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만주 길림성이다. 어머니는 열다섯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다가 일본 사람 등살에 중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중국에서 1924년에 낳고 그후 백일도 안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여자 혼자서 아는 사람도 없는 타향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워 어머니는 두살 먹은 나를 데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내가 열네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살다가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함께 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한테도 정이 안 가 반항을 하곤 하니깐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나를 기생을 기르는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살이었다.
권번에서 졸업증을 받게 되면 정식 기생이 되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살이 되어야 관에서 기생 허가를 내주었다. 졸업하던 해 내 나이가 열일곱살이라 졸업을 하고도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우리를 데리고 영업을 할 수 없었던 양아버지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함께 기생수업을 받았던 언니와 나는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 북경에 도착하여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일본 군인이 양아버지를 불렀다. 여러 명 있는 중에서 계급장에 별 2개를 단 군인이 양아버지에게 당신들 조선 사람들이지? 하고 물었다.
양아버지가 우리는 중국에 돈 벌러 온 조선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중위는 돈 벌려면 너희 나라에서 벌지 왜 중국에 왔냐고 하면서 스파이지, 이쪽으로 와라? 하면서 양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언니와 나는 따로 군인들에게 끌려 갔다. 골목 하나를 지나가니 뚜껑 없는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거기에는 군인들이 대략 4-50명 정도 타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 트럭에 타라고 해서 안 타겠다고 하니깐 양쪽에서 번쩍 들어올려 태웠다.
다음날 컴컴할 때쯤 트럭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군인 몇 명이 우리를 어떤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사람들이 도망치고 비어 있는 집이었다. 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힘에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어졌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그날밤 나는 그 장교에게 두번이나 당했다.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그 장교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찢어진 옷으로 얼기설기 몸을 가리고 앉아 울었다. 장교가 나간 후 나는 옆방에 언니가 있을까 해서 포장을 들추어보았다. 누런 군복을 입은 군인이 누워 있고 그 언니도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그날 포장쳐진 두 방에 군인들이 나무로 침대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우리는 방 하나씩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있었던 집은 문이 2개나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었다. 그 집 옆에는 부대가 있었다.우리가 있는 곳은 중국인 마을인데 일본 군대 때문인지 중국 사람은 한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 집에는 여자들만 5명이 있었다. 그 집에는 방이 모두 5개 있었다. 방에는 모포가 씌워진 침대가 있고 방문 옆에는 세수대야를 놓아두었다. 군인들이 오면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다. 군인들은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고정적이었다.
들어와서 30분 정도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얌전하게 있다가 가는 군인도 있었다. 어떤 군인은 들어와 내 머리를 자기 사타구니에 처박고 성기를 빨라고 했다. 또 일이 끝나면 세수대야 물에 자기 성기를 닦아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비위가 틀려 반항이라도 하면 늘어지게 맞았다.
군인들은 자기들이 콘돔을 가지고 왔다. 우리한테 배당되어진 콘돔은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 후방에서 군의가 졸병을 데리고 와서 검사를 했다. 바쁘면 건너뛰는 주도 있었다. 군의가 와서 진료해보고 조금이라고 이상하면 누런 빛이 나는 606 주사를 놓았다. 그것을 맞고 트림을 하면 코로 냄새가 올라와 아주 역겨웠다. 생리 때도 군인을 받았다. 받고 싶지 않아도 군인들이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솜을 말아서 피가 밖으로 새나오지 않게 깊이 넣고 군인을 받았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돈을 내는지 어쩐지는 전혀 몰랐는데, 얼마 지나 사병들은 1원 50전, 장교들이 긴밤자는 데는 8원을 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군인들이 누구한테 돈을 내냐고 하니깐 우리가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군인들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부대의 군인이 우리들에게 와서 무조건 빨리 보따리를 싸라고 했다. 우리는 하루 해가 지기 전에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 이번의 위안소는 먼저 집보다는 작았다. 방은 포장으로 칸막이를 한 것이 아니라 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별로 생활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군인들이 토벌나가는 회수가 더 많아졌는데 아침에 우리에게 오는 경우는 술병을 들고 오는 군인도 많았다. 먼저 있었던 곳에서 보다 사는 것이 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곳으로 옮긴 지 1달 조금 지났을 때 마흔살쯤 되어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이곳에 조선 여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부대 군인들이 모두 토벌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보초 눈을 피해 들어왔다고 했다. 그 사람도 나에게서 자기의 욕구를 채웠다. 그리고서는 그냥 가려 하길래 그냥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냐고 만약 그냥 나가면 소리를 지르겠다고 했다. 가다가 죽어도 좋고 못 따라 가면 내버려도 좋으니 여기서만 같이 나가달라고 애원을 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 사람과 위안소를 빠져나온 것은 새벽 두세시쯤인 듯하다. 군인들이 모두 토벌하러 나갔다 해도 보초는 있었을텐데 어떻게 눈에 안 띄었는지 모르겠다. 북경에서 끌려간 지 4달만에 그곳을 도망나온 것이다. 그 사람은 지리도 잘 알고 비어 있는 집도 잘 찾아냈다. 그 사람은 중국말을 아주 잘해서 중국 사람 행세도 곧잘 했다. 나는 중국말도 별로 못하고 행여 잡힐까봐 무섭기도 해서 그 사람 옆만 따라다녔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를 마누라라고 소개하였다.
