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낙태수술을 받은 여자

검객201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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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혐오스럽고 가슴 아픈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장이 약한 분이나 임산부, 노약자들은 패스해 주세요. 









이것은 한겨레 1998년 10월 22일 229호에서 발췌한 것으로

한 양심적인 일본인 기자에 의해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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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후세대이지만 일본이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행한 침략의 실태를 일본사회에 알리는 것이 일본인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십수년간에 걸쳐 아시아 여러나라를 방문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 600여명을 찾아가 취재했다.


그런데 취재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곳이 북한이었다. 취재교섭을 시작한 것은 1990년. 그것이 올해 4월 겨우 허가가 났다.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단독취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년 만의 일이라 한다. 니가타에서 승선한 배는 5월17일 원산항에 입항했고, 나는 약 80kg의 촬영기재를 둘러메고 부두에 내렸다.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연행돼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


(중략.....)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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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일본에서도 그나마 양심있는 소수 일본인 중 하나인 

이토 다카시 기자가 취재한 글 중 일부입니다. 

그러나 이 기사가 나간 뒤 이토 다카시 씨는 일본 우익 단체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전쟁에서 패한 뒤 후퇴하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총으로 죽이거나 

파묻거나 아니면 폭탄을 던져서 폭살시켰습니다. 

자신들에게 수치스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는 

위안부 문제가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기술한 내용은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에 적혀 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에서 교과서 검정 위원들에게

독도 관련 기술을 강화하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기술을 삭제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일본 정부나 극우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 대다수의 국민들도 자기네 일본인들을

2차 대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보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위안부 소녀상을 비하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보상을 강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인 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을 2차 대전의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한 

[8월의 광시곡]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의 배우 리차드 기어가 등장해서 

(미국 전체를 대신해서) 일본인에게 사과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웃집의 토토로]를 만든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제로센 비행기의 설계자인 호시쿠리 지로를 미화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제로센 비행기는 2차 대전 당시 자살 폭격기로 알려진 

카미카제 특공대 전투기에 사용된 비행기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많은 조선인 청년들도 억지로 태워져

죽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일본이 가해자로 보이는 그 어떠한 묘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보듯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한국이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오버하고 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일본 정부가 보상할 필요는 없다고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