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와, 가녀린 몸, 큰 귀걸이, 미니원피스, 레깅스 등은 그녀의 표상하는 아이콘이었으며, 워홀과 세즈윅은 우정, 사랑을 초월한 깊은 정신적 유대감을 가지고
워홀의 factory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후에 세즈윅이 빌리 퀸과 사랑에 빠지고, 이를 질투해서인지 워홀은
세즈윅에게 상처를 주는(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기억을 자극할만한 영화를 촬영하고,
둘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맙니다.
앤디 워홀의 뮤즈, 에디 세즈윅.
타인에게 영감을 주되 자신을 위한 불꽃은 채 피워 올리지 못했던 다른 여성 예술가들처럼
워홀과 갈라선 세즈윅은 스물여덟 해를 뒤로하고 세상에 작별을 고했습니다.
“60년대, 그 누구보다도 날 매료시켰던 사람이 있다. 그때 그 감정은 사랑이었던 것 같다.”
워홀의 고백에서 출발하는 <팩토리 걸>은 팩토리의 일원이거나 세즈윅 자신이 아니라
단지 ‘팩토리 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를 좇고있습니다.
쓰라리고 슬프지만 또 눈이 멀 정도로 화려했던 세즈윅의 삶을 네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았습니다.
1. 가정사
에디 세즈윅의 가정은 부유했다. 조각가이자 자선가이며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기도 했던 프랜시스 민턴 세즈윅은 남태평양철도회사 사장의 딸 앨리스 델란노 드 포레스트와 결혼했다. 집안의 권세가 권세이니 만큼 세즈윅가의 아이들은 모두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았고 매일 비타민B를 담은 주사를 맞았다. 또 세즈윅가는 당시로선 급진적으로 흑인 여성에게 법적인 자유를 안겼던 테오도르 세즈윅 판사를 비롯해 미국의 발전에 기여한 조상들을 자랑했지만 빛나는 위상과 달리 정신병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지니기도 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 역시 정신병을 앓은 적이 있어 의사가 그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 그럼에도 그들은 다섯 딸과 세 아들을 뒀으며 마약을 남용해 죽음에 이른 에디 외에도 그의 오빠들인 민티와 바비 또한 정신병을 앓다 자살과 교통사고로 삶을 등졌다.
2. 앤디 워홀과 밥 딜런
래드클리프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지적이고 아름다우며 자유로운 에디 세즈윅에 앤디 워홀은 분명 매혹됐다. <말>(1965)과 <비닐>(1965)에서 함께 작업한 이후 워홀은 세즈윅을 “팩토리의 여왕으로 만들겠다” 공공연히 선포했다. 이어 세즈윅의 대학 친구인 척 웨인이 워홀의 시나리오작가가 되면서 워홀과 세즈윅, 웨인 삼총사는 <뷰티 넘버 투>(1965)를 완성했다. 1965년 7월 처음 상영된 이 작품으로 세즈윅은 갑작스레 스타덤에 올랐다. 부쩍 가까워진 워홀과 세즈윅은 똑같은 복장을 한 채 공식 석상에 나서는 등 대단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불운의 씨앗은 서서히 싹을 틔웠다. 그 사이 세즈윅은 밥 딜런를 사랑하게 됐고 술과 마약에 집착했으며 주위에선 그에게 워홀과 이별하라 권유하기 시작했다. 1966년 딜런과 사라 론스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워홀이 전하면서 그들의 사이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다.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활시설을 전전하던 세즈윅은 1971년 6월 마이클 포스트와 결혼하며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샌타바버라에서 열린 패션쇼의 파티에 참석한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3. 최후
에디 세즈윅의 사인은 진통제나 최면제로 주로 쓰이는 바르비투르산염 중독이다. 자신을 헤로인 중독자라고 몰아붙이는 사람을 만나 쫓기듯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포스트는 자신의 곁에서 꿈꾸듯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팩토리 걸>에서 그의 역할로 캐스팅된 시에나 밀러가 말했듯 세즈윅은 자신만만한 겉모습과 달리 한없이 연약한 사람이었다. 두려운 현실과 마주할 수 없었던 그는 평생을 마약에 빠져 지냈다. 남편 포스트와도 마약 중독을 치료하는 재활시설에서 처음 만났으며 한때는 마약을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몸을 섞었을 정도다. 금세 꺼져버릴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죽기 전날 파티장에서 일어났다는 일은 죽음을 앞둔 세즈윅의 담담함을 증언한다. 분위기를 돋우려는 듯 파티에 손금 읽는 사람이 불려왔다. 손금을, 특히 끊어진 생명선을 보고 흠칫 놀라는 그에게 세즈윅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알고 있어요.”
