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조선에 파견된 천주교신부이자 선교사이자 친일파. 1881년에 조선에 와서 선교에 힘쓰다가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5년 후인 1890년에 제 7대 조선 교구장인 장 블랑 주교가 선종(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발을 디딘다. 이후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하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조선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자료를 수집했는데 특히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받는다.
......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그의 실체는 한국인은 물론 그 실체를 알고 상식이 있는 천주교 신자 입장에서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사상 최악의 흑역사인 인물. 교세 확장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친일부역하면서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조선을 깔보고 폄훼하면서 인종차별의식까지 가졌을 뿐 아니라 교회법까지 무시하며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미개한 조선민족은 그나마 우수한 일본민족의 지배를 받는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며 특히 데라우치를 암살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온 안명근 의사(안중근 의사의 친척동생)를 밀고하여 데라우치 의 칭찬을 받아 천주교의 교세확장에 이용했다.
1.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안중근 의사는 집안이 천주교였다. 이것은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인데 안중근도 19살 때 부친의 권유에 따라 영세를 받았다.이 때 영세를 준 이가 프랑스 신부 빌렘이었다.이후 안중근은 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빌렘 신부의 복사일도 맡아보면서 성당을 건립하는데도 집안의 힘을 보탰다. 이런 인연으로 안중근은 물론 집안 전체가 조선 대교구장인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빌렘 신부의 상관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안중근이 일제의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자, 처형 전에 고해성사를 받기를 원했다. 일본인 관리도 이에 동의하였기에 안중근의 동생과 사촌이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집전을 요청했으나 뮈텔은 안중근 의사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에 사촌 안명근이 뮈텔을 찾아와 다시 부탁했으나 그걸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기에는 그가 아주 무례했다면서 비난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뮈텔이 고해성사를 거부한 것에는 일제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는 것이다.게다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하더라도 조건을 내걸면서 종부성사나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리는 물론 교회법으로도 잘못된 행위이며 주교에게 그럴 종교적 권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정치적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성사를 주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었던 빌렘 신부가 뮈텔의 금지령을 어기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귀국도 하기 전에 정치적인 일에 관여했다면서 2개월간 성사를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이에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를 거쳐 교황청의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신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성사금지령을 해제했다.또한 당시 빌렘 신부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뮈텔이 교회법과 교리에 어긋나고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뮈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더 나아가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한 후 자신의 일기에, "일본인들이 토마스(안중근 의사의 세례명)의 시체를 유가족에게 넘기고 싶어하지 않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어 후일 김수한 추기경이 이 일은 천주교의 잘못이며 수치다 라고 공개사죄하였다.
2. 대학설립 방해 ¶
안중근 의사는 특히 대학을 설립하여 민중의 교육수준을 높이려고 했는데 뮈텔과 그를 추종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 계획을 반대했다. 이유는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진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에게 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뮈텔의 사고방식에 큰 충격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후 외국인을 믿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었으며 주변에도 외국어를 익히면 외세의 종이 되기 쉽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는데 믿었던 주교에게 배신당한 안중근 의사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3. 독립운동 밀고와 친일의 길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모두 주었던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후, 그 사촌이던 안명근 의사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와 관련이 있었고 당시 일본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서 이 계획을 털어놓았다. 빌렘 신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것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이 말을 전해들은 뮈텔은 당시 날씨가 매우 안 좋았는데도 서둘러서 일본 헌병대에 밀고했다. 이 날이 1911년 1월 11일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 결과 국사책에도 나오는 105인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회는 일망타진당하고 말았다. 이때, 수사와 관련해서 뮈텔과 헌병대는 긴밀하게 의논하며 협조했다는 사실이 뮈텔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대가로 일본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명동성당의 진입로를 넓히고, 총독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더불어 조선왕조가 작성, 관리하던 공문서와 실록등 온갖 기록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게 해주고 희귀문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주는 등 갖은 편의를 다 봐주었다
4. 3.1운동의 방해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천주교 신학생들도 이에 가담하려고 했다.이에 대해 뮈텔은,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묘사했다.이처럼 뮈텔은 동족의 고통에 울면서 애타하는 신학생들을 무서운 폭도처럼 묘사하고 독립군들을 산적과 강도라고 주장하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신학생들은 퇴학시켰다.
