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영국의 수도 런던 영국의 왕과 왕비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을 때 그들의 옆에 있던 18세의 소녀는 어머니의 옆에 붙어서 눈물로 남자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번 이야기는 불행한 인생을 사랑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한 공주이자 여왕의 일방적인 짝사랑 이야기다.
메리여왕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잉글랜드 국왕 핸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아버지 핸리 8세는 형수였던 캐서린의 미모에 빠져 앤 블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녀와 매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예로 그는 이십대 무렵 쓴 시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캐서린을 골라 결혼할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 메리를 무척이나 귀여워 했다고 한다. 캐서린은 이사벨라 여왕의 막내딸로 당시 유럽을 석권하던 카를 5세의 이모였다. 하얀피부에 청순한 외모로 핸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었고 무려 여섯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메리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소녀의 무정한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젊은시녀와 재혼했다. 그것도 신의 진정한 말씀을 어기고 자신이 수장이 되는 죄를 범하면서 까지... 그리고 그녀는 여기에서 자신이 사생아로 취급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게된다. 그녀의 새엄마인 앤 블린은 주변에 보란듯이 메리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녀는 심지어 메리에게 갓 태어난 엘리자베스를 공주님이라 부르게 하고 메리에게 돌보게 하였다. 메리가 반발하면 넌 사생아고 이 아이는 진짜 공주니까 라고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메리는. 어머니인 케서린을 무척이나 보고싶어 했지만 아버지의 거부와 앤 블린의 반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일방적인 이혼을 당해 궁에서 쫓겨나고 딸과 생이별한 채 어렵게 지내다 2년여쯤 뒤에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51세. 캐서린의 시신은 부검됐는데 부검의가 "심장에 시커멓게 종양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보면 암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에는 앤 불린이 독살을 한 거다, 왕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썩어 들어간거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캐서린은 생전에 덕망이 높고 인기가 많았던 왕비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린시절부터 혹독한 환경속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은 메리여왕 이른바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여왕이다.
그러나 메리는 여기서 다신 한번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남편을 한번만 보고 싶어했는데도 핸리 8세는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앤과 함께 축하를 뜻하는 노란 옷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란히 나타났다. 심지어 앤은 캐서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된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다녔다. 소녀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보고 자라며 졸지에 사생아가 된 데다가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키지 못했던 메리는 앤 블린을 매우 증오했다.
1527년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단 온 국민이 이 아이의 탄생에 기뻐했다 . 이 아이가 바로 카를 5세의 장남이자 스페인에서의 후계자로, 유럽 최대 최강의 초강대국으로서 황금 시대 스페인을 통치한 펠리페 2세였다.
해가지지 않는 대제국의 정점과 몰락을 동시에 본 왕 펠리페 2세 이 시기 스페인은 잉글랜드, 프랑스, 교황청 할 거 없이 모두 그 군대의 깃발과 함대만 보아도 벌벌 떨 만큼의 강대한 국력을 자랑했고, 대영제국보다 훨씬 일찍 유럽,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아시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유럽 강국들에게 몰매를 얻어맞고 특히 네덜란드라는 걸출한 영지와 잉글랜드라는 훌륭한 파트너십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예 그쪽에 해상 입지를 빼앗긴 근본적 계기를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은, 실로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군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펠리페 2세는 뛰어난 부왕 카를 5세의 업적을 능가해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일평생 시달렸다. 그래서 심지어 결혼관계 역시 정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던 부왕의 신념까지도 본받아 평생 성행위를 기피했으며 후계자를 낳기 위한 짧은시간의 성행위만 고집했다.
1547년 메리의 아버지인 핸리 8세가 죽었고 그리도 원했던 적자 에드워드 6세도 불과 6년 후 숨을 거두었다.