4. 음악
에디 세즈윅과 관련한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and Nico)에 실린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루 리드의 기억에 따르면 그 곡이 탄생한 배경은 이렇다. “앤디는 내가 에디 세즈윅에 대한 노래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예를 들면?’이라고 되물었고 그는 ‘오, 너는 그녀가 팜므 파탈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루’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팜므 파탈>을 썼고 우리는 그 곡을 니코에게 줬다.” 한때 뜨거운 관계였다는 밥 딜런의 앨범에도 세즈윅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있다.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Just Like a Woman)이나 <레오파드-스킨 필-박스 햇>(Leopard-Skin Pill-Box Hat)이 그것들. 반면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은 이 역시 세즈윅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루머에도 시기상 그들이 서로에게 빠져들기 전에 녹음을 마쳤다.
1965년, 섹스, 마약, 로큰롤, 모든 혼란의 중심 뉴욕. 캠벨수프를 이용한 파격적인 전시로 현대 예술의 개념을 뒤흔든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한 사교파티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 오드리 헵번을 꿈꾸며 뉴욕으로 건너와 패션모델을 하고 있는 그녀는 이제껏 발견할 수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앤디는 그녀가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예술의 뮤즈가 될 것을 직감한다.
앤디는 에디를 자신의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팩토리'로 초대한다. 그의 실험영화 주연으로 발탁된 에디는 그가 창조하는 예술의 동반자이자 뮤즈로서 순식간에 유명해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에디는 자신이 피사체일뿐, 팩토리의 일원은 아니라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런 그녀 앞에 빌리(헤이든 크리스텐슨)라는 록스타가 나타나는데....
<팩토리 걸> 예고편
앤디 워홀과 에디 세즈윅.
그들 사이에는 많은 일화와 세즈윅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이 있는데요,
그 중 몇 가지를 가져와봤습니다:)
1.세즈윅이 밥 딜런을 만난 건 앤디 워홀을 만나기 이전이었다!
세즈윅이 워홀을 만난 시점은 1965년 1월이다. 하지만 세즈윅이 밥 딜런을 만난 것은 1964년 12월의 일이다. 하지만 이 때 딜런은 벌써 훗날 그의 부인이 될 사라 라운디스와 첼시 호텔에서 동거 중이었고 이전 애인인 조앤 바에즈와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앤디 워홀을 만나고 난 후에도 세즈윅과 딜런의 친구 관계는 계속 유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에디 세즈윅의 진정한 사랑은 바로 밥 딜런의 로드 매니져, 밥 뉴버스(누워스)(Bobby Neuwirth)였다.
세즈윅의 진정한 로맨스는 딜런의 로드 매니져인 뉴버스와 꽃폈다. 워홀과의 결별, 딜런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고통 받는 세즈윅이 마약에 빠지며 자신을 해친 결과, 뉴버스와의 로맨스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3.진져맨 레스토랑 사건, 1966년 2월.
결국 세즈윅의 사랑은 딜런의 로드 매니져였지만 딜런과의 로맨스 자체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분명 세즈윅은 딜런에게 푹 빠져 있었고 워홀을 비롯해 팩토리 멤버들도 벌써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딜런이 세즈윅을 만나기 한 달 전에 벌써 딜런은 로운디스와 비밀리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워홀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져맨 레스토랑에서 (영화에서 "Andy, You funed me up!!"을 외치던) 세즈윅에게 워홀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게 된다. "에디, 딜런이 지금까지 유부남이었던 거 아니?"
4.Beauty No.2
영화에서 워홀이 질투심과 배신감에 넘쳐 영화를 찍으며 세즈윅에게 심리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씬이 나오는데 이 영화가 바로 Beauty No.2이다. 이 영화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High class society에서 온 그녀의 배경을 그대로 투영시켜 그녀의 정신분열적 고통을 이끌어 내는 장면이다. 분명 이것은 정신분석학적 치료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이고 위험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워홀의 작품 중 가장 큰 찬사를 이끌어내는 아이러니컬한 사건이었다.
