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싱글파파 입니다.

woo2015.06.19
조회2,137

안녕하세요. 네이트는 회원가입도 하지 않고 눈팅만 하던 31세 남성입니다.

 

많은글을 보면서 웃기도하고,,화나기도 하고 그런 평범한 .. 헤헤.

 

오늘은 꿈자리가 워낙 안 좋아서 눈이 일찍 떠졌어요,,오늘 비번이라 출근 늦게 해도 되는데!

 

꼭 이런날 눈이 잘 떠지더라구요..

 

저도 오늘은 네이트 톡톡에 저의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다소 글이 길 수도 있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이라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저의 이야기를,,

 

 

 

 

저는 사고뭉치 아이였습니다..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고

 

제가 태어난지 채 100일이 되지 않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요. 지혜롭고 강인한 분이시라 아버지가 내곁에 없음을

 

원망해본적은 이제껏 살아오며 한 손가락 안에 꼽는군요^^

 

운동을 좋아했고 공부는 잘하진 않았지만 생활기록부에 항상 명랑하고 운동신경이 좋다는 글은

 

끊기지 않던 저였지만 나이를 한살한살 먹어가고,,

 

 요즈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것에 많은 회의감을 느낀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저는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었죠.

 

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관심도 한차 많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돈은 벌고 싶었는데

 

마땅한곳이 없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첫 직장?이었고

 

나름 열심히 했고 사장님도 좋은분이라 꽤 오랫동안 일하게 되었지요,

 

편의점은 갈수록 장사가 잘되었고, 이제는 저 혼자서는 손님응대를 못할만큼 가게도 커지고,

 

손님도 많아져서 사장님이 여직원을 구하셨습니다.그때 제가 21살 이었고 새로 온 여직원은

 

20살 이었죠. 그 당시에 그 아이를 처음본 제 느낌은..이런 시골에 저렇게 예쁜 아이도 있구나,,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작은 도시라, 옆집 숟가락이 몇개인지도 알만한 동네에서

 

왜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 라는 생각도 들었었죠. 얼굴도 저의 주먹만했고 몸매도

 

아주 얄상해서 그때 당시 제 또래 남자라면 싫어할수는 없는..그런 여자 아이 였습니다.

 

약간 성격이 소극적이고 어두운면은 있었던것 같지만 제 농담에도 잘 웃어주고,

 

그때 당시 상남자였던 저의 성격엔 나약해보이기만 하는 그 여자애를 좋아하게 되었고..

 

어렵사리 대쉬하여 커플이 됐습니다. 그 뒤로는 항상 붙어다녔습니다..

 

저는 낮12시부터 6시까지 근무, 그 친구는 오전2시부터 저녁8시까지 근무하면서

 

서로 퇴근시간도 잊은채 데이트겸 일을 했었죠..제 인생에서 행복했던때를 뽑으라면,

 

저 때를 뽑을수도 있겠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 친구도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습니다.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페인트공 이었고,

 

어머니는 그 친구가 어릴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뒤로 한번인가 밖에 못봤다고 했으니깐요.

 

그런 슬픈 가정사 때문에 서로를 더 이해하고 아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사귄지 4개월정도? 됐을때 일입니다.

 

 그 친구는 임신중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관계를 가진적이 없는데..무슨말이지?

 

싶어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그 당시 그 아이는 동X신기의 광팬이었고 학교도 많이 빼먹고

 

서울등지를 그 가수들 공연을 쫓아다니며 지낼때 만났던 남자의 아이라고 하더군요...

 

이름만 알뿐, 연락처도 집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일단 말을 아끼고, 집에 돌아가서 아주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친구를 여기서 그만 만나야할지, 아니면 아이를 지우자고 설득해야하는지,

 

아이를 지우자고 설득해보았으나, 20살먹은 아이들끼리 산부인과를 가서 그런건지,

 

사실이 그런건지. 의사선생님이 지울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수술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이 말로는, 자기도 몰랐고 배가 계속 부르고 생리를 안해서 테스트를 해보고 알았다고..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요? ..

 

저는 길고 긴 고민 끝에, 21살 아이의 판단력은 그다지 신뢰할수 있는것이 아니죠..^^;

 

그 아이를 제 호적에 올려서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친놈 아니냐구요?

 

글쎄요..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무참하게 버릴수는 없다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던것 같네요..