1942년 내 나이 열여덟살 겨울에 아이가 들어섰다. 그 사람은 아이를 낳으려면 한군데 정착해야 한다고 하면서 상해에 우리가 살 장소를 정했다. 내가 열아홉살 먹은 해 음력 9월 20일에 첫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리고 45년 내가 스물한살 먹은 해 정월달에 아들을 낳았다.
해방이 되자 유일평이라는 거류민 단장이 조선에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배를 타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1946년 6월에 배를 타고 나왔다. 그리고는 서울 장충단 수용소에서 3개월간 지냈다. 그곳에서 큰아이는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었다. 나는 채소장사하고 남편도 공사장에 나가 먹고 살 돈을 벌었다. 하루는 부식을 납품하기 위하여 검사받으러 갔다가 그 집이 무너져 내려 남편이 깔렸다.남편은 적십자병원에 옮겨졌다. 그러다 50일만에 죽었다.
말이 남편이지 살면서 받은 고통이 참으로 컸다.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알기 때문에술 먹고 기분나쁘면 사람 가슴에 칼을 내리꽂는 소리를 했다. 아들이 있는데서 더러운 년이니 군인들한테 개나리짓했다느니하는 소리를 들을 땐 내 더러운 팔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남편을 화장시키고 아들과 둘이 살았다. 너무 마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라 죽고도 크게 서럽지 않았다. 하나 있는 아들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속초에 헤엄치러 놀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죽으려고 여러 번을 마음먹고 약을 먹어도 죽지 못했다. 1961년에 무작정 전라도에 내려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담배와 술로 20년을 보냈다.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한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다른 노인네들을 보면 '저들은 나와 같지 않겠지'하는 비교가 든다. 내 순결을 뺏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도 있다.
---------------------------------------------------------------------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
납치당한 후 순결을 뺏긴 여자
내가 태어난 곳은 만주 길림성이다. 어머니는 열다섯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다가 일본 사람 등살에 중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중국에서 1924년에 낳고 그후 백일도 안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여자 혼자서 아는 사람도 없는 타향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워 어머니는 두살 먹은 나를 데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내가 열네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살다가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함께 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한테도 정이 안 가 반항을 하곤 하니깐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나를 기생을 기르는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살이었다.
권번에서 졸업증을 받게 되면 정식 기생이 되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살이 되어야 관에서 기생 허가를 내주었다. 졸업하던 해 내 나이가 열일곱살이라 졸업을 하고도 영업을 할 수 없었다.우리를 데리고 영업을 할 수 없었던 양아버지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함께 기생수업을 받았던 언니와 나는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
북경에 도착하여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일본 군인이 양아버지를 불렀다. 여러 명 있는 중에서 계급장에 별 2개를 단 군인이 양아버지에게 당신들 조선 사람들이지? 하고 물었다.
양아버지가 우리는 중국에 돈 벌러 온 조선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중위는 돈 벌려면 너희 나라에서 벌지 왜 중국에 왔냐고 하면서 스파이지, 이쪽으로 와라? 하면서 양아버지를 데리고 갔다.언니와 나는 따로 군인들에게 끌려 갔다. 골목 하나를 지나가니 뚜껑 없는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거기에는 군인들이 대략 4-50명 정도 타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 트럭에 타라고 해서 안 타겠다고 하니깐 양쪽에서 번쩍 들어올려 태웠다.
다음날 컴컴할 때쯤 트럭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군인 몇 명이 우리를 어떤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사람들이 도망치고 비어 있는 집이었다.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힘에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어졌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그날밤 나는 그 장교에게 두번이나 당했다.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그 장교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찢어진 옷으로 얼기설기 몸을 가리고 앉아 울었다. 장교가 나간 후 나는 옆방에 언니가 있을까 해서 포장을 들추어보았다.누런 군복을 입은 군인이 누워 있고 그 언니도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그날 포장쳐진 두 방에 군인들이 나무로 침대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우리는 방 하나씩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있었던 집은 문이 2개나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었다. 그 집 옆에는 부대가 있었다.우리가 있는 곳은 중국인 마을인데 일본 군대 때문인지 중국 사람은 한사람도 보지 못했다.그 집에는 여자들만 5명이 있었다. 그 집에는 방이 모두 5개 있었다. 방에는 모포가 씌워진 침대가 있고 방문 옆에는 세수대야를 놓아두었다.