5.50불을 건네준 워홀, 진정 그는 돈이 없었던 것일까?
딜런의 패거리들은 줄기차게 세즈윅에게 워홀이 그녀를 소모품으로 이용할 뿐이고 그의 영화는 충분한 경제적 이윤을 남기고 있다고 설득했고, 세즈윅은 이 말에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지는 것은 (보시다시피 워홀의 영화는 상업적인 영화가 아니라 세인의 관심을 끌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 돈벌이가 시원찮았다.
6.밥 딜런과 앤디 워홀의 팩토리에서의 만남. 그 진상은?
영화에서와는 달리 오히려 팩토리 멤버들이 더 들떠있었다. 워홀은 지하실에 처박혀 딜런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고민하고 있었고 모두들 청소하랴 뭐하랴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 한다. 아무래도 밥 딜런의 존재감이 너무 절대적이었는지라. 결국 밥 딜런은 팩토리 전통의 앤디 워홀 스크린 테스트에 응했지만 카메라가 컷 하기 전에 "안해"라고 자리를 떠버린 유일한 위인으로 기록된다. 참고로 앤디 워홀의 스크린 테스트 시리즈는 미술사적으로 귀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또한 워홀은 고심한 끝에 자신이 만든 엘비스 프레슬리 실버 스크린을 선물로 주었고 딜런을 이를 가져갔지만 훗날 다트 판으로 사용했다는 둥 자신의 로드 매니져가 가지고 있었던 낡은 소파와 바꿀만한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명 딜런은 앤디 워홀을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것이 반증하고 있다.
7.세즈윅이 자신의 방을 태워버린 첼시 호텔은 대체 어떤 곳인가?
첼시 호텔은 뉴욕에서 역사가 깊은 곳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롱텀 스테이를 주로 했으며 이는 유명하고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이곳을 지나쳐 갔기 때문이다. 세즈윅은 이곳에서 별종으로 통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기간 머무른 이들 중 몇몇만 열거하자면 아서 클락 (2001:우주 오디세이의 작가), 알렌 진버그 (60년대 히피 문화의 선두주자), 마크 트웨인,
레오나드 코헨, 아서 밀러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저자), 윌리엄 버로우즈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 시몬 데 보바르와 그의 남편 사르트르 (프랑스 철학), 스탠리 큐브릭 (2001년 우주 오디세이 감독), 밀러스 포만 감독, 에단 호크, 우마 서먼, 데니스 호퍼, 제인 폰다, 페티 스마이스, 러몬즈, 에디스 피아프, 밥 딜런, 제니스 죠플린, 시드 비셔스 (섹스 피스톨즈의 리더), 러프스 웨인라이트, 지미 헨드릭스 등이 있다.
이는 첼시 호텔이 전 세계 지성인들의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앤디 워홀은 첼시 걸즈란 영화를 제작 했는데 이 첼시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는 여성들을 다룬 영화로 최초의 상업적으로 히트한 작품으로 알려진다. 세즈윅도 이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가 발표 될 때 쯤 워홀과 결별한 상태였고, 자신을 편집에서 제외시켜 달라 통보했으며, 워홀은 이에 따라 세즈윅 씬을 잘라버렸다.
[유익한글]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그의 뮤즈(muse)들 +전시 추천
안녕하세요.
예술가들과 함께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많은 뮤즈들도 존재하는데요,
앤디 워홀 또한 많은 뮤즈들과 함께했고,
그 중 워홀의 뮤즈로 잘 알려진 에디 세즈윅, 장 미셸 바스키아는 정말 유명하죠:)
오늘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에디 세즈윅입니다.
Edie Sedgwick (1943.4.20.-1971.11.16)
모델 겸 영화배우로 ‘앤디워홀의 뮤즈’ 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1960년대의 열광, 패션아이콘이 되었던 에디 세즈윅.
에디 세즈윅과 앤디워홀은 한 갤러리에서 처음 만나게 되고
앤디워홀은 그녀를 본 순간 ‘아주 아름답군요’ 라는 말을 첫마디로 내뱉었다고 합니다.
