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예가 된 독립운동가의 딸

검객201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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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4년 봄, 대구시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줄곧 대구에서 살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아버지는 집에 가끔씩 들르시곤 했었다. 

 

 

 

그러다 내가 여덟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돌아오셔서 그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가 상해,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느라고 집에도 못 오시고 결국 병을 얻어 돌아가신 것이라고 한다. 
집안살림은 어머니가 모두 맡아 하셨다. 끼니는 가끔씩 시골에 있는 외가에서 실어오는 곡식 외어머니의 침모질 등의 품팔이로 이어나갔다. 
집이 어려워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나는 남자들이나 다니던 집 근처에 있던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그리고 야학에도 다니면서 한자나 한글, 일본어 등을 깨우쳤다. 공부에 대한 욕심은 상당히 많았다.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살이 되었다. 그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친구네 집에 가서 놀았다.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친구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일본 헌병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간 곳은 헌병대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에는 내 또래의 또 다른 여자애 1명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헌병은 우리를 역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기차를 타고 이틀 정도를 계속 북쪽으로 갔다. 
저녁녘이 되어 우리는 당시 북만주 도안성(逃安城)이라는 곳에 내렸다. 여기에서 같이 온 남자는 우리를 군용트럭이 있는 데로 데려다 주고는 갔다. 
트럭을 타고 한참 갔다. 트럭은 마을과 허허벌판을 지나 외딴집 앞에 와서 멈추었다. 먼저 온 여자들은 20명 가량 됐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여자들이 많을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피곤하기만 하여 그날은 곧장 잤다. 이곳에 온 지 사흘이 지나자 주인은 나와 일행에게 각각 방 하나씩을 주었다. 
거기에는 이불 하나 요 하나 그리고 베개 둘이 있었다. 이날부터 우리는 군인들을 받았는데 나는 이때 정조를 빼앗겼다.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차서 까무라치고 울기만 했다. 

 

소련과 국경지역이라고 하던 이곳 북만주 도안성은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군인들은 정말 많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었던 것 같다.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나는 물건을 관리하는 장교를 사귀었다. 나는 정당하게 노력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군인들 가운데 힘있는 사람과 친해 놓으면힘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물품담당자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며 비위를 맞췄다. 

 

온 지 한 1년쯤 지나 9월이었다. 이 물품담당자는 나보고 위안소 밖에서 살림을 차리고 같이 살 것을 제안해왔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내가 끌려올 때 우리 어머니가 아파 돌아가시려 하는 것을 보고 왔다. 그러니 당신이랑 같이 살기 전에 먼저 조선에 다녀오게 해달라. 갔다 와서 꼭 같이 살겠다 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런 말을 하면서 애걸하는 나에게 그는 정말 돌아오겠느냐고 몇 번이나 다짐하듯 묻더니 조선을 다녀올 수 있는 증명을 떼주었다. 

 

가족을 다시 만나니 절로 눈물이 났다. 대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때로는 남의 집살이도 하면서 때로는 하는 일 없이 놀면서 한 1년 지냈다. 
대명동 집 근처에는 우연히 알게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1942년 7월초 그 친구는 돈을 많이 주는 식당에 가려는데 너도 안 가겠느냐? 하고 물었다. 
곧장 수락했다. 나는 어떻게든 돈을 꼭 벌어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부산에 갔더니 이미 열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와 있었다. 우리 18명은 1942년 7월10일 부산항에서 배를 탔다. 
우리가 탄 배는 한 두어 달 항해했다. 우리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만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의 랑군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리자 저 편에 많은 트럭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후 저 편의 트럭 1대가 우리 곁으로 왔다. 우리가 다 타자 트럭은 만다레를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트럭은 외딴 2층집 앞에서 멈추었다. 관리자는 우리가 다 내리자 모두 2층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2층은 가운데 빈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방이었다. 

 

방의 수는 열두어 개는 되어 보였다. 관리자는 우리에게 방 하나씩을 따로따로 주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지 3일째부터 군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왔고 우리는 이들을 받아야 했다. 막상 이곳에 와서 군인들을 받게 되자 내가 또다시 만주에서처럼 이리 되는구나 싶은 생각으로 가슴이 미어져왔다. 
정말이지 군인들이 많이 왔다. 대개 아침을 먹고 9경부터 군인을 받았는데 때로는 군인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졸병들이 오후 4시경에 부대로 들어가면 그후 장교들이 와서 10시 정도까지 있다가 갔다.그 이후는 긴밤 손님이 들어왔다. 
사단사령부가 아끼아부로 이동을 하자 우리도 따라갔다. 도중에 미군 비행기가 자주 폭격을 가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폭격을 피해 아무 섬에나 내려서 몸을 피하곤 했다. 
아끼아부에 도착하여 우리는 1년 정도를 3층집에서 살았다. 술 먹고 와서 1시간도 넘게 추군대어 배창자가 나오도록 아프게 하는 군인도 있었다. 

 

한번은 술에 취한 군인이 들어와서 칼을 들어 죽이려 해 처음에는 살살 달래다가 그가 쥐었던 칼을 놓자 그 칼을 들어 무조건 가슴을 찔러버린 적도 있다. 
그 군인은 피를 흘리면서 차에 실려나갔고, 나는 헌병대에 불려가 군정재판을 받았다. 어느 정도 하던 일본말도 나오지 않아 우리말로 울면서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그후 1주일 만에 풀려나와 군인들을 다시 상대했다. 
우리는 위안부 생활 내내 조센삐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당시 아이를 낳은 동료도 있다. 

 

한번은 술을 먹고 내 신세가 처량하여 3층에 올라가 떨어져버린 적도 있다. 팔로 머리를 감싸쥔 채 떨어졌는지 왼쪽 팔 어깨쭉지뼈가 나가버렸다. 이후 병원에서 기부스한 채로 3개월이나 있었다. 
한 언니가 폐병이 들어서 어느 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열흘이 지나 숨을 거두었다. 군인들이 가까이하기 꺼려해서 내가 직접 이 언니를 화장시켜 뼈를 가까운 바다에 띄워주었다. 
해방이 되자 우리는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고향으로 갔다. 다행히 어머니는 살아게셨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하루는 외숙모가 집에 와서양반집에서 너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야단을 했다. 어찌됐건 나는 이후 일가 친척들에게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돌아온 지 1년 후에 어머니는 나를 달성 권번에 보내줬다. 내 나이 스물두살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틈틈이 기생질도 했다. 
권번을 졸업하고 유곽에 있던 나는 대구에서 조선공작주식회사를 경영하던 김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하고 나는 김씨의 전처의 아이들 둘을 기르면서 6년쯤 살았다. 
그러나 남편은 사업이 망해버리자 아무 대책 없이 자살을 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생질을 하여서, 아이들과 친정어머니를 모셨다. 

 

정말 나는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이 아프다. 그리고 한때는 불면증으로 제대로 자지도 못했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젊은 시절. 왜 내가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가? 어렸을 때는 남들에게 똑똑하다고 칭찬도 많이 듣고귀여움도 받았던 나였는데.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