군인들이 오면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다. 군인들은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고정적이었다.
들어와서 30분 정도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얌전하게 있다가 가는 군인도 있었다. 어떤 군인은 들어와 내 머리를 자기 사타구니에 처박고 성기를 빨라고 했다.또 일이 끝나면 세수대야 물에 자기 성기를 닦아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비위가 틀려 반항이라도 하면 늘어지게 맞았다.
군인들은 자기들이 콘돔을 가지고 왔다. 우리한테 배당되어진 콘돔은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 후방에서 군의가 졸병을 데리고 와서 검사를 했다. 바쁘면 건너뛰는 주도 있었다.군의가 와서 진료해보고 조금이라고 이상하면 누런 빛이 나는 606 주사를 놓았다. 그것을 맞고 트림을 하면 코로 냄새가 올라와 아주 역겨웠다.
생리 때도 군인을 받았다. 받고 싶지 않아도 군인들이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솜을 말아서 피가 밖으로 새나오지 않게 깊이 넣고 군인을 받았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돈을 내는지 어쩐지는 전혀 몰랐는데, 얼마 지나 사병들은 1원 50전, 장교들이 긴밤자는 데는 8원을 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군인들이 누구한테 돈을 내냐고 하니깐 우리가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군인들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부대의 군인이 우리들에게 와서 무조건 빨리 보따리를 싸라고 했다. 우리는 하루 해가 지기 전에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이번의 위안소는 먼저 집보다는 작았다. 방은 포장으로 칸막이를 한 것이 아니라 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별로 생활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군인들이 토벌나가는 회수가 더 많아졌는데 아침에 우리에게 오는 경우는 술병을 들고 오는 군인도 많았다. 먼저 있었던 곳에서 보다 사는 것이 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곳으로 옮긴 지 1달 조금 지났을 때 마흔살쯤 되어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이곳에 조선 여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부대 군인들이 모두 토벌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보초 눈을 피해 들어왔다고 했다.그 사람도 나에게서 자기의 욕구를 채웠다. 그리고서는 그냥 가려 하길래 그냥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냐고 만약 그냥 나가면 소리를 지르겠다고 했다.
가다가 죽어도 좋고 못 따라 가면 내버려도 좋으니 여기서만 같이 나가달라고 애원을 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 사람과 위안소를 빠져나온 것은 새벽 두세시쯤인 듯하다. 군인들이 모두 토벌하러 나갔다 해도 보초는 있었을텐데 어떻게 눈에 안 띄었는지 모르겠다.북경에서 끌려간 지 4달만에 그곳을 도망나온 것이다. 그 사람은 지리도 잘 알고 비어 있는 집도 잘 찾아냈다. 그 사람은 중국말을 아주 잘해서 중국 사람 행세도 곧잘 했다.
나는 중국말도 별로 못하고 행여 잡힐까봐 무섭기도 해서 그 사람 옆만 따라다녔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를 마누라라고 소개하였다.
1942년 내 나이 열여덟살 겨울에 아이가 들어섰다. 그 사람은 아이를 낳으려면 한군데 정착해야 한다고 하면서 상해에 우리가 살 장소를 정했다.내가 열아홉살 먹은 해 음력 9월 20일에 첫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리고 45년 내가 스물한살 먹은 해 정월달에 아들을 낳았다.
해방이 되자 유일평이라는 거류민 단장이 조선에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배를 타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1946년 6월에 배를 타고 나왔다.그리고는 서울 장충단 수용소에서 3개월간 지냈다. 그곳에서 큰아이는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었다.
나는 채소장사하고 남편도 공사장에 나가 먹고 살 돈을 벌었다. 하루는 부식을 납품하기 위하여 검사받으러 갔다가 그 집이 무너져 내려 남편이 깔렸다.남편은 적십자병원에 옮겨졌다. 그러다 50일만에 죽었다.
말이 남편이지 살면서 받은 고통이 참으로 컸다.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알기 때문에술 먹고 기분나쁘면 사람 가슴에 칼을 내리꽂는 소리를 했다. 아들이 있는데서 더러운 년이니 군인들한테 개나리짓했다느니하는 소리를 들을 땐 내 더러운 팔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남편을 화장시키고 아들과 둘이 살았다. 너무 마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라 죽고도 크게 서럽지 않았다. 하나 있는 아들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속초에 헤엄치러 놀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죽으려고 여러 번을 마음먹고 약을 먹어도 죽지 못했다. 1961년에 무작정 전라도에 내려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담배와 술로 20년을 보냈다.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한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다른 노인네들을 보면 '저들은 나와 같지 않겠지'하는 비교가 든다. 내 순결을 뺏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도 있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