짧은 머리와, 가녀린 몸, 큰 귀걸이, 미니원피스, 레깅스 등은 그녀의 표상하는 아이콘이었으며, 워홀과 세즈윅은 우정, 사랑을 초월한 깊은 정신적 유대감을 가지고
워홀의 factory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후에 세즈윅이 빌리 퀸과 사랑에 빠지고, 이를 질투해서인지 워홀은
세즈윅에게 상처를 주는(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기억을 자극할만한 영화를 촬영하고,
둘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맙니다.
앤디 워홀의 뮤즈, 에디 세즈윅.
타인에게 영감을 주되 자신을 위한 불꽃은 채 피워 올리지 못했던 다른 여성 예술가들처럼
워홀과 갈라선 세즈윅은 스물여덟 해를 뒤로하고 세상에 작별을 고했습니다.
“60년대, 그 누구보다도 날 매료시켰던 사람이 있다. 그때 그 감정은 사랑이었던 것 같다.”
워홀의 고백에서 출발하는 <팩토리 걸>은 팩토리의 일원이거나 세즈윅 자신이 아니라
단지 ‘팩토리 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를 좇고있습니다.
쓰라리고 슬프지만 또 눈이 멀 정도로 화려했던 세즈윅의 삶을 네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았습니다.
1. 가정사
에디 세즈윅의 가정은 부유했다. 조각가이자 자선가이며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기도 했던 프랜시스 민턴 세즈윅은 남태평양철도회사 사장의 딸 앨리스 델란노 드 포레스트와 결혼했다. 집안의 권세가 권세이니 만큼 세즈윅가의 아이들은 모두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았고 매일 비타민B를 담은 주사를 맞았다. 또 세즈윅가는 당시로선 급진적으로 흑인 여성에게 법적인 자유를 안겼던 테오도르 세즈윅 판사를 비롯해 미국의 발전에 기여한 조상들을 자랑했지만 빛나는 위상과 달리 정신병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지니기도 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 역시 정신병을 앓은 적이 있어 의사가 그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 그럼에도 그들은 다섯 딸과 세 아들을 뒀으며 마약을 남용해 죽음에 이른 에디 외에도 그의 오빠들인 민티와 바비 또한 정신병을 앓다 자살과 교통사고로 삶을 등졌다.
2. 앤디 워홀과 밥 딜런
래드클리프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지적이고 아름다우며 자유로운 에디 세즈윅에 앤디 워홀은 분명 매혹됐다. <말>(1965)과 <비닐>(1965)에서 함께 작업한 이후 워홀은 세즈윅을 “팩토리의 여왕으로 만들겠다” 공공연히 선포했다. 이어 세즈윅의 대학 친구인 척 웨인이 워홀의 시나리오작가가 되면서 워홀과 세즈윅, 웨인 삼총사는 <뷰티 넘버 투>(1965)를 완성했다. 1965년 7월 처음 상영된 이 작품으로 세즈윅은 갑작스레 스타덤에 올랐다. 부쩍 가까워진 워홀과 세즈윅은 똑같은 복장을 한 채 공식 석상에 나서는 등 대단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불운의 씨앗은 서서히 싹을 틔웠다. 그 사이 세즈윅은 밥 딜런를 사랑하게 됐고 술과 마약에 집착했으며 주위에선 그에게 워홀과 이별하라 권유하기 시작했다. 1966년 딜런과 사라 론스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워홀이 전하면서 그들의 사이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다.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활시설을 전전하던 세즈윅은 1971년 6월 마이클 포스트와 결혼하며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샌타바버라에서 열린 패션쇼의 파티에 참석한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3. 최후
에디 세즈윅의 사인은 진통제나 최면제로 주로 쓰이는 바르비투르산염 중독이다. 자신을 헤로인 중독자라고 몰아붙이는 사람을 만나 쫓기듯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포스트는 자신의 곁에서 꿈꾸듯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팩토리 걸>에서 그의 역할로 캐스팅된 시에나 밀러가 말했듯 세즈윅은 자신만만한 겉모습과 달리 한없이 연약한 사람이었다. 두려운 현실과 마주할 수 없었던 그는 평생을 마약에 빠져 지냈다. 남편 포스트와도 마약 중독을 치료하는 재활시설에서 처음 만났으며 한때는 마약을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몸을 섞었을 정도다. 금세 꺼져버릴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죽기 전날 파티장에서 일어났다는 일은 죽음을 앞둔 세즈윅의 담담함을 증언한다. 분위기를 돋우려는 듯 파티에 손금 읽는 사람이 불려왔다. 손금을, 특히 끊어진 생명선을 보고 흠칫 놀라는 그에게 세즈윅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알고 있어요.”
