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역 앞 동자동 82번지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 언니, 큰오빠와 작은 오빠가 있었다. 셋방살이로 뻔질나게 이사를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한 기억이 난다.
소공동에서 다시 다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 1945년, 내가 19살 나던 해였다. 양력
정월달이라고 기억하는데 정내회(町內會)에 있는 남자가 와서 집에서 노느니
취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집에 있으면 정신대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도 벌고 정신대에도 안 나가니 참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가 들어오시면 의논해본다고 했다.
그때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그리고는 며칠이 흘렀는데 또 그 사람이
와서는 빨리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하고 갔다. 어머니는 취직은 무슨 취직이냐고 하면서 아이구 큰일났구나, 또 이사가야겠구나 하셨다.
그러나 그때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막걸리 장사하던 것이 불법이라고
지서에 불려 들어가 혼이 나고 나오신 후로 아버지는 마땅히 일자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혼자 뭘 하시는지
겨우 밥이나 얻어와 먹고 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라도 취직해서 돈이라도 벌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밤새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몰래 짐을 싸들고 어머니가 일나가신 사이에 정내회의 그
남자를 찾아가 일본에 가서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날로 바로 그 남자와 서울역에 가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밤새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리자 그 남자는 나를 일본 남자 2명에게
넘겼다. 그때서야 더럭 겁이 났다. 그날 저녁쯤 되어 배에서
내렸다. 8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배에서 내리면서 사람들이
시모노세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배에서 내려 기차를 탔다.
온통 창이란 창은 다 막혀 있어서 대체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 이제 난 죽었구나. 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깜깜해졌다.
기차에서 내려 두 일본 남자가 나를 어느 집엔가 데리고 갔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이는 일본 남자가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아주 좋아했다. 주인 남자는 나에게 방 하나를
가리키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집안 형편을 살펴보니 앓아 누워 있는 부인이 있고, 스무 살 정도
먹은 아들이 있었다. 난 방에 들어가서 일하는 여자가 해주는 밥을 받아 먹고 불안한 마음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니 일하는 여자가 이부자리를 펴주고 자라고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들어왔다.
주인은 그 이부자리에 눕더니 나더러 옆에 누우라고 끌어당겼다. 싫다고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니 일어나 나를 눕히곤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서워 반항도 크게 못했다. 머리는 멍멍하고 몸은 뻣뻣하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남자와 어떻게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뭐가
아래로 들어오는데 난 그게 무릎팍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어찌나 아프던지 정신이 아찔하였다. 피가 흥건이 나고 밑은 빠지듯이 아프고. 그러고 난 후에서야 난
내가 몸을 뺏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로 주인은 계속 나를 데리고 잤다. 주인이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면
그 아픈 짓거리를 안 당해도 되었다. 주인은 아파 누워 있는 자기 부인방에는 잘 안 들어갔다. 매일 밤 그 지긋지긋한 잠자리를 강요당하는 와중에서도 그 부인에게 무슨 죄 지은 것 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괴로왔다.
주인 이름은 스하라라고 했고 아들은 지로라고 했다. 주인은 군인이었는데
아침에 군복 입고 나갈 때 보면 어깨에는 뻘건 헝겊 위에 별이 달린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난 그 집에
머물면서 부인의 시중도 들어주고 집안일을 거들기도 했다.
두 달쯤 지나자 주인 여자도 울화병이 나는 듯 나를 대하는 것이 점점 고약해졌다. 어느 날 주인 남자가 아침에 나간 후 주인 여자와 아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아들이 나한테 짐을 챙기라고
했다.
나를 어느 역에 데리고 갔다. 그 아들이 일본 사람 둘에게 뭐라 하더니
나를 그 사람들한테 넘겼다. 그리곤 나를 한번 흘깃 보더니 가버렸다.
일본 남자들이 내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하기에 나는 안 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한 놈이 내 허벅지를 냅다 차면서 빨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끌고 갔다.
나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창고같이 생긴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방이 10개 정도 주루룩 있었는데,
그중 한 방으로 들어가니 한평 조금 넘을 만한 방에 담요 하나만 덩그러니 깔려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낯선 일본군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게 누우라 했다. 나는 보따리를 꼭 껴안은 채로 뒤로 떠밀려져서 일을 당했다.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쳐진다.아침 9시 반이나 10시 정도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나면, 어떤 때는 점심 전부터 군인들이
오고 보통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군인들이 밀려왔다.
