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 서울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1938년 8월 어느 날 동창생들인 경숙, 영자와 함께 시내의 공원에 놀러갔다가일제놈들의 "처녀사냥"에 걸려들었다.
세명의 일본인이 달려들어 다짜고짜로 우리를 역사로 끌고갔다.
거기서 우리는 짐짝처럼 유개화차에 실렸는데 그 안에는 이미 100여명의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그제서야 일제의 "처녀사냥"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고 몸부림치며 울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본군인들은 유개화차의 문을 밖으로 잠그고 부산으로 실어갔다.
부산에 가니 수많은 여성들이 끌려와 있었다.
우리는 완전히 죄인 취급을 받으며 다시 배와 기차에 실려중국의 심양 (당시 만주의 봉천) 지방으로 끌려갔다.
"종군위안부" 집결소라고 생각되는 그곳에는 수백명의 조선여성들이 끌려와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몇놈의 망나니들이 하는짓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계획적인 조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안소"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이름을 빼앗고 일본이름을 강요하였으며 조선옷을 벗기고 일본옷을 입도록 강요하였다.
나는 같이 끌려간 처녀들과 함께 깨끗한 정조를 무참히 짓밟히고 짐승같은 일본군의 희생물이 되었다.
"위안소"에서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몸서리쳐지곤 한다.
짐승우리와도 같이 판자를 칸칸이 막은 "집"에서 매일 수십명씩 야수처럼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청춘의 넋과 육체를 여지없이 짓밟혔다.
어느 날 마당쪽에서 사살 살리라는 비명이 들려 뛰어나가보니 옆방에 있던 영자(서울에서 같이 왔었음)가 팔다리를 꽁꽁 묶이운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도려낸 젖가슴, 잘리운 왼팔을 보고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한참 후에 깨어보니 일본군은 숨도 채 지지않은 그를 울타리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달려들며 항거하자 일본군은 나의 팔을 뒤로 묶어놓고 군도뒷등으로 머리와 어깨, 잔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정신을 잃은채 물 한모금 못마시고 창고에 갇혔다가 사흘후에야 풀려나왔는데 그 때 끌려나간 영자는 소식이 없었다.
서울에서 같이 왔던 경숙이도 후에 일본군에 학살당하였다.
일본군이 지껄인것처럼 그들이 조선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도 무사했던것은 일본 정부와 군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의 "종군위안부" 강요행위로 인하여 단 한명의 자식도 없이 조카의 부양을 받고있으며 벌써 칠순을 넘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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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