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학회 교학, 호렌초(法蓮抄)에서 배운다 극악을 책하는 신심에 대복덕이 악왕(惡王)이 있어 법화경을 멸실(滅失)한다면 신명(身命)을 버릴지라도 따르지 말지니라. 지계정진(持戒精進)의 대승(大僧)들이 법화경을 홍통하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멸실하거든 이를 알아서 책(責)할지어다. 법화경에 가로되 “나는 신명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아끼나이다” 운운(云云). 이번 달에 배독하는 어서(御書)는 1275년(건치 원년)에 쓰셔서 소야 교신(曾谷敎信)에게 주셨습니다. 대고중(對告衆)인 소야 교신은 지로입도(二郞入道), 교신고보(敎信御房)라고도 하며 시모우사구니(下總國 현재 지바현)에 살았고, 입도(入道)해서 호렌니치레이(法蓮日禮)라는 법호(法號)를 니치렌(日蓮)대성인으로부터 받았다. 이 〈호렌초(法蓮抄)〉외에도 여러 편의 어서(御書)를 하사 받았는데 경지(境智)의 이법(二法)이라든가 총별(總別)의 이의(二義)등 중요한 법문(法門)이 설해져 있으며 지식, 교양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본초(本抄)에서 대성인(大聖人)은 법화경의 문자 하나하나는 모두 생신(生身)의 부처이고, 법화경에 의한 추선공양(追善供養)이야말로 진실한 효양(孝養)이라는 것, 또한 대성인께서 당하신 수많은 난(難)을 드시며 대성인이야말로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이시라는 것을 밝히시고 있다. 이번 호의 배독 범위는 법화경 수행의 여러 상(相)을 나타내신 부분이다. 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사람과의 투쟁 대성인(大聖人)은 “불법을 기하려는 자는 시(時)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풀이해서 가르치시고 있다. 본초(本抄)는 일흉(一凶)과 싸우고, 인간주의(人間主義)의 시대라고 하는 희망찬 신세기(新世紀)를 구축(構築)하고자 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지금을 위해서 써 남기신 어서(御書)라고 생각한다. 말법(末法)인 현대에 있어서 정법(正法)을 지키고 홍교(弘敎)해 가기 위해서는 ‘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자’ 즉 횡포(橫暴)부리는 권위, 권력과의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본초(本抄)에서 말씀하시는 ‘악왕(惡王)’이란 ‘속(俗)’의 권력을 말하는 것이고, ‘지계정진(持戒精進)의 대승(大僧)’이란, ‘성(聖)’의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민중을 내려다보고 이용(利用)하는 권력자라든가 그러한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권위, 권세를 구하는 성직자(聖職者)등, 인간을 경멸(輕蔑)하고 천시(賤視)하는 도배(徒輩)들이다. 법화경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설해 밝힌 가르침이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서민이 자연스런 모습과 입장에서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사회를 이룩해 내는 것이 광선유포의 목적이다. 그 어떤 특별한 존재라든가 그런 개재(介在)가 없으면 성불(成佛)할 수 없다고 하는 닛켄종(日顯宗)의 본질(本質)은 그야말로 법화경을 홍통시키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멸실(滅失)하면 법화경의 원적(怨敵) 바로 그것인 것이다. 법화경은 현존하고 있는 이 현실사회야말로 불국토(佛國土)라고 설한다. 결코 어디 다른 곳에 낙토(樂土)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일상 생활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고 나타내는 것이 법화경의 삶의 기본자세인 것이다. 출가(出家)라는 권위를 앞세워 신도를 이용물로 해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 한없이 수탈(收奪)을 일삼는 것이 닛켄종(日顯宗)이다. 승려(僧侶)가 기원(祈願)하지 않으면 성불(成佛)할 수 없다든가 승려와 신도(信徒)의 제목에는 차이가 있다는 등, 터무니없고 당치않은 망언(妄言)을 하고있다. 이 닛켄종(日顯宗)을 타파하는 것은 잘못된 종교관(宗敎觀)을 타파하는 것이며, 정신풍토를 대변혁시키는 운동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본초(本抄)에서 말씀하시는 “이를 알아서 책(責)할 지어다”라는 말씀의 실천(實踐)인 것이다. 