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이 두렵기만한 일일까.

델피2015.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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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이 두렵기만 한 걸까.

 

몇 주 전 나는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혼 서류를 내고 열흘쯤 뒤에 남편은 이사를 했다. 집은 조금 오래된 오피스텔로 혼자 살기에 꽤 괜찮았고 함께 살던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그 오피스텔을 선택한 이유는 남편이 아이를 보고 싶을 때, 아이가 남편을 보고 싶을 때 쉽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남편과 나는 이혼서류를 법원에 냈고, 나오는 길로 남편이 앞으로 살 집을 함께 보러 다녔다. 내가 아이를 맡아 키울 테니 아무래도 지금 아파트에 나와 아이가 살고 남편이 나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남편도 동의했지만 아무래도 집을 나서야 하는 입장이니 서운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할 것 같아 같이 오피스텔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는 살만한 집에 산다는 걸 내가 알고 있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헤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거의 10년을 함께 한 사람이니 그가 괜찮은 곳에서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고, 그가 혼자 집을 보러 다니는 쓸쓸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헤어진 것에 대해 사람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알코올중독이나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고,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나를 때린 것도 아닌 남편에게 헤어져야겠다고 이야기한건 나였다. 남편은 꽤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었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었다. 결혼 생활을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서 부부 상담을 받자고 제안하고 성실히 상담을 받기도 했다. 내가 그런 남편과 왜 헤어지고 싶어 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그리고 남편도 역시, 우리는 결혼 생활 내내 너무 외로웠다. 우리는 9년 전 처음 만났고 그때는 뜨겁게 사랑했다. 같은 회사의 입사동기였고 남편이 입사와 동시에 서울로 상경하게 되면서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집을 얻었고 우리는 거의 매일 붙어있었다. 아침에 만나서 함께 토스트를 사먹으며 출근했고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었다. 회사에선 연애를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출퇴근길에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금방 사랑은 탄로가 났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편은 지방으로 한 달 간 연수를 갔을 때에도 주말마다 나를 보러 KTX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아직 사랑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고, 원가족에 대해 버겁고 힘들게 느끼던 차인지라 남편과의 연애가 벅찼고 심지어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

 

그렇게 1년을 뜨겁게 연애하면서, 내가 결혼을 더 서둘렀다. 나의 남편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상황에서 그를 꺼내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의 오만이자 나를 보이지 않는 감옥 안에 가두는 시작이었던 것 같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게 사랑이었다. 남편의 월급을 내 통장으로 보내라고 시키고 내 월급과 합쳐서 열심히 저축을 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양가의 도움 없이 우리는 입사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대출을 받아 4000만 원짜리 10평 남짓의 조그만 전셋집을 구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이 9년이 흘러갔다. 결혼 3년차쯤인가 우울증이 찾아오고 자꾸만 술을 찾게 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고 그런 생활이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서로 너무 달랐고 서로에게 의지가 될 수 없었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혼이라는 것이 막연하게 그 자체로 두려웠다. 그 뒤에 어떠한 일이 닥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어 무서웠고 그래서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시기를 여차저차 넘기자 사랑스러운 아이가 찾아왔고,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키우는 몇 년간 나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유 없이 바쁘게 지내왔다. 그렇게 살던 중 아이가 두 살이 되던 해에 친정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6개월 정도 식사를 안 드시고 병원을 극구 거부하시던,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상처라는 이름으로만 떠오르던 아빠가, 내 삶의 무게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아빠가 장시간 자신을 돌보지 않고 40키로 남짓의 몸이 되어 호흡할 힘이 딸려서 소파에서 쓸쓸히 혼자 눈을 감으셨다. 예순도 되지 않은 나이에 해골 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가시기 전날 밤 나를 섬뜩하게 바라보며 “너도 내가 죽으면 좋지?”라고 말했던 아빠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자, 나는 슬픈 게 아니라 기가 막혀 울었다.