4. 음악
에디 세즈윅과 관련한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and Nico)에 실린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루 리드의 기억에 따르면 그 곡이 탄생한 배경은 이렇다. “앤디는 내가 에디 세즈윅에 대한 노래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예를 들면?’이라고 되물었고 그는 ‘오, 너는 그녀가 팜므 파탈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루’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팜므 파탈>을 썼고 우리는 그 곡을 니코에게 줬다.” 한때 뜨거운 관계였다는 밥 딜런의 앨범에도 세즈윅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있다.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Just Like a Woman)이나 <레오파드-스킨 필-박스 햇>(Leopard-Skin Pill-Box Hat)이 그것들. 반면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은 이 역시 세즈윅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루머에도 시기상 그들이 서로에게 빠져들기 전에 녹음을 마쳤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6670]
에디 세즈윅을 다룬 영화 <팩토리 걸>은 앤디 워홀과 에디 세즈윅의 관계를
60년대의 음악, 패션, 화보, 영화, 그들만의 파티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고 세밀한 배경 안에서
절망적인 영화 상품으로 되살려냅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부잣집 아가씨가 몰락하는 과정은
예술 때문이 아니라 결핍 때문이고, 그 몰락의 끝은 결핍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돈’과 ‘사랑’의 결핍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조지 하이켄루퍼 감독은 흑백과 컬러를 넘나들며 영화 장면들을 구성합니다.
당대의 인터뷰, 신문 기사, 잡지 화보, 세즈윅이 주연한 팩토리의 영화들은
마치 다큐멘터리나 전시회를 보듯 충분히 재현적이며,
세즈윅이 활짝 피었다가 사위어가는 유흥과 방종에 중독된 절망의 드라마에
딱 맞게 설명적입니다.
<팩토리걸>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6235영화 <팩토리 걸> 감독 조지 하이켄루퍼 출연 시에나 밀러, 가이 피어스 개봉 2006
<팩토리걸의 줄거리 -네이버 영화>
앤디 워홀과 그의 뮤즈, 그들의 매혹적인 기억
1965년, 섹스, 마약, 로큰롤, 모든 혼란의 중심 뉴욕. 캠벨수프를 이용한 파격적인 전시로 현대 예술의 개념을 뒤흔든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한 사교파티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 오드리 헵번을 꿈꾸며 뉴욕으로 건너와 패션모델을 하고 있는 그녀는 이제껏 발견할 수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앤디는 그녀가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예술의 뮤즈가 될 것을 직감한다.
앤디는 에디를 자신의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팩토리'로 초대한다. 그의 실험영화 주연으로 발탁된 에디는 그가 창조하는 예술의 동반자이자 뮤즈로서 순식간에 유명해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에디는 자신이 피사체일뿐, 팩토리의 일원은 아니라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런 그녀 앞에 빌리(헤이든 크리스텐슨)라는 록스타가 나타나는데....
<팩토리 걸> 예고편
앤디 워홀과 에디 세즈윅.
그들 사이에는 많은 일화와 세즈윅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이 있는데요,
그 중 몇 가지를 가져와봤습니다:)
1.세즈윅이 밥 딜런을 만난 건 앤디 워홀을 만나기 이전이었다!
세즈윅이 워홀을 만난 시점은 1965년 1월이다. 하지만 세즈윅이 밥 딜런을 만난 것은 1964년 12월의 일이다. 하지만 이 때 딜런은 벌써 훗날 그의 부인이 될 사라 라운디스와 첼시 호텔에서 동거 중이었고 이전 애인인 조앤 바에즈와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앤디 워홀을 만나고 난 후에도 세즈윅과 딜런의 친구 관계는 계속 유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에디 세즈윅의 진정한 사랑은 바로 밥 딜런의 로드 매니져, 밥 뉴버스(누워스)(Bobby Neuwirth)였다.
