의 순수했던 내 모습을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앞에만 서면 재고 따지고 그런 걸 할 수도 없게 하던, 내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그런 과정들을 생략시켜 주는 너라서, 편해서 다시 사랑했던 걸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헤어진 지금까지도 난 널 사랑한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누구보다 진지했고 깊었고 진심이었지만 역시 이유는 불투명하다. 이유가 없는 사람. 누군가 나에게 니가 어떤사람이냐 묻는다면 난 그렇게 말하겠다. 이유가 없는 사람. 이유가 떠오를 새도 없이 나를 허물어 버리는 사람. 한가지 이유를 댈 틈도 주지 않고 새로운 열가지 이유를 매순간 매초마다 늘려버리는 사람.
그런 너라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나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기에 내가 널 놓친 줄 알았다.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하며 자책했고, 따끔하게 돌아온 정신차리라는 비난에도 난 끝까지 그렇게 믿었다. 근데 이젠 안다. 그때의 난 너에게 너를 놓칠 수 있는 주제도 못되었다는 걸. 넌 내가 간신히 놓지 않고 있던 손끝, 그마저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했다는 걸. 친구였고 한편이었고, 여자였던 내가 이젠 단순한 부담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는 걸.
괜찮다. 이젠 괜찮다. 내 마음빼곤 다 괜찮다. 한순간의 욱하는 마음만 참았다면 시작도 없었을 이 관계, 괜찮다. 니가 여전히 내 친구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괜찮다. 가끔씩 들려오는 니 안부에, 니 이름에 아직 조금은 동요하는 것도, 이젠 아프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친구들의 연애 상담에 너를 종종 예로 들며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조용히 웃으며 넘기는 대화도 괜찮다. 니가 괜찮은 것만큼 괜찮아 지려면 아직은 조금 더 있어야겠지만, 괜찮다. 시간은 더디다가도 야속하리만큼 빠르니까. 당장은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에 흔들리겠지만 돌아보면 이것도 꽤나 짧은 순간이었다는 걸 난 또 깨닫게 될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수고했다. 힘든 길 짧게나마 걸어줬던 그 시간도, 지쳤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주던 그 인내도,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헤어진 이후의 그 대처도, 다 니 나름의 노력이었겠지. 수고했다 정말. 많이 고마웠고. 그래. 지금처럼 잘 지내.
너도 나도 수고했다
시간의 단위라는게 이렇게까지 가혹한 줄은 몰랐다.
너와 나의 관계는 우리라는 사이는 언제가 시작이었고 어디가 끝이었을까.
처음 만난 비냄새가 나는 그곳에서 던져진 그 우스갯소리가 시작이었을까,
눈이 내리던 그곳에서 모든게 통하던 그 느낌이 시작이었을까.
넌 애들에게 들었던 거에 비해 나에게 첫인상이 좋진 않았으니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을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나눴던 대화 속에서 '아 이 아이구나' 한 적도 없으니 그때도 아니었을거야.
그냥 그 순수했던 시절, 너는 나의 습관같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옆에 서면 그 어리던 가슴이 떨리는 사람이 되어있었지.
그때 우리가, 우리 무리가 나눴던 우정은 꽤나 대단했었는지 난 결국 내 마음을 숨겼다.
그렇게 내 모든 생활을 등지고 난 이곳에 와버렸고, 넌 거기 남았지.
그리고 몇년만에 한 재회.
너는 딱 내가 변하지 않은 만큼 변하지 않았고, 나는 딱 니가 변한 만큼만 변해 있었다.
넌 여전히 나한텐 친구가 아닌 친구였다.
우리를 막는 것들은 정말 여러가지였다. 모든 것이 장애물이었고 모든 것이 난관이었다.
하지만 둘만 남게 될 때면 묘해지는 분위기는, 서로 간의 간격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 넘고 싶을 만큼의 설레는 희망을 내게 주었다.
내가 손을 먼저 내밀고 난 뒤에도 머뭇거리던 너를 나는 낚아채 나와 그 고된 길을 걷게 했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이 흘렀고 우린 함께이지 않은 채로 함께이기로 약속했다.
흔한 장거리 커플들을 비웃으며 이정돈 돼야 장거리라고, 우린 특별하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괜시리 헛웃음이 나온다.
세상에 별다른 인연 없고, 별다른 사이 없다던 그말이 왜 다 지나고나니 뼈저리게 와닿는 걸까.