일요일엔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군인들은 나란히 줄을 서 있다가 한
명씩 들어와서는 보통이 5분, 길어야 10분 정도 있었다. 한 놈 나가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그 생지옥이 끝났다. 하루에 적어야 20명이었다.
하라는 대로 안한다고 맞기도 엄청 맞고 기절도 숱하게 했다. 그러면
주사 놔줘서 다시 깨어나고. 오줌을 질질 싸고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으면 어떤 놈은 냅다 발길질을 하고
그냥 나가버리기도 했다.
치마로 얼굴을 쓰고 누워 있으면 얼굴 가린다고 맞고, 자기들 성기를
입에 갖다 대고 빨라 해서 안 빨면 맞고. 조선말 쓴다고도 맞고. 하도
맞다 보니 병신이 됐는지 그저 눈만 멀뚱 멀뚱 뜨고 송장처럼 누워 있었다.
어떤 놈은 금방 하고 나가고 어떤 놈은 안돼서 질질 끌었는데 그렇게 몇 십 분씩 진저리가 나게 끌고 나면 난
기절을 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냥 기절하고 누워 있으면 밥해주는 일본 아줌마가 와서 찬물로 씻어주고
미음을 가져다 먹이곤 했다.
입구에서 감독하는 군인이 서너 명 있었는데 자주 바뀌었다. 바람 쐬러
나갔다가 감독하는 놈들에게도 숱하게 맞았다. 군인들은 들어올 때 입구에 있는 놈들에게 뭔가를 내는 것
같았다. 그것이 군표나 돈일 것이라는 것은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밥해주고 빨래해서 가져다주는 아줌마는 바뀌지 않았다. 빨래라야 걸치고
있는 겉옷 하나였지만. 아예 속옷은 안 입고 있었다. 나이가
마흔 살 정도 된 일본여자였는데 같은 여자라 그런지 많이 위로를 해줬다. 아줌마는 내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봐도 그런 건 물어보면 안된다고 했는데, 그러다 얼핏 오사까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하도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얼마 안되어 몹쓸 병이 들었는지 밑이 시뻘겋게 퉁퉁 붓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들어오는 군인이 제각기 콘돔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끼는 놈도 있고 안 끼는 놈도 있었다. 군의가 와서 주사를 놓아주었지만 잘 낫지를 않았다.
병든 상태에서도 계속 군인을 받았다. 한번은 어떤 놈이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려고 하다가 시뻘겋게 된 내 밑은 보고는 뭐라 욕지거리를 하고는 못 같이 뾰족한 것을 가지고 자궁을 찔러버렸다.
거기에 병균이 옮아 번져서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냥 누워 군인을 받았다. 그 엉망이 된 밑을 보고도 덤벼드는 놈들이 인간 같지 않았다.
약 먹고 주사맞고 치료를 해도 병이 낫지를 않았다. 무슨 주사인지
한번 맞고 나면 속이 울렁울렁하고 입과 코에 냄새가 올라와 역겨웠다. 군의가 치료를 하면서 약으로 치료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한번은 내게 잘해주었던 장교와 군의가 같이 왔다. 그 장교는 군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를 내보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나를 또 딴 곳에 보내려는
이야기로 들었다.
어느 날인가 아줌마가 오더니 내가 조선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너무
병이 심하게 들어 나만 조선에 보내준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장교가 나를 나가게 손 써준 것 같다.
부산에서 배를 내려 안내인이 기차를 태워줘 혼자 서울에 도착했다. 다행히
식구들은 이사를 안 가고 그 집에 그냥 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발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들어가니 어머니가
방문에 걸터앉아 계셨다.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밑에 병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왔으니 동네 사람들이 알까봐 쉬쉬하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굳이 내게 어디 갔다왔느냐는 것을 물어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간혹 딸 있는 것을 이렇게 버렸구나 하시면서 울곤 하였다.
하도 배가 아파 뒹굴으니 어머니가 만져보고는 아이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이대
부속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아이가 이미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꺼내보니 사내아이인데 얼굴부터 몸
반쪽이 이미 썩어 있었다.
의사는 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 했다. 6-7개월 된 아이였다. 아이는 죽은 채로 내 뱃속에서 근 한달을 있었던 것이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명순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
몹쓸 성병에 걸린 여자
나는 서울역 앞 동자동 82번지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 언니, 큰오빠와 작은 오빠가 있었다. 셋방살이로 뻔질나게 이사를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한 기억이 난다.