 

내 삶을 짓누르던 아빠라는 존재가 내 삶에서 사라지고 나자, 나는 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삶의 지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일 년 정도의 시간동안 나는 나에게 엄청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계속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 과거의 나는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러자 나의 행복과 불행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삶에서 내가 느끼는 외로움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 외로움은 남편의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내 과거에서부터 비롯된 외로움이었다. 그러나 난 과거부터 나를 따라온 이 외로움을 치유해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 아니라 이 외로움을 더 지속시킬 상대를 만났던 것이다. 물론 그게 상대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독히도 달랐기 때문에 그랬다. 너무 사랑해서 만났지만 너무나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취향도 달랐고 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소통을 간절히 원했고 남편은 소통을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은 아빠에 대한 내 상처의 무게 때문에 힘겹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남편과의 삶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 삶의 다른 부분들까지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아빠가 돌아가시고 반년쯤 지나서 그 방황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1년 정도 나는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흔들렸다. 내가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빠르게 달리는 열차에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위의 친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걱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것뿐이었다. 내 삶의 변화들이 두려웠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멈추면 숨이 막히고 시들어버릴 것 같았다. 내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내가 너무 힘드니 당분간 좀 이상하게 굴어도 이해해 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남편이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남편은 내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대화 역시, 소통이 안 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서 감정이 상한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 몇 년간을 사느라 참 힘들었어.”라고. 그 말이 나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너무 무게감이 있는 말이라 처음에는 그 말이 나에게 주는 절망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서서히 나는 좌절했다. 그와 사랑해보고자 함께하고자 소통해보고자 애써왔던 나의 노력은, 그리고 그 노력을 가능하게 했던 나의 사랑은 다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지금은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헤어졌어야 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고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 아팠지만 진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잡고 싶었고 나를 잡아주길 원했던 남자에게 그 말을 들은 것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물론 그는 나를 한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반자로써 아껴주고 사랑해주었지만, 나를 여자로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고 진심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서히 내 마음을 접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그와 연결될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리던 나는 조금씩 독립적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혼자 영화를 보러가고 혼자 여행을 가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더 가까이 지냈다. 그렇게 홀로 서야 이 사람과의 삶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가끔씩 ‘내가 바라는 사랑은 이제 다시는 내 삶에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들면 죽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운전을 하다가 이대로 운전대를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나에게 사랑의 종말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나에게는 죽지 못할 이유가 있으니까. 나의 아이와 내 직업적 소명이 그 이유였다.

 

남편은 내가 방황하던 와중에 나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의지를 표현했고, 나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부 상담을 6개월 정도 받았는데 상담자는 우리 부부가 각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라며 일단 따로 상담을 받고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같이 만나거나 혹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다. 상담과정은 나와 남편 둘 다에게 힘든 과정이었다. 남편의 과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나는 묻어두었던 아빠, 엄마에 대한 무기력, 슬픔, 분노를 만났고 그 경험은 몸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하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기도 했다. 온몸이 뻘 속에 있는 것처럼 무겁기도 하고 너무 화가 나서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기도 했다. 그렇게 또 같이 6개월을 보냈고 그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4월28일, 우리의 9번째 결혼기념일이 찾아 왔다. 우리는 이태원에 식당을 예약했다. 사실 나는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그 전날 남편이 이야기해줘서 알았다. 바빠서일 수도 있지만, ‘관계’라는 것이 중요한 나라는 사람이 의미 있는 기념일을 잊었다는 사실이 나를 맥 빠지게 했다. 이제 나에게 그와의 ‘관계’가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구나. 우리는 6개월의 상담이 무색하게도 결혼기념일 식사자리에서 또 싸웠고, 서로 상처를 주고 식당에서 나와 각자 걸어갔다. 나는 그 길로 내 사람들을 만나러 갔고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나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으며, 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그 변화가 달갑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이 관계에 힘을 다 쏟았고 더 이상 견딜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상담의 영향인지 묻어놨던 분노를 맞닥뜨린 남편의 눈빛은 나를 미워하는 기운이 가득하게 느껴졌고 나는 그 눈빛을 한순간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음을 먹었다. 헤어져야겠다, 헤어져야 내가 살겠다, 헤어져야 하루라도 내가 웃을 수 있겠구나.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헤어져야 될 것 같다고. 남편은 우리가 언젠가는 헤어질 것 같다고 생각 했었다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에게 한 마디 이죽거리며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아이만 제일 걱정이 되네.” 나는 가볍게 응수했다. “미안한 얘기는 그냥 안 해도 되잖아.”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끝이 났고 우리는 헤어지기로 합의를 했다. 슬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와 함께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고 그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되었다. 아이는 내가 키우기로 하고 남편이 집을 구하기로 했고 얼마 있지 않은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틀 후 처음으로 이혼서류를 작성했다. 그걸 쓰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애써 담담히 써내려갔다. 그리고 며칠 후에 함께 법원에 서류를 내고(그 과정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또 며칠 후에 남편은 이사를 했다. “네가 걱정 되. 잘 살 수 있을지. 나 월급 올랐으니까 돈 많이 줄게. 술 너무 많이 먹지 마.”라는 말을 나에게 남기고.

