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당하며 성매매 하는 여자

검객20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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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아버지가 목수여서 살림살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면서 집안 살림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그렇게 집이 가난하게 된 뒤, 1940년의 어느 날이었다. 남자 3명이 고향 마을에서 여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일본공장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한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 나서자 그들은 나를 배로 인도했다. 대만으로 가는 커다란 배였다. 군인들과 민간인이 많이 타고 있었다. 

 

멀미를 몹시 하고 토하면서 대만 어느 항구에 도착했다. 차가 와서 우리를 싣고 어디론가 갔다. 어디로 가는지 지명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해서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일본 군인들이 마구 몰려오기 시작했다. 공장에는 보내지 않고 그 군인들을 받으라고 했다. 
우리는 전부 놀랐다. 글도 모르고 길도 몰라서 도망할 수가 없었다. 위안소에 있던 여자들은 전부 미혼녀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말만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일본 군인들은 제마음에 드는 여자를 데리고 각 위안부가 차지하고 있는 방으로 갔다. 잠시 있다 가는 사람들과 하루 밤을 자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매일 여러 명의 군인들을 끊임 없이 받아야 했다. 

 

손님은 주로 일본군인이었으나 더러는 민간인도 있었다. 민간인은 대만옷을 입은 대만사람이었다.
위안소에는 평균 2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다.우리외에도 한국에서 15,16세 되는 처녀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 처녀들은 우리 위안소를 거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받으며 지냈지만내게는 아무런 돈도 들어오지 않았다.돈은 일본인 관리인의 주머니 속으로 전부 들어갔다. 
식사는 하루에 두끼였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외출을 할 수 없었고 돈도 없었다. 쌀이 귀해서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 굶기도 했다. 

 

 

위안부들 중 한사람이라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전부가 몽둥이로 구타당했다. 얼마나 맞았던지 지금 이렇게 나이를 먹고서도 다리를 제대로 못 쓸 지경이다.  

 

난 그 위안소에만 5년 있었다. 위안소 가까이에는 산도 해변도 있었으나 나는 5년 동안 한번도 산이나 해변에 나간일이 없다.혼자 자유롭게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리인은 일본인 여자였는데 아침마다 기계로 우리를 검사했다. 성병을 가지고 있으면 손님에게 옮고 그렇게 되면 장사를 못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위안부 생활 중에 병이 생겨서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위안부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 청도에 있는 집으로 왔다. 나는 부모님에게 내가 대만에서 무엇을 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박두리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8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한국인 생존자는 47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