소공동에서 다시 다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 1945년, 내가 19살 나던 해였다. 양력 정월달이라고 기억하는데 정내회(町內會)에 있는 남자가 와서 집에서 노느니 취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집에 있으면 정신대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도 벌고 정신대에도 안 나가니 참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가 들어오시면 의논해본다고 했다.
그때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그리고는 며칠이 흘렀는데 또 그 사람이 와서는 빨리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하고 갔다. 어머니는 취직은 무슨 취직이냐고 하면서 아이구 큰일났구나, 또 이사가야겠구나 하셨다.
그러나 그때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막걸리 장사하던 것이 불법이라고 지서에 불려 들어가 혼이 나고 나오신 후로 아버지는 마땅히 일자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혼자 뭘 하시는지 겨우 밥이나 얻어와 먹고 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라도 취직해서 돈이라도 벌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밤새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몰래 짐을 싸들고 어머니가 일나가신 사이에 정내회의 그 남자를 찾아가 일본에 가서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날로 바로 그 남자와 서울역에 가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밤새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리자 그 남자는 나를 일본 남자 2명에게 넘겼다. 그때서야 더럭 겁이 났다. 그날 저녁쯤 되어 배에서 내렸다. 8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배에서 내리면서 사람들이 시모노세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배에서 내려 기차를 탔다.
온통 창이란 창은 다 막혀 있어서 대체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 이제 난 죽었구나. 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깜깜해졌다.
기차에서 내려 두 일본 남자가 나를 어느 집엔가 데리고 갔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이는 일본 남자가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아주 좋아했다. 주인 남자는 나에게 방 하나를 가리키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집안 형편을 살펴보니 앓아 누워 있는 부인이 있고, 스무 살 정도 먹은 아들이 있었다. 난 방에 들어가서 일하는 여자가 해주는 밥을 받아 먹고 불안한 마음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니 일하는 여자가 이부자리를 펴주고 자라고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들어왔다.
주인은 그 이부자리에 눕더니 나더러 옆에 누우라고 끌어당겼다. 싫다고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니 일어나 나를 눕히곤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서워 반항도 크게 못했다. 머리는 멍멍하고 몸은 뻣뻣하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남자와 어떻게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뭐가 아래로 들어오는데 난 그게 무릎팍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어찌나 아프던지 정신이 아찔하였다. 피가 흥건이 나고 밑은 빠지듯이 아프고. 그러고 난 후에서야 난 내가 몸을 뺏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로 주인은 계속 나를 데리고 잤다. 주인이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면 그 아픈 짓거리를 안 당해도 되었다. 주인은 아파 누워 있는 자기 부인방에는 잘 안 들어갔다. 매일 밤 그 지긋지긋한 잠자리를 강요당하는 와중에서도 그 부인에게 무슨 죄 지은 것 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괴로왔다.
주인 이름은 스하라라고 했고 아들은 지로라고 했다. 주인은 군인이었는데 아침에 군복 입고 나갈 때 보면 어깨에는 뻘건 헝겊 위에 별이 달린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난 그 집에 머물면서 부인의 시중도 들어주고 집안일을 거들기도 했다.
두 달쯤 지나자 주인 여자도 울화병이 나는 듯 나를 대하는 것이 점점 고약해졌다. 어느 날 주인 남자가 아침에 나간 후 주인 여자와 아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아들이 나한테 짐을 챙기라고 했다.
나를 어느 역에 데리고 갔다. 그 아들이 일본 사람 둘에게 뭐라 하더니 나를 그 사람들한테 넘겼다. 그리곤 나를 한번 흘깃 보더니 가버렸다. 일본 남자들이 내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하기에 나는 안 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한 놈이 내 허벅지를 냅다 차면서 빨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끌고 갔다.
나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창고같이 생긴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방이 10개 정도 주루룩 있었는데, 그중 한 방으로 들어가니 한평 조금 넘을 만한 방에 담요 하나만 덩그러니 깔려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낯선 일본군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게 누우라 했다. 나는 보따리를 꼭 껴안은 채로 뒤로 떠밀려져서 일을 당했다.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쳐진다.아침 9시 반이나 10시 정도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나면, 어떤 때는 점심 전부터 군인들이 오고 보통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군인들이 밀려왔다.