미리 알았다면 우리 관계에 그렇게까지 근거없는 희망을 품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무리 영원할거라 믿게 하는 것이 사랑이 가진 속임수고 속성이라지만, 어쩜 그리 아둔했던건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넌 반년만에 보여줬다.
우리의 어렸던 추억도, 길었던 시간도, 좋았던 날들조차도
결국 저 뻔한 문장에 다 부질없어져 버렸다.
만나질 못하니 온몸으론 느낄 수 없었지만, 가슴 저 깊숙히서부터 울려오던 그 불안감은,
그건 니 변화가 일으킨 내 마음의 파장이었다.
괜찮았다. 사람 사이란게 늘 좋을 수 만은 없는거니까.
이시간을 잘 견디고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지겠지.
우린 다른걸. 우린.. 우린 그래 우린 다르니까.
아니 우린 다르지 않았다 결국. 아니 적어도 너는 수많은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니가 흔한 남자라면 내가 더 흔하지 않은 여자가 되면 될 줄 알았다.
내가 더 이해하고 덜 조급해하면 될 줄 알았다.
마음이 변한 것이 하루에 수십번씩 느껴져도 당연하다 여겼다.
변해서 변한 티가 나는 걸 어쩌겠나. 자기도 나한테 얼마나 미안해 할까 생각했다.
그렇게 서운해도 서운하다 하지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했다.
새벽에 삼킨 사랑한다는 말이 아침엔 보고싶다는 말이 되어 턱 끝까지 차올라도, 혀를 깨물며 참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너에게 부담으로 얹혀져 돌아오는 니 걸음을 더디게 할까봐.
그렇게 나는 너에게서 받은 모든 상처를 유배시켰고, 오히려 니 걱정으로 그 허전함을 메웠다.
근데 나도 별로 특별한 여자는 아니더라.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 힘이 들더라.
너는 너에 대한 내 무력함을 무기삼아 나를 막대하고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악랄하지는 못한 사람이고,
우리의 거리가, 함께한 시간 덕에 나에게 연락이 소홀해 지기엔 이미 그것은 의무이자 습관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몇주 동안 때로는 새벽에, 때로는 학교에서, 때로는 늦은 밤에 문득 그렇게 한계를 느끼곤 했다.
여긴가, 여기가 끝인가, 정말 여기서 끝인건가 하고.
근데 또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난 이렇게 끝을 부정하고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너는, 지금쯤일까, 이쯤이면 끝일까, 이정도면 끝날까 하고있지 않을까.
이렇게 사귀면 둘다 행복하지 않을텐데, 내가 먼저 정리해주면 너라도 행복해지는 걸텐데.
그럼 나도 시간이 지나면 행복해 질텐데. 맞아 그때 정말 옳은 결정이었어 하며 무릎을 탁 칠 그런 날이 올텐데.
둘 중 한명이라도, 단 며칠이라도 조금이나마 먼저 행복할 수 있는, 홀가분해질 수 있는 이 방법이 최선이겠지.
그 한명이 꼭 나일 필요는 없겠지.
그 생각을 하고 나서도 며칠을 망설이던 내가 결국 헤어지자고 한 그 이유는,
더이상 나때문에는 웃지도 않는 전화 넘어의 니 침묵 때문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라더니.
이젠 나를 사랑하려면 너에겐 노력이 필요한 거였다.
난 아직 널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건데, 너에게는 애를 써야하는 문제가 되어버린 거였다.
난 그렇게 몇번의 침묵에서 니 대답을 읽어냈다.
사실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진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충분히 비참해질 수 있었고, 뭐 내 마음 자체는 이미 비참했었지만.
아무튼 매달릴 수 있었다. 거리에 제한이 있었겠지만, 방법은 많았을 거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았던 건, 그것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 느낌 때문에.
그런 모습마저 보이면 너한테 있어서 여자로서의 내 마지막은 그냥 그저 그렇게 구질스럽던, 지치게만 하던, 미련스러운 사람일까봐.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그렇게 된 걸, 그 관계를 그렇게까지 몰아간 데에 자책이라도 할까봐.
그래서 난 여자들의 눈물의 호소라는 흔한 비장의 카드도 꺼내 보일 수 없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웃음을 보이던 나에게 나만큼 자길 좋아해줄 여잔 없을 거라는 걸 안다던 너.
아니 넌 알지 못한다. 안다면 넌 내가 가라고 했을 때 그렇게 떠나버리지 못했어야 한다.
