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만 있는 노동자의 삶

이14132015.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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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다. 노동자의 목숨은 값이 없다. 요즘 세상에서는....

 

제 남편의 직업은 전기 기술자로 건설현장의 노동자였습니다.

몹시도 추운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출근을 했던 남편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별 일이야 있겠나, 그냥 조금 다친 것이려니 하며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해보니 남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 하던 중에 급작스럽게 시멘트바닥 위에서 보는 이 없이 그렇게 죽었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간 곳으로 쫓아 갈 생각뿐이었기에 산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이던 병으로이던 간에

먼저 세상을 떠나면 장례 치른 후에 곧 바로 따라 가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전 남편의 장례 후에 따라가려 하느라 산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시댁 조카가 서류 띠는 것을 도와주었지만 전 어찌하면 죽을까만 생각했습니다.

친척들과 지인들이 제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더 늦기 전에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일 년 전에 준비해 주었던 서류를 근로복지 공단에 제출했습니다.

정신적 고통에 허덕이는 시간으로 인해 제출이 늦어졌지만 남편의 목숨 값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염려 말라고 했습니다.

 

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한 현장 직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결석을 자주 합니다.

남편은 직원들의 책임 없는 행위와 계약으로 인한 회사와의 사이에서 자기 혼자만이라도 책임을 다해야 회사의 손해를 줄일 수 있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칼 날 같은 추위에도 회사부터 생각했던 남자, 자신이 맡은 책임을 완성하고자 몹시도 추운 어느 날 칼바람을 맞으며 출근했고 그대로 현장에서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현장에서 죽었기에 부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검은 하지 않아도 산재보상을 받을 거라고 굳이 부검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때 저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비록 남들 같은 스펙은 없었고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전기 기술이란 자존감이 전부였습니다. 노동자일지언정 정직과 성실로 외롭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살았습니다.

각박하고 사악한 세상의 눈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하여도 남편의 성실과 정직은 존경받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세상에 남은 보물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남편의 인격과 성품은 제 삶의 모든 것이었고 저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남편이 죽었음은 현재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산재보상이란 것은 일하다가 현장에서 그대로 죽으면 받을 수 있는 약자를 위한 사랑의 혜택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부검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숙들이나 친척들도 온순한 사람들이라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출근하고 일하던 곳에서 급작스럽게 죽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도 너무도 추운 날씨에 외부에서 일을 하는 건설현장이기에 핏줄이 쫄아드는 심근경색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부검을 하지 않았기에 미상이라고 적었다는 소견서를 써주었습니다. 이 미상이란 글자 하나로 저는 남편의 목숨 값을 잃어버리는 미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괴감에 남편이 죽은 것과는 또 다른 고통으로 불면의 날을 지냅니다.

즉 건설 현장은 높은 데서 떨어졌거나 건설더미에 묻혀서 죽었으면 산재가 된다 합니다.

육체가 박살나지 않았고 곱게 죽은 것은 산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심장마비는 곱게 죽은 거라 합니다.

 

어찌됐든 그날의 추위로 인한 심장마비라면 그 회사에서 전기 설치를 지시하지 않았다면 그날 그 자리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추위에 심장이 마비되서 죽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찌 됐던 회사와의 계약으로 인해 추운 밖에서 일하다가 죽었다면 회사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데 어느 누가 미쳤다고 기업체에 지시를 받아 따스하게 난방이 잘 된 곳이 아닌 칼바람이 몰아치는 불기 하나 없는 곳에서 추위와 맞서서 일을 한다 말입니까?

그 회사에서 사람의 기술을 필요로 해서 계약을 했고 일을 진행시켰다면 회사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회사 일을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다가 회사일로 죽었으니 산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이 주는 계절의 추위와 현실의 일터에서 환경과 자연이 합쳐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자연과 환경은 인간이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회사라는 권력을 가진 갑인 사람들이 일의 진행상의 이익을 내려는 이기심으로 인해 자연과 환경을 무시 내지는 외면한 채 사람 몸의 한계를 뛰어넘길 바라는 비겁한 마음으로 밖으로 내 몰은 겁니다. 그렇다면 회사도 전혀 책임이 없다구는 못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세요. 진실로 제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요?