일요일엔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군인들은 나란히 줄을 서 있다가 한 명씩 들어와서는 보통이 5분, 길어야 10분 정도 있었다. 한 놈 나가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그 생지옥이 끝났다. 하루에 적어야 20명이었다.
하라는 대로 안한다고 맞기도 엄청 맞고 기절도 숱하게 했다. 그러면 주사 놔줘서 다시 깨어나고. 오줌을 질질 싸고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으면 어떤 놈은 냅다 발길질을 하고 그냥 나가버리기도 했다.
치마로 얼굴을 쓰고 누워 있으면 얼굴 가린다고 맞고, 자기들 성기를 입에 갖다 대고 빨라 해서 안 빨면 맞고. 조선말 쓴다고도 맞고. 하도 맞다 보니 병신이 됐는지 그저 눈만 멀뚱 멀뚱 뜨고 송장처럼 누워 있었다.
어떤 놈은 금방 하고 나가고 어떤 놈은 안돼서 질질 끌었는데 그렇게 몇 십 분씩 진저리가 나게 끌고 나면 난 기절을 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냥 기절하고 누워 있으면 밥해주는 일본 아줌마가 와서 찬물로 씻어주고 미음을 가져다 먹이곤 했다.
입구에서 감독하는 군인이 서너 명 있었는데 자주 바뀌었다. 바람 쐬러 나갔다가 감독하는 놈들에게도 숱하게 맞았다. 군인들은 들어올 때 입구에 있는 놈들에게 뭔가를 내는 것 같았다. 그것이 군표나 돈일 것이라는 것은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밥해주고 빨래해서 가져다주는 아줌마는 바뀌지 않았다. 빨래라야 걸치고 있는 겉옷 하나였지만. 아예 속옷은 안 입고 있었다. 나이가 마흔 살 정도 된 일본여자였는데 같은 여자라 그런지 많이 위로를 해줬다. 아줌마는 내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봐도 그런 건 물어보면 안된다고 했는데, 그러다 얼핏 오사까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하도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얼마 안되어 몹쓸 병이 들었는지 밑이 시뻘겋게 퉁퉁 붓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들어오는 군인이 제각기 콘돔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끼는 놈도 있고 안 끼는 놈도 있었다. 군의가 와서 주사를 놓아주었지만 잘 낫지를 않았다.
병든 상태에서도 계속 군인을 받았다. 한번은 어떤 놈이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려고 하다가 시뻘겋게 된 내 밑은 보고는 뭐라 욕지거리를 하고는 못 같이 뾰족한 것을 가지고 자궁을 찔러버렸다.
거기에 병균이 옮아 번져서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냥 누워 군인을 받았다. 그 엉망이 된 밑을 보고도 덤벼드는 놈들이 인간 같지 않았다.
약 먹고 주사맞고 치료를 해도 병이 낫지를 않았다. 무슨 주사인지 한번 맞고 나면 속이 울렁울렁하고 입과 코에 냄새가 올라와 역겨웠다. 군의가 치료를 하면서 약으로 치료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한번은 내게 잘해주었던 장교와 군의가 같이 왔다. 그 장교는 군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를 내보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나를 또 딴 곳에 보내려는 이야기로 들었다.
어느 날인가 아줌마가 오더니 내가 조선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너무 병이 심하게 들어 나만 조선에 보내준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장교가 나를 나가게 손 써준 것 같다.
부산에서 배를 내려 안내인이 기차를 태워줘 혼자 서울에 도착했다. 다행히 식구들은 이사를 안 가고 그 집에 그냥 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발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들어가니 어머니가 방문에 걸터앉아 계셨다.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밑에 병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왔으니 동네 사람들이 알까봐 쉬쉬하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굳이 내게 어디 갔다왔느냐는 것을 물어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간혹 딸 있는 것을 이렇게 버렸구나 하시면서 울곤 하였다.
하도 배가 아파 뒹굴으니 어머니가 만져보고는 아이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이대 부속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아이가 이미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꺼내보니 사내아이인데 얼굴부터 몸 반쪽이 이미 썩어 있었다.
의사는 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 했다. 6-7개월 된 아이였다. 아이는 죽은 채로 내 뱃속에서 근 한달을 있었던 것이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명순 할머니의 증언입니다.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