5. 인종차별
조선인의 교육을 방해하고 우매하게 만들어 가톨릭 교리만 가르치려고 노력하던 뮈텔은 조선을 미개한 국가로 여겼다. 이런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신부가 한국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조선인의 눈에 한 유럽인이 조선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처럼 보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면서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의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뮈텔의 지침 때문인지 외국인 선교사들은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조선 관아에 난입해 죄수를 마음대로 데리고 나가고 건물을 부수거나 신자들을 거느리고 비신자나 관리들을 폭행하며 타 종교의 상징물을 부수는 등의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았다. 게다가 같은 천주교 신부라도 조선인이면 같은 사제라고 여기지 않았고 조선인 신자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뮈텔 주교와 외국인 신부들의 행태에 대해 당시 조선인 신부였던 김명제 베드로 신부가 "왜 우리들을 막 대하는가?!" 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사실 이런 문제는 천주교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개신교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장로교 조선인 목사들이 선교사들이 자신들을 하등인종대하듯이 한다고 항의한 일도 있었고 구세군은 인종차별 문제로 분규를 겪기도 했다
6. 평가
온갖 막장행태를 보였는데도 한동안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그가 남긴 일기가 번역되고 다른 사료들이 발굴,연구되어 그가 저지른 만행과 그릇된 사고방식이 밝혀지면서 비난받고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가 저지른 행동은 단순히 한국인의 관점만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매우 잘못된 점이 많은데다 그의 적극적인 친일행각과 조선민중에 대한 무시가 1920년대 천주교의 성장을 정체시켰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는 근래 들어서는 천주교에서도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또한 천주교 주도로 그의 일기가 번역,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뮈텔의 실체를 일반 신도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그와 관련된 사적지를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신도들에게 세뇌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사나 한국 근대사를 잘 모르는 신도들의 경우에는 그저 위대한 선각자로 착각할 우려가 큰 대목이다.2011년도에는 그와 관련된 심포지움도 개최되어 여러 사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었다.또한 그가 수십년에 걸쳐서 남긴 일기는 구한말~일제시대의 한국 천주교사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리그베다 위키
천주교의 흑역사였던 한 신부이야기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민덕효)
프랑스에서 조선에 파견된 천주교 신부이자 선교사이자 친일파. 1881년에 조선에 와서 선교에 힘쓰다가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5년 후인 1890년에 제 7대 조선 교구장인 장 블랑 주교가 선종(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발을 디딘다. 이후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하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조선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자료를 수집했는데 특히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받는다.
......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그의 실체는 한국인은 물론 그 실체를 알고 상식이 있는 천주교 신자 입장에서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사상 최악의 흑역사인 인물. 교세 확장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친일부역하면서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조선을 깔보고 폄훼하면서 인종차별 의식까지 가졌을 뿐 아니라 교회법까지 무시하며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미개한 조선민족은 그나마 우수한 일본민족의 지배를 받는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며 특히 데라우치를 암살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온 안명근 의사(안중근 의사의 친척동생)를 밀고하여 데라우치 의 칭찬을 받아 천주교의 교세확장에 이용했다. 1.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 안중근 의사는 집안이 천주교였다. 이것은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인데 안중근도 19살 때 부친의 권유에 따라 영세를 받았다.이 때 영세를 준 이가 프랑스 신부 빌렘이었다.이후 안중근은 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빌렘 신부의 복사일도 맡아보면서 성당을 건립하는데도 집안의 힘을 보탰다. 이런 인연으로 안중근은 물론 집안 전체가 조선 대교구장인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빌렘 신부의 상관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안중근이 일제의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자, 처형 전에 고해성사를 받기를 원했다. 일본인 관리도 이에 동의하였기에 안중근의 동생과 사촌이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집전을 요청했으나 뮈텔은 안중근 의사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에 사촌 안명근이 뮈텔을 찾아와 다시 부탁했으나 그걸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기에는 그가 아주 무례했다면서 비난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뮈텔이 고해성사를 거부한 것에는 일제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는 것이다.게다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하더라도 조건을 내걸면서 종부성사나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리는 물론 교회법으로도 잘못된 행위이며 주교에게 그럴 종교적 권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정치적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성사를 주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었던 빌렘 신부가 뮈텔의 금지령을 어기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귀국도 하기 전에 정치적인 일에 관여했다면서 2개월간 성사를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이에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를 거쳐 교황청의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신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성사금지령을 해제했다.