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공미니 ( http://www.gongmini.com/gongpo/618681 )도조 히데키(1884- 1948) 일본 군인.군국주의자. 아시아의 히틀러.아버지도 군인이었던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3남으로 출생 10명의 형제중에 세번째였다.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관동군 헌병사령관을 하면서 승진하기 시작했다. 참모장,육군차관,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 가서 군인 신분으로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로 자신이 마음대로 총리에 문부장관,상공장관,군수장관을 겸직하면서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사진에 찍힌 왼쪽 가슴에 치렁치렁 매달린 도조 히데키의 무거운 훈장이 현재북한군 장군들의 어리석은 모습과 닮았다. 2년 9개월간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간 전쟁 최고 책임자로 그의 별명은 속전속결로 일처리를 하는 '면도날'이었다. 중국침략으로 하남성에서만 400만명을 죽였는가하면 진주만 공격과태평양전쟁을 일으켜 1200만명을 죽게한 전쟁 범죄자였다. 일제시대 한국에서도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 실시해 수 많은 남자들은 전쟁터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게 했으며젊은 여성들은 전선으로 끌고가서 위안부로 학대,영혼을 짓밟아 처참한 삶을 살게 했다. 그는 일본천황을 들먹이면서 전쟁터에 나가는 모든 일본 병사들에게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戰陳訓)'까지만든 인물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3 아들들에게는 전쟁터에 보내지 않고 자신의 범죄도 자각하지 못하고목숨을 어떻게든지 구걸해보려고 처신한 인물이기도 했다.병사들 앞에서는 냉혹한 인물이면서도 천황 앞에서는 겸손의 화신처럼 행동한 이중인격자였다. 장남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안전한 만주 풍만발전소로 보냈고차남은 미쓰비시 공업에서 자동차 사장을 지냈으며3남은 육사를 들어 갔지만 졸업은 못하고 항공자위대에서 소장계급까지 진급만 했다. 수 만명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희생됐지만끝까지 전선에 보내지 않아 원성을 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맥아더장군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자식을 전쟁에 잃은 일본 시민들은 뻔뻔하게 살아있는 도조 히데키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너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 할복해서 국민에게 사죄하라''빨리 자결하라'는 수만장의 투서가 집으로 날라 왔지만전쟁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만은 어떻게 지켜 보려고눈치만 살피는 죄의식이 없는 소심한 군인이었다. 무소리니가 시민들로 부터 맞아서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사진이 보도될때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동경전범재판에 전쟁범죄자로 교수형 1위로 올라 체포되는 순간에자택에서 미제 콜트 22구경 권총으로 얼굴 관자놀이에 총을 쏘지도 않고자살 흉내만 내려고 정확하게 심장을 겨냥하지 않고 옆에다 쏘고쓰러졌지만 미군들이 응급처치로 완치시킨 다음,재판정에 올려 진술을 듣고 1급 전범 교수형으로 처리했다. 그의 시체는 유족에 인도하지 않고 화장, 유골을 분쇄해서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뿌려졌다.일본 몇몇의 승려들이 화장한곳에서 몇개의 뼈를 줏어서 따로 묘지를 만들고 야스쿠니에도 봉안해서일본 정치인들이 지금도 과거 전쟁범죄를 잊고 애도하고 있는 중이다.
두번 죽은 일본인
출처 : 공미니 ( http://www.gongmini.com/gongpo/618681 )
도조 히데키(1884- 1948)
일본 군인.군국주의자. 아시아의 히틀러.
아버지도 군인이었던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3남으로 출생
10명의 형제중에 세번째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관동군 헌병사령관을 하면서 승진하기 시작했다.
참모장,육군차관,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 가서 군인 신분으로
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로 자신이 마음대로
총리에 문부장관,상공장관,군수장관을 겸직하면서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
사진에 찍힌 왼쪽 가슴에 치렁치렁 매달린
도조 히데키의 무거운 훈장이 현재
북한군 장군들의 어리석은 모습과 닮았다.
2년 9개월간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간 전쟁 최고 책임자로
그의 별명은 속전속결로 일처리를 하는 '면도날'이었다.
중국침략으로 하남성에서만 400만명을 죽였는가하면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1200만명을 죽게한 전쟁 범죄자였다.
일제시대 한국에서도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 실시해
수 많은 남자들은 전쟁터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게 했으며
젊은 여성들은 전선으로 끌고가서 위안부로 학대,
영혼을 짓밟아 처참한 삶을 살게 했다.
그는 일본천황을 들먹이면서
전쟁터에 나가는 모든 일본 병사들에게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戰陳訓)'까지
만든 인물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3 아들들에게는
전쟁터에 보내지 않고 자신의 범죄도 자각하지 못하고
목숨을 어떻게든지 구걸해보려고 처신한 인물이기도 했다.
병사들 앞에서는 냉혹한 인물이면서도
천황 앞에서는 겸손의 화신처럼 행동한 이중인격자였다.
장남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안전한 만주 풍만발전소로 보냈고
차남은 미쓰비시 공업에서 자동차 사장을 지냈으며
3남은 육사를 들어 갔지만 졸업은 못하고 항공자위대에서
소장계급까지 진급만 했다.
수 만명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희생됐지만
끝까지 전선에 보내지 않아 원성을 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
맥아더장군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자식을 전쟁에 잃은 일본 시민들은
뻔뻔하게 살아있는 도조 히데키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너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 할복해서 국민에게 사죄하라'
'빨리 자결하라'는 수만장의 투서가 집으로 날라 왔지만
전쟁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만은 어떻게 지켜 보려고
눈치만 살피는 죄의식이 없는 소심한 군인이었다.
무소리니가 시민들로 부터 맞아서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
사진이 보도될때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동경전범재판에 전쟁범죄자로 교수형 1위로 올라 체포되는 순간에
자택에서 미제 콜트 22구경 권총으로 얼굴 관자놀이에 총을 쏘지도 않고
자살 흉내만 내려고 정확하게 심장을 겨냥하지 않고 옆에다 쏘고
쓰러졌지만 미군들이 응급처치로 완치시킨 다음,
재판정에 올려 진술을 듣고 1급 전범 교수형으로 처리했다.
그의 시체는 유족에 인도하지 않고 화장, 유골을 분쇄해서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뿌려졌다.일본 몇몇의 승려들이 화장한
곳에서 몇개의 뼈를 줏어서 따로 묘지를 만들고 야스쿠니에도 봉안해서
일본 정치인들이 지금도 과거 전쟁범죄를 잊고 애도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