 

차라리 성한 몸이라면 이별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머니께 거짓말을 했고 어머니는 많이 당황하시고 저를 다그치셨지만

 

이내 받아들이고는 없는 형편에 이것저것 많이 돈도 보태주시고, 아버지와 둘이 살아서

 

김치에 밥도 제대로 못먹던 그 친구 맛있는것도 많이 해 주시고...

 

회상하면서도 느끼고 그때도 생각은 했지만 전 언젠가 천벌 받을것 같군요.

 

지금도 저희 어머니께 많이 죄송스럽고 못난 아들입니다..

 

그렇게 그 아이를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저희집에서 같이 살게 될 때쯤.

 

저는 군대에 가게 됩니다.

 

워낙 시골에 살았던지라, 근처에 있는 관공서로 공익근무를 할 수도 있었지만

 

저희 큰형이 입대해야했던 당시 실질적인 집안의 가장노릇을 하고 있었기에 면제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선 아들이 둘인데 하나는 군복입은 모습이 꼭 보고싶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기에

 

전 현역으로 자원입대를 하고, 대전에 있는 병무청에서 신검도 1등급 받고..

 

아주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입대하였습니다. 훈련소에서 자대배치를 받는 4주간의 과정에서,

 

어머니께서 군청에 혼인신고도 해주셨고, 제가 자대배치를 받고 100일 휴가를 나오기전에

 

아이를 출산해서 출생신고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훈련소에서부터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그 친구가 보고싶고 걱정도 되고, 어머니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그렇게 100일 휴가를 기다리고 기다려서 휴가 나와서,,군복입고 어머니와 사진도 찍고,,

 

제 딸아이로 나라에 신고한 아이 얼굴도 보구..의미있는 휴가를 보내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제 인생을 바꾼 사건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어머니와, 누나, 애기엄마와 애기 넷이서 살았는데요. 애기엄마는 집에 있고..

 

어머니와 누나는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옆집 아주머니가 저희 어머니께

 

전화를 한것이지요. 아이가 어디 아프냐, 시끄러울만큼 오랫동안 우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느냐,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없다는 내용의 전화를 한것입니다.어머니는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집에 오셨었고. 방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

 

아이 돌반지서부터,비싸진 않지만 어머니의 금장신구들..현금100만원이 조금넘는것들은

 

모두 사라지고..정말 덩그러니 아이만 남아있었습니다.어머니는 너무 허탈하여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셨다고,,아이 울음소리도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으셨다며..

 

아팠던 그 순간을 말씀하시곤 했습니다..군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 애기엄마가 가출했단

 

얘기를 입밖으로 꺼내질 못하셔서 편지로 전화로 눈물만 삼키시던 불쌍한 내 어머니..

 

1차 휴가를 나와서 사실을 알게 되고 저는 제정신일수가 없었습니다. 꿈인가 싶고,

 

군인의 신분으로 선뜻 어떻게 어디부터 무슨일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어머니앞에선 너무 죄송해서 조용했던 뒷동산에 올라가 정말 많이 울부짖었습니다.

 

9박10일이었던 휴가중 일주일을 패닉상태에서 보내고.애기엄마를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다 알게된 소식은 주소도 아직 생각나는군요. 서울시 서대문구 독립문역 근처 홍제동

 

넘어가는 길목의 고시원에서 아는 여동생과 살고 있었고 여전히 동X신기인가 하는 가수를

 

쫓아다니고 있다고..그 길로 만나러 갔습니다. 태어나서 서울을 2번째로 가봤습니다.

 

지하철과 번호적힌 버스가 너무 생소해서,주소만 들고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귀가 찢어질만큼 춥던 겨울날 지내고 있다는 고시원 계단에서, 그 앞에서 더 보태지 않고

 

27시간인가를 기다려 만날 수 있었습니다.고시원 총무라는 분이 들어와서 난로라도 잠깐 쬐고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같이 지내고 있다는 여동생과 오더군요..근데 이상했습니다. 그 여동생이라는 분이

 

절 무슨 경멸하듯이..벌레 쳐다보듯이 하더군요?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에 그러려니 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여동생에게는 남의 자식인것도 말 안하고 아이를 임신시켜놓구

무책임하게 입대해버린 남자로 얘기했더라구요..

 

얘기했습니다. 돌아가자고. 이러지 말아달라고 사정 했습니다.

어머니도 책임 묻지 않는다고 했다. 누나는 곧 결혼날짜도 잡혔고 곧 시집갈것이니

집에 들어오는게 어렵더라도 아이를 봐서 이러면 안된다고 설득해봤습니다.

