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5명의 자식(아들2명, 딸3명)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늘 병석에 있고 어머니가 벌이를 하여 우리들을 먹여살렸으므로 우리집은 가난하였다.
내가 18살 때였다. 하루는 양복을 걸친 일본인이 나에게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무슨 일자리인지는 몰랐으나 빌어먹기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
어느 날 약속 장소에 가니 내또래의 어린 소녀들이 수십 명 정도 와있었다. 우리가 열차를 타고내린곳은 함경북도 경흥군 (오늘의 은덕군) 청학동이었다.
거기서 또다시 화물차를 타고 어느 깊은 살골짜기에 가서 내렸다. 거기에는 17~18살쯤되는 소녀들이 이미 10여명정도 있었다.
일본군은 우리들을 나무판자로 된 집으로 안내하더니 매방에 한명씩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집은 "위안소"였는데 가마니와 판자같은 것으로 매칸을 막아놓고 있어 옆에서 말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그날부터 나는 "에이꼬"라는 일본이름으로 불리웠다. 내방에 맨처음 들어온 것은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온 사람들중의 한놈이었다.
양복을 걸쳤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중위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강제로 나를 강간한 다음연이어 7명의 장교들이 나를 강간하였다.
다음 날부터 20~30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일요일에는 40~50명이 달려들었다. 식사는 보리로 만든 주먹밥과 약간의 국을 주어 늘 배가 고팠다.
가까운 곳에 "홍의"라고 하는 산골마을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마을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을 위하여 이동봉사를 강요당하곤 하였다.
우리는 1주일에 한번씩 검진을 받았다. 병이 나 성봉사를 할 수 없는 여자가 나타나면 군대들이 어디론가 데려갔고 새로운 "위안부"들이 오곤하였다.
나는 아침 9시부터 밤늦게까지 봉사를 강요당하였는데 새벽까지 계속되는 날이 며칠씩이나 되었다.
어느 날 "도끼꼬"라고 불리우던 소녀가 조선말을 하자 장교는 우리를 들판에 모아놓고 우리앞에서 그 소녀의 목을 칼로 내리쳐 떨구었다.
너무도 무서웠던 나머지 우리는 소리내어 울면서 그자리에서 달아났다. 여러명의 소녀들이 "위안부" 노릇에 견딜 수 없어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어느 일요일 내가 몸상태가 좋지 않아 거절하자 장교놈이 나를 가로타고 앉아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내 머리를 몇번이나 방바닥에 찧었다.
내가 장교의 팔을 물었을 때, 그가 팔을 뿌리치자 나의 이빨두대가 부러졌다. 다음 날, 여러명의 악한들이 나에게 달려들어 콧구멍으로 물을 끼얹었다. 내 배가 부어오르자 그들은 나의 배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는 발로 힘껏 내리눌렀다. 정신을 차리면 같은짓을 반복하곤 하였다.
1945년 8월 13일 일본군장교는 우리에게 자기들과 같이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우리는 모두 모여 한사람씩 도망치기로 의논하였다. 내가 맨 먼저 도망쳤다. 그 후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 나는 지난날의 치욕이 알려질까봐 두려워 그리고 나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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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영실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