소설 왕자와 거지의 모티브로 잘 알려진 영국 왕 에드워드 6세 핸리 8세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은 왕자라 그 사랑이 대단했고 따라서 그의 성격도 오만하면서도 냉정한 나르시스트였다고 한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병으로 죽어갈 때, 첫번째 왕위 계승권은 메리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왕이 된다는 건 국교가 다시 가톨릭으로 회복될 것이 분명했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고,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에드워드 6세의 측근인 노섬벌랜드 공작은 3번째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제인 그레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메리를 제거하려 한다. 메리는 한 발 앞서 런던을 탈출해 지금까지의 불행한 인생을 이용해 여론의 동정을 앞세워 여왕으로 즉위하고 노섬벌랜드 공작과 성공회 신자인 신하들의 숙청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살생부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다름아닌 어머니 캐서린 왕비의 이혼에 앞장섰던 인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 였다
이렇듯 왕위를 확고하게 잡은 메리는 후계자가 절실함을 느꼈다. 자신의 나이가 당시로서는 고령인 38세였지만 그녀가 죽으면 그 다음자리는 원수같은 앤 블린의 딸인 자신의 이복누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계모인 캐서린 파의 따뜻한 배려로 인해 여동생에 대한 원한은 그다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남편감을 고르는데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쉽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왕실의 왕자나 대공들과 혼담이 오갔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헨리 8세와의 사이가 벌어진 뒤에는 혼담마저도 뚝 끊겼다. 어쩌다 들어온 혼담도 헨리 8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내치는 바람에 결국 혼기를 놓치게 됐다. 나중에 캐서린 왕비를 존경했던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와, 헨리 8세와 그 아이들 사이를 잘 중재한 6번째 왕비 캐서린 파 덕분에 부녀 관계는 조금 회복되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결혼하기엔 나이가 많은 30대 초반인지라 혼담이 잘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여왕이 될 때까지 미혼이었다.
처음에는 사실 어릴 때 어머니가 이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모진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 자란 터라 당사자에게도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다. 헨리 8세 때 결혼 문제로 이래저래 곤욕을 겪은 신하들은 메리 여왕도 결혼 문제로 말썽을 일으킬까 걱정했지만 메리 여왕은 나 결혼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하들 앞에서 선언한지라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반전이 생기는데... 여왕이 된 후에 들어온 혼담에서 사촌인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신보다 11세나 연하인 스페인의 왕자 펠리페 2세의 초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겠다며 결혼을 전격 발표했다. 이때 메리는 38세, 펠리페 2세는 27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에서 가톨릭이 다시 세를 불리는 것을 경계하던 신하와 국민들은 여왕이 자타가 공인하는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굴지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왕세자와 결혼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으나, 어머니를 빼다 박은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서 결국 결혼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토마스 와이어트라는 신하는 이에 반대하여 끝내 반란마저 일으킬 정도였으니 얼마나 난리가 났었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을 터.
여기에는 아직 1등국이라고 할 수 없었던 영국이 여왕의 남편인 스페인의 왕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두려워했던 데 이유가 있다. 이는 엘리자베스때도 마찬가지로, 두 여왕의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고 후보로 외국 왕들이 거명될 때마다 신하들은 영국이 남편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결혼 계약에 삽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혼 후 메리는 온 열정을 다해 펠리페 2세를 사랑해 때때로 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최대한 펠리페 2세의 생각을 따랐다.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영국이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 결혼이 영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정략적인 결혼인데다 메리가 자신보다 한참 연상이고 못생겼기 때문인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영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메리를 찾아간 일이 드물었다고.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스페인에 있는 남편에게 영국으로 좀 오라고 애걸복걸 편지를 썼지만 펠리페는 들은 척도 안하거나 온갖 핑계를 대며 멀리하기에 이른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고생을 하다가 결국 그녀는 상상임신까지 하고 말았다. '임신했으니 영국에 와 달라.'고 편지도 보냈지만 펠리페 2세는 코웃음만 쳤다는 야사도 있다. 워낙 심한 근시라 늘 눈을 찌푸렸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많았고 자궁이 안 좋아서 늘 고생했다고 한다. 자궁 근종이 심해서 월경을 거르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다.
남편으로 부터 철저히 무시를 당한 메리 1세는 스트레스성 히스테리가 더욱 심해졌다 원래 그녀의 성격은 모진풍파를 겪은데 비해 정이 많았고 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끝까지 반대해 신하들은 먼저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고 뒤에 보고하기까지 하였다. 충격을 받은 메리는 이후 자신의 이복누이 엘리자베스에 대한 숱한 역모혐의가 고발되었는데도 끝까지 그녀를 지켜줬고 전에처럼 살해당할까봐 직접 측근을 동원해 불순한 움직임을 감시했다. 또한 그녀의 취미는 궁 밖에 나와 백성들을 상황을 지켜보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도 대체로 그녀를 좋아했다.