세즈윅의 진정한 로맨스는 딜런의 로드 매니져인 뉴버스와 꽃폈다. 워홀과의 결별, 딜런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고통 받는 세즈윅이 마약에 빠지며 자신을 해친 결과, 뉴버스와의 로맨스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3.진져맨 레스토랑 사건, 1966년 2월.
결국 세즈윅의 사랑은 딜런의 로드 매니져였지만 딜런과의 로맨스 자체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분명 세즈윅은 딜런에게 푹 빠져 있었고 워홀을 비롯해 팩토리 멤버들도 벌써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딜런이 세즈윅을 만나기 한 달 전에 벌써 딜런은 로운디스와 비밀리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워홀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져맨 레스토랑에서 (영화에서 "Andy, You funed me up!!"을 외치던) 세즈윅에게 워홀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게 된다. "에디, 딜런이 지금까지 유부남이었던 거 아니?"
4.Beauty No.2
영화에서 워홀이 질투심과 배신감에 넘쳐 영화를 찍으며 세즈윅에게 심리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씬이 나오는데 이 영화가 바로 Beauty No.2이다. 이 영화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High class society에서 온 그녀의 배경을 그대로 투영시켜 그녀의 정신분열적 고통을 이끌어 내는 장면이다. 분명 이것은 정신분석학적 치료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이고 위험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워홀의 작품 중 가장 큰 찬사를 이끌어내는 아이러니컬한 사건이었다.
5.50불을 건네준 워홀, 진정 그는 돈이 없었던 것일까?
딜런의 패거리들은 줄기차게 세즈윅에게 워홀이 그녀를 소모품으로 이용할 뿐이고 그의 영화는 충분한 경제적 이윤을 남기고 있다고 설득했고, 세즈윅은 이 말에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지는 것은 (보시다시피 워홀의 영화는 상업적인 영화가 아니라 세인의 관심을 끌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 돈벌이가 시원찮았다.
6.밥 딜런과 앤디 워홀의 팩토리에서의 만남. 그 진상은?
영화에서와는 달리 오히려 팩토리 멤버들이 더 들떠있었다. 워홀은 지하실에 처박혀 딜런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고민하고 있었고 모두들 청소하랴 뭐하랴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 한다. 아무래도 밥 딜런의 존재감이 너무 절대적이었는지라. 결국 밥 딜런은 팩토리 전통의 앤디 워홀 스크린 테스트에 응했지만 카메라가 컷 하기 전에 "안해"라고 자리를 떠버린 유일한 위인으로 기록된다. 참고로 앤디 워홀의 스크린 테스트 시리즈는 미술사적으로 귀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또한 워홀은 고심한 끝에 자신이 만든 엘비스 프레슬리 실버 스크린을 선물로 주었고 딜런을 이를 가져갔지만 훗날 다트 판으로 사용했다는 둥 자신의 로드 매니져가 가지고 있었던 낡은 소파와 바꿀만한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명 딜런은 앤디 워홀을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것이 반증하고 있다.
7.세즈윅이 자신의 방을 태워버린 첼시 호텔은 대체 어떤 곳인가?
첼시 호텔은 뉴욕에서 역사가 깊은 곳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롱텀 스테이를 주로 했으며 이는 유명하고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이곳을 지나쳐 갔기 때문이다. 세즈윅은 이곳에서 별종으로 통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기간 머무른 이들 중 몇몇만 열거하자면 아서 클락 (2001:우주 오디세이의 작가), 알렌 진버그 (60년대 히피 문화의 선두주자), 마크 트웨인,
레오나드 코헨, 아서 밀러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저자), 윌리엄 버로우즈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 시몬 데 보바르와 그의 남편 사르트르 (프랑스 철학), 스탠리 큐브릭 (2001년 우주 오디세이 감독), 밀러스 포만 감독, 에단 호크, 우마 서먼, 데니스 호퍼, 제인 폰다, 페티 스마이스, 러몬즈, 에디스 피아프, 밥 딜런, 제니스 죠플린, 시드 비셔스 (섹스 피스톨즈의 리더), 러프스 웨인라이트, 지미 헨드릭스 등이 있다.