광선유포를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행동을 일찍이 종문문제가 심각할 때, 어느 종교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것은 ‘종교란 인간의 생명속에 살고 있는 것이며 사원(寺院)이나 승려 등의 형식(形式)에 있는 것은 아니다. 창가학회의 회원의 강성한 신심을 관철시켜 갈 수 있는 것은 창가학회(創價學會)라고 하는 인간공화(人間共和)의 세계가 있고, 이케다(池田)SGI회장을 비롯해 동지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원(寺院)이나 승려의 존재는 창가학회 회원의 신앙이 성립함에 있어서 결코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라고. 계율(戒律)이나 사회적인 지위 등 외견적(外見的)인 요소가 법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을 아끼는 마음’이 강성한가 어떤가 라는 것이다. 대성인(大聖人)은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아끼노라”(법화경 443쪽)는 법화경 권지품(勸持品) 제13의 일절(一節)을 인용(引用)하시고 있다. 이것은 법(法)을 지키고 넓히는 것이 모든 가치(價値)에 우선(優先)하고 여기에 인생을 거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이라고 배견된다.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고 해도 결코 목숨을 가벼이 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하루 24시간 중에서 살기 위해서 일하는 시간도 있으려니와 생활을 위해 필요한 시간도 있다. 그 중에서 창가학회를 위해, 법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쓴다-. 이것이 불법을 아끼는 ‘아불애신명(我不愛身命)’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와의 불법대화도 가정방문이나 동지를 격려하는 일 등도 모두 ‘광선유포를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행동하면 불석신명에 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역대(歷代) 회장(會長)의 결사적인 지도 아래, 열성적인 동지의 힘으로 창가학회 SGI(국제창가학회)는 전세계에 희망의 불법을 넓히고 전해가고 있다. 생신(生身)의 창가학회의 서민군상(庶民群像)이 현실의 괴로움에 고통받으면서도 자신의 경애(境涯)혁명에 도전해 가면서 자타(自他) 모두의 행복경애 확립을 위해 홍교(弘敎)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일은 인류사(人類史)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무상도(無上道)’의 실천인 것이다.
창가학회 교학, 호렌초(法蓮抄)에서 배운다
창가학회 교학, 호렌초(法蓮抄)에서 배운다
극악을 책하는 신심에 대복덕이
악왕(惡王)이 있어 법화경을 멸실(滅失)한다면
신명(身命)을 버릴지라도 따르지 말지니라.
지계정진(持戒精進)의 대승(大僧)들이 법화경을
홍통하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멸실하거든
이를 알아서 책(責)할지어다.
법화경에 가로되 “나는 신명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아끼나이다”
운운(云云).
이번 달에 배독하는 어서(御書)는 1275년(건치 원년)에 쓰셔서
소야 교신(曾谷敎信)에게 주셨습니다.
대고중(對告衆)인 소야 교신은 지로입도(二郞入道),
교신고보(敎信御房)라고도 하며 시모우사구니(下總國 현재 지바현)에
살았고, 입도(入道)해서 호렌니치레이(法蓮日禮)라는
법호(法號)를 니치렌(日蓮)대성인으로부터 받았다.
이 〈호렌초(法蓮抄)〉외에도 여러 편의 어서(御書)를
하사 받았는데 경지(境智)의 이법(二法)이라든가 총별(總別)의
이의(二義)등 중요한 법문(法門)이 설해져 있으며 지식,
교양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본초(本抄)에서 대성인(大聖人)은 법화경의 문자
하나하나는 모두 생신(生身)의 부처이고, 법화경에 의한
추선공양(追善供養)이야말로 진실한 효양(孝養)이라는 것,
또한 대성인께서 당하신 수많은 난(難)을 드시며 대성인이야말로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이시라는 것을 밝히시고 있다.
이번 호의 배독 범위는 법화경 수행의 여러 상(相)을 나타내신 부분이다.
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사람과의 투쟁
대성인(大聖人)은 “불법을 기하려는 자는 시(時)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풀이해서 가르치시고 있다.
본초(本抄)는 일흉(一凶)과 싸우고, 인간주의(人間主義)의
시대라고 하는 희망찬 신세기(新世紀)를 구축(構築)하고자 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지금을 위해서 써 남기신 어서(御書)라고 생각한다.