자주 궁궐밖을 나온 메리... 그녀는 정이 많고 때로는 소심해 수십여명을 처형한 후 끝까지 개종을 시키지 못한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히스테리가 발동할때 수 많은 반대파들을 처형했다.
펠리페 2세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많고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없었던 메리에 대해 전혀 애정이 없었고 다만 영국을 꿀꺽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증조부(2편에 나오는 막시밀리안 1세)와 할아버지인 미남공 필립의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얼마나 커졌던가 펠리페는 얼른 메리가 죽고 자신이 영국까지 먹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펠리페가 처음부터 그러한 마음만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1554년, 카를 5세는 당시 막 영국의 국왕이 된 사촌동생 메리 1세와 자신의 장남이자 스페인 국왕이 될 예정인 펠리페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당시 펠리페는 첫 결혼 후 2년만에 아내와 사별해 9년이나 홀아비로 지낸 상태로, 정략적으로도 국가와 가톨릭의 번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그녀가 11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이와 별개로 영국에서 보내온 초상화도 꽤 미화가 잘 되어 있어 흡족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직접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오만한 그와 측근들은 영국인들의 큰 불만을 샀지만 그것은 펠리페 나름대로의 기대감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리와의 첫만남에서 약간의 기대는 큰 절망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막상 만나보니 메리 1세는 (펠리페 2세 생각에) 미인은 커녕 오히려 못생긴 여자였기 때문에 펠리페 2세는 기겁했다. 일단 정략혼인의 결과 명분상으로 영국까지 다스리게 되었지만, 펠리페는 스페인 현지에 틀어박혀서 바쁘다는 이유로 영국을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 1세는 펠리페에게 첫눈에 반한 상태였기에, 그가 좀처럼 오지 않자 지독한 상사병에 걸렸다. 그녀는 펠리페 2세와 결혼할 당시에도 이를 거부하며 영국 현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무력으로 찍어눌렀으며,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펠리페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했다.그래서 마지막까지 영국의 땅으로 남아있었던 칼레마저 프랑스에 털렸다.(1558년) 그러나 펠리페는 그녀에 대한 사랑마저도 없었고 빨리 죽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메리는 끝까지 펠리페가 일을 마치면 자신에게 돌아와 함께 해줄것이라 믿었다. 아버지를 끝까지 기다렸던 어머니 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매일 펠리페에게 보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고 어쩌다 한번 오는 펠리페와 계속 같이 있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그러나 펠리페는 공적인 업무만 마치면 바로 돌아가버려 그녀를 끝내 외면했다. 우울증과 히스테리가 더욱 심해진 메리는 그 분노의 대상을 반대파인 성공회교도와 신교도 들에게 돌렸다 그들의 피와 비명이 스페인까지 전달되면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남편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마지막의 그녀는 블러디 메리라는 오명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너지며 절망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필로그
그리고 끝내 1558년, 바다 건너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메리 1세의 이복여동생이자 차기 영국 국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 개인적으로는 언니보다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엘리자베스와 부부가 된다는 선택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영국에서의 지배권을 유지해서 신교 세력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 거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반대했던 펠리페 2세의 아버지 카를 5세에 대한 앙금도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성공회에 독실했는데다, 당시 영국 내에선 스페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사람이기에 굳이 결혼하려면 (일단 당시 영국의 국교기도 했던 가톨릭 기준으로) 교황에게 특별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서 퇴짜를 놨다.
결국 반대로 차여버린 펠리페 2세는 분노했고 1559년, 외아들 돈 카를로스의 약혼자이자 당시 자신의 적국이었던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덜컥 재혼해버렸다
메리가 죽은 후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 치하의 잉글랜드는 결국 성공회 국가가 되었으나, 그녀에게 나름대로 호감을 가졌던 펠리페 2세는 그 뒤에도 다른 가톨릭 국가들 이상으로 영국에 여전히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프란시스 드레이크를 필두로 한 잉글랜드 해적들이 들끓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잉글랜드를 침공할 무적 함대를 출병시킨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유럽역사로 보는 왕자&공주의 사랑이야기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
"이 아이가 사생아임을 인정한다면 당신의 앞날은 보장하지"
"그럴 순 없습니다. 전 잉글랜드의 왕후이자 당신의 아내이며 이 아이는 당신의 딸입니다.
