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세 딸 중의 장녀로 태어났다. 소녀 나이 열 살 때 아버지를,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가난하고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자매 셋이 다 흩어졌지. 막내는 남의 집에 주고, 둘째도 남의 집 보내고…나도 최○○라고 강원도 철원의 순경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지. 그 집 가면 호강하고 좋다고 해서….” 소녀는 그 집에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남자를 만났다. 양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청년이었다.“한 1년 댕기고 하니까 알게 됐어. 손목 잡고 하는 것까지는 없었고 좋아만 했지.” 하지만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남자 집에서 반대한 탓이다. “옛날에는 집에서 어른들이 그러면 맘대로 못 하잖아. 왜 그랬는지 사귀지 말라고 나를 타박하는 거야.” 청년은 집안 어른의 강요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그리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소녀는 집을 떠나게 되었다. “돈 버는 데가 있으니 가보고 돈을 못 벌 것 같으면 다시 오라”는 양아버지의 말이 집을 떠나며 들은 마지막 인사였다. 검정 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군복 입은 남자를 따라나섰다. “나는 그냥 심부름 가는 줄 알았지.”
화물차를 타고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린 뒤 다시 트럭으로 갈아타고 한참을 가서 도착한 곳은 ‘긴카쿠 위안조’라고 불리는 중국 지린성 훈춘의 위안소였다. 나이 16세의 막 생리를 시작한 소녀는 평일에는 장교를 받고, 주말에는 일반 군인을 받아야 했다.“한 명씩 오는 사람 없지. 조를 짜서 트럭 타고도 오고 걸어서도 오고. 그럼 방마다 바글바글 서서 기다려. 100명씩 밖에 있어.”
도망은 엄두도 못 냈다. "도망가려다 붙잡혀서 죽도록 두드려 맞더라고. 감시가 얼마나 심한지… 그때 생각하면 지겹고 슬프고 진절머리가 나.” 가장 안타까운 건 청력을 잃은 일이다. “처음 들어온 사람이 장교였는데 일본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귀퉁배기를 후려쳐서…고막이 터져서 내가 지금 귀가 안 들린다”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오른쪽 귀로만 듣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왔지만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위안소 관리자의 말이 소녀에겐 ‘해방’이었다. 위안소 친구 일곱 명과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을 건넜다. 집을 떠났을 때처럼 돈 한 푼 없는 단벌 신세였다. “뭘 먹었는지도 몰라.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집에 들어가서도 자고 했어. 완전히 거지였지.”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을 버린 양아버지에겐 가지 않았다. 길을 걷다 첫사랑과 마주쳤다. 그는 징용을 다녀왔다고 했다. 평생 혼자 살면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식모살이도 하고 강릉에서 빵 장사 하고… 남가좌동에서 미제 물건 장사 하고 세관에서 자꾸 털어가니까 옷 보따리 장사를 했어. 평화시장에서 물건 떼다가 삼척에 팔고. 그러다가 힘들면 또 식모살이 하고 그랬다”
하지만 장사하며 모은 돈을 모두 내놨다. “나는 야학에서 8개월밖에 공부를 못해 봤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못 배운 탓에 삶이 이렇게 힘들었나 해서…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기회만이라도 갖도록 돕고 싶었지.”
그녀는 그렇게 평생을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돈을 쓰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통장에 남은 돈 없어. 0원.나 쓰려면 돈이 아까운데 기부하는 건 하나도 안 아깝다. 옷은 냄새 나지 않을 만큼만 갖추면 되고 먹고 자는 건 여기(나눔의 집)에서 해주니까 됐다”‘ 이제 할머니가 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죽는 날까지 곱게 있다가 갔으면… 바라는 건 그뿐이야.”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중앙일보 기사 인용)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8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한국인 생존자는 47명입니다.
막 생리를 시작한 소녀에게 일어난 끔찍한 경험
소녀는 세 딸 중의 장녀로 태어났다. 소녀 나이 열 살 때 아버지를,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가난하고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자매 셋이 다 흩어졌지. 막내는 남의 집에 주고, 둘째도 남의 집 보내고…나도 최○○라고 강원도 철원의 순경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지. 그 집 가면 호강하고 좋다고 해서….”
소녀는 그 집에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남자를 만났다. 양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청년이었다.“한 1년 댕기고 하니까 알게 됐어. 손목 잡고 하는 것까지는 없었고 좋아만 했지.”
하지만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남자 집에서 반대한 탓이다. “옛날에는 집에서 어른들이 그러면 맘대로 못 하잖아. 왜 그랬는지 사귀지 말라고 나를 타박하는 거야.”
청년은 집안 어른의 강요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그리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소녀는 집을 떠나게 되었다. “돈 버는 데가 있으니 가보고 돈을 못 벌 것 같으면 다시 오라”는 양아버지의 말이 집을 떠나며 들은 마지막 인사였다.
검정 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군복 입은 남자를 따라나섰다. “나는 그냥 심부름 가는 줄 알았지.”
화물차를 타고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린 뒤 다시 트럭으로 갈아타고 한참을 가서 도착한 곳은 ‘긴카쿠 위안조’라고 불리는 중국 지린성 훈춘의 위안소였다.나이 16세의 막 생리를 시작한 소녀는 평일에는 장교를 받고, 주말에는 일반 군인을 받아야 했다.“한 명씩 오는 사람 없지. 조를 짜서 트럭 타고도 오고 걸어서도 오고. 그럼 방마다 바글바글 서서 기다려. 100명씩 밖에 있어.”
도망은 엄두도 못 냈다. "도망가려다 붙잡혀서 죽도록 두드려 맞더라고. 감시가 얼마나 심한지… 그때 생각하면 지겹고 슬프고 진절머리가 나.”가장 안타까운 건 청력을 잃은 일이다. “처음 들어온 사람이 장교였는데 일본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귀퉁배기를 후려쳐서…고막이 터져서 내가 지금 귀가 안 들린다”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오른쪽 귀로만 듣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왔지만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위안소 관리자의 말이 소녀에겐 ‘해방’이었다. 위안소 친구 일곱 명과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을 건넜다. 집을 떠났을 때처럼 돈 한 푼 없는 단벌 신세였다.“뭘 먹었는지도 몰라.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집에 들어가서도 자고 했어. 완전히 거지였지.”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을 버린 양아버지에겐 가지 않았다. 길을 걷다 첫사랑과 마주쳤다. 그는 징용을 다녀왔다고 했다.
평생 혼자 살면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식모살이도 하고 강릉에서 빵 장사 하고… 남가좌동에서 미제 물건 장사 하고 세관에서 자꾸 털어가니까 옷 보따리 장사를 했어. 평화시장에서 물건 떼다가 삼척에 팔고. 그러다가 힘들면 또 식모살이 하고 그랬다”
하지만 장사하며 모은 돈을 모두 내놨다. “나는 야학에서 8개월밖에 공부를 못해 봤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못 배운 탓에 삶이 이렇게 힘들었나 해서…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기회만이라도 갖도록 돕고 싶었지.”
그녀는 그렇게 평생을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돈을 쓰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통장에 남은 돈 없어. 0원.나 쓰려면 돈이 아까운데 기부하는 건 하나도 안 아깝다. 옷은 냄새 나지 않을 만큼만 갖추면 되고 먹고 자는 건 여기(나눔의 집)에서 해주니까 됐다”‘이제 할머니가 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죽는 날까지 곱게 있다가 갔으면… 바라는 건 그뿐이야.”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중앙일보 기사 인용)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8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한국인 생존자는 47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