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서양의 마녀사냥 뒷이야기

콜로라도201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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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 위키 항목에서 witch hunt 항목에서 가장 긴 항목은
middle age이다. 단지 early modern europe 항목이 꽤 길며 심지어 witch hunt와 같은 길이의 별도의 항목이 붙어 있을 뿐....

2. 아무튼 서양의 마녀사냥 열풍이 불었던 시기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국가는
신구교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독일어권 국가들이다. 총 5만 건의 마녀 재판이 열려
2만~3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시기 마녀 사냥에 의한 사망자 추정치인 3만 5천명의
80%를 가볍게 넘기는 숫자다.

3. 14세기까지 교황청은 무분별한 민중의 마녀 사냥을 억제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로마법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대표적으로 마녀사냥의 재판 방법으로 유명한 '물에 넣어서 가라앉으면 무죄, 떠오르면 유죄' 식의 신명재판은 사실 교황청에서 금지시키려고 애쓰던 것이었다.)  문제는 교권이 축소되고 군주 간의 싸움이 심화되는 15세기
결국 교황청은 이런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는 행동을 한다
1484년 인노켄티우스 8세는 독일에서 악마숭배자들을 척결할 것을 명하게 된다. 이 때 책임자인 스프렝거와 크레머가
만든 마녀 식별 책이 바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다.

4. 종교개혁에 대항해서 시작된 가톨릭 개혁 운동인 반 종교개혁은 마녀 사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리에트 공회의에서 사실상 군주측 인사들이 승리를 거두어 이단과 악마 숭배에 대한 척결권은 더이상 교계가 아닌
세속적인 군주들이 보유하게 된다. 이들은 종교재판소가 아닌 일반 재판소에서 대중들이 잡아들인 악마 숭배자들과
반 군주적인 인사들을 악마숭배자로 몰아 처단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재산을 노리고 이런 짓을 한 인간들이 상당했을
지경이었다. 대충 1580~1650년에 이르는 이 시기를 마녀 사냥의 절정기라고 보른다.

5. 사실 가톨릭만 마녀사냥을 한게 아니었다. 개신교 영주들도 자신에 반대하거나 민심을 다잡기 위해 민중이 싫어하는 인물을
다수 마녀로 처단했다. 가장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한 독일어권 국가의 마녀사냥이 심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들이 수호하려 한 게 종교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이며 그에 대항하는 자 혹은 자신에 불만을 품은 농민과 하층민의
분노를 돌릴 수 있는 마이너를 제거하는데 적극적으로 마녀란 죄목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마녀 사냥의 매력을
느끼는데 영주의 종교 구분은 사실 의미가 없었다.

6. 18세기에 이르자 마녀사냥은 의미가 없어져 쇠퇴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세속과 종교가 빠르게 분리되면서 군주권이
더 이상 종교의 도움만으로 유지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시기 나온 개념이 주권, 민족 등이었고 이 개념하에서
절대 왕정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교적 색체 없이 불순분자들을 왕에 대한 반역을 했다는 이유로 무차별로 잡아 가두어도 될 권력을
군주들은 가지게 되었다. 이젠 마녀들은 더이상 마녀일 필요가 없이 반역자 혹은 불순분자란 이름을 사회에서 제거된다.
한편 몇몇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언급되는 광인 취급되어 마찬가지로 제거 되었다.

7. 사실 마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여자만 뜻하는 게 아니다. 많은 남자들도 잡혀서 화형당했다.
이런 면에서 악마 숭배자가 맞을지도 모른다.

8. 마지막으로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이게 기독교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슬람권이나 유대인들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알자 일신교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화인류학 발달로 여러 연구 결과 그냥 인류 문명 대부분이 이런 마녀 사냥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사하라 이남, 동남아시아 일부, 태평양의 섬들,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이런 마녀 사냥이
행해지고 있다.

9. 또한 우리는 아니겠지 생각하지만 가장 이시절 마녀사냥과 가까운 현대 병증은 매카시즘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우리는
이런 행태를 마녀사냥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