1534년 영국의 수도 런던 영국의 왕과 왕비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을 때 그들의 옆에 있던 18세의 소녀는 어머니의 옆에 붙어서 눈물로 남자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번 이야기는 불행한 인생을 사랑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한 공주이자 여왕의 일방적인 짝사랑 이야기다.
메리여왕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잉글랜드 국왕 핸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아버지 핸리 8세는 형수였던 캐서린의 미모에 빠져 앤 블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녀와 매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예로 그는 이십대 무렵 쓴 시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캐서린을 골라 결혼할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 메리를 무척이나 귀여워 했다고 한다. 캐서린은 이사벨라 여왕의 막내딸로 당시 유럽을 석권하던 카를 5세의 이모였다. 하얀피부에 청순한 외모로 핸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었고 무려 여섯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메리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소녀의 무정한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젊은시녀와 재혼했다. 그것도 신의 진정한 말씀을 어기고 자신이 수장이 되는 죄를 범하면서 까지... 그리고 그녀는 여기에서 자신이 사생아로 취급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게된다. 그녀의 새엄마인 앤 블린은 주변에 보란듯이 메리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녀는 심지어 메리에게 갓 태어난 엘리자베스를 공주님이라 부르게 하고 메리에게 돌보게 하였다. 메리가 반발하면 넌 사생아고 이 아이는 진짜 공주니까 라고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메리는. 어머니인 케서린을 무척이나 보고싶어 했지만 아버지의 거부와 앤 블린의 반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일방적인 이혼을 당해 궁에서 쫓겨나고 딸과 생이별한 채 어렵게 지내다 2년여쯤 뒤에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51세. 캐서린의 시신은 부검됐는데 부검의가 "심장에 시커멓게 종양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보면 암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에는 앤 불린이 독살을 한 거다, 왕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썩어 들어간거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캐서린은 생전에 덕망이 높고 인기가 많았던 왕비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린시절부터 혹독한 환경속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은 메리여왕 이른바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여왕이다.
그러나 메리는 여기서 다신 한번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남편을 한번만 보고 싶어했는데도 핸리 8세는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앤과 함께 축하를 뜻하는 노란 옷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란히 나타났다. 심지어 앤은 캐서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된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다녔다. 소녀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보고 자라며 졸지에 사생아가 된 데다가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키지 못했던 메리는 앤 블린을 매우 증오했다.
1527년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단 온 국민이 이 아이의 탄생에 기뻐했다 . 이 아이가 바로 카를 5세의 장남이자 스페인에서의 후계자로, 유럽 최대 최강의 초강대국으로서 황금 시대 스페인을 통치한 펠리페 2세였다.
해가지지 않는 대제국의 정점과 몰락을 동시에 본 왕 펠리페 2세 이 시기 스페인은 잉글랜드, 프랑스, 교황청 할 거 없이 모두 그 군대의 깃발과 함대만 보아도 벌벌 떨 만큼의 강대한 국력을 자랑했고, 대영제국보다 훨씬 일찍 유럽,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아시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유럽 강국들에게 몰매를 얻어맞고 특히 네덜란드라는 걸출한 영지와 잉글랜드라는 훌륭한 파트너십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예 그쪽에 해상 입지를 빼앗긴 근본적 계기를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은, 실로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군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펠리페 2세는 뛰어난 부왕 카를 5세의 업적을 능가해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일평생 시달렸다. 그래서 심지어 결혼관계 역시 정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던 부왕의 신념까지도 본받아 평생 성행위를 기피했으며 후계자를 낳기 위한 짧은시간의 성행위만 고집했다.
1547년 메리의 아버지인 핸리 8세가 죽었고 그리도 원했던 적자 에드워드 6세도 불과 6년 후 숨을 거두었다.