억울해서,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온 남편의 인생이 너무도 허망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풍요로운 삶은 아닐지라도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의사 선생님이 분명하게 추위로 인한 심장마비 같다는 소견서를 써 주었는데도 아니라니요?

그렇다면 저희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죽은 값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인지요?

 

제가 존경했고 사랑했던 남자로 인격은 흠 잡을 데 없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조건은 부족했어도 착하고 성실했던 남편의 값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민답게 살아온 사람을 나라의 기업인 근로복지 공단에서조차 떨어져 박살나 죽지 않았다고, 근무 연한이 짧다고 외면을 합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해 노동자로 살았지만 밑바닥 노동자라고 해서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떡해야 하나요. 조국에서조차 수십 년을 살아온 노동자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국민의 대우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피를 토하는 심정이 무엇인지 요즘 체험하고 있습니다.

삶의 전부를 잃어서 죽지 못해 겨우 겨우 견디어지고 있는데 남편의 죽음까지 억울해야 하나요? 남편의 삶이 불쌍해서 비참하게 결론이 나서 미치겠습니다.

어떻게 서민은 자기의 권리도 없는 건가요. 서민이라기보단 빈민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 잘났다고 평가받는 사람들만, 부자들만 해당된다면 저희 같은 정직과 성실로 살아온 많은 사람들은 비참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있는 자들의 소모품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 아픕니다.

아파서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자유롭게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기술을 배워 떳떳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여유로운 생활이 아니어도, 학업에 대한 굶주림이 있어도,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하지 않고 기술을 배움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온 노동자입니다.

풍요롭지 않았어도 웃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서민은 무척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매번 이리 울면서 약자로서의 설움과 구차함을 견디기만 해야 하는지요.

강자와 약자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인가요. 그 경계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근로복지 공단에 갔었습니다.

현장에서 죽었는데 왜 산재가 불승인으로 떨어지는지 모르겠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 직원이 하는 말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냐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일하다가 죽었는지도 아니고 왜 죽었느냐는 것이랍니다. 스트레스냐 그 회사에 오래 근무했느냐 등이요.

회사에서 직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일한 시간의 양을 말한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학을 나와도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더군다나 밖에서 일하는 일은 모두 도망갑니다.

춥고 추운 겨울 날씨에 사무실에서 따스한 히터를 틀어놓고 편히 앉아 하는 일만 선호합니다. 사무실의 10시간에 해당되는 에너지가 밖에서 일하면 한 시간 만에 다 소모됩니다.

이미 에너지가 소모된 상태에서 기초 열량도 없이 10시간을 버텨야 하는 것이 노동자입니다.

사무실하고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피곤함은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사이의 스트레스만을 이야기하고 시간의 양만 계산한다면 이 세상은 고학력자와 풍요한 자들만의 세상인가요?

 

또 자연에서 오는 기후와 환경에 의한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니란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 자연에서 오는,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가 인간과 자연이 합치면 사람이 정신력으로 이기고 싶어도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으로 자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절대적으로 인간의 몸은 자연을 어느 정도는 비껴나가며 살아갈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 자연이 주는 환경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자연을 이겨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인간이 이 세상에 몇이나 존재할 까요?

그리고 그리 지혜 있는 몇 명만을 위해 세상은 존재하는 것인지요?

무엇보다 아픈 것은 근로복지 공단의 감사원들이 이런 것을 짐작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결정을 내려 주어야 하는데 항시 갑인 사람들 편이라면 저희 같은 서민은 어찌해야 하나요?

 

세상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 하지만 이번 판결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감히 용기를 냅니다. 죽기 살기로 정직하게 성실했던 남편의 삶의 값을 찾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경제가 발전하려면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도 필요하지만 밑바닥에서 말없이 추위와 더위를 참아가며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을 시킬 때만 노동자를 위하는 척 하다가 죽음 앞에서 약자로 밀어버리고 외면한다면 어느 노동자가 열심을 내고 싶을까요. 노동자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지요.

살아서도 임금의 부적절함 때문에 제 값을 받지 못했어도 사회의 한 일원이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건만 죽어서는 그 값조차 찾지 못하고 싸구려로 변모한 남편의 죽음 앞에 저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과연 노동자가 없는 세상이 있을까요?