또한 당시 빌렘 신부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뮈텔이 교회법과 교리에 어긋나고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뮈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더 나아가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한 후 자신의 일기에, "일본인들이 토마스(안중근 의사의 세례명)의 시체를 유가족에게 넘기고 싶어하지 않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어 후일 김수한 추기경이 이 일은 천주교의 잘못이며 수치다 라고 공개사죄하였다. 2. 대학설립 방해 ¶ 안중근 의사는 특히 대학을 설립하여 민중의 교육수준을 높이려고 했는데 뮈텔과 그를 추종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 계획을 반대했다. 이유는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진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에게 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뮈텔의 사고방식에 큰 충격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후 외국인을 믿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었으며 주변에도 외국어를 익히면 외세의 종이 되기 쉽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는데 믿었던 주교에게 배신당한 안중근 의사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3. 독립운동 밀고와 친일의 길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모두 주었던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후, 그 사촌이던 안명근 의사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와 관련이 있었고 당시 일본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서 이 계획을 털어놓았다. 빌렘 신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것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이 말을 전해들은 뮈텔은 당시 날씨가 매우 안 좋았는데도 서둘러서 일본 헌병대에 밀고했다. 이 날이 1911년 1월 11일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 결과 국사책에도 나오는 105인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회는 일망타진당하고 말았다. 이때, 수사와 관련해서 뮈텔과 헌병대는 긴밀하게 의논하며 협조했다는 사실이 뮈텔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대가로 일본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명동성당의 진입로를 넓히고, 총독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더불어 조선왕조가 작성, 관리하던 공문서와 실록등 온갖 기록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게 해주고 희귀문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주는 등 갖은 편의를 다 봐주었다 4. 3.1운동의 방해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천주교 신학생들도 이에 가담하려고 했다.이에 대해 뮈텔은,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묘사했다.이처럼 뮈텔은 동족의 고통에 울면서 애타하는 신학생들을 무서운 폭도처럼 묘사하고 독립군들을 산적과 강도라고 주장하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신학생들은 퇴학시켰다.
5. 인종차별 조선인의 교육을 방해하고 우매하게 만들어 가톨릭 교리만 가르치려고 노력하던 뮈텔은 조선을 미개한 국가로 여겼다. 이런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 신부가 한국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조선인의 눈에 한 유럽인이 조선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처럼 보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면서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의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뮈텔의 지침 때문인지 외국인 선교사들은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조선 관아에 난입해 죄수를 마음대로 데리고 나가고 건물을 부수거나 신자들을 거느리고 비신자나 관리들을 폭행하며 타 종교의 상징물을 부수는 등의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았다. 게다가 같은 천주교 신부라도 조선인이면 같은 사제라고 여기지 않았고 조선인 신자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뮈텔 주교와 외국인 신부들의 행태에 대해 당시 조선인 신부였던 김명제 베드로 신부가 "왜 우리들을 막 대하는가?!" 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사실 이런 문제는 천주교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개신교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장로교 조선인 목사들이 선교사들이 자신들을 하등인종대하듯이 한다고 항의한 일도 있었고 구세군은 인종차별 문제로 분규를 겪기도 했다
6. 평가 온갖 막장행태를 보였는데도 한동안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그가 남긴 일기가 번역되고 다른 사료들이 발굴,연구되어 그가 저지른 만행과 그릇된 사고방식이 밝혀지면서 비난받고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가 저지른 행동은 단순히 한국인의 관점만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매우 잘못된 점이 많은데다 그의 적극적인 친일행각과 조선민중에 대한 무시가 1920년대 천주교의 성장을 정체시켰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는 근래 들어서는 천주교에서도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또한 천주교 주도로 그의 일기가 번역,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뮈텔의 실체를 일반 신도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그와 관련된 사적지를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신도들에게 세뇌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사나 한국 근대사를 잘 모르는 신도들의 경우에는 그저 위대한 선각자로 착각할 우려가 큰 대목이다.2011년도에는 그와 관련된 심포지움도 개최되어 여러 사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었다.또한 그가 수십년에 걸쳐서 남긴 일기는 구한말~일제시대의 한국 천주교사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리그베다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