이는 첼시 호텔이 전 세계 지성인들의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앤디 워홀은 첼시 걸즈란 영화를 제작 했는데 이 첼시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는 여성들을 다룬 영화로 최초의 상업적으로 히트한 작품으로 알려진다. 세즈윅도 이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가 발표 될 때 쯤 워홀과 결별한 상태였고, 자신을 편집에서 제외시켜 달라 통보했으며, 워홀은 이에 따라 세즈윅 씬을 잘라버렸다.
http://electronica.tistory.com/entry/%EC%97%90%EB%94%94-%EC%84%B8%EC%A6%88%EC%9C%85%EC%97%90-%EA%B4%80%ED%95%9C-%EB%AA%87-%EA%B0%80%EC%A7%80-%EC%82%AC%EC%8B%A4%EB%93%A4
앤디 워홀의 뮤즈 중에는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있었는데요,
앤디 워홀과 그의 뮤즈 바스키아에 대한 이야기들도 흥미롭습니다:)
Jean Michel Basquiat(1960.12.22-1988.8.12)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뮤즈는 일반적으로 이성의 연인이었으나,
앤디 워홀의 여러 뮤즈 중 장 미셸 바스키아는 동성인 동료이자 라이벌이었습니다.
‘흑인 피카소’로도 불리는 그는 미국의 낙서화가로, 인종주의, 흑인, 만화, 죽음 등을
주제로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고,
낙서처럼 보이는 것들을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데에 그의 작품의 의의가 있습니다.
‘그래피티’라는 예술의 한 분야를 새롭게 정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어릴 적 엄마와 함께 갔던 미술관 MOMA에서 자신의 엄마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그는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점차 자라며 방황 및 가출을 하게 되는데, 노숙을 하며 엽서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당시 노숙을 했던 경험은 그의 그림에서 다양한 기호와 표시로 남게 됩니다.
한편, 그는 친구인 알 디아스와 전철과 건물 등에 자유롭게 낙서하는
거리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그림으로 더욱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의 소유자였고,
당시 가장 유명했던 앤디 워홀을 동경하던 바스키다는 워홀이 한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엽서를 핑계로 그와 친해집니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엽서를 1달러에 구입하였고, 그로부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1970년대 뉴욕의 미술시장 성장과 더불어
앤디워홀과 함께 바스키아도 크나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그래피티는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고, 이후 두 작가가 함께
승승장구하며 공동전시를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스키아에게 워홀은 동경에 대상이자 많은 영감을 주는 존재였고,
워홀 또한 바스키아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둘은 함께 유명세와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바스키아는 피렌체, 기도하는 사람, 천국, 흑인, 재즈 등 다양한 작품들로 인정을 받았지만
흑인이라는 차별이 아직 젊었던 그에겐 많은 스트레스였고,
그에 대한 인종차별, 앤디워홀과의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인해
둘의 관계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 멘토와 멘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던 두 작가였으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많은 의지를 하던 워홀이 1987년 2월 22일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심적으로 힘들어하던 바스키아는 결국 마약에 빠지게 되고,
1988년 8월 12일 뉴욕에서 헤로인 중독으로 27세에 요절하여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관계는 결국 끝이 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예술적 우정으로 서로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현대미술계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습니다.
http://jmbasquiat.new21.org/
http://dangerousminds.net/comments/andy_warhol_and_jean_michel_basquiat_in_1986
바스키아의 일생을 다룬 영화 <바스키아 (Basquiat, 1996)>
앤디 워홀과 가장 잘 알려진 뮤즈 에디 세즈윅, 장 미셸 바스키아의 이야기였습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그의 이야기들을 직접 눈으로 느낄 수 있는 좋은 전시회를 추천해드리고싶어요bbb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6월 6일부터 시작된 [ANDY WARHOL LIVE]전은 9월 27일까지
약 4개월 간, 앤디 워홀의 대표 작품 400여점이 전시되며,
30년만에 발견된 작품들 또한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고 합니다.
티켓 할인이 가능한 혜택들도 있다고하니, 더운 여름 눈이 즐거워지는 문화생활하러 가봅시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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