노동자는 사람 측에도 속하지 못하고 기계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보는 세상의 약자로 밀려나고 가족들은 남편의 죽음 앞에 울다가 기절했다가 또 울다가 해야만 하나요. 아니면 그냥 같이 세상을 떠나야 하나요?

 

남편의 죽음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남편이 죽은 지 일 년 동안을 울고만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시때때로 나도 남편 따라갈 생각만으로 그렇게 살아진 것입니다. 헌데 여직원의 이야기로 다시 정신이 고통의 늪으로 떨어집니다.

물론 그 직원은 자신이 처한 직장에서의 냉정함을 이야기 한 것이지요.

 

몸과 마음이 아주 건강했던 사람입니다. 성실했고 정직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또한 건설현장의 사람들은 한 건물이 끝나면 다른 건물로 갑니다.

한 건물의 건축이 끝났다고 생업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잠깐 일하고 평생을 살 수 있는 세상인지요? 또 다른 건설현장을 찾아서 일을 합니다.

잠시도 쉴 수 없는 것은 허영과 사치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가족과 나중의 노후를 위해서 일합니다. 건설현장은 노동자의 뜻하고는 다르게 잠깐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건물을 건축하는 기간은 건물의 크기에 비례한다 해도 몇 십 년을 건축하는 건물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또한 사무원이나 공무원들처럼 한 곳에서 평생을 일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상황이 노동자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현실로 옮겨 다닙니다.

한곳에서 평생 일하는 노동자가 몇 %나 될까요?

그러므로 잠시인 것 같아도 기술자의 인력은 특히 제 남편은 몇 십 년이 된 겁니다.

그런데 한 건물에서 일한 것으로 시간을 재서 날짜가 짧다고,

잠시 일을 했기에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불합리한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건설현장에서 비바람에도 눈보라에도 책임감에 꾀부리지 않고 자연에 맞서며 살아온 노동자가 추위로 인해 죽었습니다.

 

가족이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쉴 수가 없지만 회사하고의 성실의 계약으로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시작한 건물에서 며칠 일하다가 죽었어도 일하다가 죽은 것은 산재보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회사의 일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용납을 하지 않으면 건설현장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있는 것인가요?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면 착각인지요?

직업이 밑바닥 일을 한다고 해도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면 안 되는지요?

세상에서 모두가 피하는 3D 직업을 거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잘못인지요?

 

세상에서 일을 죽기 살기로 했는데 근무시간이 부족하다고 (야근한 시간이 없다고)

병명을 모르겠다고 (건설현장 건물에서 떨어져 몸이 박살났거나 건물에 깔렸거나만을 주장하는) 거부한다면 산업재해 보상이란 것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요.

현장에서 그대로 죽었는데도 말입니다. 일 시작한지 두 세 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전 제 남편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존경했고 사랑했던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진심으로 사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모범 시민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법이 없으면 세상에서 말하는 강자들에게 이리 채이고 밟히는데 죽어서까지 억울해야 하나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저의 지나친 욕심이라고 하시겠는지요.

만물의 영장으로 한 세상 잘 살다 갔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노동자의 현실은 비참합니다. 노동자의 끝은 구차하고 구차해서 더욱 더 삶이 아픕니다.

 

과연 제 생각은 미련한 것인가요?

제 생각과 마음은 무식에서 나온 무지인지요?

그냥 편리에 의해서 노동자를 무시하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가만히, 조용히 있어야 하나요?

 

분명한 것은

현장에서 일하다가 일과 추위의 스트레스로 인해 현장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회사와의 계약에 의한 일이고 (개인 일이 아니고)

추운 겨울의 날씨는 한 시간을 일해도 하루 종일인 10시간에 해당되는 고통입니다.

    

 

* 건강한 사람이 몸에 이상이 없이 일하다 현장에서 곧바로 죽었으니 산재가 허용되어야지 육체가 병이 들어 환자가 되었으면 그 누가 현장에 일하는 일군으로 투입이 되겠는지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육체에서 혼이 떠났다는 겁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일거리가 많은 현장에서 죽은 것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환자가 와서 일해야만이 가능하다면 무엇으로 산재의 정당성을 주장하겠는지요