소설 왕자와 거지의 모티브로 잘 알려진 영국 왕 에드워드 6세 핸리 8세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은 왕자라 그 사랑이 대단했고 따라서 그의 성격도 오만하면서도 냉정한 나르시스트였다고 한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병으로 죽어갈 때, 첫번째 왕위 계승권은 메리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왕이 된다는 건 국교가 다시 가톨릭으로 회복될 것이 분명했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고,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에드워드 6세의 측근인 노섬벌랜드 공작은 3번째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제인 그레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메리를 제거하려 한다. 메리는 한 발 앞서 런던을 탈출해 지금까지의 불행한 인생을 이용해 여론의 동정을 앞세워 여왕으로 즉위하고 노섬벌랜드 공작과 성공회 신자인 신하들의 숙청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살생부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다름아닌 어머니 캐서린 왕비의 이혼에 앞장섰던 인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 였다
이렇듯 왕위를 확고하게 잡은 메리는 후계자가 절실함을 느꼈다. 자신의 나이가 당시로서는 고령인 38세였지만 그녀가 죽으면 그 다음자리는 원수같은 앤 블린의 딸인 자신의 이복누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계모인 캐서린 파의 따뜻한 배려로 인해 여동생에 대한 원한은 그다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남편감을 고르는데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쉽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왕실의 왕자나 대공들과 혼담이 오갔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헨리 8세와의 사이가 벌어진 뒤에는 혼담마저도 뚝 끊겼다. 어쩌다 들어온 혼담도 헨리 8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내치는 바람에 결국 혼기를 놓치게 됐다. 나중에 캐서린 왕비를 존경했던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와, 헨리 8세와 그 아이들 사이를 잘 중재한 6번째 왕비 캐서린 파 덕분에 부녀 관계는 조금 회복되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결혼하기엔 나이가 많은 30대 초반인지라 혼담이 잘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여왕이 될 때까지 미혼이었다.
처음에는 사실 어릴 때 어머니가 이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모진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 자란 터라 당사자에게도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다. 헨리 8세 때 결혼 문제로 이래저래 곤욕을 겪은 신하들은 메리 여왕도 결혼 문제로 말썽을 일으킬까 걱정했지만 메리 여왕은 나 결혼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하들 앞에서 선언한지라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반전이 생기는데... 여왕이 된 후에 들어온 혼담에서 사촌인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신보다 11세나 연하인 스페인의 왕자 펠리페 2세의 초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겠다며 결혼을 전격 발표했다. 이때 메리는 38세, 펠리페 2세는 27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에서 가톨릭이 다시 세를 불리는 것을 경계하던 신하와 국민들은 여왕이 자타가 공인하는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굴지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왕세자와 결혼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으나, 어머니를 빼다 박은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서 결국 결혼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토마스 와이어트라는 신하는 이에 반대하여 끝내 반란마저 일으킬 정도였으니 얼마나 난리가 났었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을 터.
여기에는 아직 1등국이라고 할 수 없었던 영국이 여왕의 남편인 스페인의 왕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두려워했던 데 이유가 있다. 이는 엘리자베스때도 마찬가지로, 두 여왕의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고 후보로 외국 왕들이 거명될 때마다 신하들은 영국이 남편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결혼 계약에 삽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혼 후 메리는 온 열정을 다해 펠리페 2세를 사랑해 때때로 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최대한 펠리페 2세의 생각을 따랐다.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영국이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 결혼이 영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정략적인 결혼인데다 메리가 자신보다 한참 연상이고 못생겼기 때문인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영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메리를 찾아간 일이 드물었다고.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스페인에 있는 남편에게 영국으로 좀 오라고 애걸복걸 편지를 썼지만 펠리페는 들은 척도 안하거나 온갖 핑계를 대며 멀리하기에 이른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고생을 하다가 결국 그녀는 상상임신까지 하고 말았다. '임신했으니 영국에 와 달라.'고 편지도 보냈지만 펠리페 2세는 코웃음만 쳤다는 야사도 있다. 워낙 심한 근시라 늘 눈을 찌푸렸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많았고 자궁이 안 좋아서 늘 고생했다고 한다. 자궁 근종이 심해서 월경을 거르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다.
남편으로 부터 철저히 무시를 당한 메리 1세는 스트레스성 히스테리가 더욱 심해졌다 원래 그녀의 성격은 모진풍파를 겪은데 비해 정이 많았고 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끝까지 반대해 신하들은 먼저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고 뒤에 보고하기까지 하였다. 충격을 받은 메리는 이후 자신의 이복누이 엘리자베스에 대한 숱한 역모혐의가 고발되었는데도 끝까지 그녀를 지켜줬고 전에처럼 살해당할까봐 직접 측근을 동원해 불순한 움직임을 감시했다. 또한 그녀의 취미는 궁 밖에 나와 백성들을 상황을 지켜보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도 대체로 그녀를 좋아했다.
