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며 강간 당한 여자

검객201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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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1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갈아 먹을 논도 없었다. 오빠 둘, 언니, 나, 여동생, 이렇게 다섯명의 자식을 데리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셨다.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17세 때(1937년)의 음력 정월 보름인가 2월초쯤 되었을 때였다. 취직시켜준다고 여자들을 모집하여 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는 지금같지 않아 세상이 어수룩했고, 특히 학교도 다니지 않은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공장에 돈벌러 가는 줄만 알았고 그것이 위험하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나가사키까지 갔다. 나가사키에 도착하니 버스같이 생긴 차가 와서 우리 일행을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에 들어간 날부터 군인 같은 사람이 우리를 지켰다.첫날밤 나는 계급이 높은 군인에게로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 그 군인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피도 나오고 무서워서 내가 도망을 가려고 하니까 그 군인은 내 등을 두드려주면서 아무 때 당해도 당하니까 그런 줄 알라며 달랬다. 

 


우리 여자들은 매일밤 군부대 안의 계급이 높은 군인들의 방으로 이곳저곳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 이렇게 나가사키에서 1주일을 보낸 후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 부두에 내리니 트럭이 와서 우리를 싣고 갔다. 어수선한 상해 거리를 지나 변두리로 생각되는 곳에 닿았다. 육군부대 바깥에 있는 큰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큰 집은 나무판자로 칸을 막아서 한 사람 누울 만큼 크기의 방들을 많이 만들어놓았다. 집은 단층이었고 집앞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위안소라고 써 있었던 같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교대로 밥을 먹고 나면 9시쯤부터 군인들이 줄을 서서 오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30-40명이 와서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다. 
방마다 콘돔을 박스 속에 수북이 갖다놓아서 군인들은 방에 와서 이것을 집어서 사용했다. 간혹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군인들도 있었으나 절반 이상은 사용했다.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에게는 내가 나쁜 병이 있으니 옮지 않으려면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병에 걸리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덤비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아래에서 피가 흐르고 소변을 못 보는 병(방광염인 듯함)에 걸려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다른 여자들 중에도 밑이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어지도록 붓고 피가 나는 사람이 많았다. 
멀쩡한 처녀들을 데려다가 날이면 날마다 이런 일들을 시키니 오죽했겠는가? 나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어려서 하도 많이 자궁을 사용하여 자궁이 비뚤어졌다고 한다. 
아프고 괴로울 때는 죽으려고도 해보았지만 죽지 못했다. 강물에 뛰어들려고도 했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려고도 했고,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이럴 때 고향의 엄마생각이 가슴이 저리도록 났다. 

 


도망가려 해도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서 갈 수도 없었다. 무서워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했다. 개중에는 싸움을 하는 방, 물건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나는 방, 여자가 도망치다가 붙잡혀오는 방, 여자가 군인에게 발길로 채여 소리지르는 방 들도 있었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군인들은 비교적 난폭하고 콘돔도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 옷, 신발 등이 온통 먼지투성이었다. 

 


계급이 아주 높은 군인들을 위해서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을 골라 차를 태워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가기도 했다. 
이런 중에 나도 불려가 이즈미라는 군인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아마 50살 정도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계급도 아주 높아 보였다. 
이 사람은 전투가 잠잠하여 시간이 날 때는 졸병을 시켜서 나를 불러들여 이삼일간 자기 방에서 재웠다. 전투가 있을 때는 몇달간 소식이 없다가 잠잠해지면 자주 불렀다. 

 


위안소 생활을 한 지 3년쯤 지난(1940년) 2, 3월경, 이즈미는 내가 자주 아프고 전쟁도 점점 위험하게 될 것 같으니 고향의 집에 돌아가라고, 가 있으면 꼭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이즈미는 귀향증을 여러 장 만들어 봉투에 넣어주었다. 20일쯤 걸려서 합천군 삼가면의 집으로 돌아왔다.내가 스무살되던 해였다. 
집에 와보니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같고 사는 것도 가난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종로의 낚시여관에도 있다가 남의 집살이도 했다. 그러다가 가방공장에도 다니고 구멍가게도 하면서 살았다.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방광염, 자궁병, 정신불안 등 많은 병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담석도 있고 빈혈도 심하고. 
텔리비전에서 김학순씨의 증언과 정신대에 관한 여러 프로를 보았다. 지금까지 원통하고 분한 것을 혼자 가슴에 묻어두었는데 그것을 보고 밤잠을 못 자게 되었다.
조카(친정 큰오빠의 아들)가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데 찾아가서 과거를 말하고 신고할까 의논했다. 이 조카는 "태평양유족회 재판도 다 소용없더라구요. 괜히 귀찮기만 하고 자식들이 충격받으니 신고하지 마세요.아들 가슴에 못 박아요. 미국에 있는 애가 알면 어쩌게요?"하면서 말렸다. 

 

그래도 마음이 께름직하고 통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하루는 방송국을 찾아나섰다. 파출소에 가 도움을 받아 정대협에 신고했다. 신고하고 나서 1주일간 못 잔 잠을 잤다. 할 말을 하고 나니 한이 반은 풀린 것같다. 
큰아들에게 말하니 아들은 "그렇게 험한 과거를 가지고 어머니 열심히 잘 사셨우. 장하우"라고 말하며 막 울었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는 이 사실을 알고 비관에 빠져 있다. 작은 아들도 맥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정대협이 주관하는 일본 대사관 앞의 수요시위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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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덕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