 

흔히들 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자기 배 아파 낳은 하늘이 내린 자식과 부모의 연은 끊을수없다는말.

저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 친구도 아이를 그리워할줄 알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촌이라 답답해서 싫다고,하루종일 보채는 아이 감당해낼 자신도 없고, 키우기도 싫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그랬을수도 있겠다..이해를 해보려 노력하는척은 할 수 있으나,

 

그때 당시엔 정말 그 친구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고,이해하기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자꾸 돌아가라는 말에, 손에서 떠나보내면 언제또 다시 만날까,어머니께는 뭐라고 말씀드릴까.

 

걱정이되어 어떻게든 데려가려는 저와 가기싫은 그 친구와 씨름을하다가 밤이 되어서

 

근처에 모텔방을 잡아서 그 친구와 들어갔습니다. 사정했습니다.

 

너무많은 눈물 흘리며 사정했지만 제 사정을 들으면서도 그냥 자버리던 그 친구를 깨우고 깨우고

 

또 사정하고 사정했습니다.군대는 누구나 가야하지만, 나도 자원입대를 후회한다.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난 죽고 싶은 심정 여러번 억누르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저의 심정을 토해냈지만.소용 없었습니다..

 

그래요..나 같아도 돌아가기 싫었을수도 있겠단 생각을 합니다..

 

그 아이는 여동생고시원에 가서 잠깐 옷을 갈아입고 온다고 떠난 뒷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로 7년이상 못보고 지냈던것 같군요.

 

군대에서 정말 죽고싶은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잠을 편하게 자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으며,

 

예민해진 신경탓에 동료들을 때려 영창도 갔습니다.

 

조용한곳에 가서 목을맬까.사격훈련할때 내 머리에 쏠까.

 

하지만 끝까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어머니와 혼자남겨있을 그 아이 생각에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영창을 다녀온탓에 전역일은 14일 미루어졌지만

 

다행히 별탈없이 전역은 했지만..그 후가 더 괴로웠던것 같습니다.

 

형과 누나에겐 병신취급받는 동생이 되야 했지만,사실을 말할순 없었고.

 

어머니께 부담주기싫어 남들이 잘 안하는 힘들고 위험한일을 했습니다.

돈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돈도 성실하게 모으고, 회사에서 인정받을 무렵. 사고를 당했습니다.

 

26살 6월 16일. 15일이 월급이었던 저희회사. 2교대 였던 15일 오전에 야간근무를 마치고,

 

저녁에 일어나서 입금되있던 돈에서 어머니께 용돈도 드리고,적금통장에 송금하고

 

기분좋게 출근했는데.. 왼손가락 3,4수지가 반마디씩 잘려나가는 절단사고를 당했습니다.

 

처음엔 살짝 찧은줄 알고 장갑을 벗었는데 피가 분수처럼 터지고 피범벅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짧아진것 같은 제 손가락을 보고 기절했습니다.

 

눈떠보니 서울의 큰병원에서 어머니는 제 팔을 주무르고 계셨고..저희 형은 아무말없이 앉아만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누나도 울고불고 난리가나서 그날저녁 바로 오구,,ㅎㅎㅎ

 

잘려진 손가락은 기계에 씹혀서 붙일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고. 병원에서도 참 많이 힘들었었죠,,

 

처음에는 손가락이 잘려나갔단 현실이 실감되지 않아 무덤덤했지만. 화장실을 가서도,

 

병원생활을 할때도. 오른손만 써야했던 제 모습이 보이면서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나에게만 잔인한걸까..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 우울증이 오기도 했습니다..그러던 중 제가 겪고 있는 상황을

 

계속 앓다가는 병원옥상에서 뛰어내리려던 제 모습을 발견했기에.어머니께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3일 밤낮을 누워서 울기만 하셨습니다..

 

멍청한놈이라고 등신같은놈이라고.. 욕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말하고나니,,

 

얼마나 마음이 나아지는지...이제 저의 비밀을 어머니와 저만 간직하기로 했습니다..

 

회사에선 제대로 된 보상을 해줄리 만무했고,,앞으로가 더 많이 막막해졌습니다.

 

건강한 내 몸. 자신감으로 내가 못하는 일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버텨왔는데.

 

무슨일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남들에게 왼손을 보여주기도 싫었습니다.