자주 궁궐밖을 나온 메리... 그녀는 정이 많고 때로는 소심해 수십여명을 처형한 후 끝까지 개종을 시키지 못한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히스테리가 발동할때 수 많은 반대파들을 처형했다.
펠리페 2세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많고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없었던 메리에 대해 전혀 애정이 없었고 다만 영국을 꿀꺽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증조부(2편에 나오는 막시밀리안 1세)와 할아버지인 미남공 필립의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얼마나 커졌던가 펠리페는 얼른 메리가 죽고 자신이 영국까지 먹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펠리페가 처음부터 그러한 마음만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1554년, 카를 5세는 당시 막 영국의 국왕이 된 사촌동생 메리 1세와 자신의 장남이자 스페인 국왕이 될 예정인 펠리페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당시 펠리페는 첫 결혼 후 2년만에 아내와 사별해 9년이나 홀아비로 지낸 상태로, 정략적으로도 국가와 가톨릭의 번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그녀가 11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이와 별개로 영국에서 보내온 초상화도 꽤 미화가 잘 되어 있어 흡족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직접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오만한 그와 측근들은 영국인들의 큰 불만을 샀지만 그것은 펠리페 나름대로의 기대감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리와의 첫만남에서 약간의 기대는 큰 절망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막상 만나보니 메리 1세는 (펠리페 2세 생각에) 미인은 커녕 오히려 못생긴 여자였기 때문에 펠리페 2세는 기겁했다. 일단 정략혼인의 결과 명분상으로 영국까지 다스리게 되었지만, 펠리페는 스페인 현지에 틀어박혀서 바쁘다는 이유로 영국을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 1세는 펠리페에게 첫눈에 반한 상태였기에, 그가 좀처럼 오지 않자 지독한 상사병에 걸렸다. 그녀는 펠리페 2세와 결혼할 당시에도 이를 거부하며 영국 현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무력으로 찍어눌렀으며,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펠리페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했다.그래서 마지막까지 영국의 땅으로 남아있었던 칼레마저 프랑스에 털렸다.(1558년) 그러나 펠리페는 그녀에 대한 사랑마저도 없었고 빨리 죽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메리는 끝까지 펠리페가 일을 마치면 자신에게 돌아와 함께 해줄것이라 믿었다. 아버지를 끝까지 기다렸던 어머니 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매일 펠리페에게 보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고 어쩌다 한번 오는 펠리페와 계속 같이 있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그러나 펠리페는 공적인 업무만 마치면 바로 돌아가버려 그녀를 끝내 외면했다. 우울증과 히스테리가 더욱 심해진 메리는 그 분노의 대상을 반대파인 성공회교도와 신교도 들에게 돌렸다 그들의 피와 비명이 스페인까지 전달되면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남편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마지막의 그녀는 블러디 메리라는 오명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너지며 절망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필로그
그리고 끝내 1558년, 바다 건너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메리 1세의 이복여동생이자 차기 영국 국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 개인적으로는 언니보다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엘리자베스와 부부가 된다는 선택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영국에서의 지배권을 유지해서 신교 세력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 거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반대했던 펠리페 2세의 아버지 카를 5세에 대한 앙금도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성공회에 독실했는데다, 당시 영국 내에선 스페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사람이기에 굳이 결혼하려면 (일단 당시 영국의 국교기도 했던 가톨릭 기준으로) 교황에게 특별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서 퇴짜를 놨다.
결국 반대로 차여버린 펠리페 2세는 분노했고 1559년, 외아들 돈 카를로스의 약혼자이자 당시 자신의 적국이었던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덜컥 재혼해버렸다
메리가 죽은 후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 치하의 잉글랜드는 결국 성공회 국가가 되었으나, 그녀에게 나름대로 호감을 가졌던 펠리페 2세는 그 뒤에도 다른 가톨릭 국가들 이상으로 영국에 여전히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프란시스 드레이크를 필두로 한 잉글랜드 해적들이 들끓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잉글랜드를 침공할 무적 함대를 출병시킨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