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의 가치에 대해 고민했던 어느 황제 이야기

콜로라도201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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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희 20년, 그는 법률 집행 기관에서 올린 상소를 통해, 사형이 너무 많이 행하여진다는 것을 알고 형부와 대리사, 도찰원의 관리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도덕으로서 백성을 감화시켜야 하며, 형벌로써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형벌은 경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대들이 공정하게 법률을 집행해야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이 무지몽매하여 법을 어기고 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을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교육을 잘 받지 못하였을 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생활이 궁핍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습관이 되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모든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중략)

"짐은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살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형부에서 판결기록을 올릴 때마다 짐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죄인을 살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지 찾아보고 있다. 죄인이 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즉각 처형하기보다는 감옥에 가둬 놓고 이듬해에 다시 관찰해보도록 하자."


"하지만 죄인들은 자신들이 곧장 처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지만, 감옥 안에서 몇달을 지내다보면 개과천선을 하고 싶어도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짐은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불쌍하게 여긴다."

2.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형부에 명하여 유배를 보내는 시기를 바꾸도록 하였다.


"10월에서 1월까지는 겨울이다. 그리고 유배되는 죄수들은 몹시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 그러니 대단히 추울 것인데, 그들이 죄를 짓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길에서 얼어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몹시 불쌍하니 앞으로 10월에서 1월까지는 죄수들을 유배지로 보내지 말며, 한여름인 6월에도 마찬가지다."

3.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 동북 지역에 있는 선조의 능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유배된 죄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놀란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짐은 이제껏 영고탑과 오라의 죄수들이 이토록 고초를 겪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돈도 능력도 없다. 게다가 남방 출신인 그들은 약한 몸으로 이렇게 추운 곳에 끌려와, 고향과는 전혀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로 측은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비록 스스로 지은 죄값을 치르고 있다곤 하나, 요양과 같은 지역으로 유배된 것만으로도 능히 대가는 치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어 생계를 꾸리도록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라."

4. 어사 황경기가 팔기 소속의 노비들 가운데서는 자결하는 자가 많다고 하자, 강희제는 노비 박해를 금지시켰다. 같은 해 6월, 그는 팔기의 포의좌령 소속 노비들이 주인이나 남편이 죽으면 순장되는 악습을 금지시켰다. 1688년 예부에서 관례에 따라 선서성의 열부 형씨 등이 남편이 죽자 함께 순장되었다며 상과 표창을 내려 달라고 상소를 올리자, 강희제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죽는다고 따라 죽는것은 이전에 금지시킨 일이다. 근래에도 각지에서 순장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람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미 남편이 죽은 것만으로도 불쌍한 일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또 목숨을 버린다는 말인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남편이 죽었다고 따라 죽는것은 황당무계한 일이다. 그들에게 표창을 내린다면, 앞으로 더 순장을 성행시키라고 상을 내리는 일 아닌가?

5.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있을때, 팔기 관병들은 한족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는 일을 빈번하게 자행했다. 정남왕 경정충의 부대에서 청나라군에게 자식을 빼앗긴 사람만 해도 절강 출신이 500명, 강서 출신 500명으로 총 1천명에 달할 정도였다. 강희제는 지방 총병과 장수들이 민간인들의 재물과 자식을 뺏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희제는 장군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관직을 빼앗고, 패륵이라면 종인부에 넘겨 죄를 처벌하도록 했다.

(중략)

…… 대만의 정씨 왕조 때문에 북건 지역에서는 해안가에 경계선을 긋고 경계선 밖에 사는 백성들을 모두 경계선 안쪽으로 이주시킨 후, 경계선 밖과의 왕래를 완전히 끊도록 했다. 이로 인해 수천리에 달하는 해안에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내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가 만주족 관리들에게 잡혀 노비로 전락했다.


총독 요계성은 팔기병의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팔기병은 팔기병 대로 '거액의 몸값을 받아야만' 노비를 풀어 주엤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20만 냥이라는 거금이 팔기병에게 제공된 끝에, 무려 2만여명이나 되는 노비들이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갔다.

 

청나라 4대황제 강희제(제위: 1661~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