 

숨기게 되니까 자꾸 내손만 쳐다보는것같고..그럴때마다 고개숙여서 시선을 피해야하는..

 

에구 말하다보니 너무 속상하네요.^^

 

애기엄마를 만나 이혼을 했습니다..어머니는 못미덥고 정이 없어도 은근히 같이 살기를

 

바라셨지만 저에게는 말씀하지 못하셨습니다..그럴수 없다는걸 아셨기 때문일까요..

 

그 친구는 저와 떨어져 지내던중에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 친구도 어려웠던 시간을 보냈다 라는 간단한 대화를 하고 협의이혼 신청하여,

 

도장까지 모두 찍었습니다..각각 친권은 그 친구가 양육권은 제가 갖고

 

양육비도 한달에 20만원 정도만 합의를 봐서 받기로했는데 처음에 2번주고

 

연락처를 바꾸는 바람에 지금도 아무런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입니다..

 

아이가 궁금하지 않느냐,,너를많이 닮았단 말에는 대답도 하지않고 시간이 없단말만 하였으니,

 

참으로 무심한 친구입니다..그 후로 

 

형과 누나는 제게 아이를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으면 더 늦기전에 입양이나,기타 다른방법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제가 형이나 누나였어도 그랬을것 같아요..

 

저도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한테 정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나와 전혀닮지 않은 외모에.

 

애기엄마를..그것도 참 안좋은부분들만 닮은것 같아 심지어는 미울때도 있었지요.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저도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죄송합니다.

 

어머니와 상의를 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형이나 누나와 생각이 좀 많이 달랐습니다..당신의 4번째 자식이라고..

 

죽은 우리 큰언니가 환생해서 날 도와주러 온걸수도 있고,,너희 아버지가 온것일수 있으니,,

 

절대 보낼수 없다고. 내손으로 키운 아이이니 자격은 당신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틀린말은 아니지요..

 

저보고 복받는일 하는거라며, 넌 언젠가 천운을 받을거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며.

 

당신몸 성할때까지는 돌봐주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던것 같습니다..

 

그렇게 형과 누나에겐 답답한 동생이 되었고. 어머니에겐 의붓자식 안겨다 준 천하의

 

불효자로 산 지가 한달 모자란 10년이 되었네요.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저는 한번도 화낸적도 혼낸적도 없는데 저를 얼마나 무서워하고 피하는지...

 

아이가 엄마없이 눈치밥을 먹고 자라서, 아주 소극적이에요..하지만 천사같이 때묻지 않고

 

마음이 착한 아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모두 해결해주리라..생각했습니다.그렇게 마음이라도 편하게 가지지 않으면

도저히 맨정신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적어도 저에겐 그랬습니다.

 

 

때가되면 애기엄마가 정신을 찾고 돌아오겠지,,

 

어머니도 마음의 준비가 되면 아이를 놓아주시겠지,,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나도 다른 사랑을 할 수 있겠지,,

 

형과 누나도 나중에 사실을 알게되면 날 이해해주겠지..

 

 

정말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고뇌하고,허상뿐인 그런 생각을 해오면서 버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젠 저희 어머니가 아프세요.. 정말 산전수전 모두 겪은 저이지만 지금은 무너질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폐질환으로 인해 이른 새벽에 피를 토하셔서 응급실에 실려가신적이 있는데

 

예전에 결핵을 앓으셨던것이 문제가되어 이젠 폐가 안좋아서 위험하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어야했습니다..

 

폐는 재생 불가능한 아주 중요한 호흡기라는 상식도 저는 어머니가 아프고나서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응급조치는 했지만 언제 위험한 상황이 올지 모르니,

 

좋은것 많이 보시게하고, 좋은것 많이 드시게하라는 어이없이 결론내리는 말에

 

저희형과 얼마동안 울었는지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아직도 저는,,제 코가 석자인 철부지 막내아들인데..어머니께 무엇하나 제대로 해드린것도 없는데

 

살만하니,,애기엄마가 집을 나가고. 자리잡을만하니,,손가락이 잘리고..마음을 추스리니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합니다. 도저히 더이상 살 자신이 없네요..

 

무엇을위해 무엇을보고 희망하며 살 수 가 있겠습니까.

 

자면서도 꿈을꾸고 소리내어 우는 제 목소리에 잠이 깨어 한참을 주절거리다 갑니다...

 

쓰고나면 마음이 풀릴까..아픈사진들 모두 꺼내어 적어봤지만 더 마음이 아파오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