여자든 남자든 진정으로 상대방이 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사람이 등을 떠밀어도 떠나지 않아야 한다.
너와 내가 우리이던 그때에 니가 어떤 밤들을 어떤 생각들로 보냈는지 모르듯이, 너도 내가 어떤 것들을 보냈는지 모른다.
난 너에게 징징거리지 않는 선에서 나의 불안감, 초조함, 막막함을 가끔씩 털어놓았고 너는 믿으라는 한마디로 내 수많은 밤들을 잠재웠다.
그런데 너는, 너는 니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울타리에 뭘 그리 지키려하는지 몇년을 보아왔고 여자친구이기까지한 나마저도 그렇게 그 밖에 세워두었다.
그래서 난 사귀는 내내 그걸 허물기 위해 니 삶에서 내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너에게, 너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위로하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 다 챙기는 모든 기념일을 챙겨주지 못함에 항상 마음이 아팠다.
부족했던 거다. 내 노력이나 마음이 부족했던 걸 수 도있고, 나라는 여자가 너에겐 부족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넌 나쁘지 않다. 나쁜 놈이라고 쉬이 단정짓지 않겠다.
나쁜 놈이기엔 넌 나못지 않게 받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었고, 주는 것에 대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유도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저 너의 마음은, 딱 반년짜리였을 뿐인 거다. 난 딱 그만큼의 기간 동안만 널 동요시킬 수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었고 대단할 것도 없던 우리 둘이다.
그저 순간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를 과대포장 시켰던 것 뿐이었다.
그러니 널 좋아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니가 내 첫사랑이라 다행이었고, 다른 사람이 아닌 니가 날 상처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입모아 말하듯이 넌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고, 사랑을 받고 자라 고유의 빛이 나는 그런 사람이고,
날 순수하게 하는 남자였고, 변화가 사랑의 시작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니까.
그런 따듯한 너에게 받은 상처라 시리진 않으니 그걸로 됐다.
정말 가장 순수했을 때 만났던 너. 그리고 조금 더 성숙해져서 다시 만난 너.
나는 어쩌면 니가 데려오던 그 시절의 순수했던 내 모습을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앞에만 서면 재고 따지고 그런 걸 할 수도 없게 하던,
내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그런 과정들을 생략시켜 주는 너라서,
편해서 다시 사랑했던 걸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헤어진 지금까지도 난 널 사랑한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누구보다 진지했고 깊었고 진심이었지만 역시 이유는 불투명하다.
이유가 없는 사람.
누군가 나에게 니가 어떤사람이냐 묻는다면 난 그렇게 말하겠다.
이유가 없는 사람. 이유가 떠오를 새도 없이 나를 허물어 버리는 사람.
한가지 이유를 댈 틈도 주지 않고 새로운 열가지 이유를 매순간 매초마다 늘려버리는 사람.
그런 너라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나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기에 내가 널 놓친 줄 알았다.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하며 자책했고, 따끔하게 돌아온 정신차리라는 비난에도 난 끝까지 그렇게 믿었다.
근데 이젠 안다. 그때의 난 너에게 너를 놓칠 수 있는 주제도 못되었다는 걸.
넌 내가 간신히 놓지 않고 있던 손끝, 그마저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했다는 걸.
친구였고 한편이었고, 여자였던 내가 이젠 단순한 부담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는 걸.
괜찮다. 이젠 괜찮다. 내 마음빼곤 다 괜찮다.
한순간의 욱하는 마음만 참았다면 시작도 없었을 이 관계, 괜찮다.
니가 여전히 내 친구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괜찮다.
가끔씩 들려오는 니 안부에, 니 이름에 아직 조금은 동요하는 것도, 이젠 아프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친구들의 연애 상담에 너를 종종 예로 들며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조용히 웃으며 넘기는 대화도 괜찮다.
니가 괜찮은 것만큼 괜찮아 지려면 아직은 조금 더 있어야겠지만, 괜찮다.
시간은 더디다가도 야속하리만큼 빠르니까.
당장은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에 흔들리겠지만 돌아보면 이것도 꽤나 짧은 순간이었다는 걸 난 또 깨닫게 될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수고했다.
힘든 길 짧게나마 걸어줬던 그 시간도,
지쳤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주던 그 인내도,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헤어진 이후의 그 대처도,
다 니 나름의 노력이었겠지.
수고했다 정말.
많이 고마웠고.
그래. 지금처럼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