 

남편이 이사를 하는 날 나는 남편이 짐을 싸는 것을 돕고, 같이 차에 짐을 싣고, 짐을 내려주고 오피스텔 청소를 도와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중간 중간 아이의 재롱에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게 참 나에게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혼이라는 것이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건가.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에서 보던 느낌과 사뭇 달랐다. 우리는 서로 웃으며 헤어졌고 서로를 응원했고 서로를 배려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이혼을 결정한 후에 상담자와 진행했던 커플상담 한회기의 영향이 컸다. 상담자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잘 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나는 그에게 무언가 이야기했다가 또 다시 상처받게 될까봐 두려워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상담자는 더 이상 받을 상처도 없지 않냐며 우리를 이야기하도록 독려했다. 나는 힘들게 내 마음을 전달했다. “나는 당신을 많이 사랑했고 그래서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걸 알아주면 좋겠어. 미안하고 고마워.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자,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화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만큼 감정이 정리가 되었다. 물론 그에 대한 내 감정의 변화와는 별개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과의 이별은 나에게 슬픔과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슬플 때는 울었고 마음 아파했고, 그리고 나면 다시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2015.05.30.

 

참 독특한 경험이네.

 

옷가지 세면도구 화장품 다리미대

새벽부터 그는 짐을 싸고

 

서둘러 그를 내보내는 나는,

그릇 냄비 커피믹스 찬통을 챙겨주고

 

그러다가 깨어난 아이가 뭐하느냐 묻고

우리는 같이 설명을 하고

설명을 하다 웃기도 하고.

 

짐을 싸다 슬퍼서 드러눕기도하고

같이 짐을 나르고 차에 싣고

 

라면 끓인 것을 뺏어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이를 보고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렇게 마주하길 걱정했던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하고 흐리게 흘러갔다.

이렇게 다시 보고 웃을 수 있어 다행이네.

그리고 웃지만 서로 다시 기대를 품지 않는 것도 다행이지.

 

참 독특한 경험이야.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러갔다. 나는 아이를 돌보고, 내 일들을 하고 더 나에게 집중했다. 헤어지고 나니 더 그럴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원래 좋아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 책을 읽고 영감을 받는 것,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춤을 추는 것, 여행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일들에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혼 서류를 낸지 며칠이 되지 않았고 남편이 이사를 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의 마음은 편안하고 안정이 되었다. 누군가는 아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척이나 두려워하던 ‘이혼’이라는 경험을 막상 하게 되니 역설적으로 내 마음이 더 담담해지고 차분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새로운 결정을 한 후에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경험들. 새롭게 맺게 되는 관계들, 잊고 지냈던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다시 경험하고 감동 받는 것, 근처에 이미 충분히 있었는데도 내 상처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나에 대한 관심과 지지와 사랑들.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해서 나는 점점 충만한 마음이 들었다. “나 행복하네.”라는 말이 되뇌어졌다. 생각해보니, 스물다섯 살 사랑에 달떴던 몇 달 동안 느꼈던 충만함 이후에 이렇게 안정감 있는 행복을 느낀 건 처음인 것 같다. 아니, 내가 서른 네 해를 살면서 이렇게 내 마음이 차분하고 충만한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혼, 헤어짐 이런 단어들은 듣자마자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있다. 나는 그 단어들이 그랬다. 내가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겪은 이혼과 헤어짐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혼을 하면 내 삶이 망가지거나 손상될 것 같았는데 내 삶이 더 회복이 되고 충만해졌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두려웠는데 막상 지금은 남들의 시선이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아이가 행복하려면, 내가 행복하려면, 그리고 그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나는 나에게 더 집중하고 달라진 나를 즐기며 기뻐하고 있다.

 

내 이러한 경험이 나에게는 참 생소하고 의아해서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누군가는 그런 우려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직 며칠 안 되어서 그렇지 지내다보면 힘든 게 많을 거야’라고. 아마 슬픈 일, 마음 아픈 일들은 앞으로도 나를 꾸준하게 방문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가리었던 상처라는 안대를 벗고서 그 일들을 마주한다면 나는 잘 견뎌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나는 무력감, 외로움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 무게를 덜어내니 그만큼 더 힘이 생겼다. 그래서 자만일지 모르지만, 나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고 충만한 소통을 하며 더 행복하게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