말법(末法)인 현대에 있어서 정법(正法)을 지키고
홍교(弘敎)해 가기 위해서는 ‘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자’ 즉 횡포(橫暴)부리는
권위, 권력과의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본초(本抄)에서 말씀하시는 ‘악왕(惡王)’이란
‘속(俗)’의 권력을 말하는 것이고, ‘지계정진(持戒精進)의 대승(大僧)’이란,
‘성(聖)’의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민중을 내려다보고 이용(利用)하는 권력자라든가 그러한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권위, 권세를 구하는 성직자(聖職者)등,
인간을 경멸(輕蔑)하고 천시(賤視)하는 도배(徒輩)들이다.
법화경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설해 밝힌 가르침이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서민이 자연스런 모습과 입장에서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사회를 이룩해 내는 것이 광선유포의 목적이다.
그 어떤 특별한 존재라든가 그런 개재(介在)가 없으면
성불(成佛)할 수 없다고 하는 닛켄종(日顯宗)의 본질(本質)은
그야말로 법화경을 홍통시키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멸실(滅失)하면 법화경의 원적(怨敵) 바로 그것인 것이다.
법화경은 현존하고 있는 이 현실사회야말로
불국토(佛國土)라고 설한다. 결코 어디 다른 곳에 낙토(樂土)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일상 생활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고 나타내는 것이 법화경의 삶의 기본자세인 것이다.
출가(出家)라는 권위를 앞세워 신도를
이용물로 해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 한없이 수탈(收奪)을
일삼는 것이 닛켄종(日顯宗)이다.
승려(僧侶)가 기원(祈願)하지 않으면 성불(成佛)할
수 없다든가 승려와 신도(信徒)의 제목에는 차이가 있다는 등,
터무니없고 당치않은 망언(妄言)을 하고있다.
이 닛켄종(日顯宗)을 타파하는 것은 잘못된
종교관(宗敎觀)을 타파하는 것이며, 정신풍토를 대변혁시키는
운동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본초(本抄)에서 말씀하시는 “이를 알아서 책(責)할 지어다”라는
말씀의 실천(實踐)인 것이다.
광선유포를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행동을
일찍이 종문문제가 심각할 때, 어느 종교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것은 ‘종교란 인간의 생명속에 살고 있는 것이며
사원(寺院)이나 승려 등의 형식(形式)에 있는 것은 아니다.
창가학회의 회원의 강성한 신심을 관철시켜
갈 수 있는 것은 창가학회(創價學會)라고 하는 인간공화(人間共和)의
세계가 있고, 이케다(池田)SGI회장을 비롯해 동지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원(寺院)이나 승려의 존재는 창가학회 회원의
신앙이 성립함에 있어서 결코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라고.
계율(戒律)이나 사회적인 지위 등 외견적(外見的)인
요소가 법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을 아끼는 마음’이
강성한가 어떤가 라는 것이다.
대성인(大聖人)은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아끼노라”(법화경 443쪽)는 법화경
권지품(勸持品) 제13의 일절(一節)을 인용(引用)하시고 있다.
이것은 법(法)을 지키고 넓히는 것이 모든 가치(價値)에
우선(優先)하고 여기에 인생을 거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이라고 배견된다.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고 해도
결코 목숨을 가벼이 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하루 24시간 중에서 살기 위해서
일하는 시간도 있으려니와 생활을 위해 필요한 시간도 있다.
그 중에서 창가학회를 위해, 법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쓴다-.
이것이 불법을 아끼는 ‘아불애신명(我不愛身命)’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와의 불법대화도 가정방문이나
동지를 격려하는 일 등도 모두 ‘광선유포를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행동하면 불석신명에 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역대(歷代) 회장(會長)의 결사적인 지도 아래,
열성적인 동지의 힘으로 창가학회 SGI(국제창가학회)는
전세계에 희망의 불법을 넓히고 전해가고 있다.
생신(生身)의 창가학회의 서민군상(庶民群像)이
현실의 괴로움에 고통받으면서도 자신의 경애(境涯)혁명에
도전해 가면서 자타(自他) 모두의 행복경애 확립을
위해 홍교(弘敎)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일은 인류사(人類史)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무상도(無上道)’의 실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